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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의 왕생(沙門往生): 연지대사, 왕생집 1권
원조사(遠祖師): 연지대사, <왕생집> 1권
진(晋) 혜원(慧遠)은 안문(雁門) 누번(樓煩) 사람이다. 육경(六經)에 통달했으나, 그 중 노장(老莊)에 더욱 밝았다. 안 법사(安法師 ; 道安)에게서 <반야경> 강의를 듣고 활연히 대오하여, 이로 인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그를 섬겼다. 태원(太元) 6년[381], 심양(潯陽)을 지나다가, 여산(廬山)이 유적하여 마음을 깃들여 살만한 곳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산신(山神)의 현몽(現夢)을 받고, 어느날 밤 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재목을 힘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자사(刺史) 환이(桓伊)가 집을 짓고 신운(神運)이라고 불렀다. 혜영(慧永)이 먼저 서림(西林)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혜원이 사는 곳은 동림(東林)이라 하였다. 혜원은 동림에 머문 지 30년 동안 발길을 세속에 들여놓은 적이 없이 지극히 서방(西方)에만 뜻을 두어, 고승과 거유(鉅儒) 140인과 함께 정사(淨社)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연루(蓮漏 : 혜원의 제자 혜요慧要가 만든 시계. 샘 안에 연 12잎을 세우고 물결따라 하루 12시를 정하도록 만들었다) 6시 동안 선송(禪誦)을 그치지 않았고, 생각과 마음을 정토에 쏟아 세 번이나 성상(聖相)을 보았으나 침묵하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훗날 19년[394] 7월 저녁, 반야대(般若臺)에서 정(定)에서 막 일어나려 하다, 아미타불의 몸이 허공에 가득한데, 원광(圓光) 속에서 화불(化佛)이 몸을 나투시고, 관음⋅세지 두 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물이 흐르듯 광명이 열네 줄기로 분산하면서 아래 위를 선회하는 속에서 미묘한 법을 연설하시고, 부처님께서 ‘내가 본원력(本願力 : 부처님이 보살 때 세운 원력)을 지키기 위하여 와서 너를 안위하노라. 너는 7일 후에 반드시 나의 국토에 태어나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또 보니, 불타야사(佛陀耶舍)⋅혜지(慧持)⋅혜영(慧永)⋅ 유유민(劉遺民) 등이 부처님 곁에서 읍하며 ‘ 스님께서는 저희들보다 뜻을 세운 지가 오래였습니다.
어찌 오시는 것이 이다지 늦습니까?’하는 것이었다. 이미 때가 이른 것을 알고는 문인(門人)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 이곳에 머물 때 세 번 성상을 보았고 오늘 다시 두 번이나 보았다. 정토에 태어날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는, 때가 이르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때는 의희(義熙) 12년[416] 8월 6일이었다.
찬(贊)
진(晋)나라 이전에도 정토의 법이 비록 중국에 전해지긴 했으나, 널리 전하고 힘써 행하여 거리나 집집마다 정토의 법을 깨우치게 된 것은 원 법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래서 만대 이후에 정업을 닦는 제자들이 스님을 추존하여 시조로 삼게 된 것이다. 참으로 석가가 다시 서방(西方)을 연설한 것이며, 미타가 동토(東土)에 현신한 것이라 할 만하였다.
그 공이 위대하지 않은가. 내가 예전에 여산을 여행하다 호계(虎溪)의 샘을 마셔보고, 삼소(三笑)의 집을 바라보면서 18현(賢)의 유적을 배회한 적이 있었다. 그 규모가 홍원(弘遠)한 것을 보니 족히 만 명의 스님들이 살만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전각(殿閣)은 먼지가 쌓였고 종과 북은 적막에 묻혔으며, 문은 뒤틀리고 부엌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철인(哲人)이 가시자 아름다운 자취도 끊어지고 만 것이다. 애달픈 일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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