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세기에
중국 북방에서 거란(契丹)이 세운 정복 왕조(916~1125), 요
[遼]
요(遼)은
10~12세기에 거란(契丹)이 중국 북방의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로서, 916년 건국 당시의 명칭은 거란국(契丹国)이었지만, 938년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한 뒤 나라 명칭을 요(遼)라 하였다. 1125년 여진(女眞)에 세운 금(金, 1115∼1234)에 멸망되었지만,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중앙아시아에
서요(西遼, 1132∼1218)를 건국하여 1218년 칭기즈칸(成吉思汗,
1155?~1227)의 몽골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거란(契丹)은
이른바 동호(東胡)계 유목민인 선비(鮮卑)의 한 갈래로서, 그 명칭은 4세기 전반부터 사서(史書)에 나타난다. 이들은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시라무렌(Sira Muren) 강 유역에서 유목 생활을 했으며, 8개의 주요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다. 9세기 후반 당(唐, 618~907)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거란(契丹)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며, 907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太祖 재위 907~926)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카간[可汗, qaghan]이 되었다.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916년 스스로를 천황제(天皇帝)라 부르며 거란국(契丹国)을 세웠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강묵기(康默記), 한연휘(韓延徽),
한지고(韓知古) 등의 한인(漢人)을 등용하여 체제를 정비했으며, 918년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지금의 遼寧省巴林左旗)를 건설해 도읍으로 하였으며, 920년에는 거란문자(契丹大字)를
창제해 보급하였다. 그리고 탕구트(Tangut,
党项族)와 위구르(Uighur)
등의 부족들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926년에는 발해(渤海, 698∼926)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 재위 926~947)은 중국 경략(經略)에 힘써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남으로 영역을 넓혔다. 936년 후당(後唐, 923∼936)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석경당(石敬瑭,
892~942)이 신하를 자청하고 세공(歲貢)을 바쳤으며,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넘기는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석경당(石敬瑭)은
거란의 군사 지원에 힘입어 반란을 일으켜 후당(後唐)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晉, 936∼947)을 세웠다. 그 보상으로 장성(長城) 이남의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차지한 거란(契丹)은 938년 그 곳의 한인(漢人)들을 회유하기 위해 민족 색채가 강한 거란국(契丹國)의 명칭을
‘대요(大遼)’로 바꾸었다. 태종은 연호도 ‘회동(會同)’으로 하고, 한인(漢人)들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과 남면관(南面官)이라는 이중
지배 체제를 만들었다. 남면관(南面官)에서는 당(唐)의 군현
제도를
그대로 본떠 한인(漢人)을 통치하고, 북면관(北面官)에서는 거란의 관습에 따라 통치했다.
하지만
942년 석경당을 이어 후진(後晉)의 황제가 된 출제(出帝)가 거란에 반기를 들면서 944년부터 후진(後晉)과 거란의 전쟁이 벌어졌다. 947년
태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후진(後晉)의 수도인 카이펑[開封]을
점령하고, 후진(後晉)의 국호를 ‘대요(大遼)’로 바꾸고 연호도 ‘대동(大同)’으로 하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약탈 때문에 민심을 잃어
한인(漢人)들의 저항이 거세게 나타났고, 결국 한지(漢地) 지배에 실패하고 철군하였다.
태종(太宗)이
죽은 뒤, 세종(世宗, 재위 947~951), 목종(穆宗, 재위 951~969), 경종(景宗, 재위 969~982) 등이 차례로 황위에
올랐지만,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의 갈등 때문에 세종(世宗)과 목종(穆宗)이 피살되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6대
황제인 성종(聖宗, 재위 982~1031) 때에 이르러 요(遼)는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고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세력을 떨쳤다.
성종(聖宗)은
12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어 1009년에서야 친정(親政)을 하였는데, 섭정(攝政)을 맡은 소태후(蕭太后)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국정을 쇄신하였다. 법전을
편찬해 공포하고, 과거제를 실시해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불경(佛經)을 편수(編修)하여 불교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993년 소손녕(蕭遜寧)에게
고려(高麗)를 침략케 하여 배후를 다진 뒤, 1004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송(宋, 960∼1279)을 공격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화약(和約)을 체결하였다. 당시 송(宋)과 요(遼)는 전연(澶淵)에서 화약(和約)을 체결하여 이를 ‘전연지맹(澶淵之盟)’이라고 하는데,
송(宋)은 매년 요(遼)에 은(銀) 십만냥(兩)과 비단 이십만필(匹)을 세폐(歲幣)로 바쳐야 했다. 화약(和約) 이후 요(遼)는 송(宋)으로부터
획득한 세폐(歲幣)로 재정이 풍족해졌고, 송(宋)과의 무역으로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성종(聖宗)은 친정(親政)을 한 뒤에도 정치와
군사 부문의 개혁을 꾸준히 추진하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요(遼)는 만주와 화북(華北)의 일부를 차지하고 고려(高麗)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정복왕조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