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22 - 니시도마리 해수욕장을 지나 히타카츠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다!
2024년 1월 27일 이즈하라의 지온(祈園) 호텔에서 일본 가정식으로 아침을 먹고는
렌터카를 타고 면세점 다이렉스 미쓰시마를 지나니 곧 만제키운하가 보이고
붉은 다리인 만제키바시 (万關橋) 를 거쳐 '단풍가도' 라고 불리는 숲길을 지납니다.
히타카츠(比田勝) 에 도착해서는 도시를 통과해 어제 본 미우다(三宇田) 해수욕장에 도착해
언덕을 올라가니 바다쪽에 큰 비가 하나 서 있는데..... 여기 이름은 日露友好
の丘 (일로우호의구) 이니.... “쓰시마 해전” 에서 포로가 된 러시아 병사들의 상륙지 입니다.
언덕에서 렌터카를 타고 왔던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니 아름다운 해안과 섬을 지나 모래사장이
보이니..... 니시도마리 해수욕장 (西泊 海水浴場) 인데 시간만 있으면 한번 걸을만 한 곳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차를 몰아 히타카츠 (比田勝) 로 가면서 생각하니.... 2000년 이후 16~ 18세기 동아시아
은 교역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쇠퇴했던 중국 -
일본의 은 교역을 대체하는 창구로 "쓰시마 섬의 은 무역" 에 관한 연구가 활발했다는 얘기가 떠오릅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조선은 중국의 생사, 비단, 약재 등을 부산포 왜관에서 일본 상인에게 중개하고
인삼 등을 판매하며 수익을 누렸는데, 특히 인삼 은 일본인들의 수요가 매우 높아 1695년 일본이 수출용
은화의 은 함량을 80% 에서 64% 로 깎았을 때도, 유일하게 80% 은 을 줘가면서 사갔던 물건이기도 합니다.
16세기 초반 세계 최대의 은광산은 남미 볼리비아의 포토시광산 이었으나 후반이 되면 일본 시마네현
이와미 광산 이 포토시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은광산이 되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1년에
난공불락이라 일컫는 돗토리성(鳥取城)을 함락하고 서쪽으로 진격해 동해(일본해)에 모리씨
가 장악하고 있던 이와미 은광산 (石見銀山)을 손에 넣고 그 은을 군자금으로 임진왜란 을 일으킵니다.
“'천문 2년 (1533년) 8월 5일 하카다 (博多) 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 (神谷壽禎) 가 종단(宗丹), 계수(桂壽)
와 함께 은광에 와서 회취법 (吹鎔鍵製)을 시작했다 (伴同國博多 宗丹及桂壽者 而來于銀山
始吹鎔鍵製白銀).' (에도시대 이와미은광 기록인 '긴잔규키· 銀山舊記') 이와미 은광 발견 7년 뒤 였다 ”
“조선과 달리 재래식 제련법으로 은을 만들던 이와미였다. 그런데 어느날 조선의 첨단 제련법인 '회취법' 을
초빙된 기술자가 와서 가르쳤다는 것이니, 이와미 은광은 볼리비아 포토시를 제치고 생산량이 세계 1위
은광 이 되었는데..... 17세기 에도시대 초에는 연간 생산량 150톤으로 전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 에 달했다.”
“1595년 포르투갈 테이세라의 일본도. 시마네현 붉은 동그라미 속에 '이와미 은광 표시' 이들은
누구인가. 6년뒤 조선 실록에는 기록이 나온다. '유서종 이 왜노(倭奴) 와
사사로이 통해 연철(鉛鐵) 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銀) 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 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하나이다.' (1539년 8월 10일 '중종실록') ”
“유서종은 전주 판관인데 공직을 남용해 이익을 챙긴 죄가 많았다. 일본의은광석을 밀수입해 제련하고,
일본인에게 제련법을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중종은 "저놈이 죽어도 좋으니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
하라" 고 명했다. '빽' 이 좋았는지 유서종은 전옥서 주부로 강등됐다가 4년뒤 파직으로 없던 일이 됐다.”
“한국과 일본 사료를 종합하면, 이와미 은광에 회취법 을 전수한 기술자는 바로 조선인 이라는 말이다.
중국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한·일 학계에서는 새 사료(史料) 가 나오지 않는 한 종단과 계수가
조선에서 유출된 첨단 기술자 라 판단하고 있다. 자, 도대체 왜? 왜 조선의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갔는가.”
“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제작한 '문록석주정은 (文祿石州丁銀)'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씨를 격파하고 이와미 은광 을 장악한 후에 임진왜란
(문록의 역) 에 사용된 철포와 배 같은 무기 구입 을 위해 이와미 은으로 만든 은화 다.”
“1600년 선조 는 당시 최대 은광인 단천 은광을 채굴한 자는 전 가족을 국경으로 추방하고
감사는 파직 하라고 명했다. 1706년 숙종 때 만든 '전록통고' 는 금과 은을 미리
국경 도시인 의주에 숨겨둔 자를 신고 하면 면포 50필 혹은 면천(免賤) 포상 을 규정했다. ”
“18세기 영조는 새 은광이 발견됐다는 보고에 개발을 금했고(1740년 11월 20일
'영조실록'), 19세기 헌종은 "금은 채굴 금지는 농사철에 방해 가 되고
백성이 이익을 다투게 되니 행한 조치" 라는 보고에 채굴 금지 정책 을 이어갔다.”
“명이 됐든 오랑캐 청이 됐든 중국에 들키면 안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백성이 본업인 농사 대신 이득에 눈이
멀게 되니 아니 되었다. 사대주의 와 성리학적 도덕론 에 의해 조선의 은(銀)은 햇빛을 영영 보지 못했다.
1582년 율곡 이이는 상소 '진시폐소 (陳時弊疏)' 에서 그 나라를 이렇게 묘사했다. ” “'國非其國(국비기국)'.
나라 꼬라지가 나라가 아니라는 뜻 이다. 에피소드가 누적되면 역사가 된다. 결국 19세기말 조선
방방곡곡에 있는 광산은 '제국주의 양허업자의 행복한 사냥터 로 전락했으니.... 조선이 고이 간직한
금은은 1896년 고종의 조선정부가 미국인 모스에게 운산금광 채굴권을 주니 "노다지!" 라는 말이 생깁니다.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된 이와미 은광 유네스코센터 전시장 초입에는 철포와
은과 회취법 전래 내력을 한 줄로 요약한 안내문 이 걸려 있다.
철포, 은, 회취법. 안개처럼 조선의 손에 들어왔다 빠져나간 기회들 이다. 분하다.”
18세기 초반 인삼의 일본내 국산화가 진행되고, 북아메리카산 백삼이 유입되면서 인삼 교역은 쇠퇴했으며
조일 중개무역은 청과 일본이 무역조약을 맺는 18세기 후반경에 거의 단절되지만.... 교역이 완전히 단절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해삼 등 해산물이나 쇠가죽 등의 판매가 쓰시마를 경유해서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꾸준히 은, 동 등 귀금속과 유황 등을 수입하는 경로로 쓰시마 섬 무역을
이용했다. 그리고 일본산 인삼은 난재배와 지력 관리에 소홀히 해 약효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생겨 일본산 인삼산업은 현대에 접어들기 이전에 이미 사양산업이 되었다.
1861년에 러시아 제국이 통상조약과 개항을 요구하면서 일본의 쓰시마 섬을 점령했다. 러시아
는 반년간 주둔하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철수하였다. 인도를 취하려는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던 영국은 그 이전인 1859년 5월, 이후인 1863년과1865년에 조선의 거문도를 측량한다.
크림 전쟁과 아프카니스탄 등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던 영국은 1885년 해군 1천명으로
조선의 거문도를 무력 점령하자..... 청나라는 제독 정여창을 보내 영국의 거문도 주둔을
질타하였다. 정여창이 직접 거문도에 방문해 기존 이름인 거마도를 거문도로 개칭토록 권한다.
한편 러시아는 벌쳐의 사마랑호 탐험기를 입수하여 포트 해밀턴(조선의 거문도) 에
대해 알게 된다. 1854년 4월 9일 부터 19일 까지 Putiatin(푸티아틴) 제독이
이끄는 4척의 함대가 기항한 일이 있었으나 어떤 목적이 있어서 기항한 것이 아니다.
크리미아 전쟁으로 인한 병사들의 휴식과 식수 공급을 받으면서 11일간 기항하는 동안 주민들은
Pallatin(팔라틴)호에 승선하는등 군인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그 후 1857년 8월에 증기
기선 S.S Amenrika(아멘리카) 로 3년만에 거문도를 다시 찾아 왔다 간후 더 이상의 교류는 없었다.
그러고는 히타카츠에서 렌터카 차량을 반납하고는 배낭과 가방을 끌고 히타카츠 터미널로
들어가서는 마눌과 손주 3명은 2층 대기실에 남겨두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노트북과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기 바쁘고 마눌이 준비한 김밥과 빵으로 점심을 대신합니다.
사위와 딸등 우리 3명은 다시 히타카츠 시가지를 걸어서 여기 저기를 구경한 다음에 원래 생각
했던 오카베 식당으로 가니 여긴 오늘 휴무일이고 다른 식당도 손님이 꽉 차서 만원이라....
해서 Chinguya(친구야) 라는 식당으로 들어가니 여기도 만원에 가까운데 간신히 테이블
하나가 나기로 들어가 앉는데..... 한국인 주인은 너무 바빠서 안되는 음식이 많다고
멀하기에 무엇이 가능하냐 물어서 가쓰동과 맥주에 닭 튀김을 시켜서 점심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식당을 나와 페리 터미널로 가다가 길가에 아이스크림을 선전하는 그림이 보여 사진을
찍는데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3명의 아이 그림에서 우리 손주들 3명이 떠오르니
문득 정상도 논설주간이 국제신보 도청도설란에 쓴 “이금이 후보“ 라는 기사가 생각이 납니다.
노벨상, 프리츠커상, 안데르센상은 유독 한국인에게 문턱이 높다. 프리츠커상은 ‘건축계 노벨상’, 안데르센
상은 ‘아동문학의 노벨상’ 으로 통하니 그 권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 노벨상은 일본은
과학상 26명등 수상자가 30명에 달하는데, 한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게 전부이다.
올해 53회 프리츠커상은 일본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에게 돌아갔다. 이 사람은 경기도 성남시 연립주택
단지인 ‘판교 하우징’ 조성에 참여했다. 그를 포함해 이 상을 받은 일본인이 9명 이다.
한국과 견줘 “0 대 9 라면 너무 격차가 벌어진 것 아니냐” 는 지적이 나왔다. 우리나라 수상자는 아직 없다.
이금이는 올해로 작가생활 40년을 맞은 한국 아동문학계 대표 주자다. ‘너도 하늘말나리야’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유진과 유진’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등 그동안 50권 넘는 작품을 펴냈다.
유년 시절 전래동화를 들려주던 할머니가 동화작가의 자양분이었다고 한다. 이 작가에게 올 4월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잔인한 달이지 싶다. 안데르센상 도전과 수상 불발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안데르센상은 덴마크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을 기려 1956년 제정된 아동문학상
이다. 국제 아동청소년 도서협의회가 2년마다 글 · 그림 작가를 한명씩 선정해 시상한다.
이 금이 작가는 한국인으로는 처음 글 부문 최종 후보(6명)에 올랐다. 결손 가정, 성폭력
등 아동문학의 금기라 할 소재들을 작품 속에 녹여 냈다. 또 해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여성의 삶에 천착했다. 우리 이야기의 지평을 넓힌 공을 인정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 참석한 이 작가는 지난 8일 이 상을 오스트리아 작가가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게임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겠다” 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2022년 이수지 작가가 한국인 첫 안데르센상 그림작가 부문 수상자가 된 것처럼 글 작가 수상을 한걸음
앞당겼다는데 만족했다. 작품 활동은 우리 아동문학계가 국내는 물론 해외로 확장하는 디딤돌
이다. 12일 도서관의 날과 12~18일 도서관 주간을 맞아 열리는 여러 도서관 행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22대 국회의원 300명이 11일 가려졌다. 승자의 겸양과 패자의 승복만큼 정치가 성숙해
질 것이다. 화살이 과녁에 꽂히지 않으면 화살을 탓할 것인가, 과녁을 탓할
것인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음을 다스리는 이가 진정한 승자다. 이금이 후보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