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29〉 순천박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2-04-17 22:34:48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사육신 박팽년 배출… 고려말~조선 중기 주름잡은 문벌
#순천박씨는
순천박씨(順天朴氏)는 신라 경명왕의 8왕자 중 7번째인 강남대군 박언지(朴彦智)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순천박씨의 시조는 박영규(朴英規)인데, 그가 박언지의 아들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박영규는 신라 유리왕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에 대해선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순천박씨가 후백제 왕인 견훤의 사위였다가 태조 왕건에 귀의한 박영규의 후손은 분명해 보인다. 박영규에 관한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그는 승주(昇州, 순천의 옛이름) 사람이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 후손의 계대(系代)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에 따라 순천박씨에서는 박영규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크게 이름을 떨친 평양(순천의 옛이름)부원군에 봉해진 박난봉(朴蘭鳳)을 득관조로 모시고 있다.
그렇지만 박난봉의 후손들도 정확한 계대를 알 수가 없고, 충숙왕(忠肅王) 때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박숙정(朴淑貞)이 가문을 크게 열었기 때문에 순천박씨 가문에서는 박숙정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박숙정의 맏아들 박원룡(朴元龍)은 시랑(侍郞)을 역임했고, 막내 박원상(朴元象)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이 공고해졌다.
순천박씨에는 원파(原派)·문숙공파(文肅公派)·군수공파(郡守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경력공파(經歷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판관공파(判官公派)·감사공파(監司公派)·충정공파(忠正公派)·교리공파(校理公派)·수찬공파(修撰公派)·박사공파(博士公派)·검열공파(檢閱公派)·전직공파(殿直公派)·인의공파(引儀公派)·부위공파(副尉公派) 등이 있으며,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2만7209가구 총 8만7631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순천박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 이야기했듯이 순천박씨는 박영규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지만, 고려에 귀의하여 후백제 공략에 공을 세워 고려 삼한통합익찬공신(高麗三韓統合翊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다. 이에 대해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박영규(朴英規)는 승주인(昇州人)으로 견훤(甄萱)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견훤의 장군이 되었다가 신검(神劒)이 반역함에 견훤이 와서 투항하니,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대왕(大王)이 40여 년 동안 근로(勤勞)하여 공업(功業)이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가인(家人)의 화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항하였으니…(중략)… 어찌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하여 왕공(왕건, 王公)에게 은근(慇懃)함을 표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으리요”라고 하니 그 아내가 “당신의 말씀이 곧 나의 뜻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조 19년 2월에 박영규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만약 의병을 일으키면 청컨대 내응하여 왕사(王師)를 맞이하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태조가 크게 기뻐하였다…하략.]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박영규에게 좌승(佐丞)을 하사하고 전답과 역마, 그리고 노예를 주었으며,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그는 2남3녀를 두었는데, 딸은 각각 왕건의 부인(동산원부인, 東山院夫人)과 고려 3대 정종의 비인 문공왕후(文恭王后)와 문성왕후(文成王后)가 되었다고 한다.
박난봉(朴蘭鳳)은 시조인 박영규의 8대, 또는 9대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계대는 실전되어 알 길이 없다. 그는 충렬왕(忠烈王)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으며 정승(政丞)에 이르렀고 평양군(平陽君, 지금의 순천)에 봉군(封君)되였다.
박숙정은 박난봉의 3∼4대 후손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박난봉에서 박숙정까지의 계대가 밝혀지지 않아, 순천박씨에서는 박숙정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는 고려(高麗) 충숙왕 때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내며 익제 이제현(李齊賢)과 교유하였다. 경상도제찰사, 국자감 제주에 임명되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5남을 두었는데 첫째가 원룡(元龍)이고, 둘째가 원호(元虎)이며, 셋째가 원구(元龜), 넷째가 원린(元麟), 다섯째가 원상(元象)이다.
박천상(朴天祥)은 박숙정의 손자로 공민왕 때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군되었다. 그는 고려 말 역성혁명을 도모한 세력에 의해 여러 번 고초를 겪은 후 경상도 가야산 죽백동에 은거하였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가흥(可興), 둘째가 가실(可實), 셋째가 가권(可權)이다. 첫째 가흥은 밀직부사를 지냈으나, 역성혁명세력에 의해 순천으로 귀양갔다. 또다시 이성계 제거에 협력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 하지만, 태종의 즉위 후 평양군(平陽君)에 봉군 되고 검교의정부우찬성(檢校議政府右贊成)에 제수되었다. 후에 세종이 우의정(右議政)을 제수하였으나, 고령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박중림(朴仲林)은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이며, 목사(牧使)였던 박안생(朴安生)의 아들이다. 그는 태종 때 문과에 장원을 하고 집현전수찬, 사간,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단종 즉위 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제학(大提學)과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공조·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아들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팽년, 인년(引年), 기년(耆年), 대년(大年)도 모두 처형되었다. 그 후 영조 때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정조 때에는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또한 단종충신으로 등재되고, 장릉(단종의 능) 충신단에 배향되고,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박석명(朴錫命)은 박천상의 손자로 밀직부사를 지낸 가흥의 아들이다. 그는 공양왕 아우인 왕우의 사위였기 때문에 조선이 건국되자 7년간 은거하였다. 그 후 정종 때 다시 등용된 후 정종의 양위 교서를 태종에게 전달했다. 이후 좌명공신 3등이 되고, 평양군에 봉해진 후 전라도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황희(黃喜)를 승지로 천거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거비(去非), 둘째가 거완(去頑), 셋째가 거소(去疎)이다.
박팽년은 박안생의 손자이며, 박중림의 아들이다. 세종 때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집현전 학사를 지내고 단종 즉위 후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조가 집권한 후에는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심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그의 아버지 박중림도 능지처사되었으며 아우들인 인년, 기년, 대년도 처형되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 처, 제수 등도 노비로 끌려갔으며, 숙종 때 이르러 신원이 회복되었다. 그는 여러 학문에 능통하고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했으나, 멸문지화를 입어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이 전하지 않고 있다. 그의 시호는 충정이며, 묘는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그의 손자로 전해지는 박비(朴卑)와 묫골박씨에 대한 일화가 있다.
박중선(朴仲善)은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거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의 딸로 세종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세종과는 동서지간이 되는 셈이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사가 되었다. 그 후 병조참판이 되어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단종복위를 꾀했던 박중림·박팽년 일가와는 친척이었으나, 정반대의 길을 간 것이다. 그 후 그는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곧이어 호조판서에 임명되고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남이장군의 옥사에서도 공을 세워 정난익대공신(靖難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재임되었으며,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박원종(朴元宗)은 성종즉위에 도움을 준 적개좌리공신 박중선의 아들이다. 성종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병조참지가 되었다. 연산군의 특명으로 좌, 우승지를 역임했으나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복권되어 경기관찰사가 되었으나, 또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 후 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하여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그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처남으로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는데 연산군이 숙모였던 박씨부인을 범하자, 그에 분개하여 반정을 일으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중종의 후궁이었던 경빈박씨는 그의 수양딸이다. 그는 중종반정의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그 후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고,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또다시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렇듯 순천박씨는 그 일족의 인구는 많지 않지만, 고려 말과 조선 초·중기를 주름잡았던 문벌 중의 하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도 박팽년의 후손이며,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박기정 등이 유명하다.
박기정(朴基正)은 박팽년의 후손이다. 박팽년의 후예라는 이유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음보로 현감을 지내다가,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승지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했으며,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하지만, 칙수미(勅需米, 중국 칙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사신이 지나는 역로(驛路)에 두는 쌀)의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정조의 영을 받아 이의준(李義駿)·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장릉사보(莊陵史補)’를 편찬하였다.
조선시대 순천박씨에서 배출된 과거급제자는 모두 134명인데, 그중 문과에 34명, 무과에 13명, 사마시에 85명, 역과에 2명이 합격했다.
#순천박씨 근현대 인물
순천박씨의 근·현대인물로는 독립운동가로 박인환·박노창·박규명 등이 있으며, 정계에서는 국회의장을 3번 역임한 박준규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박재우(국회의원)·박종남(국회의원) 등이 있고, 학계에서는 박황(성균관고문, 도산서원장)·박만규(고려대 교수)·박창준(흥사단이사장, 서울대 교수) 등이 있다. 또한 재계와 법조계에서는 박노성(전 제일은행장)을 비롯하여 박종철(전 대구지검장) 등이 있다.
박준규(朴浚圭)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최다선(9선) 의원 중의 한 명이다. 그는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5대 국회의원이 된 뒤, 김영삼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소장파로 활동했다. 그 후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겨 당의장을 역임했다. 5공화국에서 정치활동규제자로 묶였으나, 민주정의당에 영입되어 13대 이후 3번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그의 9선은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다선 기록이다.
박비(朴卑)와 묫골박씨
단종복위로 박중림·박팽년 등 3대가 멸문지화를 입게 되었을 때,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는 임신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있던 교동현감의 관노비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임신 중인 박팽년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노비가 되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마침 그때 함께 있던 계집종도 임신을 하고 있었다. 이에 박팽년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자, 계집종의 아들로 숨기고, 계집종의 딸을 노비로 보냈다. 이름도 비천할 비(卑)자를 넣어 박비(朴卑)라고 지었다. 그 후 박비가 장성한 뒤, 이모부인 이극윤이 박비에게 자수할 것을 권하고, 이에 박비가 성종에게 박팽년의 손자임을 고했다. 이에 성종은 박비에게 일산(一珊, 유일하게 남은 옥구슬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노비에서 풀어주었다. 그 후 박비는 후손이 없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99간의 가옥을 짓고 묫골에서 살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묫골박씨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