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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 선생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1920~1940년대 무렵 옛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도서관에 들렀다 우연히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란 책을 발견하고 놀라 마지않았던 라라와복래 또한
벅찬 감동으로 이 그림들을 소개합니다.
꽃가마가 아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갑니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습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네요.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합니다.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고,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답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키스가 대동강변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모란봉ㆍ을밀대ㆍ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싶습니다.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밤하늘의 별빛과 바다 위 배의 불빛이 기막힙니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날라다 준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달을 쳐다보는 데 최고로 좋은 집>”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
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한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지금도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를말합니다. 동묘라고도 하고 관운장을 모시고 있죠.]
백불(白佛)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습니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군요. 옛 우리의 세시풍경을 그린 귀중한 그림입니다.
나란히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군요. 키스의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차림을 한 것 같군요.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그렸습니다. 혹 그보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아이 어른 다 합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치르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신부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라는 키스의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격세지감을 들게 합니다~~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키스의 관찰입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愍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다음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 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
첫댓글 환상 그 자체 네요,표현력이 놀랍습니다.
정말 귀한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와우! *^^*
귀한자료이에요.
감사합니다.~~~
소중한 우리 조상들의 자료군요. 고맙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림이 그 당시의 역사가되었네요 . 놀라울 정도의 표현력에 감탄이 절로 나네요
귀한 그림 스크랩 합니다. 건강하세요.
정말 조선시대 의 멋스러움과 우리의 미묘함이 있네요 즐겨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민영환묘가 용인 기흥 마북동에 있는것 같아요
그림 솜씨도 놀랍습니다.
정말. 귀한 자료고 솜씨 또한 대단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
멋지고 소중한 그림이네요.
모르고 지낸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덕분에 감동깊게 감상했습니다
실로 멋진 작품이네요.
와우~~~
잘보고 갑니다.
여러 작품과 설명서와..감사드립니다.
귀한자료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