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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루카 10,38-42
평신도가 성화(聖化)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전형적인 마르타 스타일인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살짝 빈정이 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가 마르타가 아니라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시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깊이 있는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몰입할 수 없는 평신도들께서 약간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담컨대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이전, 3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평범한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30년의 세월은 복음사가조차 별로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청년의 삶을 사셨던 나날이었습니다.
때로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도 하셨을 것이고 마당도 청소하셨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동고동락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도와 묵묵히 대패질에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다 만든 물건을 납품하러 다니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이 따위로 물건을 만들었냐’는 주문자의 딱딱거림에 화도 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30년이란 세월동안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참 인간으로서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가치’를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평신도들께서 참으로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 가야하는 가를 몸소 삶으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우리의 이 일상적인 일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마주치게 되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일상의 삶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 안에 늘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는 노력(Finding God in All Things)을 계속할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기도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참으로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사 안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자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능동적이었던 박해시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교계제도가 확립되어가면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화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했던 초기교회의 탁월했던 평신도들의 영성이었는데, 성직자들의 역할이 강화되어가면서 즉시 힘을 잃어갔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와 불충분한 개념정립은 평신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불이익과 손실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신도 영성의 쇠락은 교회의 퇴보와 늘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과제 하나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입니다.
평신도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평신도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창의력을 존중하고 교회 쇄신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2중대가 절대로 아닙니다. 장교인 사제들을 맹목적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졸병 역시 절대로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고 그들의 업무가 과중하기에 이를 보완해주기 위한 존재도 결코 아닙니다.
평신도들 역시 성직자나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복음적 완덕에로 불림을 받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단 평신도들께서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이나 성전 안에서 살지 않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의 성화 여정은 당연히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도자가 평신도의 삶을 살길 원치 않으시듯이, 평신도가 수도자나 사제의 영성을 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각기 소명에 성실하며 각자의 카리스마, 달란트에 따라 복음적 삶을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나 수도자 못지않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영성을 지닙니다.
평신도 영성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도피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그 구조들 안에서 육화하여 복음화하며 그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성화하고 또한 성화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평신도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며 성화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묵상기도 잘하는 방법: 마르타는 소리기도, 마리아는 묵상기도
오늘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어떻게 봉사할까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이 두 자매의 상태가 바로 걱정을 하는 사람과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가끔 우리는 걱정하면서도 생각한다고 착각합니다. 생각은 내 밖에서 들어오는 좋은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걱정은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생각은 곧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윌리스 캐리어(Carrier)는 미국 유명 에어컨 회사, ‘캐리어’의 설립자입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백만 달러가 드는 일을 수주받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들어가야 했는데 아직 그 회사는 그 기술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캐리어는 수천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되었고 회사에서도 퇴사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몇 날 며칠 엄청나게 걱정합니다. 막연한 걱정이 그를 집어삼켜 잠도 잘 수 없었고 먹고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도대체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게 뭘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현실을 분석해 본 것입니다. 종이 위에 이 실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써보았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직업을 잃을 수도 있어. 길거리에 나 앉겠지.’ 최악의 상황을 쓰다 보니 긍정적인 생각도 올라왔습니다. ‘물론 회사는 2,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지만 좋은 실험을 한 거야.’ ‘근데…. 어떻게 하겠어…. 현실을 받아들이자.’
이때 바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걱정이 생각인 줄 알았는데, 걱정은 자신을 사로잡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하게 되니 구체적인 방안이 떠올랐고 그 결과 2,000만 달러 손해를 단지 2만 달러 손해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걱정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생각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J.K. 롤링은 1990년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 연착된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해리포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기차를 타는 동안 마법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의 아이디어가 “완벽히 형성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혼하고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착된 기차가 무엇입니까?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이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저절로 다다르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기차는 자신의 인생도 그럴 수 있다는 차분한 마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지혜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욕조에 들어가자 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알아차렸고, 왕의 왕관이 얼마나 많은 물을 대체했는지 측정함으로써 왕의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방법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레카!"를 외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시라쿠사의 거리를 달렸습니다.
왕의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 알아내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욕조에 들어가 한가하게 목욕하는 게 정상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내 힘으로 하려는 마음을 포기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오고 깨달음이 옵니다. 걱정은 그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담장과 같습니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예스터데이’(Yesterday)의 멜로디가 꿈에서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완벽히 형성된 곡조로 잠에서 깨어났고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완벽해 보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표절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이란 무엇입니까? 세상 걱정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걱정이 많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잠을 자고 나면 새로운 영감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좋은 생각은 내 노력에서 오지 않고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제임스 와트는 증기 엔진의 기존 설계에서 얼마나 많은 증기가 낭비되는지 알아차린 후 증기 엔진을 개선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패에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공원을 거닐다가 별도의 콘덴서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이는 증기 기관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향상하게 하였고 산업 혁명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원을 걸으며 평화를 찾는 것도 얼마나 좋을까요?
뉴턴은 연구할 때가 아닌 사과를 바라볼 때 중력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서 좋은 게 나온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좋은 생각은 내 힘으로 무언가 생각하려 할 때 달아납니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듣는 마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마르타로부터 마리아로의 전환이고 기도의 꼭 필요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며,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신다.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 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인지 심리학자 힐렌 아인혼은 ‘경험의 함정’이라는 책에서 행복을 ‘행복의 사분면’으로 이야기합니다. 우선 행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행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자기가 원치 않던 것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되면 행복하지만, 사업이 잘 안되면 불행합니다. 건강 검진을 해서 너무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오면 행복하지만, 암진단을 받으면 불행합니다.
세 개의 단면이 보입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 불행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원하지 않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입니다. 행복 하나에 불행이 두 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빠진 한 면이 있습니다. 바로 원치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픈 가족이 없다거나,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반반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이 힘들지만, 원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됨에 “다행이다”라고 말하면서, 행복한 ‘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의 이유는 갖는 것에만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갖지 못하는 것에도 행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 것만 해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가십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까요? 아니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을 분주하게 시중드는 마르타가 행복할까요? 둘 다 행복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 행복을 간직하며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녀는 앞서 말씀드렸던 불행의 측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초대했지만 마리아처럼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마르타처럼 우리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이유보다 불행의 이유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몫인 행복의 이유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다가와도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만큼 늙는 것이다(조지 번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교회 안에서
누군가는
육적인 양식을 위해
열성적인 사람이 되고
또 누군가는
영적인 양식을 위해
몰두하는 사람이 된다네.
하지만
육신의 일은
세상에서
언젠가는 사라져버리고
영혼의 일은
하늘 끝까지 영원하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는 길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사랑하기를 원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사랑하기를 정말 원한다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내가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지 그것에만 몰두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이 우선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게 우선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 41)
홀로 너무
많은 염려와
걱정을 하며
우리들은
살아갑니다.
왜 그렇게만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걱정을
떼어내야
머무름이라는
믿음이 됩니다.
걱정의
분주함이
아니라
머무름의 온기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염려와 걱정
하나 없는
삶을
주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염려와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주님을
불편한 염려의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도록 하는
사랑의 자리에
우리가
모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분주함으로
상대방과
더 이상
다투지 않습니다.
온갖 걱정으로
주님께 머무를
시간조차 없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걱정을
내려놓고
맡겨야
우리 생활에서
살아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좋은 몫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몫이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좋은 몫을
선택하는
좋으신 오늘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좋은 몫을 선택하자!'
오늘 복음(루카10,38-42)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정 방문을 하십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이때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이 오셨으니 큰 대접을 해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분주한 마르타가 얼마나 바빴으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10,40)
그러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좋은 몫을 선택하자!'
마리아는 언니 마르타가 선택한 몫보다 더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마리아가 선택한 몫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요즘은 본당 신부님의 가정 방문을 신자들이 부담스러워 합니다. 병자 영성체를 위한 가정 방문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왜, 그럴까?
아마도 마르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부님이 방문하면 분주하게 청소도 해야 하고, 음식도 준비해야 하는 부담 때문이지 않을까?
본당 신부님들은 마리아가 선택한 몫, 곧 미사에 자주 참여하여 말씀을 듣고, 사제의 손을 통해서 축성된 예수님의 몸을 함께 나누어 모시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을 선택합시다!
(~ 2열왕23,10)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