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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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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터키 여행① : 실크로드의 시작과 끝인 ’그랜드 바자르‘와 ’히포드럼‘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109 19.01.17 14: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첫째 날 :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와 히포드롬(Hippodrome)

 

특징 : 터키(Turkey) : 북쪽으로 흑해와 동쪽으로 조지아·아르메니아·이란, 남쪽으로 이라크·시리아·지중해, 서쪽으로는 에게해·그리스·불가리아와 접해 있다. 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역인 트라케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나누어진다. 터키 민족은 서기전 2000년경부터 아나토리아반도에 정착하여 독립국가를 형성해 왔다. 특히 1281년에 설립된 오스만터키제국은 1354년에 유럽에 진출하고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가 되었으며, 에티오피아·중앙아프리카·예멘·크리미아까지 그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측에 가담하여 패전국이 되기도 했다. 1923년에는 터키공화국으로 독립하고 케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케말 파샤 이후 잦은 정권교체와 두 번의 군사혁명을 거쳐 1982117일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우리나라와는 1949년에 국교를 수립한 이래 6·25전쟁 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며, 이후 혈맹의 우방국으로서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이스탄불(Istanbul) : 흑해 어귀에 있는 구릉성 3각형 반도의 요충지로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에 걸쳐 있어서 유럽·아시아 양 대륙에 속한다.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움을 세운 곳으로, 324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로 채택했고, 후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개칭되었다. 145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고,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터키의 역사·문화의 중심지였던 탓에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라는 토인비(Arnold Toynbee)의 말처럼 이스탄불에는 인류가 이룩한 5천년 역사의 문화유산들이 그대로 살아 숨 쉰다.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로마와 비잔틴, 그리고 이슬람 문명이 서로 만난다.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 그랜드 바자르는 터키어로 카팔르 차르쉬(Kapalı ?ar?ı)’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메흐메트 2(II. Mehmet) 때인 1461년 비잔틴 시대의 마구간 자리에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작은 시장이었다가 증축을 거듭해 현재는 2천 개에 가까운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 최대의 시장이 되었다. 내부는 여전히 미로에 가까운 모습이나 예전에 비해 깔끔한 느낌으로 많이 바뀌었으며 호객꾼들이나 강매도 많이 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스탄불 여행의 첫 방문지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이다. 대형버스의 진입을 막고 있는지 버스는 대로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덕분에 5분쯤 걸어야만 목적지에 이를 수가 있다.





18개의 출입구 가운데 하나이자 정문이랄 수 있는 베야즈트 문(Beyazıt kapısı)’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오래 묵은 시장이다 보니 보수 또한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박공머리에 새겨져 있다는 신은 상인들을 사랑한다라는 글과 술탄 압둘하미트의 인장은 구경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굽이굽이 흘러온 역사만큼이나 이스탄불에는 시장이 여럿 숨 쉬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이다. ‘그랜드 바자르가 생긴 것은 560년 전인 1461술탄 모하메드 2(II. Mehmet)’에 의해서이다. 이후 여러 번 다시 지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당시의 시장들은 대부분 지붕이 없었는데, 지붕을 덮었다고 해서 터키사람들은 그랜드바자르를 지붕 있는 시장이라는 뜻의 카팔르 차르쉬(Kapalı ?ar?ı)’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간단하게나마 몸수색을 받아야한다. 테러에 대한 기사가 심심찮게 올라오는 유럽지역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시장은 수천 개의 상점들이 60여 개의 미로(迷路)로 얽혀있다. 출입구만도 18개나 되니 자칫 길을 잃고 해맬 수도 있다. 시장 지도를 미리 챙겨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혹시라도 준비를 못했다면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 두자. ‘베야즈트 문(Beyazıt kapısı)’에서 누루오스마니예 문(Nuruosmaniye kapısı)’까지 곧게 이어지는 중앙의 메인 통로가 가장 넓고 가장 화려하다는 것을 말이다. 귀금속 등의 화려한 상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대부분 중앙 통로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들어서면 그 화려함에 눈이 부실 정도이다. 각각의 색을 내뿜는 보석들을 진열해놓은 상점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양으로 세공된 귀금속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시장의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보석들이 더욱 빛나 보인다. 이 보석상들은 오스만제국 때부터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도 보석과 귀금속은 힘을 상징했기 때문이란다. 힘 있는 귀족들이 금으로 치장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시장의 중심에 보석상들이 들어설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인파에 휩쓸려 돌아다니다가 문득 이곳에 시장이 들어선 이유를 생각해본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1의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이런 지리적인 특징 때문에 이스탄불은 옛날부터 여러 대륙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나라에서 나는 특산품을 파는 한편, 자기 나라에 없는 물건을 사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육상 실크로드가 이곳에서 끝나고, 해상 실크로드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단다. 북아프리카나 로마에서 실려 온 물품이 이스탄불에서 동방의 상인들에게 건네졌고, 그러는 사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나서 섞이게 된다. 이스탄불을 서양 속의 동양, 또한 동양 속의 서양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아무튼 그렇게 생겨난 시장이 바로 이스탄불 최대의 시장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이다. 1,200여 개의 가게가 모여 있고 매일 250,000명에서 400,000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우아한 자태의 등()들로 장식된 상점들도 보인다.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디자인으로 치장된 등들이 시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가게 자체만으로 아라비안나이트에 들어온 것 같다. 패턴도 다양하다. 조각 난 유리조각들이 색색별로 이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나오는 빛은 오묘했다. 가게에는 유리공예품과 도자기도 함께 진열되어 있다.






반짝이는 보석들로 눈요기를 하다가 미로(迷路) 같은 길에 들어섰다. 여기저기에서 프리 애플티를 외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차를 얻어 마실 경우 곁에 딱 들어붙어서 자신의 상품을 설명하니 호객행위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무조건 사양할 일만은 아니다. 차를 마시면서 그가 설명하는 제품의 품질 등에 대해 경청해주는 것도 일종의 예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미안하다면 미안한 표정과 함께 고맙다는 터키어인 테쉐퀴르 에데림(Te?ekk?r ederim)’이란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뜨면 된다.





이곳에서는 주로 토산품이나 장식품, 양탄자, 도자기 등을 판다. 대부분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하지만 가격이 저렴한 편은 아니기 때문에 아이쇼핑을 즐기거나 가벼운 기념품들만 구입하는 것이 좋다. 가이드의 안내 멘트에도 이런 경고가 꼭 따라다녔다.




오토만 시대의 그랜드 바자르는 상업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환전소와 은행 등 각종 경제활동이 행해지던 곳이었다. 이 시장은 노천에서 행해지던 상거래를 지붕으로 덮인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전천후 상거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각종 향료나, 섬유, 나무 등을 파는 전문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까지는 노예시장의 역할도 했다. 19세기 초에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도망 나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각종 골동품 및 왕실의 보물들을 이 시장에서 팔곤 했으며, 유럽에서 들어온 각종 레이스 품목 및 고급 천, 침대 카바 등도 같은 시기에 이곳에서 거래되었다고 한다.




누루오스마니예 문(Nuruosmaniye kapısı)’을 빠져나오면서 시장구경은 끝을 맺는다. ‘누루오스마니예 문역시 보수공사 중이다. 박공머리에는 새겨져 있다는 의장용 무기와 책, 그리고 깃발 또한 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출입구의 밖에도 수많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상점의 외관이나 규모, 진열된 상품들이 안쪽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 그래선지 기웃거리는 관광객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출입문을 나서면 누루오스마니예 모스크(Nuruosmaniye Camii)’가 나온다. 대부분의 패키지여행자들이 집결 장소로 이용하는 곳이다. 1748년 마흐무트 1세 때 시작되어 그의 후대인 오스만 3세 때인 1755년에 완성된 이 사원은 유럽의 바로크 양식이 오토만 건축양식에 적용된 가장 성공적인 건물로 꼽힌다. 고전적인 오토만(Ottoman) 사원들과 이 누루오스마니예 사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벽에 행해진 많은 장식과 장식이 된 첨탑의 캡, 그리고 본당의 이중으로 된 미흐랍(Mihrap, 메카가 있는 방향의 벽)’이다. 12개의 기둥과 14개의 돔이 있고 분수가 만들어지지 않은 반원형 정원은 이 전에 세워진 사원들과는 전혀 다른 장식이 많은 바로크양식의 특성이라고 한다.





사원의 난간에 서니 그랜드바자르의 아치형 돔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저 지붕 위의 풍경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몇 년 전에도 ‘007 스카이 폴테이큰 2’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다음 방문지는 히포드롬(hippodrome)’이다. ‘블루모스크의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풍스런 옛길을 따라 10분 남짓 걸으면 만날 수 있다. 지금 찾아가고 있는 히포드럼(Hippodrome)’은 말(horse)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hippos와 경주(race)를 뜻하는 dromos를 합성한 말로서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누렸던 경마나 전차경주의 U자 트랙을 의미한다.






길쭉한 터로 이루어진 히포드롬(hippodrome)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고대 검투 경마장 터이다.  처음에는 검투경기장이었으나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경기가 금지되면서 마차경기장으로 이용되었단다. 경기장은 10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중앙에다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기둥이나 조각상 등을 배치하고, 밖에다 트랙을 만드는 구조였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는 니카의 난이 일어나 처형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오스만 시대 때는 예니체리 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이곳에서 처형당하기도 했다. 13세기에는 십자군의 침입으로 유적 대부분이 파괴·약탈당했다. 당시 이곳에 있던 4개의 청동말 장식은 지금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성당의 정면을 장식하고 있단다참고로 히포드럼은 1959년에 제작된 영화 벤허의 배경으로 벤허(찰톤 헤스톤)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던 바로 그 전차 경기장이다. 현재 이름은 술탄 아흐멧 광장’, 오스만 제국의 14번째 술탄()인 아흐멧이 술탄 아흐멧 사원(블루 모스크)’을 고대도시의 심장부 히포드럼에 세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시안 오벨리스크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로 원래 높이는 32.5m이었는데 현재는 20m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 오벨리스크는 BC 15세기 즉 3500년 전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메소포타미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AD 390년 비잔틴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신전에서 이 엷은 핑크색 대리석 기둥을 가져와 이곳에 세웠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4면 본체에 음각된 이집트 상형문자이다. 내용은 투트모스 파라오의 용맹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글씨가 무려 3500년이 흘러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 그 역사성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오벨리스크의 기단 받침대 4면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모습, 무희들이 춤추는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부터 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 등 히포드럼에서의 일들을 양각으로 부조해 놓았다.



콘스탄티누스 7세가 940년에 만든 오르메 수툰(Orme Sutun)’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오벨리스크이다. 높이는 32m, 탑의 기단부에 콘스탄티누스 7세가 할아버지를 위해 탑을 세우고 청동을 입혔다.’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원래는 청동으로 덮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 표면에는 당시 비잔틴시대의 시민생활상을 조각해 놓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3세기 초 라틴 군이 청동을 떼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해버렸고, 청동을 떼어낸 자리는 마치 속살을 베어 낸 것처럼 움푹 움푹 들어갔으므로 현재의 모습은 몹시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가운데에 위치한 뱀들이 뒤엉켜있는 모양새의 기둥은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으로,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BC 479년 그리스가 팔라테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AD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곳 히포드럼 광장의 트랙 중앙에 세워 놓았다. 기둥은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며 위로 올라가는 형상인데 페르시아의 청동 무기를 빼앗아 녹여서 만들었다. 원래는 머리 위에 직경 2미터의 황금 트로피가 있었다고 하나 황금 트로피는 뱀 기둥이 이스탄불에 옮겨 오기 전에 이미 분실 되었고 뱀들의 머리도 오스만 시대에 부서졌는데, 하나는 이스탄불 박물관에, 또 다른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푸른빛을 띤 청동 기둥이 철()이었다면 산화로 인해 벌써 부식되어 옛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청동은 고도의 합금 기술이 요구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므로 뱀 기둥은 청동기의 우수성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히포드럼의 북쪽 귀퉁이에도 고풍스런 건물이 들어서있다. ‘마르마라 예술대학(Marmara University)’의 캠퍼스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틀(첫날과 마지막 날)을 머물렀던 메리어트 호텔(Courtyard by Marriott Istanbul international airport), 이스탄불공항 근처에 위치한 5성급 호텔로 넓고 깔끔한 객실은 물론이고 바와 라운지, 사우나, 헬스클럽, 비즈니스 센터, 실내수영장, 회의실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특히 블루 모스크와 소피아 사원, 톱카프 궁전 등 유적지가 밀집해 있는 구시가지와 가깝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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