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할아버지와 하회마을 이야기
대전에서 안동가는 길은 버스로 두 시간 반이나 걸린다. 주일인 오늘은 서울에서 홍 선생이 합류하기로 했다. 오랜 벗님인 홍 선생은
캐나다 거주 시인으로 서울에 머무르고 계셨다. 우리는 터미날에서 만나 목성동 성당 10시 미사에 맞추어 갔다. 안동시청 뒷편에 아담하게
지어진 성당은 주교좌지만 서울 변두리 성당보다도 작다. 교중미사인데도 신자는 3,4백 명 정도다. 성당에서는 부활절을 앞두고 대대적인
선교캠패인을 펼치고 있었다. 본당신부는 사순 5주일 예수님이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복음을 강론하고는 신자들에게 열심히 선교하겠다는 선서를
받았다. 모든 신자들이 미사 후 선교발대식을 갖고 띠를 두르고 가두선교에 나섰다. 선교는 크리스찬의 의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하신 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문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한국
청년들이 인도 불교성지에서 '땅밟기'를 하며 찬송가를 부르는 선교장면이 보도되고 있다. 요즘 유행한다는 '땅밟기'라는 것은 '지신밟기'라는
무속에서 유래된 것인데 기독교 선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 지하철이나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는 "예수천당, 불신지옥"하면서 마이크로
떠드는 것을 본다. 이런 광신적인 선교는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만 조장할 뿐이다. 또한 길에서 찰나적인 접촉으로 유인물 한장 건네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효과보다는 신자들의 선교사명을 일깨우는 목적일 것이다. 나는 평소 선교란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꾸준히
크리스찬의 향기를 풍기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예수께서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고 가르쳤다. 신앙이란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그렇지 못해 항상 죄스러울 뿐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철저한 교적제도로 한자리
숫자까지 집계될만큼 통계가 정확하다. 매년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발표하는 교세통계는 정부 센서스보다 늘 적게 나온다. 천주교는 세례받은 신자만
집계하기 때문이다. 지난 해 기준으로 한국 가톨릭 신자는 5.442,996명으로 인구의 10.4%이다. 그러나 안동교구는 48,480명으로
인구대비 6.6%에 불과하다. 따라서 보다 적극적인 선교가 필요한 지역이기도하다. 사실 안동지역은 오랜 유교전통으로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쉽지
않았다. 그나마 천주교가 이만큼이라도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구장 두봉 주교의 헌신적 삶에 힘입은 바 크다. 나의 이번 안동여행 목표는
두봉 주교님을 뵙는 것이었는데 교구 관계자의 충정어린 보호로 무산되었다. 전화를 받은 교구 직원은 주교님이 연로하셔서 사람들이 방문하면 건강에
지장있다며 본인에게는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번호 주는 것조차 거절한다. 안동교구 어느 신부가 함께 가자고 했지만 나와는 일정이 맞지 않았다.
어차피 인연따라 사는 것이다. 192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두봉 주교는 안동에서 '농민들의 아버지' '안동 할아버지'로 통한다. 조국
프랑스보다도 한국을 사랑한다. 두봉 주교는 180년 전부터 한국에서 많은 피를 흘린 파리외방선교회 출신으로 1953년 사제서품 이듬 해 한국에
도착해 대전교구 보좌신부로 출발 1969년 안동교구 초대 주교로 임명된 후 22년 교구장 재직기간 동안 유림과 불교계로부터도 큰어른으로
존경받았다. 두봉(杜峰)이란 이름은 자신의 이름인 르네 뒤퐁을 한국어로 음역한 것이다.
10여년 전 나는 두봉 주교를 미국에서 뵌 일이 있는데 그분은 매우 고급 어휘의 한국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고전부터 불교, 유교 경전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지금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분은 수준높은 유머로 한시간 내내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1969년 대구대교구에서 분리되어 경상북도 북부지역을 관할하는 안동교구는 가장 작은 교구지만 우리나라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유신말기
가톨릭 농민회와 얽힌 오원춘 사건은 전국 사제들의 시국기도회와 유신철폐 운동으로 이어져 유신 종말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두봉
주교를 추방하려고 외무장관까지 바티칸에 파견했으나 고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가 교종에게 실상을 정확히 전달해 무산되었다. 두봉 주교는
항상 한국교회는 한국인 주교가 맡아야 한다며 교구 기틀이 잡히는대로 사퇴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그는 주교가 된지 10년 후인 1979년
사퇴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1990년에야 후임이 결정돼 그는 주교 정년이 14년이나 남았음에도 일찍 은퇴했다. 두봉
주교는 은퇴 후 경기도 행주산성 마을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면서 공소신자들을 돌보다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시라는 안동교구장의 간청으로 2004년부터는
경북 의성 봉양 문화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모국 프랑스에서는 그의 삶 전체를 높이 평가해 1982년 나폴레옹 대훈장을
수여했다.
나와 홍 선생은 두봉 주교를 직접 뵙지 못한 서운한 마음을 안고 시내버스로 화회마을로 향했다. 나는 8년 전에도 이곳을 찾은 적이
있는데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한 하회마을보다는 약 5킬로 떨어진 병산서원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이날 처음에는 홍 선생과 도산서원을 찾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한번에 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되어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풍산 류 씨가 6백년 이상 집성촌을 이루어 온
하회마을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곳으로 우리나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하회(河回)라는 이름은 마을 앞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돌아간다 하여 붙여졌다. 마을에는 구한말까지 350여 세대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가구 뿐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전통음식 식당과 기념품, 민박 등 관광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마을에는 입장료도 징수한다. 흥미로운 것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민속놀이로
서민들이 놀았던 파계승에 대한 조롱과 양반을 야유조로 풍자하는 '별신굿탈놀이'와 양반들이 강에 배를 띄우고 시회를 즐겼던 '선유줄불놀이'가 함께
전승되어 온다. 선유줄불놀이는 강건너 부용대 정상에서 마을 앞 만송정까지 240미터 거리를 네 개 밧줄로 연결하고 수백 개 뽕나무 숯가루봉지를
매달아 점화하면 한가닥 씩 타올라 불덩이가 65미터 높이 부용대 절벽에서 강으로 떨어지는 화려한 불꽃놀이다. 불덩이가 강으로 떨어질 때마다
선상의 선비들은 "낙화(落火)야'하고 소리치면 다음 사람이 시창이나 가무를 하는 전형적인 양반들의 여흥이다. 생각해 보라. 강위에서는 양반네들이
가무를 즐기며 불꽃놀이하는 동안 마을에서는 서민들이 탈바가지를 쓰고 춤을 추며 양반들을 조롱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반상동락(班常同樂)
아니겠는가.
이곳의 하회와 병산탈은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고 하회마을은 2010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대표적 민속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에서 한국식으로 거나하게 회갑잔치를 했다. 2005년에는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는데 아들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는지 4년 뒤에는 아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하회마을을 찾아
기념식수했다. 우리는 마을 입구 식당에서 안동명물이라는 간고등어로 점심을 하고 마을에서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숲길을 걸었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고 길은 파랗다. 숲길에는 매화, 벚꽃, 진달래가 만발하고 새들은 공중에서 지저귄다. 나는 숲길을 걸으면서 홍 선생의 신앙체험담을 듣는다.
몹쓸 병을 신앙으로 이겨낸 홍 선생의 의지가 존경스럽다. 특히 그분은 우리나라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심으로 103위 순교성인 호칭기도를 하면서 한
분 한 분 그분들의 생애와 신앙을 묵상한다고 했다. 사람은 대화를 나누어 보아야 깊이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홍 선생은 이날 신앙을 자신에게
체화시킨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 왔다. 나즈막한 산을 하나 넘으니 낙동강이 보인다. 강변은 갈대밭으로 우거졌다.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은 이웃 하회마을과 한묶음이다. 원래는 고려 때부터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고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한편 유림들을 양성했다. 사액서원으로 고종의 사원철폐령 때도 무사히 보존되어 지금까지 내려 온다. 지금도 이곳 사당인
존덕사에는 서애 류성룡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병산서원은 정면의 만대루와 경내 곳곳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이라고도 불리우는 배롱나무가
절경이다. 한여름에는 류성룡이 심었다는 수령 4백년 이상 된 배롱나무들의 새빨간 백일홍이 서원을 감싸 꽃향기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라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봉오리도 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방에 흰 배꽃과 진달래 등 온갖 봄꽃들로 또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었다. 내가 8년 전
이곳에 와서 만대루에 올라 마루에 정좌하고 건너편 낙동강과 병산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산과 강물 자체가 만대루안에서
8폭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지금은 수리가 필요해 만대루 마루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홍 선생께 병산서원의 장관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웠다. 지금도 일년에 두차례 제사드리는 병산서원에는 옛날 유생들이 공부하던 3천여 권의 고서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병산서원에서 마을 버스정류소까지 6킬로 거리는 비포장 흙길이다. 8년 전 왔을 때 병산서원 관리인은 시에서 포장계획을 세운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못하도록 진정해 중단시켰노라고 자랑했다. 시에서는 병산서원 앞 낙동강에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병산서원과 낙동강, 병산을
한번에 관광하도록 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병산서원의 고즈녁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많은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일으킬 것이 뻔하기 때문에
병산서원을 아끼는 사람들은 절대 반대한다고 했었다. 당시에는 그 이야기가 꽤 신선하게 들렸다. 그런데 이날은 관광객을 실은 차들이 연신 드나들어
흙먼지를 일으키는 통에 곤욕을 치렀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포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그래도 그동안의 경험때문에 견딜만 했지만 서울에서
오신 홍 선생이 불편할 것 같아 미안했다. 지나가는 차를 몇 번 세워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공사 트럭 한 대가 멈추어 태워주겠다고
한다. 높은 트럭에 내부는 지저분하지만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운전사는 우리를 지름길로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주고 사라졌다. 홍
선생은 운전기사의 친절이 고마워 한구석에서 그를 위해 기도를 바친다. 덕분에 우리는 예정보다 일찍 터미날에 도착했다. 우리는 터미날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홍 선생은 서울행 버스를 타고 나는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마산 교구장을 지내고 은퇴한 박정일
주교와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이날 저녁은 대구 허연구 신부댁에서 신세를 지겠노라 미리 연락해 두었다.
(2014.7.24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