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30)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길은 올바르다는 신앙 고백의 시를 읊는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주 하느님을 갈망한다고 노래하며 이제 그분을 통하여 다시 빛을 보리라고 희망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은 모두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시며 안식을 약속하신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가벼우니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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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제품을 받고 출신 본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새 사제는 신자들에게 기념 상본을 나누어 줍니다. 거기에 적힌 성구는 사제가 평생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고른 성구가 바로 오늘의 복음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미사 독서와 성무일도 등에서 자주 대할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첫 마음처럼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그래도 이 말씀을 되새기며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 구절을 선택한 것은 예수님을 닮아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사제직을 수행하겠다는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미사에서 강론을 맡아 주셨던 원로 신부님이 제게 해 주신 당부 말씀을 들으며 깨닫고 지금까지도 깊이 새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원로 신부님은 강론에서 새 사제가 대단한 각오로 살아가려 하겠지만 자신의 잘못과 한계, 그리고 사람들의 몰이해로 말미암아 시련을 겪고 좌절할 때가 자주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때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에 대한 말씀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자존심과 책임감을 생각하기 이전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원기를 되찾으라고 간곡히 이르셨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당부를 떠올립니다. 주님과 교회의 일을 수행하며 겪는 어려움과 한계가 참으로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초대하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치유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억한다면 그 짐은 가볍고 편한 멍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에 평화방송 라디오 녹음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출발하면서 비가 오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더군요. 하지만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없어서 우산 없이 그냥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우산 하나가 별 무게가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지고 다니면 불편하니까요.
방송 녹음을 하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신부님... 비가 많이 와요.. ㅜ 지하철 내리고도 비 많이 오면 전화주세요~”
제가 있는 성소국 직원의 문자 메시지였습니다. 방송을 하고 있는 그 시간에 인천에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었나 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서울에는 비가 오지 않았거든요. 또 제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에는 비가 그쳤지요. 따라서 사람들은 비가 엄청나게 왔다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빗방울이 모여 있는 것만을 볼 뿐 쏟아지고 있는 비를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자 메시지를 받으면서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솔직히 우산이야 길거리에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많이 가물었기 때문에 비를 맞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근무한다는 이유만으로 지하철까지 마중 나가겠다는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누구나 외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 그 누구도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심한 외로움 속에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 혼자만 이 세상 홀로 남아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나의 적대자만 사는 세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외로움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유는 철저히 개인주의화 되는 세상의 흐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한 모습, 이웃을 협조자가 아닌 경쟁자로만 보는 시선 등이 결국 내 발목을 잡아서 자기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셨던 기준들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능력? 사람들을 배불리 해주는 것?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는 것? 좋은 말씀으로 위로를 주는 것?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법? 사실 이런 것들을 배워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즉, 화려하고 깜짝 놀랄만한 일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뜻을 내 안에 담을 수 있으며, 이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기준만을 앞세우고 있으며, 주님의 뜻 역시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가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보니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그분 안에서 편안한 안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우고 익혀 이대로 산다는 것이 세상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편안한 안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가치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밤이 되었다가 낮이 되는 것처럼 때론 즐겁고 때론 슬픈 게 인생의 맛(김원).
액션 바이어스(‘좋은생각’ 중에서)
이스라엘 학자 마이클 바엘리는 축구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차는 선수들을 관찰했다. 286회의 페널티 킥을 분석한 결과, 오른쪽으로 몸을 날린 골키퍼의 12.6%가, 왼쪽으로 몸을 날린 골키퍼의 14.2%가 공을 막아 냈다. 반면 움직이지 않고 골대 중앙에 머문 골키퍼의 경우 33.3%나 공을 막았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 골키퍼 중 6.3%만이 중앙에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골키퍼들은 중앙에 가만히 서 있으면 두려움을 느꼈다. 어느 방향으로든 몸을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아 보일 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덜 괴로웠다.
마이클 바엘리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 움직이는 ‘액션 바이어스’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때로는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성에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멈추어서 상황을 명료하게 지켜보는 것이 더 낫다. 움직이는 것뿐 아니라, ‘멈춤’도 지혜로운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11,28) -김대열신부-
삶의 무게! 말만 들어도 한숨 섞인 무게를 쏟아내게 만든다. 세상에는 만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구체적인 삶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떤 삶을 선택하더라도 삶의 무게는 존재한다. 그리고 버겁지 않은 것은 없다.
삶에 지친 이들은 당신께 오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짐은 던져버리고, 당신께서 지고 계신 짐을 함께 지자고 하신다.
그 짐은 편안하다 하신다. 쉽고 가벼워서 편한 것이 아니라, 아니 더욱 무겁고 힘들 수도 있지만, 당신께서 함께 하시고 옳고 아름다운 짐이기에 편안하다 하신다.
진정 참된 행복을 원한다면, 당신께서 주시는 짐을 지라 하신다. 당신과 함께 지어야 할 짐은 희망이기 때문이라 하신다. 그러니 함께 지자 하신다.
당신을 사랑이라 하셨다. 필요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우리의 지조 없는 사랑이 아니라 한결 같은 사랑이라 하셨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짐을 지으라 하신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지어야 할 짐이라는 것, 메어야 할 멍에라는 것은 결국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나이다. 도와주십시오. 당신께서 내미신 그 손을 놓지 않게 꽉 붙들어주소서. 옳기에 아름답기에 희망이기에 사랑이기에 편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반영억신부-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앞서 해야 할 일을 해야 먼저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계명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계명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요한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겠습니다. “정령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에 힘입어 희망을 간직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한 안식처
-이수철신부-
누구나 원하는 바 잠시나마 몸과 맘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성지를 순례할 때 마다 우선 찾는 것이 성지 안의 성전입니다.
성전을 찾을 때 마다 영혼의 평화와 더불어 오늘 복음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성전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의 품을 상징합니다.
얼마 전 합덕 성당을 순례했을 때도 참 평화로웠습니다.
꼭 고향에 온 듯 했습니다.
"어디나/하느님의 집/성전은
내/영혼의 고향“
성전 안에서의 사진과 더불어 카톡으로 지인에게 보내 드린 메시지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품을 상징합니다.
영혼의 고향,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시간이
깊은 묵상과 미사전례와 시간전례 시간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참 안식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 비로소 선사됨을 깨닫습니다.
예수 성심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서 우리의 멍에는 편해지고 우리의 짐은 가벼워집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가면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 저절로 깨닫게 되는 주님의 진리 말씀입니다.
오늘 이사야의 고백이 참 아름답습니다.
바로 주님 만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런 주님을 갈망하며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이 진정 의인입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이사26,7-9.12참조).
하느님을 찾는 인간입니다.
새삼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은 영혼입니다.
하느님만이 줄 수 있는 영혼의 안식과 평화입니다.
하느님 아닌 그 누구, 그 무엇도
하느님을 찾는 이런 무한한 인간의 갈망과 열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끊임없이 목말라 찾을 때
주님을 만나 우리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해져 저절로 영혼의 안식과 평화입니다.
다음 이사야의 아름다운 고백은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라.“(이사26,19).
우리 모두 주님의 '빛의 이슬' 은총으로 다시 살아 깨어 일어나,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행복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34,9).
아멘.
십자가의 무게 -인영균신부-
세월호에서 희생된 아들을 둔 두 아버지와 누나가 지금 안산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그리고 교황님과의 미사가 열리는 대전까지 40일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벌써 11일째, 전라북도 익산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이분들 가운데 이호진 형제와 그 따님 이아름 자매는 우리 수도원에서 열렸던 ‘세월호 참사 희생를 위한 기도 음악회’(6월 21일)에 유가족으로 참석해서 그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피를 토하는 부모의 마음을 모든 이에게 전해주셨습니다.
함께 아파했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분들이 순례길에서 들고 가는 것은 바로 주님이 짊어지고 가셨던 십자가입니다.
그 험한 십자가 순례를 한다는 소식을 떠나기 전에 들었을 때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십자가가 이분들의 무거운 아픔을 덜어주소서. 또 타오르는 분노가 온유한 사랑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소서.”
이분들이 메고 가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당신의 멍에인 십자가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십자가가 편하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우리 어깨의 십자가가 우리의 십자가이면 짊어질 수 없습니다.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어깨의 십자가가 바로 주님의 십자가라면 짊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짊어지시기 때문에 또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오늘도 짊어지고 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엠이’ 주말 봉사 모임이 수유리에 있는 봉사자 부부의 집에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하철로 가려고 했습니다. 지하철은 오르고 내리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정확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방송 앞에는 140번 노선버스가 있습니다. 조금 망설이가다 노선버스를 선택했습니다. 기다리가가 도착한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기사가 이야기 합니다. 지금 버스는 문제가 있으니 다음 버스를 타라고 합니다. 다음 버스는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전광판에서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평온하던 마음에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필 내가 타려고 하는 버스에 문제가 생겼을까! 그냥 지하철을 탈걸 왜 버스를 타려고 했을까!’ 10분 후에 버스는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사람이 많았습니다. 40분 버스를 타면서 혈압은 오르고, 심장은 벌렁거리고, 날씨는 덥고, 사람은 많고 짜증이 났습니다. 이왕 늦었으니 버스 안에서 기도를 했으면 마음도 편해졌을 것입니다. 이 또한 다 지나갈 것이라고 마음을 먹었으면 가지고 간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 모임은 직장에서 늦게 퇴근하신 분이 있어서 정해진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저만 늦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구에 있으면 착한 목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든’ 목자들의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마음 아프고, 속이 상한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구에서 병든 목자들을 치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구장을 중심으로 목자들이 주님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원칙 없는 재정 운용, 독단적인 본당 운영, 부적절한 언행, 지나친 음주’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신자들과 더불어 기도하고, 아픈 이를 먼저 찾아주며, 성사 집전을 성실하게 하고, 강론을 충실하게 준비하고,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재정과 본당 운영에 대한 것들은 신자들 중에 전문가를 선임하여 함께 상의를 하고, 오직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데 전념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많은 목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삶 안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사명이며 책임입니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고 싶다는 뜻으로 ‘사명’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이 말에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