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그 도성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독서: 묵시 22,1-7
어린양은 없고 어좌만 있는 이유
인터넷 뉴스를 뒤지다보니
나이지리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보코하람에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18세 소녀의 고백’이란 기사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보코하람이 갑자가 학교에 들이닥쳐 276명의 아이들을 납치해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중에 목숨을 걸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극적으로 탈출한
몇 명의 아이들 중 하나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다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그렇게 테러를 자행하는 것입니다.
테러는 자신의 힘으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이들입니다.
그것이 종교라면 그들이 믿는 신의 모습이라면 그 신에게 누가 가고 싶겠습니까?
나를 이용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노예로 만드는 그런 무서운 곳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이 아무리 천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드록바가 신으로 불리는 이유’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 축구선수로서 2008년 첼시에서 뛸 때
축구선수로서의 가장 큰 영예인 발롱도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축구를 잘 하기 때문에 신으로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한 사람으로서 남북 간의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5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코트디부아르가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승리를 거둔 후
드록바는 “1주일만 전쟁을 멈추자”는 이야기를 무릎 꿇고 TV 생중계에서 합니다.
이때 2002년부터 남부 가톨릭과 북부 이슬람간의 전쟁이 치열했던 코트디부아르는
실제로 드록바의 이 발언을 계기로 잠시 전쟁을 멈췄다가 재개합니다.
이후 드록바는 2008년 발롱도르를 수상하자 그 상을 들고 코트디부아르로 갑니다.
이때 남부(베트) 지역 대통령이 축하만찬을 열어주며 생중계를 하는데
이때 드록바가 폭탄발언을 합니다.
“이 상은 코트디부아르 전체의 영광이니 이 상을 북부 이슬람에 전달하기 위해
대통령이 나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이건 6.25 전쟁 시절에 이승만에게
“나와 같이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고 한 것과 다름없는 수준의 발언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이면 잘못하면 즉결 총살당할 수도 있는 그런 분위기였지만,
당시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의 스타가 아니라 그야말로 세계의 스타였고,
또 생중계 중이었으니 대통령도 못하겠다고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진짜로 북부 반군 거점 도시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북부(부아케) 이슬람 도시도 그야말로 난리가 납니다.
이 계기로 남북 단일팀이 만들어졌고
또 그렇게 내전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드록바가 코트디부아르에 산 것은 겨우 5살 때까지고
그 이후엔 쭉 프랑스에서 살았던, 사실상의 프랑스인입니다.
그런데도 가난하고 전쟁으로 고통 받던 조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죠.
이후에 어떤 기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저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축구에 대해 문외한이던 자신의 조국을 2006년부터 3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것도
드록바이고,
내전을 멈추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며,
이후 조국 국민들의 교육/의료 및 복지 개선에 자신이 번 돈을 많이 기부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하는데 드록바가 경기장에 입장할 때
땅에 손을 대고 성호를 긋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저런 위대한 선수가 가톨릭신자라는 것에
큰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이용해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죽이고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신이라면 하늘나라에서조차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보다는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모습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 자체이신 분의 모습이라야
우리가 안심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오늘 독서에서 보면 하늘나라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다고 나옵니다.
어린양의 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와 온 도성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 생명수의 강 옆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뭇잎은 민족을 치료하는데 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상징을 이해해야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을 해야만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은 목이 잘려 피가 나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어린양은 죽은 것입니다.
그 죽어서 흘러내리는 피가 곧 생명수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수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 혹은 성체와 성혈,
혹은 그냥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는데,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그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천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희생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참 신랑으로서 신부인 교회에 당신 생명을 계속 나누어주시는 분이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그분께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린양이 어좌에 앉아 군림하지 않고 그 백성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 그런 곳이라면
안심하고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루카복음 21, 34 - 36
<항상 감사하십시오>
신학교 1학년 때 담임 신부님께서
“사제는 여자, 술, 돈만 조심하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저는 술을 잘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았었습니다.
신학생이 되어서는 술 마시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술을 끊어본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 안 가서 또 시작하곤 하였습니다.
요즘에 와서야 왜 이렇게 술을 절제 없이 마시게 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과학적으로도 그런 호르몬이 나온다고 합니다.
자신감도 있어져서 자신 있게 말도 할 수 있고 맨 정신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억지로 기분을 좋게 한 대가로 술을 깰 때는 그만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침이 힘들어서 후회도 됩니다.
정말 많이 마셨을 때는 ‘다시는 술 마시나봐라.’라고 결심을 하지만
며칠 안 가서 다시 마시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술을 마시게 되는 이유는,
억지로라도 즐거움을 누려보려는 마음 때문이고
그 이면에는, 지금 나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사실 자신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평상시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은 술을 적게 마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고,
술이 쓰면 인생이 달다.”
인생이 써서 술을 찾게 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성경에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첫 기적이 술을 만드시는 것이었고
바오로는 건강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 하라고 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술에 취하지 말라는 말은 많이 나옵니다.
술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라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1935년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젊은이가
시대의 흐름과 여론을 수집, 분석하는 연구소를 창설했습니다.
바로 조지 갤럽의 '미국여론연구소'가 그것입니다.
이후 이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기반을 넓혀나갔습니다.
갤럽이 원숙한 나이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행복'이란 것을 알고 그는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놓고 한 텔레비전과 대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갤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마약 중독자와도 같이 외적인 힘으로 우울해진 마음을 위로해보려 합니다.
물론 취해 있을 때는 인생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술이 깨면 더 큰 공허함과 우울함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또 마시게 되고 그렇게 악순환 됩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기분을 UP 시키는 것은 그것이 지나고 나면 그만큼 DOWN 된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공짜로 기분이 좋아졌다면 나중엔 원하지 않아도 그만큼 나빠지는 것입니다.
어느 때 별 이유도 없이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사람은
다시 자신도 모르게 안 좋아질 때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도록 자신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인기 있는 사람도 항상 인기에 목이 마르고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돈을 더 갖기를 원하게 됩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모든 행복이 주어졌던 아담과 하와도
또 다른 육체적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금지된 열매까지 따먹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참된 겸손은
‘내게 허락된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나에게 충분히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크고 작은 기쁨들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무엇을 원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교만의 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항상 깨어 준비하란 뜻은,
어쩌면 항상 감사하며 살라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는 미사 때 주님께 찬미가 저절로 솟아나옵니까?
하느님나라는 그렇게 찬미를 드리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나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을뿐더러 얻기도 힘든 순간적인 즐거움들을 바라면서
불만족스런 눈으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포기하고
내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겸손해져야만 행복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