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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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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나를 따라라.”(루카 5,27)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랑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랑
아무도
부르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사랑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사람에게
손 내미는 사랑
아무도
곁에 두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두는 사랑
아무도
마음 쓰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 쓰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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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월 12일(240212) 강론글 하단에
내일부터 17일 토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돌아와서 기쁘게 다시 만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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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재작년에 코 수술을 받았습니다. 콧속에 혹이 나서 냄새를 맡지 못했고 또 숨을 쉬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수술 후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코안을 꽉 막고 있는 솜으로 인해 답답해서 어떻게 할지 모를 정도가 되었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통증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선택은 계속 누워만 있었습니다. 자다 깨다 만 반복하며 하루 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저를 아는 분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이 저였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서 있는 이틀 동안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인 ‘나이팅게일’은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를 ‘걷는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두 다리를 걷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도 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또 돈이 없다면서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있다면 지금 아픈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도 경험해 보니 아프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픔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평소에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지요. 그렇다면 정신의 건강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정적 감정을 몰아내고 긍정과 희망의 감정이 가득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정신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이 세상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만연하면서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걷지 못하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 포기와 좌절을 반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메시지가 더 큰 힘이 됩니다.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춘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밝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주님의 메시지는 모두 희망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올바로 따르는 이는 이 희망 안에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절망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걷지 못할 때, 얼른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하는 한 줄기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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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약간의 과학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은 그를 하느님께 다시 들어가게 만든다(프란시스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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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러니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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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인 체하는 죄인
불이 났을 때 소방대원은 목숨을 걸고 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당하더라도 인명을 구하고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합니다. 보통 사람은 위험을 피해 달아나지만, 그들은 위험 속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신앙이라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계산을 하느라 온전히 따르지 못합니다. 불을 향해 달려가는 소방대원처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십니다”(교부 사르마타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해야 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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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황당과 당황’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황당은 그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7년 여름에 저는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드다빈치 공항에서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 수속을 하였습니다. 창구의 직원은 저의 여권을 한참 보더니 벨을 눌렀습니다. 곧 보안요원이 왔고,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인종차별에 가까운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비행기 시간을 변경해야 했고, 토론토에서 동창신부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그것도 취소되었습니다. 토론토 도착시간이 밤 12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당시 수배중인 사람과 저의 인상착의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무사히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더 오래 전의 일도 있습니다. 1993년의 기억입니다. 동창 모임이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에서 있었습니다. 다들 모였는데 한 친구가 밤이 늦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을 때입니다. 친구는 진부령과 진부를 혼돈했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오대산에 있는 진부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결국 다음 날, 친구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래도 하루 늦었지만 별 탈 없이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당황은 그 원인이 본인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9년 7월입니다. 저는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렸는데 그만 지갑을 놓고 내렸습니다. 지갑에는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신용카드, 현금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권은 따로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한국에 전화해서 신용카드를 정지시켰고, 운전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은 새로 만들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는 남은 일정 얻어먹으면서 다녔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웃을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고, 드디어 성지순례를 시작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2003년의 기억입니다. 자매님은 미국비자가 있는 구여권을 가져왔습니다. 구여권은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새로 발급받는 여권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집이 수원이었던 자매님은 부득이하게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와야 했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그래도 순례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나의 부주의와 나의 착각으로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작이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나름 부푼 꿈을 가지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화려한 궁궐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축복하는 집에서 태어나기를 기대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동물이 머무는 구유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그 시작부터 ‘난민’이 되었습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난민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고식치고는 무척이나 황당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다.” 확실히 세상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황하셨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는 표징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표징은 그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십자가 없는 부활을 얻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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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병든 이에게는 필요합니다. 아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신 부분도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더욱 많은 사람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들의 회개, 하늘나라로의 귀속은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했기 때문입니다.
집단 우월주의, 이것은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월하고 더 바르고 더 선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대상도 자신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이 집단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싫어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드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모두 하느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가요. 이곳에는 집단 우월주의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있습니다. 우리만이 선하고, 우리만을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느님의 것을 사람이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병자입니다. 주님이라는 의사를 만나는 병자입니다. 우리는 그저 죄인입니다. 회개로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이런 겸손이 우리를 천상의 행복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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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백의 발전
작년 여름 어느 날
손님이 오셨습니다.
차를 한잔내려고
사무실 옆 탕비실로 들어갔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딸기 맛과 청포도 맛 티백이 있었습니다.
차는 뜨거운 물을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
티백을 담은 컵에 뜨거운 물을 넣으려는데
신부님! 그 티백은 찬물용입니다.
직원분이 알려주었습니다.
찬물에 우러나는 티백이라….
정말 금방 우러납니다.
정말 맛나게 우러납니다.
색도 예쁘게 우러납니다.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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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라”
-더불어(together) 주님을 따름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주님,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에는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3)
어제 수도형제들을 위한 금요강론중 마지막 한 구절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정주생활의 은총을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자신과 함께 편안히 머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다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To be at home with oneself is indispensable for finding one’s identity)
제자리에서 제대로 참나의 삶을 살 때 평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이 또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자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도 읽어보는 2월17일자 다산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이 새로운 감동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참 구도자의 향기를 느낍니다.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며 나를 찾았다.’”
외롭고 고독한 중에도 한결같이 정진하는,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다산의 준열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전해져 옵니다.
“군자의 도에서 어느 것을 먼저 전하거나 미뤄두겠는가? 처음이 있고 마침이 있는 것은 오직 성인뿐이다.”
늘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하루 영원을 살았던 참된 구도자 공자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어제 받은 카톡 메시지 두 편도 소개합니다. 곳곳에서 주님을 찾는 ‘주님의 향기’같은 분들을 만나는 느낌입니다.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드립니다. 아침엔 강론 말씀으로 배부르고 잠자리에서선 ‘둥근마음 둥근삶’으로 배불러 너무 행복해서 가슴뛰는 이런 단식은 안해도 되겠죠. 아부지 감사드립니다. 모자라기 짝이 없는 이 죄인을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찬미와 영광을 영원히 홀로 받으소서. 아멘.”
아버지란 표현보다 아부지란 표현이 더 정답게 느껴집니다. 온갖 어려움중에도 한결같이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어느 자매의 메시지도 잔잔한 감동입니다.
“수도자의 삶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잠깐의 나태함도 허용안되는 부단한 노력과 공부! 저희들을 한결같이 이끌어 주시고 일깨워주시는 신부님, 사랑합니다!”
저에겐 제 강론을 나누는 모든 분들이 더불어 주님을 찾는 구도자이자 도반들입니다. 이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또 저에게 날마다 감동을 선사하는 살아 있는 성인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늘 봐도 미소띤 한결같은 표정에 날마다 끊임없이 많은 분들을 만나며 주시는 메시지도 살아 있는 말씀들입니다. 우리나이 89세의 고령에도 어쩌면 한결같은 열정의 삶인지 참 경이(驚異)롭고 저에게는 살아있는 멘토가 됩니다. 어제는 교황청을 찾은 신학교 사제들을 향한 말씀중 일부가 저에겐 참신했습니다.
“교회는 진보중에 있는 하나의 활동이다. 성령의 새로움에 늘 열려있는, 자신과 자기자신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극복해내며, 끊임없는 움직임중에 머무르는 교회는 무엇보다 열려있는 구성체이다.”
이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닮은 우리 깨어 있는 신자들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사야서 제1독서 말씀도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살아 있는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복음의 세리 레위는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갈망의 구도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이런 레위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뿐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하나를 위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가 아닌 “나를 따라라!” 명하십니다. 날마다 새롭게 레위와 함께, 도반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오르는 우리들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항구하고 한결같이 더불어 따름의 여정을 살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혼자 외롭게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레위를 제자공동체, 식사공동체에 합류시키셨듯이 우리를 교회공동체에 합류시키셨습니다.
외로운 혼자가 아니라 도반들과의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레위가, 우리가 제자공동체에, 교회공동체에 불림받지 않았다면 레위의 삶은, 우리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역시 부질없는 상상입니다. 우연이 아닌 주님의 섭리로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여기까지 주님 친히 인도해준 우리 하나하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통해 ‘치유받은 병자’, ‘회개한 죄인’으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죄라기 보다는 병임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모두가 죄인이요 병자들 같습니다. 이런 자각이 참된 겸손에로 이끌고 구원의 주님을 더욱 갈망하게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자 치유요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따름의 여정과 회개의 여정, 치유의 여정은 동시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도 깊이 들여다보면 무지의 병임을 깨닫습니다. 아, 무지의 병을 치유해 주실 유일한 분은 천하의 명의(名醫)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평생교육, 평생힐링에, 불치병 같은 무지의 병의 치유에 주님의 매일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얼마나 신바람 나는지요! 사랑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회개한 영혼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놀랍습니다.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아까워 전반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제의 참된 단식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새삼 참된 회개가 없어 병들도 많은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치유와 겸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의 빛입니다. 따름의 여정과 함께 무지의 어둠도 서서히 걷혀갑니다. 날마다 주님의 샘터이자 쉼터이자 배움터인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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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세리 레위를 부르시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돈 욕심이 사납고,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습니다. 세리란 본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죄업에 붙잡혀 아무 희망도 없던 그가, 우리 모두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1티모 1,15)라는, 더없이 지혜로운 바오로 사도의 말은 옳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하느님의 외아들 말씀께서 악마의 소생을 어떻게 당신께로 데려오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창조의 말씀 내지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더 깊이 탐구하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이런 물음을 던진다: 창조의 행위를 하는 창조주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런 다음 그는 위-디오니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포레타의 길버트를 위시한 수많은 신학자가 한 것처럼 신성 이해의 신학적인 구별을 요청한다. 그것은 하느님과 신성의 구별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하느님과 신성은 하늘파 땅만큼 다르다. 하느님은 땅에서 움직이고, 신성은 하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신성은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행위라는 게 없다. 반면에 하느님은 움직인다. 이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를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이 된다. 하느님은 피조물파 관계를 가지지만, 신성은 그렇지 않다. 창조주 하느님은 사물을 창조하느라 분주하지만, 처음이자 끝인 신성 하느님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자신이 만물의 시작이 되는 곳에서는 쉬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이 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곳에서 쉰다."(122)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슬람교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예언지적 종교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깊은 친근 관계가 있다. 그들은 모두 아브라함 종교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세계적 보편 종교들인 것이다. 그러나 서로 통하는 점만큼이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거기에서 나온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예수가 단순히 예언자들 중 한 분이 아니며, 그분 안에서 ‘궁극적 계시' 가 드러났다고 본다. 따라서 예수는 인간으로서 예언자이면서도 신성이 몸을 이뤄 그 안에 임한 ‘신인적 예수'(Jesus as God-Man)로 존립한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그 점을 부인힘으로써 그리스도교와 첨예하게 대별되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와 같이 ‘알라는 창조주, 전능자, 무소부재자, 자비로운 자, 의로우신 심핀자, 만물의 섭리가, 그리고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분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그리스도교 교부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고백하였듯이, <꾸란>은 알라가 인간의 목에 있는 혈관보다 더 인간에게 가까이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님 외에 누가 하나님이십니까무(시편 18 : 31 ) 당신은 지극히 높으시고 선하시며,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의로우시며, 지극히 은밀히 계시면서도 가장 가까이 현존히시며 , 지극히 아름다우시면서도 지극히 강히시며 , 항상 계시되 어디에 의존하지 않으시며, 스스로는 변화하지 않으시되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며, 새롭게 되거나 옛 것으로 돌아가지 않으시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교만한 자들을 노쇠하게 하시니 그들은 이것을 일지 못합니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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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하느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하느님께 옵니다.
아니 요즘의 모습을 보면
하느님이 필요해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닌 경우도 보게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보다는 사람이 필요해서
하느님을 찾아옵니다.
이유기 무엇이든 하느님을 찾아온다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하느님이 필요해서 찾아왔는지는
마지막에 가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찾아와서
원하는 사람을 만났거나
아니면 만날 희망이 없으면
그는 하느님 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즉 하느님이 필요해서 하느님을 찾아온 사람만
하느님 곁에 머무릅니다.
레위가 베푼 잔치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앉아있습니다.
그곳에는 세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사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식탁에는
누구든 와서 앉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초대받았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옆 사람을 자신의 동반자로 보지
세리나 죄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원해서 하느님을 찾아왔는데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종종 실망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공동체인지
반문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의 눈을 가려
하느님을 보기 어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를 떠나고 싶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순간 느끼는 어려움이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이유입니다.
그 상황에 머무르면서
조금 더 하느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 잔치의 기쁨을
우리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옆에 누가 있어도
내가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이 크게 어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아서
그 잔칫상에 앉아 있음을 기억하고
하느님과 함께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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