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프랜시스 베이컨(1561년~1626년)
영국 경험론의 시조이며,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 철학의 개척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으로 1617년에 대법관이 되었다. 그러나 공직에서 물러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실험을 하다가 부작용으로 65세에 사망했다. 그는 과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방법론(귀납법)을 주장하여 과학자로 취급한다.
실험에 기초한 귀납법적 연구 방법을 주장했다. 경험과 관찰을 중히 여기는 경험론을 주장하였다. 귀납법이 가장 바른 학문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과거에 계속하여 일어났던 일은 미래에도 그렇게 일어난다. 이러한 사유 방법은 자연과학 연구에 토대가 되었다.
가설을 관찰하고 실험하는 방법으로 결과를 이끌어 내고, 다시 실제의 경험과 비교하여 가설을 정당화 한다.
철학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만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베이컨은 과학의 모든 부분, 특히 자연 과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한 그의 유명한 말은 그의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귀납법 — 개개의 것을 조사하여 공통점을 찾아내서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4) *르네 데카르트(1596년 – 1650년)
프랑스의 철학자로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저서 1638년에 방법서설을 발표하면서 계몽사상을 이끌어 냈다.
‘방법 서설’은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 몽테뉴가 교양의 길로서, 자기 성찰을 다룬 방면에 데카르트는 획일성의 탐구이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범과 질서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야 했다. 데카르트는 우주가 움직이는 원리를 성경이 아닌 수학에서 찾았다.
지방 소도시의 법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부만 하는 샌님이 아니다. 네델란드에서 머물던 그는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로 가서 자원하여 참전했다. 1620년 제대하고 프랑스에 귀환, 1626년부터 파리에서 수학·자연 과학, 특히 광학을 연구하였다.
이때 영국에서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나오면서 데카르트는 관념론자로 서양의 양대 철학의 기초를 세웠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의심에서 시작한다.
데카르트적 의심은 자신이 믿는 바의 진실성 여부에 체계적인 방법으로 의심한다. 절대적인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믿음을 의심함으로 서양 철학을 대중화하였다. 합리주의 이다.
계몽운동 이후로, 합리론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에서와 같이 수학적인 방법을 철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합리주의는 경험주의와 자주 대조된다.
이 말을 코키토 명제라고 한다. 생각하는 것은 ‘나’이다.
《방법서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1637년에 쓴 철학서이다. 책의 완전한 제목은 《이성을 올바르게 이끌어, 여러 가지 학문에서 진리를 구하기 위한 방법의 서설 이다. 줄여서 방법서설ㅇ라 한다. 이 저서는 무엇보다도 '방법의 이야기'이다. 방법은 ‘성찰’이다.
‘방법 서설’은 에세이 류의 책이므로, 오늘의 철학책과는 많이 다르다. 인간의 복리를 도모하는 책이라 했고, 삶에 유용한 여러 가지 지식이라고 했다. 데카르트의 ‘인간이 생각함으로’ 신의 입장에서 보았던 세계관을 인간 중심으로 바꾸었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되려면 기계학과 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이성은 수학적 명징성을 요구함으로, 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학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글로 유명하다.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초의 철학서적이다.
"양식(良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다.…바르게 판단하고, 참을 거짓과 구별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양식 또는 이성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며 사람에게 평등하다."
성찰의 방법은 ‘의심’에서 시작한다.(팡세 pensees -‘사유한다’는 뜻). (*제3성찰이 제일 중요하며, 신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정신)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이 능력을 잘 활용하여(과학적, 논리적 방법으로) 학문을 탐구함으로 진리로 나아갈 수 있다.
==>이성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믿었는데, 1차,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성이 사리지는 경험을 함으로 이것도 해답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파스칼은 "그의 철학에서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는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인간의 사유로(방법서설의 방법)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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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종교전쟁)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30년 전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립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전제군주정과 봉건 제도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이 국가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제후국 및 반대하는 제후국 간의 다툼이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각국의 이해 관계가 교차하는 근대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참전 국가들은 수많은 용병을 고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수록 종교적 색채는 옅어지고 유럽의 정치적 구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세력 구도가 종교가 아닌, 국가 간의 대립으로 바뀌게 된다.
전쟁은 새로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영토에서 반종교개혁을 시행했다. 로마 가톨릭을 그의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종교 선택의 권리가 위반되자 분노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반대했다.
(이때 독일 지역은 영주가 종교를 선택하면, 주민은 영주의 종교를 무조건 따라야 했다.
이것이 전쟁의 불씨를 더 크게 키웠다.0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던 개신교 국가 보헤미아 왕국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덴마크의 패배 이후 이를 대신해 스웨덴 제국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도 1630년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계속 포위당하고 있던 로마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도 스웨덴 제국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1635년부터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다.
30년 전쟁은 독일 전역을 기근과 질병으로 파괴했다. 특히 보헤미아 왕국과 남부 네덜란드 및 독일과 이탈리아에 위치한 국가들의 인구가 급감했다. 용병과 병사들 모두 기여금을 받기 위해 공헌을 위장하거나 마을을 약탈했으며 점령당한 영토 거주민들의 생활고는 심해졌다. 전국 대부분은 파산 위기에 몰렸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신흥 강대국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을 공인받은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스웨덴 제국도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17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복잡한 전쟁 양상을 띄우면서 이리 싸우고, 저리 싸우는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하여간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오늘의 유럽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 이 전쟁으로 영국, 프랑스가 떠오르고, 신성로마제국(독일)은 시들해졌다.
독일은 30년 전쟁의 전쟁터가 되면서 역사적으로 큰 상처를 안게 되었다.
***미국 국민에서 독일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높다. 이와 같은 혼란으로 독일의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