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34
10월5일[연중 제2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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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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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LJnHSKglvI?si=cE5Mt3krqVAfMepJ
[서울대교구 송정섭 시몬 신부님 집전(사회교정사목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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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과분하게도 예수님으로부터 지명받은 사람들입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은 12 사도뿐이 아니었음을 루카 복음사가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12 사도를 선발하신 예수님께서는 72명의 제자를 다시 지명하셨습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군중, 그리고 예수님께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제한적인 딱 3년, 복음선포를 기다리는 지역은 한도 끝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더 많은 제자들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탁월한 능력을 봤을 때, 아버지께서 주신 과업 혼자서도 충분히 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위대한 인류 구원 사업, 복음선포 사업에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2+72=84명입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였습니다. 그 외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한 여제자들, 뿐만아니라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선 추종자들로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수많은 남녀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함께 움직이며 합심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광경은 정말이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지명’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따지고 보니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저이지만, 저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지명받은 존재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과분하게도 예수님으로부터 지명받은 사람들입니다.
지명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입니다. 지명받기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눈여겨보셨습니다.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셨고, 우리를 선택하셨고, 마침내 우리를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가까이 부르신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우리를 당신 가까이 부르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지명되고, 부르심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지명되고 부르심 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몇 가지 행동 지침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복음선포에 전념하라는 당부입니다. 복음선포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재물이나 사람 등등 유혹 거리들을 과감하게 떨쳐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어디를 가든지 복음 선포자로서 평화의 전도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선포 과정에서 반드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고, 노골적인 적대자들도 만날 것입니다.
고통과 상처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쭉 직진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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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라져버린 지옥 교리>
박보영 목사의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에서 그가 지옥에 갔었다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갔던 지옥은 뱀과 같은 벌레들이 몸의 구멍이란 구멍으로 다 들어가고 몸을 파먹는 곳이라고 합니다. 어둠과 비명, 불의 뜨거움과 미움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지옥입니다.
‘목으로 뱀이 들어차면 숨 막혀 죽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목사님은 강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구멍으로 그런 벌레들이 들어가서 숨이 막혀서 죽어요. 그런데 다시 살아납니다. 죽었다 또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영원히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신데 인간을 만들어놓고 그런 영원한 고통 속에 버려두실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위해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선별해서 파견하십니다. 사실 복음 선포는 특별히 선택된 제자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 소명으로 파견 받습니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으면 실제적으로는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지옥이 없다는 믿음을 전파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번은 신학생 고학년 40여명 정도에게 지옥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40명 중에 몇 명 들었을까요? 단 한 명도 들지 않았습니다. 분명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겠지만 당당하게 그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분위기인 것입니다.
또 한 번은 40여명의 수녀님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역시 수녀님들 중에서도 단 한 명만이 눈치를 보며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실 때 과연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저는 ‘왜 믿음이 없겠어.’라고 생각했지만, 보는 현실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입니다.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지옥이 없을 수도 있겠다.’라고 믿는 사람이 복음을 선포하면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복음은 우리가 다 지옥가야 했는데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 사람이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는 것밖에 안 됩니다. 설령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냥 막연한 것입니다. 지옥에 가도 영원히 삽니다. 죽지 않습니다. 귀신으로 살아도 영원히 삽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지옥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이 없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적그리스도이고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만약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를 구해주었더니, “내가 안 죽을 것을 모르셨어요?”라고 한다면 그 구해준 사람 마음은 어떨까요?
인간을 구해주시기 위해 이 세상 죄의 시궁창에 뛰어들고 십자가까지 지신 그리스도께서 “어차피 우리는 지옥에 안 가는데, 왜 그 고생을 하셨어요?”라는 말을 들으신다면 마음이 어떠하실까요?
그래서 ‘지옥이 없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기에 지옥에 가게 만드는 믿음인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수많은 고문을 참아내고 목숨까지 내어던진 순교자들은 왜 그 고생을 했던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다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하게 될 것임을 마지막으로 전하라는 뜻입니다. 끝까지 전해야하는 복음의 내용이 지옥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살면서 단 한 명에게라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는 사랑의 소명을 실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 없이 살아간다면 아직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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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키나와’는 가보지는 않았지만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이 사는 섬이라고 합니다. ‘사르데나’도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이 사는 섬이라고 합니다. 오키나와에 사는 어르신들은 모두 ‘이키가이’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정체성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가치입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입력하면 정확하게 길을 안내합니다. 마찬가지로 ‘이키가이’가 있는 사람은 삶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10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균형 잡힌 식단, 적당한 운동, 긍정적인 생각도 100세 이상 노인이 많은 이유가 된다고 합니다. 사르데나는 마을에 높은 경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사를 매일 오르내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된다고 합니다.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지만 사르데나에는 ‘요양원’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은 80세가 넘으면 50% 이상이 요양원엘 간다고 합니다. 가족이 돌볼 여유도 없고, 그만큼 몸이 허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르데나에는 요양원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공동체는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노인들과 대화하고, 아프면 찾아가서 돌봐준다고 합니다. 노인들의 경험과 연륜을 듣는 것이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요양원에서 말년을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것보다 공동체와 함께 말년을 감사하며, 기쁘게 지내는 것이 100세 노인들에게는 행복입니다.
동창신부님이 ‘황금전설’이라는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저자를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1993년 11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상임이사 겸 부소장으로 일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한국가톨릭대사전』(전12권)의 편찬 책임을 맡았으며, 상당수의 연구서와 역사 관련 화보집을 발간하였다. 2005년 12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절두산 순교성지(서울 마포구 합정동 소재)의 주임 신부를 겸임하면서, 박물관의 수장고 설치 및 전시 시설 보완을 통해 2009년부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의 초대 관장을 지냈다. 2013년 2월부터 시흥4동 성당 주임 신부를, 2019년 2월부터 현재 우면동 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역서로는 『옥스퍼드 교황사전』(존 노먼 데이비슨·켈리 마이클 윌시 지음, 분도출판사, 2014), 『르네상스 미술로 읽는 상징과 표징』(조지 퍼거슨 지음, 일파소, 2019)이 있다.”
저는 신부님이 이런 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신부님은 모든 과목의 수업을 정성껏 필사하였습니다. 시험 때가 되면 많은 신학생들이 신부님의 방을 찾았습니다. 신부님이 필사한 노트를 복사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의 정성과 노력이 깃들인 노트를 기꺼이 친구들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과 같은 방을 쓴 적도 있고, 1986년 1월 30일에 같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의 노트필기 습관을 꾸준히 이어서 신앙인들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을 번역한 신부님께 존경과 찬사를 드립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이키가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이키가이는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편찬하고,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는 그들의 ‘이키가이’를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키가이’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맡겨진 ‘이키가이’를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인생을 오래 사는 것도 기쁨이지만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상에서의 100살이 아니라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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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12: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심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 외에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모든 곳으로 보내셨다. 그러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하신다. 양들은 이리 떼의 먹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째서 양들과 같은 사도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 평화밖에 모르는 양들이 어떻게 잔인한 맹수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목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모든 악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만 의탁하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바삐 다녀야 한다. 그들이 생필품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었느냐 벗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살아가는 일을 모두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셨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라고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이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복음선포의 직무를 서둘러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인정에 끌린 행위가 거룩한 임무를 방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5절) 우리는 방문을 하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한다. 좋은 습관이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빌어준 평화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복음 전파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전하는 사람에게 더 유익하다. 평화가 전달되면 그 사람과 우리에게 다 유익한 일이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4)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시겠다고 한다. 이 응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2절) 라고 하신다. 나는 이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할 것인가? 깊이 묵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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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루카 10,1-2ㄱ)
당시 사람들은 세계의 민족을 일흔두 민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다는 말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셨음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라는 말은, 열두 사도가 아닌 제자라는 뜻인데, 열두 사도가 아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사도들이 하는 일과 거의 같고, 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의 같습니다.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라고 그 제자들을 미리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제자들의 활동은 곧 주님의 활동이며, 제자들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가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서로 증인이 되어 주라는 뜻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ㄴㄷ)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회개하고 믿는 사람이 적다.”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회개와 구원으로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일꾼인 신앙인’과 ‘일꾼이 아닌 신앙인’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꾼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교활동은 ‘잃은 양’을 되찾는 활동이고, ‘잃은 자녀’를 되찾는 활동이고, 하느님의 일꾼을 모집하는 활동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은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의 도움을 잘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기도부터 해야 하는 일이고,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은 사람이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3-8)
선교활동은 신앙을 증언하는 활동이고, 사람들을 ‘신앙의 삶’으로 초대하는 활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 자신이 ‘자신의 삶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삶으로 하는 선교활동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은, 하느님만 믿으라는 뜻인데,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만 믿는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만일에 돈 걱정이나 하고, 궁핍한 상황을 못 견뎌 하는 모습이나 보인다면, 그런 모습으로는 복음을 선포할 수도 없고, 사람들을 신앙으로 초대할 수도 없습니다. 돈 걱정이나 하는 사람이 선포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이리 떼 가운데에 있어도 ‘양’의 모습을 잃으면 안 됩니다. 즉 ‘겸손’과 ‘온유’와 ‘자비’를 잃으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 신앙인은 이리 떼 가운데에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참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속의 헛된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는 사람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교활동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인사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활동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늘 보살펴 주시고 지켜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라는 말씀은, “주는 대로 먹어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일꾼을) 먹이시려고 천사를 보내실 수도 있고, 천사 같은 사람을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신앙인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주는 대로 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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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따름’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면,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는 ‘파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제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다음 제자들을 파견하시어 당신께서 걸어가실 길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파견되어야 하는 이유는 ‘수확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기’ 때문입니다.(10,2-3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할 것을 요청하시며,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제자들은 파견됩니다. 선교의 결과를 농작물의 추수 개념을 빌려 설명하는 방식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마태 9,37-38; 요한 4,36-38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서 9장 1-6절에서 열두 제자들을 보내시며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셨고, 추가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유일하게 루카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파견에 대한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의 파견과 복음 선포 임무가 열두 제자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일흔두 명의 제자 파견과 더불어 제자들이 파견되는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루카 복음서 저자가 여기에서 유다를 넘어 모든 민족들을 향한 선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도 복음 선포의 사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합니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 시대의 과제일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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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가장 먼저 말하라고 가르쳐 주신 축복의 인사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제자입니다.
주님의 참다운 제자란 온 세상에 파견된 사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참평화의 전달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모든 제자에게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 하십니다.
세상의 것에 신경 쓰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기에,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고 그 밖의 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할 일은 세상 사람들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축복을 전하고, 아픈 이를 낫게 하며 구원의 날이 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실지로 우리는 많은 시간을 세상의 것에 신경 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고 신경 쓰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생각이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입니다. 또는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근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자주 주님께 기도합니까? 잠깐이라도 세상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소통하는 시간을 마련한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평화가 깨어지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참평화를 이웃에게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 집중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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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다. "가거라.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파견되어 가야할 곳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많은 사나운 것들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하셨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양들을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 보내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는 것일까? 양들이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에서 살아남을 무기는 물질적인 돈 주머니나 여행 보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무기인가? 그것은 제자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이 그 무기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필요한 무기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에게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세상의 돈 주머니나 여행 보따리에 의존해 가지고서는 절대로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며 그것들에게서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것들에 의해 먹히고 갇히고 힘을 빼앗길 것이다.
복음을 전하려면 그런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어디를 가나 먹을 수 있는 보따리 즉 예수님을 가지고 가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건물을 짓고 좋은 차를 가져야 하고 경제적으로 보장이 되어야 하고 안전한 거처지를 마련해야 하고 최신식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어야 한다.
즉 복음은 어떤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복음화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무리 좋은 매체를 가지고 있고 좋은 시설을 갖춘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어있다면 그 사람이 어디에 가나 또 어느 도구를 사용하든 모든 것은 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복음은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달려 있고 그 사람이 사나운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위험한 장소에 파견되었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어 있으면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우리의 가장 큰 취약점은 복음을 전하는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복음화된 복음의 사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경씨의 "미래에서 온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병'이라는 메타포를 써서 표현하자면 '중독'과 '에이즈'의 세상이야. 이 지구화 과정을 일으키는 초국적 자본주의는 'BM2'로 인간 세상을 망치고 있지. 'BM2'는 이모가 만들어낸 Buiness, Money, Many, 즉 B.M.M 의 약자야.
세상을 큰 시장터로 만들고 온 땅을 비즈니스 게임터로 만드는 초국적 자본주의는 우리를 정신 없이 바쁜 사람들로 만들어 가고 있어. 모두 "바쁘다, 바뻐" 하고 아우성을 치지. 너무 바빠 자신과 가족, 이웃을 돌볼 시간이 없는, 정신 없고 분열된 개인을 만드는 것이 이 자본주의의 음모야. 정신 없는 인간을 지배하기는 참 쉬운 거니까.
그리고 이 정신 없는 개인들이 숭배하게끔 하는 신은 돈이지.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파하며 "돈교"에 입교시키는 거야. 그리고 뭐든지 많이많이 무한정 불려 나가야 해. 생산도 늘리고, 섹스도 더 진하게 많이 해야 하고, 차도 더 빨리 몰아야 하고, 뭐든지 더 많이, 더 진하게, 더 빨리 해지 않으면 실패고 퇴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중독의 과정이지. 중독된 사람은 그 중독을 야기시킨 대상 없이는 살 수 없게 돼. 그리고 중독의 정도를 더욱 더 심화시키다가 죽음까지 몰아가는 거야. '무엇 없이는 살 수 없다.' 라고 느낄 때, 우리는 이미 중독에 들어가 있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메타포를 들자면, 그것은 '에이즈'야. 에이즈란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지. 우리의 면역체계는 몸 안에 균이 들어왔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세포가 아니라는 걸 발견하고 백혈구를 동원시켜 죽이게 되어 있어. 그렇게 해서 몸의 온전성을 지켜갈 수 있지.
그런데 에이즈에 걸리면, 다른 균이 들어와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세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낼 능력이 없어져 버려. 때문에 무엇이 들어오든 상태가 되고 결국은 이물질 세포에 잡아먹혀 죽게 되는 거지.
이것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거짓자아'가 '참자아'를 잡아먹는 병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고도로 이름답게 포장된 거짓자아들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지. 대중매체의 광고들은 많은 경우 이 거짓자아 바이러스로 현혹시키고 있어. 이걸 먹으면, 이걸 바르면, 이걸 입으면, 이걸 타면....이런 식의 미사여구로 말이야. 이걸 쫓아가다 보면 참자아를 찾기는커녕 잡아먹히게 되는 거지.
이 문화적인 중독과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치료하는 기도와 명상법은 , 중단하기, 숨쉬기, 깊이 들여다보기야. 그래서 시커들은 도시를 떠나 숲으로 가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동굴에 숨는 거야.
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람의 수레바퀴에서 잠시 내리는 거지. 그리고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신의 목소리를 듣고, 존재로 충만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거야.
우선은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는 거야.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네 존재가 잔잔해질 때까지. 그런 다음 그 잔잔해진 영혼의 수면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바라보는 거지. 이것을 생활화하면 진짜 너의 삶을 살 수 있어.
이 가능성으로 임신한 침묵의 시간이 없다면, 그 홀로 있음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위대한 창조도, 진정한 친밀함도 얻을 수 없어. 어떠한 큰 슬픔이나 고통도, 분노나 외로움도, 그리고 의미 없음도 기도와 명상에 의해 치유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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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 이어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복음 전파의 전형적인 가르침을 봅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주님께 지명을 받고 파견됩니다. 곧 복음 전파는 부르심이고 소명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실 곳에 먼저 파견되어, 주님의 오심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 하십니다. 곧 복음 전파의 주인은 파견되는 제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파견된 제자들은 복음 전파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복음을 전파하려면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진 것 같은 거부와 적대감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와 자기 소명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여행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물품마저 지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넷째로, 제자들은 사람들의 집에 직접 찾아가야 하며, 그 집에 평화를 빌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평화는 인사이면서, 동시에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다섯째로, 제자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찾아 집을 옮겨 다닐 것이 아니라, 같은 곳에 머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런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배척한 것이기에, 소돔보다 더 심한 단죄를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긴박하기만 합니다.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실천하며, 그 복음을 간직하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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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 아침기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더 귀한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유다인들은 이 지역이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감사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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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신용 정보 회사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에는 실패의 벽이 있습니다. 그곳의 안내문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실패한 순간을 자세히 기록하세요.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쓰세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적고 사인하세요.”
이 방식을 따른 사람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실패에 대해 고백하지 않은 사람은 큰 좌절과 절망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삶에 실패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패는 있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태어나면서 계속 실패를 경험했던 우리입니다. 아기가 처음 걸음마를 시작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넘어졌습니까?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실패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이 순간을 한 단계 자기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인간 세상의 눈으로는 실패로 보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이 순간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이 실패했다고 단정했습니다. 악에 패해서 이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로 보이는 수난과 죽음이 그냥 단순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어져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실패를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실패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로 보이는 삶 안에서도 예수님 사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른 일흔두 제자도 파견하십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위로와 평화를 전하라고 세상에 파견됩니다. 분명 중요한 파견입니다. 또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시면서 걱정도 가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가난과 검소한 삶을 강조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세상의 것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서 이 전교 여행이 실패로 끝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외침처럼,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 나라는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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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님처럼>
루카 10,1-12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나의 님처럼>
나의 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그 모든 곳으로
당신 앞서
보잘것없는 나를
기꺼이 보내시니
내가
있는 곳
그 어디에서든
나는
그저 내가 아니라
나의 님이 되어야 하리니
오직
나의 님처럼
따뜻하게 품고
오직
나의 님처럼
부드럽게 어르고
오직
나의 님처럼
아낌없이 나누고
오직
나의 님처럼
오롯하게 함께하고
오직
나의 님처럼
끝까지 살리고
그리하여
나는 사라지고
나의 님은 계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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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파견되는 내용으로서 루카 복음에만 있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왜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 파견 얘기 말고도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를 굳이 덧붙이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흔두 제자를 주님께서 더 파견하신 걸까요?
아니면 루카 복음사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어낸 얘기일까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의미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이방인 선교를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고, 마태오복음은 특히 더 유대인 선교만 생각했기에 열두 사도 파견 얘기만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만을 찾아가라는 얘기까지 하지요.
이에 비해 루카 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이기에 열두 사도 말고도 이방인을 위한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말씀을 다른 두 복음과 달리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는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로, 일흔두 제자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생각한 것일 겁니다.
그렇지요. 유대인만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화되고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유대인들만 복음화하는 것은 실제 주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루카의 생각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가거라”라고 하신 것은 가까이서부터 멀리까지, 내 가정부터 가까이는 이웃에게 멀리는 세상 끝까지 가라는 명령이고, 일흔두 제자에게뿐 아니라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입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데 그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이긴 합니까? 명령이고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하는데, 명령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아무리 주님 명령일지라도 나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버티지는 않습니까?
어쨌거나 가라는 명령 앞에서 나는 어떤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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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말씀의 전례 교회 공동체>
-친교와 파견-
어제 제 영명축일에는 참 많은 분들로부터 카톡을 통해 축하 메시지를 받고 즉시 감사와 축복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또 새벽 멀리 네팔에서 8월초부터 3개월쯤 머물고 있는 자매로부터 반가운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거의 10여년 이상을 매일 제 강론을 수백분에게 발송해주는 복음 선포의 일꾼입니다. 자매님의 시종여일 한결같은 삶에 주님의 축복을 비는 마음입니다.
“신부님, 영명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곁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시는 신부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저는 네팔 포카라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내면서 행복해 합니다. 신부님이 이른 새벽에 저희들을 위하여 묵상글을 준비하시는 것을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어제에 이어 답신 내용은 동일했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수님 성심상을 배경으로 서서 찍은 제 사진에다 축복기도 바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정성 가득 담아 보낸 대동소이한 메시지입니다. 위 네팔의 자매에게는 다음과 같은 답글을 보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여전히 언제 어디에서나 말씀의 봉사자로 최선을 다하시네요. 수도원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신부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러고 보니 세상 신자분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는 제 강론글들을 통해 예수님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 공동체가 형성됨을 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생명의 말씀을 섭취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보이지 않는 교회 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이는 가시적 교회 전례 공동체에 참여할 때 비로소 온전한 신앙생활이겠습니다.
전례중의 전례가 미사전례와 시편 시간경 전례입니다. 이 두 공동전례가 교회 수도공동체를 이루어줍니다. 수도원 피정온 분들이나 방문한 분들도 전례기도에 함께 참여함으로 주님 중심의 전례 공동체에 속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전례기도의 은총으로 주님 중심의 온전한 일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그 회당전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에 벅차 거행하는 말씀의 전례입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모세의 율법서를 펴자 온 백성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 다음 무릎을 꿇고 주님께 경배합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에 벅차 우는 온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참 아름다운 전례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쳐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미사때마다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참 은혜롭겠습니다. 이런 공동전례가 아니곤 어디서 공동체 일치의 은혜로운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전례의 은총과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과 힘입니다. 참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한 광야 인생,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은 이런 전례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온 백성은 선포된 말씀을 알아듣고 함께 먹고 마시며 크게 기뻐했다 합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힘이다.”
라는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공동전례를 통해,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기쁨이 바로 우리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쁨의 힘으로 광야인생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자기만족, 자기폐쇠의 전례 공동체가 아닙니다. 곧이어 파견이 뒤따를 때 온전한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친교와 파견은, 복음 선포자로서의 파견은 공동체 생명의 리듬입니다. 파견의 선교가 없는 교회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당신 제자공동체의 친교의 일치를 위해 나름대로 말씀의 전례를 거행했음이 분명합니다. 마치 주님은 일치의 중심이자 공동체의 총사령관처럼 당신에 앞서 일흔 두명을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마치 당신의 일꾼을, 당신 복음의 전사를 파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꾼이자 주님의 전사로 파견되는 이치는 예나 이제나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여전히 오늘날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전사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나눕니다.
첫째, 예나 이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습니다. 그러니 수확할 세상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니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기에 앞서 나부터 주님의 성실한 일꾼이, 주님의 용감한 전사가 되어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이리떼 세상에 무방비의 양들로 파견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말그대로 자기를 비운 비폭력적 삶의 모습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본질적 무욕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힘이 아닌 존재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파견받은 복음 선포자의 신분입니다. 이리떼 가득한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대책은 없습니다. 참으로 온전히 비울 때 주님의 성령이, 주님의 능력이 빈자리를 채울 것이니 바로 텅빈충만의 기쁨과 행복이요, 주님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의 힘임을 체험할 것입니다.
셋째, 주님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속으로든 겉으로든 진심으로 “평화를 빕니다.” 축복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존재 전체 자체가 주님의 평화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참 좋은 기도는 주님의 평화를 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평화의 선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환대에 감사하면서 번잡하거나 가볍게 처신하지 말고 이런저런 좋은 자리를 찾아 다니는 욕심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주어지는 접대에 자족하면서 일정한 자리에 정주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의 선교사들에게도 참고할 내용입니다. 이런 무욕과 겸손, 분별과 절제, 예의의 선교사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다섯째, 언제 어디에 자리하던 병자를 치유해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죄도 병도 아픔도 많습니다. 대부분 영육으로 치유받고 구원받아야 할 병자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기 전 내 존재 자체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되어 살 때 우리를 만나는 이들은 저절로 치유될 것입니다. 얼마전 하늘병원에 진료차 갔을 때 젊은 착한 간호원 둘이 자발적으로 강복을 청해 주었습니다. 강복을 청하는 그 마음이 하늘나라의 실현이요 동시에 영육의 힐링도 일어날 것입니다.
여섯째,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냉대와 박대로 아니다 싶을 때는 지체없이 단호히, 결연히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충격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무지의 사람들에게 주는 좀 과장된 충격요법의 경고입니다. 참으로 이런 심판은 주님이 아닌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요 재앙임을 봅니다. 이어지는 복음을 보면 파견받는 일흔 두 제자들은그들이 속한 제자공동체의 주님께 돌아가 그 성과를 보고합니다. 새삼 파견자들과 복음 선포자들이 지쳐 고갈된 자신들의 영육을 충전시켜야 할 중심자리이자 정주처, 안식처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임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친교 공동체 안에서는 “당신의 제자”로, 세상에서는 하늘나라의 전사이자 일꾼인 “평화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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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봉사직!>
오늘 복음(루카10,1-12)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봉사직!'
우리는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주님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왕직, 곧 봉사직'입니다. 특히 본당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요즘 본당 안에서 사목자에게 주어진 세 가지의 복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사목회장과 사목위원들 구성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복'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요즘은 예전과 다르게 그리스도의 왕직인 봉사직의 일꾼들을 정하는 것이 어렵고, 이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부르십니다. 이는 내가 능력이 뛰어나고 잘나서 부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봉사직의 첫 번째 조건은 '겸손한 순명'입니다. 나를 하느님 나라 건설의 도구로 부르신 주님의 뜻을 찾고 이 뜻에 순명하려는 자세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나 할 것 없이 동등히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 자신의 뜻을 드러내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봉사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의 뜻을 내어 맡긴 사람들이며,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하느님의 나라 건설의 도구인 봉사자로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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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XFBAz2vm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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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 11)
사람이 사람으로
살게 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기쁘게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장 강력한
구원의 선포입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에게 온
가장 좋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가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끌어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결단과 결심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새로워지는
나라입니다.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통해
예수님같이 우리도
사랑이 됩니다.
사랑으로
가장 생생한
하느님 나라를
일깨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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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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