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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취한말들을위한시간
그런데 며칠 전에 갑자기 대수롭지 않은 일 때문에 문득 이름이 생각났어요.
바람이 불어 방문이 벌컥 열리는 것처럼요.
그래, 태엽 감는 새 님의 진짜 이름은 오카다 도루야, 하고.
*
하지만 태엽 감는 새 님에게 그걸 처음부터 차례차례 설명해가려고 하면,
어찌 된 셈인지 말이 통 나오질 않아요.
눈 내리는 날의 토끼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져버려요.
뭐랄까, 간단한 걸 누구에게 설명한다는 건 어떤 경우에는 전혀 간단한 일이 아니더군요.
이를테면 "코끼리의 코는 아주 길다."는 말도
언제 어디서 그 말을 하는가에 따라 거짓말이 되어버릴 수도 있죠.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글이 잘 써지지 않아 편지지를 몇 장 버린 끝에
조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발견했어요.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에요.
*
나와 구미코의 아버지가 주고 받는 이야기는 항상 이렇게 평행선을 달릴 뿐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은 게 아니다.
우리가 도달한 장소는 결실이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
소년은 확실히 꿈을 곧잘 꾸었고 이따금 현실과 꿈을 혼동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든 태엽 감는 새도,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다만 모두들 어느 틈엔가 어딘가로 사라졌을 뿐이다.
*
육체를 떠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훨씬 더 편해지고 거북한 느낌을 버릴 수 있었다.
나는 잡초가 자란 마당이자, 날 수 없는 새의 석상이자, 말라버린 우물이었다.
여자가 나라는 빈집 속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이제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
만일 이 여자가 그 빈집에서 뭔가를 원하고 있다면 주면 된다.
*
어느 쪽이 현실인지 나는 아직도 잘 분간할 수가 없다.
'여기'라는 말이 내 속에서 조금씩 분열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도 있다.
나에게 있어 그것들은 똑같이 진실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그 기묘한 괴리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
왜 내가 이런 곳에서 샤워를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다.
뭔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
아무튼 움직임은 시작된 거야, 하고 종이봉투를 껴안고 걸어가면서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어쨌든 떨어지지 않도록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장소에.
*
그리고 한 달뒤에 나는 그런 생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거예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곳은 이미 '태엽 감는 새 님의 세계'일 뿐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있는 나는 '태엽 감는 새 님의 세계'에 포함되는 나일 뿐이에요.
어느 틈엔지 그렇게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것이 태엽 감는 새 님 탓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장소를 찾아야만 했죠.
그리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중에 나는 그 장소를 문득 생각해냈어요.
*
그것은 내가 학생 시절에 보았던 몇 편의 '예술영화' 장면들을 연상시켰다.
그런 영화 속에서는 상황 설명이 리얼리티를 손상시키는 악으로 간주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배척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사고방식이자 사물에 대한 견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실제로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꽤 기묘한 일이었다.
*
나의 리얼리티는 나를 놓치고 어딘가 이 부근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듯했다.
나를 잘 찾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
웨이터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나의 리얼리티는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
그녀는 내 질문 따위는 상대도 하지 않고 벽에 걸려 있는 유화를 흥미로운 듯이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시골(일 것으로 여겨지는) 광경을 그린 풍경화였다.
깔끔하게 손질한 소나무가 있고 불그스레한 색깔의 벽이 보이는
농가가 언덕을 따라 몇 채 늘어서 있었다.
커다란 지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 좋은 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착실한 생활을 하는 착실한 사람들일 것이리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느닷없이 양복과 신발, 시계 등을 사주는 걸 받는 일도 없을 테고,
물이 마른 우물을 손에 넣기 위해 거액의 돈을 마련하려고 궁리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그런 정상적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 부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여기서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어느 집 안으로 들어가 술 한잔 대접받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푹 잠들어버리는 것이다.
*
우물 바닥은 깊은 바다 밑바닥과 아주 흡사하다.
그 속에서는 모든 게 압력 때문에 억눌리듯이 원형대로 가만히 머물러 있다.
시간이 지나도 특별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
어둠 속에서는 물론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눈을 감는다.
어떤 어둠속에서든 눈을 감는다는 행위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 깊은 원통형을 한 어둠의 공간에 몸이 익숙해지게 한다.
평소와 같은 냄새가 있고, 같은 공기의 감촉이 있다.
한 번 완전히 메워졌던 우물이지만 그 속의 공기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전과 다름이 없다.
곰팡내가 나고 약간 눅눅하다.
그것은 내가 이 우물 밑바닥에서 처음에 맡았던 것과 똑같은 냄새였다.
거기에는 계절도 없고 시간조차 없다.
*
여자가 입으로 위스키 잔을 가져가 그 액체를 조금 마시고는 내게 뭐라고 말하려고 한다.
침실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저 어렴풋이 그림자가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다. 는 가만히 그것을 기다린다.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
1945년 팔월의 몹시 무더운 어느 날 오후에 한 무리의 병사들에 의해 사살된
호랑이, 표범, 이리, 곰들에 대해 '아카사카 너트메그'는 이야기했다.
기록 필름을 새하얀 스크린에 비추듯이 그녀는 그 사건을 차례대로 이야기했다.
거기에는 털끝만큼의 모호함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실제로 보지 않은 광경이었다.
너트메크는 그때 사세보로 향하는 수송선의 갑판 위에 서 있었고,
거기서 실제로 목격한 것은 미국 해군의 잠수함이었다.
*
그 젊은 병사는 태어난 후 한 번도 동물원에 와본 적이 없었고,
실제로 호랑이를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도 자신들이 지금 여기서 진짜 호랑이를 죽였다는 것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곳으로 이끌려와서,
자신과 관계없는 일을 우연히 해야만 했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동물원이 정말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동물원이었는지
나로서는 왠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요.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이따금 그것이 지나치게 선명한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체 그 선명성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나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마치 미궁에 빠져든 것처럼 말이에요.
당신은 그런 경험을 해본적이 있나요?"
나에게는 없었다.
*
너트메그는 미소 지었다.
"있잖아요, 그건 마치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같은 이야기로군요.
마법의 피리와 마법의 종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성에 포로로 잡혀 있는 공주님을 구해내죠.
난 그 오페라를 굉장히 좋아해요. 몇 번이나 봤어요. 대사도 모조리 외우고 있어요.
'온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새잡이꾼 파파게노가 바로 나지.'"
*
그는 잠시 동안 거기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고 했다.
그는 무릎 위에 얹혀 있는 자신의 두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나서 한 번 더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똑같은 세상이었다.
이렇다 할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확실히 다른 세상일 것이다.
결국 자신은 지금 곰과 호랑이와 표범과 이리가 '말살되어'버린 세상에 속해있는 것이다.
그 동물들은 오늘 아침까지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 오후 네 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병사들에 의해 학살되었고 시체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두 개의 다른 세계사이에는 뭔가 커다란 그리고 결정적인 어긋남 같은 게 있을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그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세상에 평소와 똑같은 세상으로 보였다.
수의사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 그런 무감감이었다.
*
어쩌면 세상이라는 것은 회전문처럼 그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 칸막이의 어디로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단지 발을 내딛는 방식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어떤 칸막이 속에는 호랑이가 있고, 다른 칸막이 속에는 호랑이가 없다.
요컨대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논리적인 연속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라는 것 따위로 실제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과 세상의 어긋남을 잘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
승객 가운데 몇 명은 긴장히 풀리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여러 시간 동안, 또 어떤 사람은 여러 날 동안이나 완전한 허탈 상태에 빠졌다.
그들의 허파나 심장, 척추, 뇌, 자궁 등에 날카롭게 꽂힌 길고 일그러진 악몽의 가시는
언제까지나 거기서 빠지지 않았다.
*
소년이 본 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이미 침대 안에 들어가서 기분 좋은 듯이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말문이 막혀서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만일 나 자신이 이미 이곳에서 자고 있다면, 지금의 나는 어디서 자면 좋을까?
*
나는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또는 오백 번 정도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되풀이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대로 되풀이한 것만은 아니에요.
내가 얘기할 때마다 시나몬은 이야기 속에 있는 조그만 이야기를 알고 싶어했어요.
그 나무에 난 다른 가지에 대해서 알고 싶은한 거죠.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묻는 대로 가지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곳에 있는 이야기를 얘끼했어요.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자꾸만 크게 부풀어갔지요.
그건 말이죠, 우리 두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 신화 같은 것이었어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매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죠.
동물원에 있던 동물들의 이름에 대해서, 그 동물들의 모피의 광택과 눈의 색깔에 대해서,
그곳에 감돌고 있던 여러 가지 다른 냄새에 대해서, 군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 모습에 대해서,
태어나고 자라난 배경에 대해서, 소총이나 탄약의 무게에 대해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의 모양에 대해서....
시나몬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노라면 나에게는 그것들의 색깔이나 모양이 똑똑히 눈에 보였으며,
보인 것을 그대로 말로 시나몬에게 전할 수 있었어요.
나는 그것에 알맞은 정확한 말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거기에는 한계라는 것이 없었죠.
세부는 어디까지나 계속되고, 이야기는 자꾸만 깊어가고 넓어져갔어요.
*
그런데 우연찮게 나쁘지 않은 것도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했어요.
특히 머릿속을 텅 비우고 베이스에 머리카락을 부지런히 심고 있을 때 뜬금없이 그런 것들이 갑자기 되살아나는 거예요.
그래, 그래, 그랬었지.
틀림없이 시간이라는 것은 ABCD 하는 식의 순서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이리 왔다 저리 갔다가 하는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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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년 동안 일의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객을 위해서 '가봉'을 하고, 시나몬은 방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장부를 적고
포르셰를 계속 운전했다. 그곳에는 진전도 없고 후퇴도 없었다.
모두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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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맥락이 결여된 것이 다른 비맥락을 유도해서 여러가지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그 오토바이를 타고 있던 남자친구와 알게 되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잖아요.
내 기억속에서라고 할까, 내 머릿속의 순서로,
'이것은 이러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라는 것이 거기에는 없는 거예요.
땡 해서 문을 열 때마다 내가 전혀 본 기억이 없는 것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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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미지는 텀블러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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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책...마지막 4권째 읽는중인데 스토리 이해는 진즉에 포기.. 그저 저 문장들의 감정선과 하루키의 문체가 좋아 읽고있음...
너무좋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