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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글 | 편집실
불상(佛像, 산스크Buddharūpa 붓다루파)은 부처와 보살의 형상(形象 · 形像)을 가리킨다. 산스크리트어 낱말 붓다루파(Buddharūpa)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 붓다(Buddha · 부처)와 형상을 뜻하는 루파(Rūpa)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깨달은 자의 형상" 또는 "부처의 형상"이다. 원래는 부처의 형상, 즉 부처상만을 뜻하나 지금은 불상이라고 하면 보살의 형상도 포함한다. 한편, 보살의 형상은 보살상(菩薩像)이라고 하여 부처상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인터넷 검색에서 뽑은 글)
불상은 현재 불교의 상징이면서 또한 탑과 더불어 신앙의 중요한 대상중의 하나이다. 원래 붓다 입멸 후에 붓다 사리를 모신 탑을 중심으로 붓다를 추모하고, 기도를 하였다. 하지만 불상이 출현한 후에는 현재는 불상이 탑과 더불어 불교 신앙의 중심 상징물이 되었다.
불상은 사용된 재질에 따라 석불상(石佛像) · 목불상(木佛像) · 주상(鑄像) · 화상(畵像) · 토상(土像)으로 나뉜다. 취하고 있는 자세에 따라 입상(立像) · 반가상(半跏像) · 좌상(坐像) · 와상(臥像)으로 나뉜다.
붓다 사후의 인도 상황
불교는 고타마 붓다의 사후에 주로 모든 도시의 왕후(王侯)와 상공업자의 귀의(歸依)를 받아서 중부 인도를 중심으로 한 동부 인도에 전파되고 있었으나, 아소카왕(재위 기원전 268~232)의 절대적인 원조와 보호를 받음으로써 전 인도에 보급되었다.고타마 붓다는 당시의 인도인 일반이 바라는 이상적 위인(偉人)으로서 갖추어야 할 특징을 모두 갖추었고, 특히 그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구비하고 있다고 일반인들은 믿었다. 이에 따라 현실의 역사적 존재가 신격화(神格化)되었다.
당시에 불교의 번성과 함께 고타마 붓다나 혹은 그의 제자들, 그리고 다른 불교 성자(聖者) 등의 유골(遺骨)과 유품(遺品)에 대한 숭배가 성행하게 되어 그것들을 매장하고 있는 장소에는 장대한 탑(塔:스투파)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불상숭배(佛像崇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아 당시의 많은 조각을 보아도 고타마 붓다의 상은 아직 조각되지 않았다.
그 후 기원후 1~2세기의 불교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보수적 불교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사회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일반민중과 더불어 그 지도자였던 설교사(說敎師)의 사이에서는 새로운 종교운동인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였으며 자비정신(慈悲精神)에 입각하여 생명을 가진 생물 모든 것을 고(苦)에서 구출할 것을 희망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살(菩薩)이라고 하였다. 출가한 비구이거나 재가(在家)의 국왕 · 상인 · 직인(職人)이거나 중생제도(衆生濟度)의 서원(誓願 · 悲願)을 세워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살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비에 근본하는 보살행(菩薩行)은 이상으로서는 어느 사람이라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일반 범부에게는 좀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제불(諸佛) · 제보살(諸菩薩)에 귀의하여 그 힘에 의하여 구제하고 서원을 실행할 것을 말하게 되었다. 제불 중에서도 특히 아촉불 · 아미타불(阿彌陀佛) · 미륵불(彌勒佛) · 약사여래(藥師如來) 등이 열렬한 신앙을 받았다. 또한 보살도 초인화(超人化)되어서 그 구제력이 강조되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문수보살(文殊菩薩) · 보현보살(普賢菩薩) 등이 많은 신자들의 염불 대상이었다.
이와 같이 제불(諸佛) · 제보살(諸菩薩)에 대한 신앙이 고조됨에 따라 그들의 신체(身體)를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하여 그것을 숭배하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 마침내 많은 불상(佛像)과 보살상(菩薩像)이 제작되었다.
불상의 출현
부처님 입멸 후 500년 동안 불상이 없었다. 이 시대를 무불상(無佛像) 시대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기원후 1세기에 불상이 출현하였다고 추측한다. 초기 불교의 금기를 깨고 불상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승 불교가 출현한 이후부터다. 쿠샨 왕조 시기 간다라(Gandhara) 지역(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과 북인도의 마투라 지역(현재의 파키스탄)에서 불상이 나타나게 된다.
불상 제작지 지도- 자현스님저 불교사 100장면에서 옮김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군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 북부까지 공격하고, 박트리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이 지역에 그리스 미술이 전파되었다. 인도문화를 기반으로 헬레니즘/페르시아 문화가 결합되면서 간다라 문화에서는 불상이 나타나게 된다. 박트리아 계 그리스 인들은 불교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신상을 인간의 형태로 묘사하는 그리스 문화의 특성과 불교가 결합되어 불교에서 금기시하던 불상 제작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 신들의 조각에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후광을 묘사하는 광배가 나타난다. 간다라 시대에 이미 석가모니 이외에도, 미륵불, 아미타불, 관음보살 등의 작례가 나타나고 있다. 육체의 사실성을 추구하던 그리스 미술의 영향으로 석가모니가 금식을 하며 보리수 밑에서 수행하다가 득도하는 불상을 보면 정말 아사 직전의 사람처럼 도드라진 갈비뼈와 푹 꺼진 안구, 텁수룩한 수염, 나무뿌리 같이 갈라져 있는 혈관 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또한 간다라 지역에서 산출되는 검푸르고 단단한 편마암 재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체로 무겁고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것들이 많다. 더불어 이때 불상이 입고 있는 법의는 두껍고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통견 형식으로 두 어깨를 가린 것이 특징이다.
간다라 양식 이외에도 인도 북부에서 탄생한 마투라 양식이 있는데 아무래도 석가모니 사후 아직 불상 조성을 금기시하는 지역 전통이 잔재해 있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불상을 만들어놓고 보살상이라고 이름 지어 놓았다, 그래서 마투라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들을 보면 보살상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이 많다. 또한 인도 고유 미술의 영향을 받아서 양감이 풍부하며 상당히 관능적이다. 검푸른 편마암을 쓴 간다라 불상과는 달리 인도 지역에서 산출되는 적색 사암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밝은 이미지를 준다. 그리고 간다라와는 달리 눈을 크게 뜨고 웃고. 불두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불상이 입고 있는 법의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 (偏袒右肩) 의 착의법을 보여주며 얇은 옷이 신체에 밀착되어 있어서 언뜻 나체 같은 느낌을 준다.
학계에서는 간다라와 마투라 중 어디서 먼저 불상이 발현되었느냐를 두고 의견이 나뉘어지는데 그 이유가 간다라와 마투라 불상을 연대측정을 해봤더니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동시대에 출현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간다라에서 불상이 발현되어 인도 본토로 넘어왔다는 주장이 다수다.
---인터넷에서 뽑음
이 불상은 적새 사암으로 조성되었고, 정수리가 솟은 전형적인 마투라 양식의 불상이다.
조형미와 균형이 잡힌 아름다운 불상이다. 현재 한국의 조그마한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상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 티베트, 부탄, 몽고,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일본, 네팔 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 1천년 이상 가장 중요한 종교였다. 그리고 정치, 경제, 교육,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관계로 불교를 상징하는 불상에 대한 각국 나라의 특별한 불상들이 있고, 또 나라마다 그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불상은 불교 교리와 신앙 내용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종교적인 예배 대상이다. 그러나 깊은 산사에서, 혹은 박물관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불상은 불교적인 것만은 아니다.불상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숨결과 정서가 담겨있다. 우리가 백제인의 심성과 지혜를 느끼게 되는 것은 불상 그 자체가 바로 과거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 ‘금동불’ 곽동석 저; 7페이지.
한국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불상은 ‘석굴암 불상’, 혹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일 것이다. 동남아시아는 불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들이 많다. 따라서 그 나라들에는 국보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불상들이 있다. 라오스는 ‘프라방’이라는 불상이 있다. 루앙프라방에 있는 ‘왕궁 박물관’의 호파방 (Haw Pha Bang)건물에 모셔져 있는데, 여기에서는 촬영이 금지다. 하지만 루앙프라방 축제에는 이 불상을 모시고 축제를 한다. 이 불상은 83cm이며 무게만 50kg 이라고 한다.
고구려 입상 불상
라오스 파방
인도 보드가야 대탑 안에 모신 불상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불상
에메랄드 불상
지구상의 수 많은 불상중에서 가장 유명한 불상은 어느 불상일까?
아마도 현재 태국 방콕의 왕실사원에 있는 에메랄드 불상일 것이다. 이 불상은 현재 태국의 국보 1호이기도 한데 라오스에서도 소유권을 주장하며 태국에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 불상에 얽힌 내력을 알아보자.
전설에 따르면, 이 불상은 인도에서 스리랑카를 거쳐 캄보디아로 왔으며, 캄보디아의 왕국에서 표면이 입혀져 1434년 아유타야왕국(태국)에 선물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이 불상은 미얀마가 아유타야왕국을 침공해 왔을 때 사라졌다가, 1세기 후인 1434년 태국북부 도시 치앙라이에서 가까운 치앙샌(Chiang Saen)에서 큰 홍수가 난 후에 다시 발견되었다. 그 당시 발견한 스님이 옥(Jade)으로 만들어진 이 불상을 에메랄드(Emerald)로 잘못알고 부른 것이 지금까지 에메랄드 불상으로 불리고 있다. 이 불상은 치앙라이에 있다가 당시의 왕국인 ‘란나왕국’ 수도인 치앙마이로 옮기려하였으니 불상을 실은 코끼리가 세 번이나 방향을 치앙마이 동쪽 도시인‘람빵(Lam Pang)'으로 가는 바람에 부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이 불상을 람빵에 32년간 두었다. 1468년 ’란나왕국‘의 딸로캇 왕이 불탑을 완공하고 이 불상을 치앙마이의 ’왓 쩨디 루앙‘의 동쪽 벽감에 안치하였다.
태국 에멀란드 불상. 높이 66cm
란나, 란쌍왕국
라오스 고대국가인 ‘란쌍 왕국’과 태국 고대국가인 ‘란나 왕국’
라오스 국부로 추앙받는 파웅음(재위 1353 ~ 1372)이 흩어져있던 호족 세력을 통합하여 불교를 국교로 하여 현재의 루앙파방(프라방)에 ‘란쌍 왕국(1353-1769)’을 세운 것을 라오스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그는 어린 시절 루앙프라방의 왕자로 앙코르 제국에서 교육받으며 성장해 선진 앙코로 제국의 군사 문화, 문물을 베웠고 커서 앙코르 왕에게 부마로 인정받을 정도의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후 왕국 설립 과정과 왕국 성립 후 그 제도와 문화가 많은 부분 유입되었다.
그의 아들 삼센타이(재위 1374~1416)는 왕조의 노역, 병역 및 조세제도의 기반을 확립하였으며 태국의 북조 왕조인 ‘치앙마이’, 태국 남부 왕조인 ‘아유타이’ 등 주변왕국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는 등 유화정책을 펼쳤다. ‘란쌍 왕국’은 1520년 왕위에 오른 포티싸랏(재위 1520~1547)왕에 이르기까지 대륙부 동남아 국가 중 가장 강성한 국가로 성장했지만 내륙국가라서 미얀마와 타이 등 주변 왕국의 침입을 수시로 받았다. ‘란쌍 왕국’ 포티싸랏 왕은 태국 중북부 지역의 ‘란나 왕국’의 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러던 중 ‘란나 왕국’의 틸로캇 왕이 아들이 없어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포티싸랏 왕과 란나 공주 사이에 태어난 왕자, 샛타티락이 외할아버지 뒤를 이어 란나 왕국의 왕이 된다. 그러던 중 아버지인 포티싸랏 왕이 죽자 샛타티락은 자신의 고향인 란쌍 왕국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는데 이 때 그는 란나 왕국의 수호상인 파께우, 에메랄드 불상을 함께 가져가게 된다. (1548년 이라는 설이 있다.)
란나 왕국의 대신들에게 불상을 가지고 곧 돌아온다고 약속을 하며 떠났으나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불상도 다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란쌍왕국의 왕이 된 샛타티락(재위 1546~1551) 왕은 미얀마의 침공을 피해 수도를 현 비엔티안으로 옮기고 에메랄드 불상을 모실 왓 파께우와 거대한 사리탑 탓루앙도 건설하였다. 이후부터는 에멀란드 불상은 비엔팅엔의 ‘왓 파께우’사원에 있었다. 100여년 후인 17세기 경에는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면서 란쌍왕국은 ‘루앙 프라방’, ‘비엔티안’, ‘참파삭’ 3개의 도시 국가로 분열되면서 약화되었다.
태국 지역은 1767년 ‘아유타야’왕국이 버마의 공격으로 멸망하였으나, 아유타야 출신의 ‘딱신’이 버마세력을 몰아내고 1768년에 ‘톤부리’지역에 새로운 태국 왕조를 수립했다. 1778년에는 ‘딱신’왕의 오른팔인 ‘짜오프라야 차끄리’ 장군이 라오스를 침공하고, ‘에메랄드’불상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와서 ‘왓 아룬(새벽사원)’에 봉안하였다. 그 후 1784년 현 ‘짜끄리 왕조’의 왕실사원인 ‘왓 프라 깨우(Wat Phra Kaew)가 완공되고 거기에 봉안된다. 그리고 원래 에메란드 불상이 있던 ’왓 째디 루앙‘에는 란나 왕국 건국 600주년이던 해인 1995년 당시 태국 국왕이 에메란드 불상을 모조한 옥으로 만든 약 70cm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라오스 비엔티엔의 왓 파케우
태국 치앙마이 왓 쩨디 루앙
이 불상은 인도에서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이후 스리랑카, 캄보디아, 태국(아유타이 왕국), 태국(란나왕국), 라오스(란쌍왕국)에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현 태국 왕실 사원에 봉안되어 태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확하게 봉안 연도가 알려지는 란나 왕국 시절부터는 각국 왕국의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각 왕국은 이 불상에 대한 특별한 보호와 신앙을 통하여 국민들의 단결과 통합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불상 중원대불
불상은 예술적으로 뛰어난 불상도 있고, 에메랄드 불상처럼 국가의 상징처럼 된 불상도 있다. 또한 크기로 유명한 불상도 있다. 남산타워 높이와 비슷한 이 불상은 중국 허난성 핑딩산(平顶山)에 있는 중원대불이다. 땅에서부터 측정하면 208미터의 이 부처님상은 불상만 측정했을 때도 153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1997년 건설을 시작한 이 부처님상은 황금 108kg, 철강 1만 5000톤이 투입되었다.
* 자유의 여신상’은 46m의 높이
중국 중원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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