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 배구
가을이 점점 깊어가는 시월 중순이다. 설악산 대청봉에서부터 불붙은 단풍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남으로 내려 내려오고 있다. 이맘때면 속리산이나 지리산이 절정이지 싶다. 불러주는 이가 드물긴 해도 그마져도 꼬박꼬박 다 다니질 못하는 처지다. 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의든 타의든 즐겨가는 산행을 접고 속세로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이날은 속세가 아닌 전원으로 나갔다.
내가 사는 이웃 아파트에 사는 교육대학 선배가 있다. 선배는 내보다 연하지만 장학사와 학교 관리자를 역임하고 도교육청 장학관으로 근무한다. 서로는 근무시간 밖 여가시간을 활용한 자생연구단체에 소속된 같은 회원이다. 이십여 명 회원들은 격월로 셋째 주 토요일 오후 지역을 달리해가면서 모임을 갖고 있다. 회원들은 창원은 비롯해 김해와 진주 통영 거제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집 앞에서 선배의 차에 동승해서 창원중앙역을 돌아 정병산터널을 빠져나갔다. 소목마을 곁을 지나니 금세 용잠삼거리였다. 동읍사무소 앞을 거치니 다호리였다. 삼거리에서 가월마을을 거쳐 주남저수지 곁을 지났다. 누렇게 익은 벼논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회원들이 모이는 장소는 대산 들녘 한복판에 위치한 어느 초등학교였다. 그 학교에 올 가을 공모교장으로 부임한 회원이 있다.
둘은 이동 중 차내에서 그간 밀려둔 가벼운 안부를 나누었다. 모임 장소인 들판 학교에는 먼저 도착한 다수 회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들녘 가운데 자리한 천연 잔디가 깔린 운동장은 동화 속에 나오는 학교 같았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롯한 각종 정원수들은 계절에 맞게 단풍이 물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교문 곁 연못에는 예쁜 부레옥잠 꽃이 피었고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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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당 한 학급에 십여 명 학생들이 재학하는 이상적인 학교였다. 각 교실은 환경이 아담에게 구성되고 교실 뒤편엔 별도 학습준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전교생이 함께 사용하는 다목적 강당은 급식소와 겸용이었다. 화장실도 고속도로 휴게소 못지않게 깨끗했다. 수고꼭지를 틀어 봤더니 온수까지 나왔다. 우리나라 농어촌 교육환경도 서구 여러 나라와 비교해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스무 명 남짓 참석 회원들은 현관에 자연스레 앉아 회의를 열었다. 우리 모임 회장은 교육장을 역임한 마산 어느 고교 교장이다. 회장 인사말에 이어 장소를 제공한 교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이어 동승해온 도교육청 장학관의 최근 교육 동향과 질의응답이 있었다. 그 사이 총무는 회원 동정을 소개했다. 서울대 교육행정지도자 과정과 교원대에서 교장 자격연수를 받는 회원도 있었다.
현관에서 공식 회의를 마치고 총무단에서 사전 고지한 바에 따라 운동장에서 추억의 ‘노지 배구’를 했다. 요즘 웬만한 면소재지 학교에서도 실내체육관은 세워졌다. 우리가 모임을 가진 시골학교는 면소재지 중심학교가 아니라 실내체육관이 있을 리 없다. 한때는 학생 수가 적어 폐교 직전까지 몰린 학교를 지역주민들이 몇 해 걸쳐 천연 잔디를 심어가면서 학생 수를 불려 놓은 학교였다.
잔디 운동장과 떨어진 교정 가장자리 숲 그늘 벤치엔 파전을 굽고 곡차가 마련되었다. 흙바닥 배구장에는 네트가 설치되고 백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회원들은 자연스레 편이 갈라져 가볍게 몸을 풀었다. 나는 감히 배구장에 들어서지 못하고 호루라기를 불고 점수판을 넘겨주었다. 왕년에는 모두들 학교 현장에서 수비나 공격에서 한 치 물러섬이 없는 회원들이라 그 기량은 녹슬지 않았다.
노지 배구를 끝내자 석양은 주남저수지로 기울었다. 우리는 들판 학교 중앙현관 앞에서 삼겹살 가든파티를 열었다. 후배 회원들은 야채를 담아내어 고기를 구워냈다. 운전자들이 다수라 주류는 맥을 못 추었다. 그런 속에 나는 초지일관 곡차를 몇 순배 들었다. 회원들 상호간 밀린 정담을 나누는 새 어느덧 교정에는 어둠이 깔렸다. 우리는 어깨를 맞잡고 다음은 통영에서 만나자고 했다. 1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