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 - 사망 | 1859. 9. 17 ~ 1941. 11. 18 |
---|
김치보 선생은 늦은 나이인 50세에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지만, 그 활동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치보는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로 1859년(철종10년) 9월 17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와 연해주 이주 이전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50세가 되던 1908년경 이주한 러시아 원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금광 감리를 거친 사람이었다는 의미의 ‘김감리(監理)’라고 불렸다는 점에서 연해주로 오기 전 평안도에서 금광업에 종사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김치보는 이주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개업하여 운영하였다. 상하이로부터 직접 약재를 수입하여 연해주의 한인들에게 판매하던 덕창국은 신한촌에 주소를 두고 있었으며, 소왕령(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지국을 두었다. 소왕령 지국의 책임자는 김이직이었다. 그의 상점은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가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였다.
김치보는 연해주로 이주한 직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8년에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 조창호 등과 상의하여 의병을 조직하기 위해 자금을 모금하였고, 1909년 국민회(國民會)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협성협회가 통합하여 출범한 단체로 자체의 강령에서 이미 쇠락한 정부를 계승한 자격 있는 ‘임시정부’로 자임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제도를 본뜬 연방공화제를 채택하여 지방회-지방총회-중앙총회의 3단계 조직체계를 채택하고 러시아 원동 연해주와 중국 만주에 지방총회를 설립하였다.
국민회는 원동지역에 대한 조직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상설과 정재관을 파견하였다. 헤이그밀사 수석대표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상설에게는 국민회의 전권을 행사할 ‘원동대표’로서의 임무가 부여되었고, 정재관은 원동의 한인사회를 통합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앞서 공립협회의 대표자로 파견되었던 이강, 김성무 및 정재관의 활동에 힘입어 국민회는 러시아 원동지역에서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었다. 국민회의 지방회와 지방총회는 1912년 현재 수찬 중흥동의 수찬지방총회(12개 지방회), 하얼빈의 만주지방총회(8개 지방회), 치타의 시베리아지방총회(9개 지방회)의 3개 지방총회로 정비되었다. 이처럼 국민회는 러시아 원동지역과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에 급속하게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원동지역의 지방총회가 수찬 중흥동에 있었지만, 연해주에서 국민회의 중심지는 아무래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1907년 1월 7일 설립된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지부로부터 이어진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는 회장 오주혁, 부회장 정순만, 서기 이홍기, 회계 윤능효, 학무 한형권, 응접 양성춘, 태원선, 임시서기 백원보, 임시사찰 윤욱으로 구성되었다. 김치보는 김상헌, 윤욱, 유진률, 한형권, 김학만, 박영빈, 이기제 등과 함께 평의원의 한 사람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의 핵심회원들인 정재관, 정순만, 유진률 등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을 계획하는 논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김치보가 위 논의에는 참가한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을 진행하는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의 회원으로 활동한 점은 그의 항일 투쟁이 의병 자금 모금을 거쳐 국민회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김치보는 1909년 4월 청년돈의회(靑年敦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청년돈의회는 명목상 청년들의 교육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조직되었다고 하여 매주 일요일 저녁 7시에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대동공보의 발행인이었던 유진률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청년돈의회는 1909년 9월 10일 계동학교에서 한국 황제의 만수절을 맞아 성대한 축하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1910년 4월 17일에는 한민학교에서 ‘안의사추도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김익용, 윤면제, 박인엽, 양주협, 최호신, 윤능효 등이 통분한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청년돈의회가 언제 해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권업신문」 1913년 11월 9일자에 청년돈의회 명의의 광고가 실린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치보는 교육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설립된 계동학교 감독이 되었으며, 교장 김학만과 함께 학생들을 위해 교과서 대금을 의연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병희, 이시달, 김응필, 이주송, 오상목, 남진석, 안창준 등과 함께 낙열평에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대한부인회가 한민여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자 이에 응하여 10원을 의연하였다. 나선리 학교와 청동학교에도 의연하였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풍속 교화와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서 한인들이 도박장을 개설하여 안녕 질서를 해치는 일이 발생하자 개척리의 유지 신사들과 함께 도박장을 혁파하는 운동을 펼쳤고, 이준 열사 전기 간행과 유족의 구휼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하는데도 참가하여 50전을 의연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1911년 6월 조직된 ‘해삼위 거류민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학만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던 ‘해삼위 거류민회’는 이후 ‘신한촌민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0년에 들어와 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연해주 한인사회 일대에 퍼졌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국망이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합병’의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 반대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고자 했다. 8월 17일 밤 김익룡, 최병찬, 유인석, 김학만 등 10여 명의 인사들이 이범윤의 집에 모였다. 이들은 각국 정부 앞으로 탄원서를 보내기로 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애국동맹단과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반대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8월 18일 오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한민학교에서 150여 명의 한인들을 모아 전날 밤에 결의한 내용을 공포하고 그 사업을 추진할 주체로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였다. 성명회의 명칭은 ‘聲彼之罪 明我之冤(적의 악독함을 소리 높여 외치고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자)’에서 취하였다. 또한 주지는 광복을 위해 한민족의 모든 역량과 수단을 모아 항일독립운동에 나아갈 때 민족의 시련을 극복하고 독립의 영광을 찾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명회를 통하여 그 종지를 내외에 알리고자 하였다.
1910년 8월 23일 오후 4시에 러시아신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 신문사로 들어온 전문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에게 전해졌다. “한일합병은 22일 조약에 조인을 마치고 29일과 30일의 이틀에 걸쳐 일반에게 발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한인 2백여 명이 즉시 개척리 한민학교에 모였다. 회의는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금세 7백여 명으로 늘어난 한인들은 이 회의에서 “대한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할 것을 결의하고 병탄 반대와 무효를 선언하는 취지서를 발표였다. 그리고 각국 정부에 병탄조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송하기로 하였다.
성명회 결성의 주창자였던 이상설이 기초하고, 성명회의 대표로 추대된 유인석이 이를 보완하여 ‘성명회 선언서’를 완성하였다. 선언서에서는 한인의 결연한 독립의지를 표명한 뒤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열강의 지지를 호소하였고 개항 이래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에 대해 논리적으로 논파하였다.
선언서에는 을사늑약 이후 연해주로 망명한 유인석, 김학만, 이범윤, 이상설, 정재관, 이남기, 홍범도, 안정근, 이갑, 이종호 등 의병 또는 애국계몽운동자와 최재형, 김병학, 김만겸, 유진율, 이규풍, 차석보 등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자들이 포함된 총 8,642명의 서명이 첨부되었다. 김치보가 8월 18일 성명회의 조직에 참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성명회 조직 당시 참가한 사람들의 명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유지이자 대표적인 배일(排日)인사 중 한 명으로 꼽히던 김치보가 성명회 조직 회의에 참가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당연히 김치보는 8,642명 중 한 명으로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성명회는 일본이 러시아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고, 그 주요 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여 해산되고 말았다. 8월 30일 러시아 당국은 유인석과 이상설을 포함한 성명회 주요인물 42명의 체포를 명하였다. 유인석과 홍범도, 이종호 등은 다행히 몸을 피해 화를 면했으나, 이상설을 비롯해 이범윤, 김좌두, 이남기, 권유상, 안한주, 이치권, 이규풍 등 8명은 ‘항일운동의 괴수들’이라고 하여 9월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유형을 당했다. 이들은 7개월 뒤인 1911년 5월 유배에서 풀려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치보는 이 때 다행히 몸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4개월 후에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자선공제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던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자선공제회는 191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안창호가 한인들의 단결과 실업의 장려를 호소하여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12월 18일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주요 한인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된 창립협의회에서 김치보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위원은 안창호, 김병학, 백원보, 장경근, 함동철, 김성원, 김현토, 김규섭, 고상준, 조창호, 이상운 등이었다. 또한 안창호가 취지 기초위원으로, 한형권은 규칙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안창호가 작성한 장정 초고에 따르면 자선공제회는 러시아 한인들의 교화와 경제 향상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성명회는 비록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려는 종지를 완수하지 못하고 일본의 항의를 받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지만, 성명회에 참가했던 인사들의 독립투쟁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독립투쟁의 의지는 다음해에 만들어지는 권업회(勸業會)로 이어졌다.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했던 인사들의 대부분이 권업회 창립에 참가하게 된다. 김치보 역시 권업회에 참가했음은 물론이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강점될 당시 일본과 러시아는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1911년 6월 1일에는 두 정부의 공동 이해에 따라 ‘러일 범죄자 상호인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가뜩이나 힘들어지고 있던 연해주 한인 항일운동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연해주의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새로운 모색의 결과 연해주 한인들의 단결된 조직으로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었다. 권업회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해주 한인들의 실업을 권장하고 노동을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시키기 위한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권업회는「권업신문」의 간행, 교육진흥활동, 한인의 자치활동, 토지조차와 귀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 단체가 명칭을 권업회라고 한 것은 일본의 방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사실상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투쟁을 조직하는 독립운동단체였다.
1911년 6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조창호의 집에서 권업회 발기회를 개최하고 임시 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에는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 총무 김익용, 서기 조창호, 재무 허태화가 선임되었다. 임시 사무소는 조창호의 집으로 정하고 연추, 수청 등 각 지방에 지회 설립을 권유하는 위원을 파송하였다. 한편 이종호와 홍병일로 하여금 러시아 당국과 교섭하게 하여 공식적인 허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7월 16일 블라디보스토크 청년근업회와 협의하여 권업회와 합동하기로 하고 임원을 재선하였다. 회장 최재형, 총무 김익용, 서기 이근용, 김기룡, 재무 김와실리가 선임되었다. 김치보는 김규섭, 김형권, 한형권, 이형욱, 조창호 등과 함께 의원에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7월 23일 청년근업회의 재정을 인수하고 청년근업회에서 발간하던 대양보를 인수하기로 하였다. 대양보를 발행할 회관을 신축하여 대양보사를 신한촌으로 옮겨 계속 발행하였다. 이후 9월 17일 대양보는 정간되었는데, 신문발행을 다시 총독과 순무사에 교섭하여 승인을 얻었다.
1911년 11월 23일 권업회는 러시아 당국의 인가를 받았다. 12월 19일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권업회의 공식적인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창립총회에서는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의장 이상설, 부의장 이종호, 총무 김익용, 한형권, 재무 김기룡, 서기 이민복, 의원 이범석, 홍병환, 김만송 등이 선임되었다. 이외에 특별임원으로 수총재 유인석, 총재 이범윤, 김학만, 최재형 등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주요부서의 장을 임명하였는데 교육부장 정재관, 실업부장 최만학, 경용부장 조창호, 종교부장 황공도, 선전부장 신채호, 검사부장 윤욱, 응접부장 김병학, 기록부장 이남기, 사찰부장 홍범도, 구제부장 고상준 등이 선임되었다. 김치보는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창립과 동시에 신문 발행에 박차를 가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자치기관 회원이며 퇴역 참모부 대위인 듀코프를 신문 발행인으로 정하여 신문허가를 청원하였다. 대양보를 이을 새로운 신문 이름은 「권업신문」으로 정했다. 권업신문은 1912년 5월 5일 석판인쇄로 제1호를 찍어냈다.
권업회는 창립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임원재선이 이루어졌다. 1912년 4월 14일에 열린 제1회 총회에서 최만학이 의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이종호, 이상설, 김도여, 최재형, 김도여 등의 순으로 변동되었다. 창립총회에서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던 김치보는 제1회 총회 이후부터는 임원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다 1914년 7월 19일 열린 권업회 하반기 정기총회에서 사임한 강택회를 대신하여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중앙조직 외에 지방조직도 두었다. 1912년 10월 13일 니콜라옙스크 지회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0월 27일에는 하바롭스크 지회가, 11월 9일에는 추풍 영안평(시넬리니코보)에 지회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이만, 우스리스크, 탕랑수, 수청 구허동, 노보키옙스크(연추), 도비허 등지에도 지회가 설립되어 1914년 7월 경에는 지회가 10여 곳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권업회의 회원은 창립 당시에는 300여 명이었으나, 1914년 7월에는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권업회에는 당시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한인사회의 각계각층 중요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최재형, 최봉준, 김학만, 김도여, 차석보, 김익용, 김병학 등은 러일전쟁 이전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정치, 경제적 지위를 획득한 이들이며,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등은 국내와 간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연해주로 건너온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정재관, 이상설, 이종호, 신채호 등은 국내와 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군대해산을 전후하여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이었다.
또한 권업회의 간부들에는 최재형, 최만학, 김병학, 윤일병, 김기룡 등과 같이 러시아에 귀화한 이들도 있었고, 한국 국적을 가진 망명자들도 있었다. 김치보는 1913년 러시아에 입적하였다. 또한 권업회는 연해주의 주요 러시아인 인사들을 명예회원으로 가담시켰다. 연흑룡주 총독 곤닷치를 비롯하여 연해주 군무지사 마나킨, 블라디보스토크 동양대학 교수인 포드스타빈, 러시아정교 주교감독국의 비서인 포랴놉스키 그리고 듀코프 등이 명예회원이 되었다.
이처럼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의 총결집체로서 러시아 당국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조직된 단체였다. 그리하여 권업회는 러시아 당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러시아 한인사회의 대표기구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러시아 당국의 묵인 아래 권업회를 활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업회 지도인사 거의 모두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1913년 이동휘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의사부원으로 선출되자 당시 권업회는 비밀리에 러․중 국경지역에서 새로운 의병 조직에 착수했다. 그렇게 하여 대한광복군정부가 수립되었다. 1914년에는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 기념행사를 조직하기 위한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권업회의 지도인사들은 이 기념행사를 활용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러시아와 동맹국 관계에 있던 일본은 러시아 당국에 권업회와 권업신문을 폐지해 줄 것과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민족운동자들을 러시아에서 추방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러시아 당국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8월 20일 권업회의 해산을 결정하고, 권업신문의 간행을 금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에서 한인 민족운동은 더 이상 진행되기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한편 김치보는 1912년 12월에 최종면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노인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노인단을 조직한 기념으로 기금을 모금하여 권업신문 발간을 후원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비롯한 연해주 각지에는 한인들이 지역단위로 한민회 또는 한민자치회를 조직하였다. 2월 혁명 이후 재건된 신한촌 한민회는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거류 한인 1만여 명의 대표기관을 자임하였고 교육부, 심사부, 위생부, 경찰부 노동부, 구제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또한 7월 21일에는 「권업신문」을 계승한 「한인신보」가 창간되어 주 1회 발행되었다.
김치보는 「한인신보」 발기회의 고문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18년 실시된 한민회 선거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부회장은 김형권, 경찰부장은 이흥운이 선임되었다.
한편 각 지역의 한민회 조직 외에도 전러시아 한인들의 자치기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1917년 5월 18일 ‘노령한인협회 발기회’가 조직되었다. 김치보는 최재형, 문창범, 윤 니콜라이, 김 야곱 등과 함께 의사원으로 참가하였다. 6월 17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이르쿠츠크 동쪽의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결성되었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25일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소집하였다. 김치보를 비롯하여 문창범, 김하석, 장기영, 김진 등 5명이 발기하여 소집된 회의에서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확대, 개편하기로 의결하였다. 김치보는 대한국민의회의 상설의회 의원 30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연해주에도 전해왔다.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17 만세운동 직후인 3월 26일 김치보의 상점인 신한촌 덕창국에서 노인동맹단이 조직되었다. 이날 거행된 발회식에서 김치보는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홍범도, 유상돈 등 16명이 의사원으로 선출되었다.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의 연령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자격을 부여하였다. 독립운동 청년들을 지원할 계획을 세운 노인동맹단은 발회식 직후 단원 모집을 위해 각 지방으로 대표를 파견하였다.
5월 5일 노인동맹단은 이승교(이발), 윤여옥, 김학영, 안태순, 차대유, 정치윤, 차부인 등 대표 7명을 선정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 대표들은 일본에 보내는 문서 2통과 취지서 수백 매, 여비 1만 루블을 지참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5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일 오전 11시 이들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민중들에게 연설을 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이동휘의 부친인 이승교는 의로써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며 칼로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일경이 그를 대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이승교와 정치윤은 너무 노쇠하여 러시아로 추방당했으며, 안태순은 징역 1년, 윤여옥은 징역 10월, 차대유는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승교와 정치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자 노인동맹단에서는 6월 20일 밤 평의원회를 열고 귀환한 이들을 환영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안건을 토의하였다. 여기에서 청원서를 상해로 보내 그곳에서 불어로 번역하고 다시 파리로 전송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노인동맹단은 6월 25일 강문백과 연병우를 대표로 파견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在露領大韓國民老人同盟團謹瀝血 禱衷干」라는 제목의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 대일본제국정부 대신 앞으로 보낸 이 요구서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대표 김치보 외 20명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노인동맹단은 단원 중에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국내로 들여보내거나 또는 단원 150명을 국내로 파견하여 3·1운동을 확산시킬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강우규 의사는 7월 8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원산에서 약 1개월 체류하다가 8월 8~9일 경 서울로 들어왔다.
강우규 의사는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새로 부임하는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탄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마차 앞 약 7보 가량 되는 지점에 떨어져 무서운 굉음과 함께 폭발하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중 몇 개가 사이토의 마차에 맞았다. 그러나 그 중 하나가 마차의 뒤쪽을 뚫고 들어가 사이토가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을 손상하는데 그쳤을 뿐 사이토의 신체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강우규의 투척은 환영 나온 인사 37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65세 노인의 의거는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큰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국내외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8년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지원하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백위파 정권이 1920년 1월 31일 혁명파에게 무너졌다. 연해주에는 연해주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한인 독립운동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이에 한인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20년 2월 23일 오후 1시 신한촌의 유지인사들은 각 단체 대표자회를 개최하고 협의한 결과 2월 27일부로 대한국민의회 의장 서리 한창해(韓蒼海)와 서기 대리 전일(全一)의 명의로써 통지서를 각 지방에 발송하여 각 지방이 모두 같은 날 같은 시간에 3·1독립선언기념회를 갖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재무부장에 김치보가 선출되었다. 3월 1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대한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유수의 인물들이 초대되었다. 기념식에는 러시아공산당 대표인 세르게이 라조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육해군 총사령관의 부관, 블라디보스토크시 위수사령관 등 혁명정부 대표자와 각 신문사의 대표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의 영사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각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참가하였다. 기념식 이후에는 연회가 베풀어졌으며 신한촌 한민회관에서는 연극이 상연되었다.
한편 1920년 2월에 김치보 등 연해주 한인 유지 16명은 블라디보스토크 상무총회 설립을 발기하였다.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의장에 최만학이 선출되었다. 상무총회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상무 진흥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에 이용하기 위하여 「한인신보」를 기관지로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김치보의 활동은 널리 알려졌다. 1920년 3월에는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있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노령에 대하여 연통제에 의한 아령총판부와 재무관서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아령총판부의 총판에는 최재형이, 부총판에는 김치보가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김치보의 위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 곧바로 일본군에 의해 연해주 4월 참변이 발발하고, 최재형이 순국함으로써 아령총판부는 설치되지 못하였다.
1920년 4월 4일 밤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연해주임시정부와 혁명군에 공격을 감행했다. 연해주 4월 참변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연해주 4월 참변은 한인 민족운동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4월 4일 밤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다.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수색을 통해 민족운동가인 채성하와 러시아사회당원 박 모이세이를 비롯한 한인 54명이 체포되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은 반일 한인 76명을 체포했다. 이중에는 상해 임정의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던 러시아지역의 유력자 최재형도 있었으며, 그는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연해주의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다른 지방으로 피신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60세가 넘은 김치보는 피신하거나 지하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김치보는 신한촌에 남았다. 그의 상점 덕창국의 주인으로 평범한 생활인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러한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일제는 이전까지 존재하던 신한촌민회 대신 블라디보스토크 거류민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1920년 5월 23일 대표회의가 열려 이상운을 회장으로 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가 조직되었다.
김치보는 창립 초기 조선인거류민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21년 1월 23일 개최된 총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그는 63세였다. 거류민회의 주요 간부들 중 가장 많은 나이였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1921년 12월 일본의 문화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의 조직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한인 교육의 통일, 고등보통학교의 신설과 교육내용의 충실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취지서에 첨부된 발기인 56명 가운데는 일본 세력 하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거류민회의 중심인물인 조영진, 강양오를 비롯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김영학, 조장원, 임호, 김치보, 이강, 한용헌, 이범석, 최만학 등 주요한 한인지도자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다.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는 이듬해인 1922년 1월 10~17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조직되었다. 이때 김치보는 영업부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일제는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조선 국내에 관광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의 일환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예술단이 1921년 4월, 1922년 4월, 1922년 7월 등 세 차례에 걸쳐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중 김치보는 두 번째 예술단의 일원으로 국내를 방문했다. 이 예술단은 해삼위 천도교청년회연예단이었다. 이들은 4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8월 10일 돌아올 때까지 원산으로부터 경성, 개성, 평양, 정주, 선천 등 27개 도시에서 총 35회의 공연을 하였다. 김치보는 해삼위천도교교구장의 고문자격으로 이 방문단에 합류했다.
그런데 국내를 순회하던 중이던 7월 14일 김치보는 김광희, 강도희, 김홍종 등과 함께 국내의 이종훈, 홍병기 그리고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를 만나 협의하고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김광희는 해외선전부장, 김치보는 강도희, 김홍종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겉으로는 일제에 순응하며 방문단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안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였을까? 1922년 10월 26일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병하고 난 후 일본의 비호 아래 있던 조선인거류민회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조선인거류민회의 회장을 역임한 조영진, 강양오 등은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김치보는 타도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로도 김치보는 지속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 참가하여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에 참여한 천도교 영수 신숙에 대해 1924년 3월 1일 시베리아 천도교인들은 반대 성명서를 발표한다. 여기에 김치보도 참여하였다.
이후 김치보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 훈춘으로 가서 살다가 1941년 별세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또한 1925년 일제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중국 영안현 영고탑에서 조직된 적기단의 조직원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적기단 관련 다른 기록에는 김치보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이미 65세가 넘은 나이에 그러한 혁명 활동에 참여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러시아 원동 연해주는 을사늑약 체결 이후 해외에서 생겨난 독립운동의 주요한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김치보는 1908년경 평안도에서 연해주로 이주한 이후 연해주에서 전개된 거의 모든 항일투쟁에 참가하였다. 의병 자금의 모집부터 성명회를 거쳐 권업회 활동을 하였고, 해외에서 조직된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에도 참가하였으며, 3.17 연해주 만세시위운동과 3.1운동 1주년 기념식도 주도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였다.
비록 늦은 나이인 50세가 되어서야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지만, 이후 김치보가 걸어온 길은 러시아 원동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