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30> 무안박씨, 죽산박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2-05-15 20:58:03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경명왕 8대군서 뿌리 갈려… 전체 박씨의 3.4% 차지
무안박씨는
무안박씨(務安朴氏)는 전라남도 무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무안박씨의 시조 박진승(朴進昇)은 경명왕의 8대군 중 여섯째인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의 5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공을 세워 무안(務安)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무안박씨에서는 12개 분파가 생겨났다. 개성파(開城派), 장단파(長湍派), 무안·서울·노성파(務安서울魯城派), 양근·남해·완도·진도·적성파(楊根南海莞島珍島積城派), 음죽파(陰竹派), 영해·양주파(寧海楊州派), 공주파(公州派), 홍산파(鴻山派), 당진파(唐津派), 연기파(燕岐派), 당진영파(唐津?派), 당진정파(唐津楨派)가 그것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에 의하면 무안박씨의 총 인구는 2만4746가구에 7만88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박씨의 2.0%를 차지한다.
무안박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고려시대의 박승중(朴昇中)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박의장(朴義長), 박홍장(朴弘長), 박창하(朴昌夏), 박호(朴浩) 등이 있다.
그리고 현대인물로는 한글 점자(點字)를 창안하여 맹인들의 세종으로 칭송받고 있는 박두성(朴斗星)이 있다.
무안박씨의 연혁과 인물
무안박씨의 중시조 박진승의 아들 박섬(朴暹)은 고려 현종 거란의 2차 침공 때 호종공신으로 좌복야에 올랐다.
그의 증손으로 당대에 학문이 뛰어났던 박승중은 문과에 급제한 뒤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서 상정관(詳定官)이 되어 예의(禮儀)를 정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보문각학사로 김부식(金富軾)과 더불어 ‘예종실록’의 편수관이 되었다. 이자겸이 국정을 맡게 되자, 그에게 아부하여 참지정사를 거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이자겸의 몰락으로 탄핵을 받고 울진에 유배되었으나, 공로가 참작되어 무안에 안거하였다.
박섬의 6세손 박문오는 정승에 올라 면성(지금의 무안)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 박문정은 문과에 급제한 후 팔만대장경 창제에 기여하였다. 무안박씨는 박문오와 박문정 두 형제 때 가세가 크게 흥했다. 무안박씨의 각 분파 중에서 박문오의 다섯 아들과 아우인 문정으로부터 분파된 가문이 많다.
10세 풍정공 박의룡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14세 박임경은 성삼문의 사위로 성삼문이 거혈형에 처하자 시신 일부를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었다고 한다.
현감 박세렴의 아들 박의장은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50여 회 전투를 이끌었으며, 그의 아우 박홍장은 대구부사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 죽기를 결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박인은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에 호종하여 의주 행재소(行在所)의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고, 숙종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박창하는 많은 고율시(古律詩)를 남겼다.
무안박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한글 점자의 창안자인 박두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경기 강화 출신으로 서울맹아학교 전신인 제생원맹아부 교사에 취임한 뒤부터 맹인교육에 힘을 썼다. 1920년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6년 만에 완성했다. 이 한글 점자는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고 불린다. 또한 ‘조선어독본’을 한글 점자로 간행하여 맹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 후 박두성은 성경의 점자원판(點字原板)의 제작에도 착수하여 1941년에 신약성서를 완성하고, 1957년에 성경전서 점역(點譯)을 완성했다.
그 외 무안박씨의 인물로는 재계의 박수웅(전 대일화학공업 대표이사), 박종득(전 대한방직 부회장), 박광섭(전 현대산업 사장), 박화복(목포화공 대표이사) 등이 있다. 국회의원으로 박승재(한양대 교수,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 박석무, 박종길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박종문(동국대교수), 박철재(이학박사, 인하공대학장), 박한규(전북대학장), 박창규(목포대학장) 등이 있으며, 권투선수였던 박종팔씨도 무안박씨이다.
죽산박씨, 음성박씨, 고성박씨는
죽산박씨(竹山朴氏)는 경명왕의 아들 8대군 가운데 넷째인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는 죽성대군의 아들 박기오(朴奇悟)이다. 박기오는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죽산(竹山, 지금의 경기 용인군, 안성군 일대)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이후 그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죽산박씨는 박기오의 6세손 박영후(朴永侯)에서 장남 박정유와 차남 박정혁으로 갈라지는데, 각각 충질공파(忠質公派)와 소경공, 학사공파의 파조가 된다. 그 후 소경공, 학사공파는 찬성공파와 별장공파, 제학공파, 충현공파, 목사공파, 충제공파, 직제학공파, 연흥군파, 대사헌공파로 분파되었다. 또한 충현공파에서 좌찬성공파가 분파되었고, 연흥군파에서 문헌공파가 분파되었으며, 문헌공파에서 다시 문정공파가 분파되었다. 또 대사헌공파로부터 판관공파, 정랑공파, 사정공파, 교하공파, 직장공파가 분파되었다.
죽산박씨는 조선시대에 39명의 문과 급제자와 2명의 상신을 배출하였으며, 2000년 국세조사에서 1만6816가구 5만3489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전체 박씨 인구의 1.4%를 차지하는 것이다.
또 죽산박씨에서 음성박씨와 고성박씨가 분적하였는데, 음성박씨는 박언립의 11세손이며 박기오의 10세손인 박서(朴犀)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또 박서의 손자인 박빈(朴彬)을 시조로 하는 고성박씨도 죽산박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 음성박씨는 모두 2149가구에 7094명이 살고 있으며, 고성박씨는 모두 1242가구에 39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죽산박씨의 연혁과 인물
죽산박씨의 시조 박기오는 왕건을 도와 고려창업에 공을 세우고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죽산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박기오의 손자 박충숙(朴忠淑)은 현종(顯宗) 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7세손인 박정유는 예종과 인종에 걸쳐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추밀원부사(樞 密院副使) 겸 태자좌빈객(太子左賓客)이 되었다. 박정유의 아들인 박육화(朴育和)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인 박인석(朴仁碩)은 선종(宣宗) 때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 초적(草賊)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다.
박인량(朴寅亮)은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송나라 사신으로 가 시문이 격찬을 받아 중국인에 의해 ‘소화집(小華集)’이 발간되기도 했다. 귀국 후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내고, 숙종 때 우복야 참지정사(右僕射參知政事)로 있다가 죽었다.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했으며, 신라시대 설화를 모은 ‘수이전(殊異傳)’의 저자이다.
박인량의 아들로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이 있다. 그중 박경인은 문과에 급제한 후 국자제주를 거쳐 서북면 병마사가 되고,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우인 박경백(朴景伯)은 문과에 장원을 한 후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고, 벼슬이 상서에 이르렀다. 또 박경산은 문과에 급제한 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벼슬이 대경(大卿)에 이르렀다.
전법판서(典法判書) 박휘(朴暉)의 아들인 박전지(朴全之)는 외교와 정치이론에 밝았으며, 충선왕(忠宣王) 때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지고, 충숙왕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벼슬은 수첨의 찬성사에 이르렀다. 박전지의 손자 박문수는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의 하나였으며, 그의 아들 박포는 조선이 개국되자 대장군을 거쳐 황주목사가 되었으나,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정사1등공신이 되고 죽성군에 봉해졌다. 하지만, 논공행사에 불만을 품다 죽주로 귀양가고, 다시 방간을 옹립하려 거병하였으나, 태종 이방원의 군사에 패하여 참수당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죽산박씨의 인물로는 박문보(朴文珤)의 증손으로 박원형(朴元亨)이 유명하다. 그는 세종과 세조 때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외교의 일인자로 손꼽혔다. 그래서 중국 사신인 장영(張寧)은 그를 평하기를 ‘춘추시대의 숙향(叔向)과 자언(子彦)에 비교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영중추부사에 오른 박안성(朴安性)이다.
조선 중·후기에는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박홍구(朴弘耉)가 있다. 그는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정언(正言)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전라도어사(全羅道御史)가 되어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또한 선조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좌의정에 올랐으나, 인조반정으로 삭직되었다. 하지만 조카 박윤장이 이괄의 난 때 광해군의 복위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신문을 받던 중 자결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용만 전투에서 순절한 박신룡(朴信龍)이 있으며, 인척이었던 박성룡도 같이 순절하였다. 또 정유재란 때 공을 세워 정난이등공신(靖難二等攻臣)에 책록되고, 연창군에 봉해진 박명현(朴名賢)이 있다. 그리고 박계성(朴繼成)은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행주대첩을 치렀으며, 정유재란 때 구례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그의 부인도 자결했으며, 아우 박승성(朴承成)과 사촌동생 벅언정(朴彦貞)도 싸움터에서 순절하였다. 또한 조선 말에는 박주현(朴周鉉)이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순절하였으며, 박치조 박치의 박건채 등은 평북 선천에서 경찰서를 파괴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음성박씨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시조는 고려의 박서(朴犀)이다. 그는 서북병마사로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장수 살리타이가 쳐들어와 철주와 귀주를 공격하자, 김경손과 함께 몽골군을 끝까지 막아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쟁 후 항복을 권하는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죽주에 귀양을 갔다가, 곧바로 조정에 들어가 문하찬성사를 역임하고, 철성백에 봉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음성박씨는 죽산박씨의 철성백파(鐵城伯派)에서 분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손자 박순(朴淳)은 조선 태조와 태종 간에 벌어진 함흥차사(咸興差使)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고려 말기 요동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 상장군이 되었다. 그가 태종을 미워하여 함흥에 머물고 있는 태조를 설득하고 돌아오다가 용흥강에서 피살되어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게 됨으로써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박순의 아우 박정은 세종 때 좌찬성을 지냈으며, 박순의 아들 박소는 좌승지로 단종 복위를 도모했다가 형을 받았다. 박순의 손자 박숙진은 대사헌을, 박숙무는 나주목사, 박숙달은 이조정랑과 집의를 역임했다. 또 임진왜란 때 고경명, 김천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권율을 도운 나주목사 박광옥(朴光玉)도 음성박씨이다.
고성박씨
고성박씨(固城朴氏)의 시조는 죽성대군 박언립의 13대손으로 고려의 문하시중을 지낸 박빈(朴彬)이다. 그의 손자 박보로(朴普老)는 고려 우왕 때 수차에 걸쳐 왜구를 격퇴하고 문하평리(門下評理)·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를 역임하였다.
고려 때 죽산박씨의 철성백파의 후손에게 고성과 음성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고성박씨와 음성박씨가 분관된 것이다. 음성박씨와 고성박씨는 본관이 같은 조상을 모시므로 죽산박씨와 족보 편찬을 합본하기로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