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교황이 공식 지명해 만난 단 한 사람…
'한국의 오토다케' 이구원 선교사
팔다리 다 있는 여러분은 저 보다 더 행복하세요?
이웃 할아버지 같았던 교황님
직접 뵐 때까지 실감 안나 "뵙게 돼 기쁘다" 인사드리자
인자하게 답 해주셨는데… 너무 떨려 잘 못 들었어요
난 남들과 다를 뿐, 틀리진 않아
길에서 사람들이 쳐다봐도 비웃는거라곤 생각 안해요
다르니까 시선이 가는거죠… 저도 장애인들 보게되거든요
"가난 못 이겨 절 버렸지만… 부모님께 감사해요, 낙태하진 않았잖아요"
물 한모금에 찾은 '삶의 의미'
왜 나만 다를까 고민하며 자살 같은 것도 생각했어요
수술 후 물 한모금 갈증에 살고 싶다는 갈망 깨달아
구원,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2년 전부터 찾아봤는데 건전지 공장서 일했다고…
전 수은 중독 영향 받았겠죠… 그분들의 상황, 이해해요
삶이 뭐냐고요?
사는 것 자체는 苦行이죠… 행복은 가끔 먹는 '초콜릿'
당신만 어려운 삶이라고 힘들어하지는 마세요
지난 14~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 오기 전 한 사람을 만나겠다고 발표했다. 교황청 공보실장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지난 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중 천주교 청주교구가 낙태된 아이들을 위해 꽃동네에 마련한 태아동산에서 기도하시게 되며, 이때 한국 선교사 한 명을 특별히 만난다"고 밝혔다. 롬바르디 신부는 "그는 매우 상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선교사"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까이서 보면 푸근한 할아버지 같으세요.”교황의 지명으로 일대일 대면을 했던 이구원 선교사는 교황과의 만남 이틀 후인 지난 18일 짧은 순간의 강렬한 감흥을 이야기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교황을 만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마당에서 놀던 강아지가 그에게 뛰어와 친한 척(?)을 했다. 충북 청주시 청원구 루카선교회 본부 건물에서. / 신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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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이 교황 방한 전에 만남을 공식 발표한 유일한 인물인 '그'는 성(聖) 황석두 루카 외방선교회(이하 루카선교회) 소속 이구원(24) 선교사다. 그는 선천성 사지절단증으로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다. 교황이 충북 음성 꽃동네를 방문한 지난 16일 오후, 그는 십자가 1000개가 꽂힌 태아동산 입구에서 휠체어에 앉아 교황을 맞았다. 교황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었다가 양손으로 쓰다듬고 부드럽게 이마를 짚었다.
교황이 한국을 떠나던 날인 지난 18일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루카선교회 본부에서 그를 만났다. "안녕하세요"라며 들어서는 그는 얼굴로만 보면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휠체어에 실려 있는 팔다리 없는 몸을 보고서야 그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입으로 모든 일을 한다. 휠체어에 달린 특수 장치를 입으로 조종해 이동한다. 입으로 막대기를 물고 타자를 쳐서 컴퓨터를 하고,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린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나이보다 어려보인다"고 했더니, "어휴, 다들 노안(老顔)이라고 하는데요"라며 웃었다.
◇교황이 방한 전 지명해 만난 유일한 인물
지난 16일 충북 음성군 꽃동네의 태아동산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휠체어에 앉은 이구원 선교사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 TV조선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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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중계를 보니 교황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나?
"제가 영어로 '한국에 와주셔서 감사하고, 만나뵙게 되어 기쁘다'고 인사드렸어요. 교황께서도 영어로 무언가 답을 하셨는데 주변이 시끄러워서 잘 못 들었어요. 교황을 뵌다는 생각에 제가 정신이 없었던 탓도 있고요."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연락을 받고 교황을 만난 것은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다.
"한 달 전쯤 소식을 들었는데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교황이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도 실감이 안 났죠. 가까이서 뵈니 인상이 참 푸근하셨어요. 근엄한 교황님이라기보다 이웃집 할아버지 같다고 할까요."
이 선교사는 1990년 5월 태어나자마자 서울 성가정입양원에 맡겨졌다. 몸통만 있는 아기를 입양하려는 가정은 한 군데도 없었다. 루카선교원을 설립하고 선교원 부설 미혼모 보호기관인 자모원을 운영하던 김동일 신부가 그의 사연을 듣게 됐다. 김 신부는 그를 입양하기 위해 선교원 사람들을 설득했다.
"장애가 심하다고 돌봐주지 않는다면 이 역시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해 7월 100일도 안 된 작은 아기 구원이는 선교회의 식구가 됐다. 24시간 누군가의 손이 필요한 그를 위해 모든 봉사자가 시간을 쪼개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화장실 가는 길을 돌봤다. 은퇴한 교사들은 국어와 영어 등 한 과목씩 맡아 구원이의 개인교사가 돼주었다.
선교원 사람들은 구원이를 돌보는 일이 "선교회 전체가 참여한 종합예술이었다"고 했다. '종합예술'에 힘입어 구원이는 장애인 특수학교인 청주혜화학교 초등부를 졸업하고, 고입과 대입은 검정고시로 마쳤다. 이어 대전가톨릭대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 신학과 석사 과정을 다니다 휴학 중이다.
―몸 상태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언제부터 의식하게 됐나.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어요. 1~3학년 과정은 집에서 배웠고, 4학년 때 처음 학교에 갔어요. 한 학부모가 안타까운 얼굴로 제 등하교를 도와주시던 선교사분께 '이 애는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부모도 없어서 어쩜 좋으냐'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야 알았어요. 제가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부모도 없어서 큰일이라는 것을요. 큰 충격이었어요."
―충격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겠다.
"10대 시절을 지날 때까지도 남들이 쳐다보고 수군대는 장애를 지녔다는 사실을 많이 의식했어요. 하지만 몸이 이렇다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한창 놀고 싶었던 때에 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는 거예요. 주로 집에서 지내야 했고, 같이 사는 사람 중엔 제 또래가 별로 없었죠. 손님들이야 왔다가 금방 갔으니까요."
―왜 신이 나만 다르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 적은 없었나.
이구원 선교사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아래 사진 오른쪽) 입으로 붓을 물고 완성한 여러 작품이 충북 청주시 루카선교회 본부 건물에 걸려 있다. 이 선교사 옆의 작품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화합을 이루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아래 왼쪽 사진은 생전의 김수환 추기경이 어린 이 선교사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 신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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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왜 이렇게 다를까, 그 이유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 힘들었죠. 하지만 하느님은 원래 모두에게 똑같은 걸 부여하지는 않으시잖아요. 조금씩 덜 줘서 서로 필요한 만큼 채워 나가게 하려는 것이죠. 누구에게나 다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삶이 더 풍성해지는 것일 테고요."
―이제는 자신이 남과 다른 이유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것인가?
"확신을 가졌다가도 흔들리지요. 평생 가는 확신은 없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새로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죠. 대학원 1학년을 마치고 서원(誓願) 준비를 하면서 휴학을 해야 했는데, 다시 집에서만 지내게 되자 적응이 잘 안 됐어요. 기도를 많이 했지만 마음이 여전히 풀리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휜 척추를 교정하는 척추측만증 수술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죠."
수술을 받은 것은 스무 살 때였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수술 전날 온갖 생각이 다 들었어요. 무서웠어요. 마취에서 못 깨어나면 어쩌나 싶다가도 아니, 안 깨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 자포자기하기도 했고요. 수술이 끝나고 누워 있는데 입술이 마르고 터져서 물이 마시고 싶어 죽겠더라고요. 그때 누군가 물에 적신 거즈를 입에 대줬어요. 그 물 한 모금이 입술에 닿자 살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그전까지 삶에 대해 회의한 것이 우스워졌어요. 물 한 모금이 이렇게 간절하고 고마운데, 그걸 모르고서 사느니 죽느니 하면서 고민했다니, 제가 교만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물을 마시고 싶다는 갈증이 살고 싶다는 갈망을 일깨우면서 그는 자신의 '다름'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나.
"길에서 아이들이 저를 보면 "어, 이 형은 팔다리가 없네?"라고 해요. 그러면 저는 "응, 원래 없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요. 아이들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요. 제가 다른 것이지 틀린 건 아니잖아요. 다르니까 무심결에 쳐다볼 수 있는 거죠. 저도 길에서 다른 장애인이 지나가면 쳐다볼 때가 있어요. 장애를 비웃거나 의식해서가 아니라 다르니까 시선이 가는 것이죠. 남들이 쳐다본다는 사실만으로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시 세상 속으로
1997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선교사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그는 7세.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공보다 작은 몸으로 공을 굴리는 모습에 많은 사람이 감동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언론 노출을 사양해왔다. 이번 교황 방문은 그를 다시 한번 세상 속으로 끌어낸 계기가 됐다.
―어릴 때 방송에 나간 이후로 인터뷰를 거절해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제가 스스로에 대해 확립이 된 후에 세상에 나서려고 했어요. 선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니, 선교회 방침에 순명(順命)해야 하는 점도 있었고요."
인터뷰 도중 점심 식사 시간이 됐다. 선교원 사람들이 본부 건물 1층에 마련된 식당에 모였다. 줄을 서서 흰 접시에 뷔페식으로 마련된 밥과 반찬을 담았다. 김치, 깻잎, 가지나물이 반찬인 소박한 끼니였다.
이 선교사의 옆자리에는 황보나 선교사가 앉았다. 황씨는 한 숟갈씩 천천히 그의 입에 넣어주면서 "이거 먹을래? 이거 줄까?" 물었다. 이 선교사가 입양되던 당시부터 그를 돌봐온 황씨는 "입양 직후에는 너무나 작아서 애처로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번은 장롱 밑으로 굴러 들어갔는데 제 손이 들어가지 않으니 도저히 밖으로 나오게 할 방법이 없어서 가는 막대로 몸통을 굴리다시피 해서 꺼낸 일도 있었어요."
―여전히 적응되지 않고 힘든 부분이 있나.
"일상의 불편함은 크지 않아요. 자주는 아니지만 외출도 해요. 정작 힘든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삶을 개척해 나가는데, 나는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이 안 나와서요. 주위 사람들은 제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만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 몸이 불편하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더 편하게 다가갈 수 있을 때도 있더라고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고요."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신의 삶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당신이 그들의 삶에 공감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사지가 멀쩡하다고 해서 삶이 안 힘든 건 아니잖아요.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저도 여러 번 했지만 그거야 보통 사람도 살면서 한두 번쯤 하는 것 아닌가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힘든 부분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저보다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도 많고요. 단순히 고통이 없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몸 상태가 어떻든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면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거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구원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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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 선교회 측에서는 "이구원 선교사가 상처받을 수 있으니 부모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간 언론 인터뷰를 거절해온 것도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했다. 인터뷰가 1시간 30분이 넘어갈 무렵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엄마 보고 싶지 않아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질문이 나올 법했는데. 하하. 안 보고 싶다면 거짓말이죠."
―입양된 사정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여기 분들을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여기고 살았기 때문에 부모님의 존재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2년 전 영화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아버지에 대한 상(像)을 그려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떠오르는 게 전혀 없는 거예요. 굉장히 서글펐어요. 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 알아보기 시작해서 지금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가 '알아낸' 부모는 건전지 공장에서 일하던 가난한 노동자였다. 그는 "내 몸이 이런 것은 아마도 수은 중독 탓인 것 같다"고 했다. 부모는 뱃속의 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한 판정을 위한 검사비를 감당할 형편이 못 됐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아내에게 "아이는 죽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아기를 서울 성가족입양원에 데려가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맡겼다. '구원'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다.
―자신을 버린 부모가 원망스럽지 않나.
"저를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게 아니라 사정이 안 돼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요. 아버지가 입양원 원장님께 쓴 편지를 봤어요. 저에게 미안한 마음을 많이 갖고 계셨어요. 집안 형편상 도저히 키울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두 분은 어찌 됐든 저를 낙태하지는 않았잖아요. 아마도 그분들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을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부모와 함께 살고 싶지는 않은지.
"지금은 때가 아닌 거 같아요. 언젠가 그럴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제가 제 자신에 대해서 더 확신을 갖고 나서…."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 선교사처럼 선천적으로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은 '오체불만족'(1999)을 쓴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38)와 '허그'(원제 Life without limits)를 쓴 호주의 닉 부이치치(32)다. 오토다케는 어머니의 의지와 본인의 노력으로 정상인과 동일한 교육과정을 밟고 와세다대를 졸업해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았으며, 닉 부이치치 역시 부모의 지원으로 일반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호주 로건 그리피스대를 졸업했다. 이 선교사는 1999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일본 도쿄에서 오토다케를 만났다. 그는 "오토다케를 존경하지만, 닉 부이치치가 좀 더 가까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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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난 오토다케보다 책으로 읽은 부이치치에 더 끌린 이유가 있다면?
"오토다케는 장애를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고 극복하려고 해요. 힘든 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이겨내는 과정을 너무 중요시하는 것 같았어요. 부이치치는 어렸을 때 자살 기도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죠. 극복해서 행복해지려 하기보다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점이 더 와 닿았어요. 그래야 남을 이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 같고요. 저도 고통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고통을 가진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싶어요."
'남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는 그는 2011년 1월 첫 서원식을 갖고 선교사의 길에 들어섰다. 장애가 무조건적인 극복의 대상이라고 보지 않듯이, 신앙 역시 무작정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선교사가 원래 꿈이었나.
"선교회의 식구로 살아왔지만 선교사가 제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신학교는 신부님 권유로 갔고요. 사실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어요. 서약을 한 동기도 신학교 동급생들처럼 매우 강렬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선교사의 길을 가다 보면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결정했어요."
―이제까지 선교회 식구로 살아온 것은 큰 행운이지 않나.
"제 스스로 돈을 벌어 살아가야 하는 노동의 부담이 없다는 것은 선물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하느님께서 배려해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동시에 고민도 돼요. 남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질 수 있잖아요. 이 부분은 다른 신학교 동기들에게도 숙제예요. 사제란 직업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다 보니 하루하루 벌어 먹고사는 치열함과는 거리가 있죠. 지나치게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반성을 해요."
―신은 고통도 주고 선물도 준 셈이다.
"그래서 제겐 신학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저를 다르게 만든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저의 삶으로 사랑을 전하고 배려해주고 도와주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죠."
―만약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소현세자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싶어요. 일찌감치 개혁과 개방을 꿈꾸던 분이라는 점이 끌려요. 그분이 더 오래 살았으면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더 빨리 인정받았을 거예요. 낙태 문제를 다룬 소설도 써보고 싶고요."
―앞으로의 계획은?
"뭐라고 한 방향으로 확정할 수 없어요. 삶은 진행형이니까요. 왜 살아야 되나, 고민하는 사람에 공감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은 분명해요. 선교사로 살든, 일반인으로 살든. 제 몸이 이렇게 된 것은 섭리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섭리에 따라 제가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교황과 만난 순간을 다시 떠올리던 그는 "교황님이 잊고 있던 제 좌우명을 다시 깨닫게 해줬다"고 말했다. 그의 좌우명은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이다. 그가 말하는 '타인과의 공감'도 좌우명에서 나왔다.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던 그는 언젠가 그가 미니홈피에 올렸다는 문장을 들려줬다. "사는 것 그 자체가 고행인 것 같습니다. 행복은 그 고통을 잠시 달래주는 초콜릿 정도. 그러니 너무 당신만 어려운 삶을 산다고 힘들어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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