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자연스러웠던 나의 기억·감정·행동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병을 상상해 보자. 뇌기능의 손상으로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의 존엄성까지 빼앗는 질병의 이름은 치매다. 고령화의 영향으로 치매 환자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는 2050년이 되면 전 세계 환자 수가 1억 명을 훌쩍 넘길 것으로 예측한다.
최근 친구의 어머니가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았다. "우리 엄마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 치매 환자 가족의 간병 스트레스는 다른 질환에 비해 더 심하다. 나의 가족이 함께 지낸 시간들을 잊어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치매 증상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치매는 대부분 소위 '착한 치매'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쏟아내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종일 중얼댄다. 한밤중에 환각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때론 폭력을 행사한다. 배회 증상으로 가족들이 온 동네를 헤매게 만든다. 병원이나 시설에 보내자니 마음이 아파서, 또 경제적인 문제로 중증 환자를 집에서 돌보는 사람이 꽤 있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지인은 "똑같은 폭언이라도 가족이니까 더 아프게 들리고, 병증에 대해 객관적 입장을 갖기 어려워 스트레스가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가족 간병 주 부양자의 상당수가 우울증을 호소한다. 간병자가 지병이 있는 경우 신체적으로 더 힘들다. 간병 기간이 길어지면 경제적 부담도 커진다. 심리적으로 벼랑에 내몰린 간병자가 살인·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3월과 4월 부산에서 치매 노모를 간병하던 중년의 자녀가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위기에 몰린 치매 환자 가족을 위해 연간 6일의 '치매 가족 휴가제'가 오는 9월부터 시행된다. 그나마 숨통을 틔우는 소식이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치매 환자와 가족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간병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개호(간병) 이직'과 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난 결과물인 '개호 독신'이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사람이 직장을 떠나는 개호 이직은 회사 입장에서도 손실이 크다. 독신의 자녀가 치매 부모 간병을 도맡는 개호 독신은 간병자의 사회적 고립을 부른다. 또 간병 때문에 정작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이들 앞에는 '노인 빈곤'이라는 미래가 기다린다. 일본이 미리 보여 주는 '우리의 내일'일지도 모른다.
노화와 간병이라는 단어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형제·자매라도 있는 우리 세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과 한 자녀 시대의 아이들 앞에는 더 가혹한 '노화-간병'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8일 자정을 기준으로 국내의 치매 환자 수는 66만 7천280명. 고령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를 하루라도 빨리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