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218. 묵상글 ( 사순 제1주일. - “어떻게 살 것인가?” . 등 )
* 07:0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글 추가
----------------------------------------------------
240218. 사순 제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더불어 광야 인생 순례 여정-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사순 제1주일 강론 제목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현실성을 지닌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32년전 1992년 1월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 미사때 제가 한 강론 제목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였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답답한 마음에 끊임없이 묻게되는 물음은 광야 순례 인생 여정,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요즘 매일 인용하게 되는 다산 어록에 나오는 말씀이 오늘도 참 좋습니다.
“공부는 나를 알아감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공부가 더욱 즐거워진다.”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요,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공부하는 평생학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공부가 진짜 평생공부요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제 좌우명이 뭔지 아십니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하루하루 살 때, 거품이나 환상, 허영은 사라지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역시 올해 2024년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시기 담화문도 참 깊고 풍부하며 참삶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를 통해 우리를 자유로 이끄십니다”라는 제하에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사순시기는 은총의 때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호세아 예언자의 말처럼, 광야는 다시 한번 우리 첫사랑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형성하시어 우리를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신랑처럼 우리 마음에 사랑의 말씀을 속삭이시며 우리를 당신께 다시 이끄십니다.”
2월18일자 오늘 가톨릭평화신문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1월30일 서울 명동 교구청 접견실에서 국민의 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예방을 받고 환담했다”는 기사 내용도 이채로웠습니다. 대주교는 한위원장에게 “전국을 누비시면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으실 텐데, 특히 작은 목소리에 더 귀기울여 들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으며, 한위원장은 “포용의 자세를 잘 배우도록 하겠다. 힘없는 소수를 대변하는 것이 정치의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노력하겠다” 화답했다 합니다.
좌우의 극단의 대립과 갈등, 분열의 상태에서 좌우를 함께 품에 안아야 하는, 어느 한쪽도 내칠수 없는 자비롭고 지혜로운 어머니 교회로서의 통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들지... 어머니 교회의 고뇌는 깊을 수뿐이 없습니다. 오늘날 광야 세상에서 겪게되는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순시기는 물론 우리의 평생 삶에 대한 궁극의 물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이 답을 줍니다. 끊임없는 영적전쟁의 광야여정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광야 여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꿈을,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삶을 압축 요약하고 있는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잘 살아야 나머지 삶을 잘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주님과 함께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전투의 삶이라하여 너무 심각하고 긴장하지 마십시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놀랍게도 즐거움이란 단어 둘을 오직 사순시기에 대한 장에서만 사용합니다. 앞서도 소개했지만 내용이 고맙고 고무적이라 다시 나눕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광야여정의 영적전쟁의 삶,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광야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우리 광야여정의 축소판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한 성령은 광야 여정중 사탄과의 영적전투중에도 예수님께 결정적 도움을 주셨음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희망이 생생하고, 성령은 물론 교회공동체 형제들의 우군이 있으며, 무엇보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영적승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면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광야는 낙원임을 잊지 마십시오.
광야를 광야로 받아들일 때 광야는 낙원이 된다고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오늘 광야여정중의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넘어가거나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떨어진 하와와 아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입니다.
사탄이 없는 곳이 낙원이 아니라 사탄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을 때 낙원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통과해가면서 영적성장에 낙원의 실현입니다. 유혹이 없이는 영적성장도 멈춥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아닌 성령께, 천사들에 귀를 기울이며 들짐승들과도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으니 그대로 지상 낙원의 실현입니다. 다음 복음의 짧은 대목이 예수님의 지상낙원의 삶을 요약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우리 삶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처럼 들짐승들 같은 사람들, 괴물같은 사람들, 사탄같은 사람들과도 평화로이 공존해야 하는 지상 낙원의 현실입니다. 자비와 지혜에 용기를 겸비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역시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영적승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천사들 또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광야여정중에도 낙원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와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탈출의 여정에 결정적 표지 역할을 하는 계약의 표징들인 무지개와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 홍수에서 살아난 노아와 그 가족들은 세례의 물로 구원받은 우리를 상징합니다.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구약의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라면 신약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는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구약 창세기의 계약의 표징은 무지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의 하느님을 제동하는 장치가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였다면, 이제 우리 교회의 시대에 하느님을 제동하는 유일한 장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뿐입니다. 광야 여정, 탈출의 여정에 우리의 결정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계약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광야여정, 탈출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영원한 길잡이가,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부단히 더불어 광야에서의 탈출의 여정을 통해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광야의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사는 참으로 역동적인 삶을 우리 신자들입니다. 바로 은총의 사순시기는 물론 전생애를 관통하는, 우리가 날마다 살아야 할, 다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아멘.
----------------------------------------------------
240218. 사순 제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2.18 06:30
- 성령의 승리와 단련을 위해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첫째 독서는 창세기 노아의 홍수 얘기이고,
둘째 독서 베드로 서간은 과거엔 노아가 물로 구원받았음을 얘기하면서
이젠 노아의 홍수보다 그 본형인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사순 제1주일은 먼저 물의 세례를 얘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물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에 대해 착각치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이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할 때
물을 섭취하면 살고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뜻으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물은 우리를 죽임으로써 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을 가지고 우리를 죽인 다음 살리시고,
우리는 물에 의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정교하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죽어야 할 내가 있고 살아야 할 내가 있는데
죽어야 할 나는 육의 나이고 살아야 할 나는 영의 나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육적인 나는 어떤 나입니까?
나를 추구하고 세상을 추구하는 나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없는 나와 하느님 없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자기와 세상을 추구하게 하는 육의 영은 죽어야 하고,
육의 영과 대결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기도와 헌신의 영이
성령을 모셔 들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뒤
복음을 공적으로 선포하시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나 루카 복음과 달리
유혹받으셨다는 얘기만 할 뿐 유혹의 내용을 얘기하지 않고,
유혹받았다는 짧은 보고에 이어 복음 선포의 시작을 짧게 기술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의도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비로소
복음 선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빼먹어선 안 될 것이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내보내시어 광야로 가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악령과의 대면은 성령께서 원하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는 자주 대면하고
악령과의 대면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악령은 피할 것이 아니라 대면하여 이겨야 하는 것이고,
대결하여 이겼을 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왜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악령은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피하다가는 우리는 교회 안이나 수도원에 갇힐 것이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시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악령의 유혹과 시련은 성령의 승리와 단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레 겁을 먹고 악령과의 대면을 피하는 것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시려는 성령의 인도를 뿌리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디모1,7)음을 믿으며 힘차게 나아갑시다.
오늘부터 강론을 다시 올린다고 말씀드렸는데
너무 죄송하게도 오늘 늦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강론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내일부터 심기일전 새로운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
240218. 사순 제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 다녀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순례 코스 중에서 광야 체험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몇 시간을 보내면서 광야가 어떤 곳인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광야는 사막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매우 덥고 따가운 햇빛을 맞으면서 살아야 했지만, 약간의 풀도 있고 또 물도 구할 수 있기에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와 같은 풍요로움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몇 시간 체험은 가능해도, 며칠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하느님 체험을 위해 많은 은수자가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고 하니, 사람들은 하느님 체험을 위해 광야로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광야에서 하느님 체험이 가능할까요? 단순히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장소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요?
세상과 동떨어진 이곳에서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볼 것이 너무 많습니다. 즉, 정작 하느님을 보는 데는 소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볼 것이 없어서, 하느님께 집중하는데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수자가 이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광야는 피해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찾아가는 곳이 되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이스라엘을 찾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도 세상에 파묻혀서 광야처럼 고통과 황량함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도 광야로 가셨습니다. 가뜩이나 불편하고 황량함이 가득한 광야인데, 여기에 사탄의 유혹까지 받게 되십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40일 동안을 말이지요. 어려운 장소에서 더 어려운 시간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싶은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유혹받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도 광야에 가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역시 유혹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장소로 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받으신 것을 왜 나는 안 된다고 말할까요?
그 시간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일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기쁜 소식이지요. 그런데 정작 그 주인공인 우리는 광야와 같은 곳을 피하면서 철저하게 쉽고 편한 것만을 쫓았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
오늘의 명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무라카미 하루키).
----------------------------------------------------
240218. 사순 제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새로운 때”와 “그때에 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끝부분을 들려줍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홍수의 물로 씻겨 진,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게 됩니다. 곧 “새로운 때”, “회개의 때”를 알립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노아의 방주를 ‘세례’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로 말하면서, “세례는 몸의 떼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1베드 3,21)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새로운 때”,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바른 양심을 입을 때” 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시어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마치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광야’에는 사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활동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시험을 받는 장소임과 동시에, 은총의 장소이기도 하고, “은총의 때”를 몰고 오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모세에게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에서 나와 주님께 제사를 드린 곳이요, 주님의 자비와 보호를 체험한 곳이었고, 엘리야에게는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한 곳이요, 호세아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끌려나갔던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광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그야말로 ‘광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순례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사랑의 외침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발설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것은 “때”가 찼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요,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이후 줄곧 준비해 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가까이 있다’는 말로 이미 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과 함께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져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루카 11,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믿음에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이미 먼저 선사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회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는 선사되었습니다.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며, 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회개” 입니다. 그러니, ‘회개’란 이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에서의 ‘회개’란 ‘뉘우치고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인 뉘우침과 동시에, 돌아오는 인격적인 행위를 포함합니다(슈브. 메타노이아). 그러니 단지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곳을 먼저 알아야 진정한 회개는 가능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인 ‘하느님의 나라’ 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로의 돌아옴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건설되도록 자신을 수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느님 사랑 안으로의 전환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가 아닌,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다스리고 실현시키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 들이는 일이요, 하느님의 의로움과 뜻에 전적으로 돌아서는 일, 바로 그 일 말입니다. 단지 도덕적인 참회와 윤리적인 통회만이 아니라, 생각과 태도와 가치관과 삶의 전인격인 전환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제 삶 안에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
240218. 사순 제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은 은총의 시작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용기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유혹에 관해 묵상하며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시조 한 수 읊어 드리겠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는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창건하려는 야심을 품은 이방원이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시조 한 수를 들려주면서 마음을 떠본 내용입니다. 칡넝쿨처럼 서로 얽혀서 옛 왕조, 새 왕조 따지지 말고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에 정몽주가 시조 한 수를 지어 변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정몽주는 이런 충절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100여 년의 박해 동안 만여 명이 넘는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온갖 유혹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임 향한 일편단심”을 버리지 않은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청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온갖 허례허식과 마귀를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서약을 잘 지켜야 합니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주님보다 세상의 소유와 지배, 재물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 온갖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을 청하며 기도합니다.
저는 신부가 되어 10여 년 뒤에 사회복지 공부를 했습니다. 조치원역에서 서울로 야간열차를 이용하며 대학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충남 조치원역에 새벽 0시10분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역 앞을 나오기가 무섭게 아가씨들이 달라붙어 말합니다. “오빠, 따뜻한 방 있어요, 쉬고 가세요!” 그러면 제가 “내 방도 따뜻한데요!”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로만 칼라를 제대로 하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아가씨들은 여전히 달라붙었지요. 제가 기분이 좋았을까요?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지쳐서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따듯한 방 있어요!”하고 아가씨가 달라붙는다면 한 번쯤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물론 가치관이 두렷한 사람이나 배우자에게 신뢰와 사랑이 있는 사람이 어디다 한눈을 팔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악의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오고 내가 약해졌을 때를 이용하는 법입니다. 유혹은 항상 옆에 있습니다. 우리는 유혹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간교한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데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창세3,6).고 했습니다. “먹음직하고 탐스러운”게 문제입니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재물이나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밟고 올라서게 하는 죄로 이끕니다. 시기 질투하는 마음, 이기심, 미움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식욕이 때로는 탐식하게 만들고 성적인 욕망이 음란의 죄로 이끌고, 휴식에 대한 욕망이 게으름으로 젖어 들게 합니다.
유혹이란 부정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를 꼬이는 것을 의미하고, 올바른 생활 원칙에서 돌아서게 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첫째로 자만해서입니다. “너는 네 사악함으로 자신만만하여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하고 말하였다. 너의 지혜와 지식이 너를 현혹시켜 너는 마음속으로‘나뿐이다. 나밖에는 없다’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불행이 너에게 들이닥치리니 너는 그것을 요술로도 막아내지 못하리라”(이사47,10.11). 둘째로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신다”(1역대28,9). 집회서를 보면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42,2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남이 모른다고 생각할 때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욕심에 끌려서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면 좋겠는데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심이 우리를 흔듭니다. 정말이지 그칠 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야고 1,14-15).
그러나 유혹은 긍정적으로 볼 때 은총의 시작입니다. 이 유혹을 통해서 나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내 자신의 상태를 결정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유혹은 주님께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유혹에서 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유혹을 극복하게 됩니다.
히브리서에서는“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히브2,18).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유혹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할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유혹은 더없이 큰 은총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곳에 구원해야 할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목마르고 배고프고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온갖 유혹이 있는 이 세상이 광야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몸소 유혹받으시고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그분이 유혹받으셨기에 유혹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쉽게 유혹에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유혹당할 기회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비쭉, 작심삼일입니다. 아무쪼록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지 말고, 주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여 은총으로 만드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218. 사순 제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1982년 서울 가톨릭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동창 중에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이 있습니다. 두 신부님 모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분입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지난 5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전임 신부님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전에 7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신부님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저와 초등학교 동창이고, 같은 본당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함께 했기에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죽마고우입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신학생들을 위한 영신수련 피정을 함께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영적으로 훌륭하십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사목의 경험이 풍부하십니다. 한분도 아니고 전임신부님 두 분이 모두 저와 동창신부님이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부족하기에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성전 신축이라는 씨를 뿌렸습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깊은 영성으로 물을 주었습니다. 저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표징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표징을 통해서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로도, 불로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곳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할 수 있는 표징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댈러스 교구로부터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할 수 있다는 공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로부터 댈러스 한인 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하라는 파견을 받았습니다. 저의 표징은 서울대교구의 파견과 댈러스 교구의 임명이라는 공문입니다. 공적인 표징은 그렇지만 제게는 또 다른 표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예수님처럼 착한목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또 다른 표징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바른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바른 양심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큰 덕목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부끄러움을 몰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던 자캐오는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식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원리와 기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
240218. 사순 제1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례의 의미를 기억하십니까? 세례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큰 것들을 이야기 하자면, 첫 번째는 죽고 새로 태어남입니다.
세상 것에 죽고, 내안에 가득차서 진짜 내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하는 욕심과 악습에서 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삶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겠다는 각오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이고 우리가 받은 세례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에서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인데 그 영이 고통과 힘겨움과 유혹이 있는 광야로 예수님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성령은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광야로 왜 보냈을까요?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죽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처럼 모든 것을 겪어야 하셨습니다.
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곳, 아니 인간이 되어야 하는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세 가지 큰 유혹을 받으시는데 그것을 하나로 묶으면 ‘하느님을 떠나라.’입니다.
광야는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시험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도 광야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유혹받습니다. 하느님을 등지라는 유혹을 얼마나 많이 받고 살아갑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라는 유혹을 얼마나 많이 받습니까?
광야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광야는 유혹받는 장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에 기쁨이 흐를 것입니다. 광야에 샘이 솟아 흐르게 될 것입니다.
--------------
어딘가 계속 샙니다.
타이어에 공기가 모자란다고
운전 중 알림이 떴습니다.
그래서 바람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2주나 지났을까요.
다시 알람이 떴습니다. 또다시 바람을 넣었습니다.
다른 곳에는 이상이 없답니다.
제 차는 10년이 훌쩍 넘은 차입니다.
혹시 알람이 고장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타이어 공기가 모자란답니다.
다시 카센터를 찾았습니다.
정말, 다시 꼼꼼히 봐달라고 했습니다. 찬찬히 봐달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아주 작은 못이 박혀 있었다는 것을….
어딘가 계속 샌다면,
어딘가 계속 아프거나 넘어진다면
꼼꼼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분명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차도…. 나도….
----------------------------------------------------
240218. 사순 제1주일. 키엣 대주교님.
광야로 들어가십시오
성령이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유혹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혹독한 자기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맞이한 시련은 혹독한 자연이었습니다. 풀조차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뼈가 시릴 정도의 추위와 모래, 굶주린 들짐승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사탄과의 싸움, 믿음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유혹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욥은 비록 재산과 자녀, 명예를 잃었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탄의 모든 유혹에 승리하셨습니다.
세번째 시련은 하느님에 대한 의지를 말살하는 유혹입니다.
유혹은 그 사람의 제일 약한 부분을 건드리기에 거절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더 주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자만과 나만의 안락함을 버리고 겸손과 주님의 길을 따른다면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단지 시련만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주님을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비록 힘든 광야이지만 시련을 극복한다면 주님을 만나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시나이에서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고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이루게 된 모세의 밝게 빛나는 모습을 유다인들은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번 사순 시기, 하느님의 영을 모실 수 있도록 예수님과 함께 광야를 체험해보기 바랍니다.
광야는 이제 더 이상 물리적인 공간, 험악한 사막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혼자 외로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지금의 광야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삶의 고난과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입니다.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떠한 유혹에도 언제나 주님께 의탁하겠다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주님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 나의 뜻을 버리고, 고통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언제나 주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영적 평화를 유지하며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함으로써 주님의 진정한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영혼의 단련을 통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덕과 믿음의 길로 가십시오.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시련이 닥쳤을 때 그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2.사탄의 유혹을 받아보았습니까?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3. 주님의 사람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
240218. 사순 제1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광야에서 삶의 자리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홀로 젖어 들어가는 외로움이
오히려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무관심의 행복과
하릴없는 쉼의 기쁨으로
내 탓 없이 서서히 변질되어가고
이러면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쉼 없이 뇌까리면서
박차고 일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괜찮아 다 괜찮아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달콤한 유혹의 손길이
나를 더욱 움켜잡으려드니
무엇이 이러면 안 되는 것인지
무엇이 괜찮고 다 괜찮은 것인지
이도 저도 그저 내 것 아닌 양
될 대로 되라 내 탓 아니니
나의 밖으로 스스로 나를 몰아내고
나 없는 나에 숨어 즐기려하다가
삶의 자리로 떠나보내시기에 앞서
나의 하느님께서 내게 당신 뜻 심으려고
잠시 머물도록 애써 마련하신 광야에서
나를 열어 하느님과 벗과 나를 품어야만
이내 맞이할 삶의 자리에서
굳게 믿고 밝게 희망하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으니
그저 홀로 머무는 듯한 광야에서
하느님 안의 나를 내 안의 하느님을
벗 안의 나를 내 안의 벗을
나마저 팽개쳤던 나를
다시 정성스럽고 곱게 보듬어
그 어디든 내가 깃들 삶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
240218. 사순 제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이미 받은 세례를 다시 생각하고 참회행위를 통해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몸소 사는 시기입니다.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는 회개와 사랑을 사는 집중적인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시기에 회개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침묵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은 다른 말로 절제요 단식이요 끊음이요 돌아섬이자 초월입니다. 이 침묵은 혀의 침묵, 눈의 침묵, 귀의 침묵, 감정의 침묵, 생각의 침묵 그리고 마음의 침묵을 포함합니다.
침묵을 지키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고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결점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자신의 진보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허하고 비천한 인식에서 회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침묵은 참된 자기를 만나게 하고 자기 마음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침묵은 또한 끊임없이 다른 이를 심판하고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침묵은 자신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게 합니다. 침묵은 자신이 지닌 결점과 어두운 면들을 다른 이에게 투영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오관의 침묵을 넘어 마음까지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주 의식적 침묵의 훈련이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입견 없이 다른 이를 바라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이에 대해 말하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마음의 끊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해 판단 기준은 ‘남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음에 있음’을 성인들의 체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이를 심판하는 사람은 아직 자기 자신을 진정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 자비롭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침묵을 통해서 마음속 깊이 체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자신과 자신 내면의 실재를 만나게 됩니다. 침묵은 또한 무엇인가 끊임없이 집착하는 무의미하고 헛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줍니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힘을 얻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며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믿고 살아온 삶의 구조가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세상을 더 이상 친구와 원수, 내 맘에 드는 사람들과 들지 않는 사람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로 아우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마더 데레사의 침묵의 체험을 나눕니다.
“침묵의 열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봉사의 열매는 침묵입니다”
-----------------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체성사를 위해 죽은 개종한 프로테스탄트
이탈리아-19세기
언젠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써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에 교만한 사울에게 하셨던 것과 같이 거만하고 믿음이 없는 이 사람에게도 당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던 것이다. 이 성체의 기적으로 아르투르 남작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세례받기를 청하였고 심지어 후에 예수회에 들어가 독실한 생활로 예수회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성체 행렬에서 은총을 받은 이후로 성체께 대한 아르투르 남작의 열렬한 홈숭은 언제나 탁월하였다. 밤낮으로 몇 시간씩 그는 감실 앞에서 기도하였다. 그는 종종 사량의 성체성사때에 성체의 형태룰 취하신 구세주께서 당하시는 차가움, 미지근함, 모욕, 그리고 신성모독에 대한 속죄의 희생 양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구세주이신 성체께 바치겠다고 기도드렸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영웅적인 속죄의 희생 양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그리하여 한때 프로테스탄트였던 그는 성체의 순교자가 될 수 있었다….
부활절 즈음에 수도원장은 예수회 신부인 아르투르를, 주임신부를 보좌하도록 자비너 산으로 보냈다. 당시 그 지방은 광포한 도둑들의 은신처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 밤늦게 주임신부는 환자방문을 나갔다. 아르투르 신부는 사제관 창문가에 서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경이에 찬 시선으로 별이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기도를 하면서 성당 창문 사이로 보이는 중앙제대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성체등의 불빛 속에서 한 그림자가 중앙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본 듯 하였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곧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성당으로 서둘러 갔다. 그는 열려진 창문을 통하여 도둑들이 황금으로 된 성작을 훔치기 위해 감실을 부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그는 탑 옆에 있는 쇠파이프로 그 도둑들을 쫓아버릴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르투르 신부는 생명의 빵을 나누어 준 손으로 그들이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해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만두었다.(25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