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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종교전쟁)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30년 전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립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전제군주정과 봉건 제도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이 국가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제후국 및 반대하는 제후국 간의 다툼이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각국의 이해 관계가 교차하는 근대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참전 국가들은 수많은 용병을 고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수록 종교적 색채는 옅어지고 유럽의 정치적 구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세력 구도가 종교가 아닌, 국가 간의 대립으로 바뀌게 된다.
전쟁은 새로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영토에서 반종교개혁을 시행했다. 로마 가톨릭을 그의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종교 선택의 권리가 위반되자 분노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반대했다.
(이때 독일 지역은 영주가 종교를 선택하면, 주민은 영주의 종교를 무조건 따라야 했다.
이것이 전쟁의 불씨를 더 크게 키웠다.0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던 개신교 국가 보헤미아 왕국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덴마크의 패배 이후 이를 대신해 스웨덴 제국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도 1630년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계속 포위당하고 있던 로마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도 스웨덴 제국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1635년부터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다.
30년 전쟁은 독일 전역을 기근과 질병으로 파괴했다. 특히 보헤미아 왕국과 남부 네덜란드 및 독일과 이탈리아에 위치한 국가들의 인구가 급감했다. 용병과 병사들 모두 기여금을 받기 위해 공헌을 위장하거나 마을을 약탈했으며 점령당한 영토 거주민들의 생활고는 심해졌다. 전국 대부분은 파산 위기에 몰렸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신흥 강대국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을 공인받은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스웨덴 제국도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17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복잡한 전쟁 양상을 띄우면서 이리 싸우고, 저리 싸우는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하여간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오늘의 유럽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 이 전쟁으로 영국, 프랑스가 떠오르고, 신성로마제국(독일)은 시들해졌다.
독일은 30년 전쟁의 전쟁터가 되면서 역사적으로 큰 상처를 안게 되었다.
***미국 국민에서 독일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높다. 이와 같은 혼란으로 독일의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
스페인의 중세에는 기사도 문학(음유시인에 의하여 낭송된 문학으로서 로망스라고 하고, 거의가 기사의 무용담과 연애담이다)이 유행하였다. 16세기가 끝나 갈 무렵에는 기사도는 이미 한물 간 유형의 인물이었지만 민간에서 대중소설로서는 널리 퍼져 있었다. 중세에 대한 일종의 향수이기도 하였다.
16세기 말의 스페인은 영국의 등장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1588년에 무적함대가 영국에 의하여 무너졌다. 무역의 중심은 네델란드 쪽으로 옮겨갔다. 쇠퇴기에 접어든 스페인 국민은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향수에 매달려서 기사도 문학을 즐기고 있었다. 돈키호테는 이러한 사회를 배경을 태어났다.
기사도 소설이 유행하는 또 하나의 배경으로 ‘레콩까스타(recoonquista)를 꼽기도 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잠시 기독교 세력의 지배를 받을 때 이슬람으로 무장한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처들어 와서 지배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국가였던 스페인의 귀족 세력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스페인 귀족의 이 투쟁을 레콩까스타 라고 하였다. 스페인 귀족의 투쟁 정신(기사도 정신)과 더불어 기독교 정신으로도 해석이 된다. 이것이 중세의 정신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호황도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이때 유행한 기사도 소설은 이러한 배경을 가졌다.
돈키호테(1권)는 대중에게 유행하였던 기사도 시리즈에 일종의 조소와 풍자였다. 조소와 풍자는 소설 속의 인물이 소설 속의 다른 인물에게 내뱉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소설 밖의 독자에게 보내는 풍자이기도 하다. 결국은 과거의 향수에 젖어서 무기력해진 스페인 사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돈키호테의 풍자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풍자이다 돈키호테가 오늘까지 고전으로 명성을 얻은 이유이다.
소설의 내용은 허구이다. 허구성은 소설들 중에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오테를 쓸 때 스페인은 전성기가 지나고, 기울어지고 있었다. 스페인의 민중은 과거에 향수 심리를 가지고,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스페인 민중이 갖고 있는 향수심리를 조롱하였다.
시대가 변하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야지, 잘 나갔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을 조롱했다.
그가 조롱한 것은 단순히 철 지난 기사도를 그리워하는 민중이 아니고
당시에 스페인을 지배하던 커톨릭이며, 정치 상황 등 여러 사회-정신의 분위기라고 한다.)
시골 신사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탓에 그만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다. 그는 (판자로 만든) 갑옷을 입고 (늙어서 병들고 삐삐마른) 준마를 타고 기사가 되어서 모험의 길애 나선다. 그는 동네 주막의 창녀를 고귀한 신분의 공주로, 도둑놈 같은 주막 주인을 성의 영주라면서 일장 연설을 한다. 기사의 작위를 얻기 위해서 우물 가에 자신의 갑옷을 벗어놓고 지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기사의 로맨틱한 사랑을 풍자하는 것과, 그때까지 신성시하였던 각종 종교 의식, 봉건사회의 계급 구조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이것은 당시의 유럽에는 자본주의의 대두와 세속적인 바람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이 도전받고 있었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돈키호테 기사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로 수많은 독자들을 만난다.
1615년에는 돈키호테 속편(2권)을 발표한다. 독자가 1권을 읽었다는 전제를 학 이야기를 펼친다. 돈키호테와 산초를 모두 알고 있다는 내용과 그 안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읽을 거리를 창조해냈다. 이것이 돈키호테의 매력이다. 이것은 현실의 부정이고, 꿈을 향하는 투쟁이기도 하였다.
돈키호테는 불가능한 꿈을 향하여 달리고, 꿈꾸기 위하여 광기를 부린다. 남이 보는 세상과 자기가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사실에 괘념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햄릿과 대비되는 유형의 인간으로 말한다. 햄릿이 이성의 소심함과 망설임을 상징한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꿈을 위하여 광기를 부리고, 광기를 찬미한다. 햄릿은 행동을 주저하면서 자신을 정신이상으로 위장하지만, 사실은 정신이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지 못한다. 우리의 내면에는 돈키호테와 햄릿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돈키호테는 죽음을 맞이한다. 돈키호테는 풍자 속에서 다양한 읽기가 가능하도록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것이 고전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 태생이다. 할아버지는 종교재판소 변호사였고, 아버지는 하급 귀족 가문의 외과 의사여서 매우 가난했다. 이에 세르반테스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족은 여러 도시로 이사를 다녔다. 이외의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570년 22세 때 이탈리아의 추기경을 따라 로마로 건너가 군인이 되어 레판토 해전에 참가했으나 부상으로 왼손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1575년에는 해적에게 잡혀 알제리에서 5년간 노예로 생활하다가, 성 삼위일체 수도회의 도움으로 주인에게 몸값을 지급하고 가족이 사는 마드리드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585년 소설 『라 갈라테아』를 출판하였으나 인기를 별로 끌지 못하였다. 1605년 《돈 키호테》 제1부를 발표하여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나 생활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1615년 《돈 키호테》 제2부를 완성했지만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1616년 4월 23일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르반테스(1547 - 1616)
미겔 델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의 마드리드 인근인 에나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서 의사였으나 무능하여 가족을 건사하지 못하였다. 채권자를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처지이다보니 세르반테스는 정식으로 교육받을 수 없었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읽을거리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읽고,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광고 쪼가리도 눈에 띄이면 주워서 읽었다. 활자 중독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의 유년은 한 마디 가난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작품 속의 인물처럼 낙천적이었다ㅣ. 자신의 가난했던 시절을 이렇게 농담하듯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양념은 가난이다. 가난한 사람은 굶주려 있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언제나 맛있게 먹을 수 있다.’
1569년에는 군에 들어갔다. 그가 복무한 군대는 이태리의 베니스에 주둔했다. 군 복무 시절에 스페인 황제 펠리페 2세의 왕비를 추모하는 시를 썼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세르반테스의 최초의 작품이다.
1571년에 유명한 레판토 해전이 있었다. 레판토 해전은 신성동맹(오스만 터키의 팽창을 저기하기 위한 카톨릭 국가들의 해상 연맹)과 터키군 사이에 레판토 지역에서 붙은 해전이다. 베니스 주둔했던 군대가 최전선에 나셨다. 세르반테스도 군대를 따라서 전투에 참전했다. 이때 가슴과 왼손에 화승총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왼손은 영원히 쓸 수 없었다. 그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과 흉터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이런 말을 남겼다. ‘오른 손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왼팔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오스만 터키에 대항하여 싸운 서방의 중심세력이 베니스 였다. 터키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화약 창고로 사용했고, 베니스는 포격을 가하여 폭파함으로, 신전이 오늘의 모습으로 되었다고 한다.)
1575년에 군에서 제대를 하고 고향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지중해 바다에서 해적선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알제리로 끌려갔다. 몸 값을 지불하지 못해서 5년 간이나 노예생활을 하면서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580년에 가족과 성삼위일체 수도회의 수도사 도움으로 몸값을 마련하여 겨우 풀려났다. 후일에 나온 그의 작품에는 이때의 경험이 나오기도 한다.
제대를 한 직후에는 전쟁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았으나, 스페인으로 돌아오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영웅 대접도 잊혀졌다. 그를 영웅으로 대접하는 이도 없었을 뿐아니라 일자리도 얻지 못했다. 가난했던 그의 집안은 몸값을 마련하느라 더 가난해졌다. 생계가 막막하지 자신의 글솜씨를 맏은 그는 글로서 생계를 유지하기로 마음 먹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3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남아 있는 작품도 몇 편 뿐이다.) 목에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1583년에 유부녀인 프랑카 데 로히스와 연애하여 딸 이사벨을 낳았다. 이사벨은 세르반테스의 유일한 후손이다.
1585년에 발표한 목가적인 로맨스 소설 ‘라 갈라테아’가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이 해에 아버지가 죽자 글로서는 생계 유지가 어려워서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을 찾아 나선다. 무적함대의 군수품 징수관, 세금 징수관 등의 말단 관리직에서 생활을 꾸렸다. 10년 간의 관리생활이었지만 회계장부상의 부정으로 징역도 살았다. 세비야에서 투옥 생활을 할 동안에 구상한 작품이 ‘돈키호테’라고 한다. 돈키호테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을 하였는지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1605년에 돈키호테 1부를 발표했다. 돈키호테는 출판되자 말자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세르반테스는 당시에 생계가 어려웠으므로 생계를 위해 출판권을 출판사에 넘겨버렸으므로, 돈키호테가 인기를 끌었어도 생계는 여전히 어려웠다.
소설 ‘돈키호테’의 내용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세르반테스는 이 작품을 통해 서사적이면서도 희곡적인 작법에서 탈피하여 현대소설의 양식을 발현시켰다. 독자의 관심을 이야기의 줄거리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향하도록 했다. 돈키호테는 발표 당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가지도록 했다.
그에 관한 일화를 보자.
스페인의 왕 펠리페 3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책을 읽다가, 울다가, 웃다가 하는 사람을 보았다. 왕은 말했다. ‘저놈은 미친 놈이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거야.’
돈키호테를 최초의 소설이며, 스페인의 국민문학이라고 평가한다.
1616년에 세르반테스는 말년에 앓고 있던 수종증이 악화되어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숨을 거둔 마지막 셋집이 있는 곳은 마드리드 중심부에 2개의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지금은 이 거리를 세르반테스 거리로 명명하였다.
세르반테스의 마지막 작품의 서문에는
“안녕, 아름다움이여, 재미있는 글들이여, 안녕, 즐거운 친구들이여, 곧 다른 세상에서 그대들을 만나길 바라며 나는 죽어가고 있다.”
2. 라블레(1510-1553)
프랑스의 수도사이며, 의사이다. 다방면을 공부하고, 여행한 지식을 가지고 소설을 썼다.(이때는 운문(시형식 문장)은 고급 문장이고, 산문은 상눔이나 읽는 글로 췩급했다.)
라블레는 당시에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가르강튀아 연대기를 바탕으로 하여 소설을 썼다. 겅박한 이야기로 멸시를 받던 소설이라는 방법으로, 해학과 풍자를 선보이며 시회를 비판하였고, 또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 했다. 그의 책은 금서가 되었고, 박해를 받았다. 박해를 피해 도망다녔다. 죽기 직전에서야 도망다니기를 멈췄다고 한다.
그때는 종교개혁 운동이 불타오르던 시대라서, 카톨릭에 대한 비판은 바로 중세 사회의 가치관과 종교관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궁정문학 형식이 아닌, 인문학 양식으로 책을 썼다. 과학을 옹호하고(카톨릭에는 비판이 된다.), 전쟁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해방과 유토피아적인 사회 건설을 주장했다. 언어 표현은 과장하고, 익살스런 방식이어서 언어유희적 표현이 많다고 한다. 풍부한 어휘로 풍자하였다. 그러나 박식한 내용으로 재미를 주었다. (말장난 하듯 하는 표현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라블레 작품은 웃음을 주지만,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어 어렵다고 말한다. 라블레는 법과 신학을 먼저 한 뒤에 의학 공부를 했다. 인간의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 신체를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러불래눈 인간의 육체적 삶은 중요시 했다. 이것은 중세의 시대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육체적인 삶은 성적인 요소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에는 군데군데 야한 일화를 끼워 넣었다. 독자를 붙잡아 두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인간은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육체적인 면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수도사나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고상한 노력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물질(본능적과 가까운 의미이다.)이다.”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물질성이 나쁜 것만 아니고 좋은 것이기도 하다.는 가르침을 준다.
사람은 자기가 신봉하는 원칙에 따라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고 원칙에만 매달리다 보면 삶의 목표 자체가 무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책의 내용이 이런 주장을 담고 있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정의 글이다.
3. 라 퐁텐느(1621 – 1695)
프랑스의 우화 작가로 라 퐁텐느의 우화집이 유명하다.
동물을 의인화하여 도덕적 우화 장르를 개척한 작가이다. 단막 희극 형식으로 독창적 사회 비판 우화를 만들었다.
1661년에 왕실 어용학자에ㅓ 해임 당하고, 귀족 부인의 살롱에서 활동하면서 몰리에르, 라신 등과 사귀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라 퐁텐은 아주 사실적이며, 해학 뒤에 날카로운 비판이 있다.
라 퐁텐느 (1621-)
1621년 7월 8일 프랑스 샹파뉴의 샤토티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연 속에서 성장하면서, 자연과 자유를 사랑하게 되었다. 후에는 고전을 연구하며 시·극·우화 등을 썼다.
1668년에서 1695년까지 발표한 시문으로 된 우화집으로 유명하다. 라 퐁텐의 우화는 이솝 우화에 비해 내용 면에서 인간 세태에 대한 풍자의 강도가 세다.
(그의 우화집은 산문 형식이 아니고, 시 형식이다.)
루이 14세의 여섯 살 난 손자에게 헌정된 최초의 우화집인 《우화 선집》(Fables Choisies)에는 124개의 우화가 실려 있는데, 동물에 비교하여 사람의 참다운 모습을 생각케 해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프랑스 언어의 시적 기능을 잘 살린 수작으로 꼽힌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지식인들은 라 퐁텐의 시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1995년 프랑스에서는 라 퐁텐과 우화 기념우표 시리즈를 발간한 바 있다.
라 퐁텐느
는 우화가 교훈적인 장르, 혹은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르라고 말하는 전
통적인 생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교훈이나 메시지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화는 하나의 이야기이며, 이야기에 중요한 것은 즐
거움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즐거움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긴장과 도발에 의
하여 창출되고,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야기는 그 끈을 이어간다는 것이
다.
<<작품론?
즉 단선적이고 간단명료한 이야기 구조를 통하여 교훈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우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우화임을 말한다.
이야기를 보다 단순하면서도 (교훈 전달이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우화를 썼다고 평한다.
이야기의 단절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독서를 편하게 하려면 하나의 이야
기가 논리적으로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라 퐁텐느의 우화에는
이러한 독서의 안락함이 없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와 명쾌한 교훈, 이러한 것이 우화의 기본 덕목임에 틀림
없지만 라 퐁텐느의 우화는 기존 우화의 개념을 여지없이 파괴한다.
라 퐁텐느는 잘 계산된 고도의 수사학적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작품 여우와 포도를 보자.
어느 교활한 또 어떤 사람들이 허풍쟁이라고 말하는 여우가,거의 배고파 죽게 되었을 때, 높은 곳에 분명히 잘 익고 자주빛 껍질로 덮인 포도넝쿨을 보았다.
꾀많은 여우는 그걸 즐거이 식사로 하고 싶었지만 닿을 수 없었으므로 – <포도가 너무 파래, 그는 말했다, 종놈들이나 먹기 꼭 알맞겠어>
이솦 우화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이솦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국어로는 《라 퐁텐 우화집》 또는 《라 퐁텐 그림우화》와 같은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작품 한 편을 읽어보자.
늑대와 어린 양 : 어린 양이 목을 축이고 있었다. 먹을 것을 찾고 있던 배고픈 늑대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누가 내 물을 흐려 놓으라고 했지? 네 행동은 벌을 받아 마땅해." 늑대는 호통을 쳤다. "늑대님,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저는 늑대님의 옹달샘에서 스무 발자국이나 떨어진 곳에서 목을 축였어요. 제가 늑대님의 옹달샘을 흐려 놓다니요." 어린 양은 있는 힘껏 변명을 해댔다. "시끄러, 너는 작년에도 내 샘을 흐려 놓았어." 늑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저는 작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이제 막 엄마 젖을 떼었단 말이에요." 어린 양은 계속 변명을 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네 형이 그랬겠지." 늑대는 좀처럼 믿지 않았다. "저는 형제가 없어요." "그렇다면 네 가족 중 누군가 그랬겠지. 게다가 너를 치는 목동이나 개들이 나를 얼마나 귀찮게 하는 줄 알아? 그 벌을 네가 대신 받아야겠어." 늑대는 어린 양의 설명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숲으로 물고 가 버렸다.
4. 몰리리에르의 ‘인간 혐오자’
몰리에르(1622-1673)는 파리 출신으로 궁정장식가인 부르주아지 집안에서 태어나서 정규적인 교육을 받았다. 세익스피어의 바로 다음 세대이다.
작품을 보자.(인간 혐오자를 읽어 보십시오)
주인공 알세스트는 스스로 귀족이지만 완고할 정도로 귀족 사회의 표리부동함에 대해서 꼬장꼬장 따진다. 작품은 한편으로는 경박하고도 위선적인 사교계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어진 세계와 인간을 무작정 경멸하는 상류층 인간형을 동시에 비판한다. 알세스트는 인간을 혐오하고 세계를 혐오한다. 이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이른바 시토이앙(?)과 같은 강직한 양심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오만한 허영심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의 궁정사회는 허영심과 아첨으로 차 있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조명한다. 몰리에는 인간이 갖는 적대적인 솔직함과 우호적인 기만 사이에 벌어지는 기본적인 갈등을 다루었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공연되고 있다.
몰리에르 작품은 패러디와 풍자로 온갖 우수꽝스러운 표현을 하여 상류층 사람의 허장성세, 표리부동을 꼬집는다. ‘인간 혐오자’, ‘돈 주앙’이 몰리에르의 특성을 잘 나타낸 대표작으로 꼽는다.
당시에 몰리에르는 ‘인간 혐오자’를 잔뜩 기대하고 공연하였으나 인기가 없었다. 몰리에는 극에 간계라든지 어떤 플롯을 만들어 넣기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 관계를 고조시키는 형식의 작품을 썼다. 몰리에르 희극에는, 인간은 처음부터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 편견과 아집이 부딪히면서 갈등을 이르킨다.
프랑스 철학자 라로슈코프는, ‘인간은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집과 편견이 가득 차 있다.’라고 했다.
(*돈 주앙-돈 후안이라고도 하며, 이태리어로는 돈 조반니 이다. 스페인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돈 주앙’은 상대방 여자는 완전 무시하고, 자기 욕망만 채운다.
‘카사노바’는 하룻밤만 자도 여자를 무시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대한다고 했다.
바이런의 시 ‘돈 주앙’도 유명하다. 여자에게 유혹당하는 남자로 묘사하며,
풍자를 담고 있다.)
최근에는 뮤지컬, 연극, 영화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시대를 바로크 시대라 하고, 소개하는 문학인은 바로크 시대의 작가이다.
바로크 시대는 르네상스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대로, 르레상스(진주)의 좋은 점을 망쳤다면서, 후대의 비평가가 붙인 이름이다.
바로크(Baroque)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르네상스의 미술(진주)을 망쳐놓았다는 뜻이다. 문학에서도 중세의 전통을 벗어(망친 것인지 모르겠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