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82]땅을 놀리면 진짜 안되는가?
힘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게 농사農事인 것은 틀림없다. 누구라도 ‘안하면 되지 않냐’고 말을 쉽게 하지만, 멀쩡한 밭을 놀린다는 게, 농심農心으로는 '천벌天罰 받는다’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반거들충이 농부인 나로서도 뒷밭 300여평을 도저히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이웃마을 형님에게 비닐하우스 폴대만 세워달라고 했다. 비교적 농약을 하지 않아도 되는 콩과작물(작두콩, 호랑이콩, 강낭콩 등)을 옮겨 심어 폴대를 타고 올라가게 할 생각이다. 작두콩 줄기는 작두로 잘게 잘라 말려 차로 마시면 비염에 특효라 하고, 맛도 고소해 마시기에 참 좋다. 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한 봉지씩 나눠줄 생각이다. 그게 재미지 뭐가 재미겠는가? 쌀농사를 하면서도 소득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직불금 수입이면 족하다고 위안을 하곤 한다.
그래도 남은 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쯤 시장에 나가면 온갖 작물의 모종이 어서 옮겨 심어달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어제는 옥수수 1판(200여개)과 작두콩, 가지, 오이, 호박, 고추, 상추 등의 모종을 5만여원어치 사다 심었다. 친구가 지황뿌리까지 한 봉지 줘 한 고랑 심고, 두 고랑은 고구마순을 사다 심을 생각이다. 어쨌든, 농약을 적게 하거나 안할 수 있으면 최상이다. 주변에 ‘옥수수 마니아’들이 제법 있다는 것도 귀향하여 처음 알았다. 택배비를 후불로 할 수 없는 게 문제이지만 ‘주는 손이 아름답다’는 농부의 마음을 갖고 안분지족安分知足 하자는 게 나의 개똥철학이다. 민물새우망을 날마다 뒤지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마른 새우 몇 마리만 넣어도 음식의 풍미風味가 장난이 아니더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보람되고 흐뭇한 지, 그 기분을 아시는가. 새우를 갈아 조미료로 쓰고, 라면 넣을 때 넣으니 '새우라면'이라며 감격하던 운봉의 친구가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 참 환장할 일이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예전 대도시에 살 때 어쩌다 한번 내려와 일만 하시는 부모에게 “평생 지어먹은 밭, 한두 해 묵히면 어디 덧나냐?”며 웨장을 쳤던 일이 생각나 후회도 되고 씁쓸하기도 하다. 남들은 모두 바쁘게 한 해 농사준비를 하는데, 농촌에 살면서 넛허고(넋을 빼놓은 듯 멍하게) 방안에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자도 아닌 주제에 독서삼매경에만 빠진단 말인가. 밭에 온갖 잡초 뽑는 일은 진작에 포기했지만, 놈팽이가 아닌 이상 최소한의 노동은 해야 할 판이다. 뒷산 저수지에서 새우를 잡고 쑥을 캐고 산취를 뜯으며 고사리를 꺾는 일은 사실 한량閑良이나하는 짓이다. 80이 훌쩍 넘은 꼬부랑꼬부랑 동네 할머니들은 시방도 유모차를 끌거나 전동차를 타고 나가 땡볕에도 밭에서 풀을 뽑아 비짜리로 쓴 것처럼 깨끗한 것을 보면 놀라곤 한다. 지독한 근면성실이다. 60대가 청년인 농촌의 현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남원에 사는 친구의 아로니아밭을 가보곤 깜짝 놀랐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장판같이 두꺼운 검은 비닐을 깔아놓았다. 친구의 성격다웠다. 그러니 독살스런 풀들이 어떻게 범접을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비닐 아래 흙들이 햇빛을 못볼 터이니 안쓰럽기도 했다.
겨우내 자란 논두럭의 풀들이 무릎을 차오르게 무성하다. 보통의 농부들은 제초제를 이미 다 뿌려 논둑이 누렇다. 모 심으려는 논에 물대기 전 웃자란 논둑 풀들을 싸악 죽여야 한다. 일단 예초刈草질을 한번 한 후 풀들이 마르면 ‘근사미(뿌리까지 죽는 제초제)’로 ‘꼬시를(죽일)’ 생각으로, 어제오후 한두 시간 했는데 지친다. 조금만 해찰해도 위험한 것이 예초질. 그 칼날에 발목 날리는 것은 일도 아니니, 작업 내내 긴장해야 하므로 두 시간 넘으면 다음날 해야 맞다. 봄비가 다시 촉촉이 내린 오전, 해가 비치니 오후엔 예초기를 들고 나설 것이다.
지난주 봄비가 그친 요 며칠새, 산천이 온통 초록 세상이다. 연초록도 좋고, 진초록도 좋다. 초록은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만든다. 녹색당, 정당이름만큼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Green색을 얼마간 보지 못하면 정신이 이상해진다고 해, 교도소에서도 죄수들을 초록산천을 바라보도록 드라이브해준다는 말을 들었다. ‘파릇파릇’이란 부사는 얼마나 예쁜 우리말인가. 개인적으로는 가을을 상징하는 '울긋불긋'보다는 봄의 상징인 '파릇파릇'이 몇 배나 좋다. 파릇파릇은 생명을 나타내기 때문이고, 울긋불긋은 성장을 멈춘 성숙의 단계이니, 당연히 '살아있음'의 생명은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봄 춘春'자를 풀어 사람 3명이 함께 모여 일어서는 날이라고 했다던가. 봄은 생명 그 자체인 것을. 우리 인간들의 마음도 봄을 맞아 파릇파릇해지면 정말 좋겠다. 예쁘고 파릇파릇하게 싹을 틔워, 머지 않아 우리에게 신선한 먹을거리로 선사해줄 온갖 채소작물에 박수를 보낸다. 그런 봄날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