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친과 시라소니 누이
1950년 6. 25. 전쟁은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苦難(고난)이었습니다!
나는 1950년 9월 13일 춘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내 아버지는 내 모친과 나를 만나려고 서울서 오는 길에 춘천에서 인민군 포로로 사로잡혀 평안북도 강계-혜산진 등으로 끌려다니고 있을 때, 내 모친은 나를 업고 병든 시어머니와 1950년 12월 인천항에서 軍警(군경) 가족 수송 미군 구축함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여 부산 보수동 피난민 천막촌에 입촌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쥔 것 없이 맨몸뚱이로....!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내 모친은 나를 업고-한심하게 부산 국제시장 이 골목 저 골목을 하루 종일 뭐 할 일 없나? 하고 일주일 내내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제시장 아래 층 노점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부르더랍니다. 내 모친은 현재 사정을 있는 그대로 그 아주머니에게 다 보고 하였습니다. 고향은 평안북도 신의주다-친척들은 다 흩어졌다-남편은 인민군 포로로 잡혀갔는데 생사를 알 수 없다-여기 업고 있는 아이와 시어머니 셋이 보수동 피난민 천막촌에 산다.
아주머니는 미군 사지 바지 3장을 내 주면서 한 장에 만원이니, 알아서 팔고 원금을 제대로 가져오는 것 봐서 물건을 또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 첫날에 내 모친은 아이를 업고 팔에 미군 사지 바지를 팔에 걸쳐 들고 열심히 팔아 원금을 갚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처음일 텐데 잘 팔았네 하며 또 5장을 내 주더랍니다. 그것도 그 날 다 팔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주머니가 통성명 하자고 하더랍니다. 아주머니도 평북이고-3살 된 딸 “순은”이가 있고-나이는 내 모친보다 2살 위라 바로 형님-아우가 되었고, 그 날부터 내 모친은 부산 국제시장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위-아래 골목 가게들은 자릿세 문제로 울고불고 옥신각신 하는 일이 많이 있는데, 순은이 엄마가 장사하는 골목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는 겁니다. 참, 이상하다? 생각하고 물어보니 순은이 엄마 왈 “우리 오빠 때문이야!” “오빠가 누군데?” “알 거 없어. 그저 그래” 하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오빠가 그 시대에 유명한 주먹 “시라소니” 였습니다. 그래서 순은이 엄마 가게에는 자릿세 받는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던 어느 날 시라소니 누이가 1층 노점가게에서 국제시장 2층 본관 포목점으로 올라가고, 1층 노점가게는 내 모친이 이어받고-5년 후 시라소니 누이는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 포목점으로 올라가고, 내 모친은 국제시장 2층 본관 포목점을 이어받고-또 5년 후 시라소니 누이는 비단 공장을 크게 세우고, 내 모친은 서을 동대문 광장시장 포목점을 이어받고, 내 모친과 시라소니 누이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져갔습니다(훗날 내 좋은 친구가 시라소니 누이 집에서 영어-수학 아르바이트 했다).
이제 내 모친도 시라소니 누이도 모두 돌아가셨지만, “6.25. 전쟁 고난” 가운데 사람들은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지금 고난 받는 사람들도 그렇게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