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m.blog.naver.com/shunzi75/221218996997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권희선)
서론
1. 경험과 객관적 사고
(집 그 자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내 눈으로 집을 똑똑히 보지 않는가!
나는 대상에 접근하는 어떤 특정한 방식, 즉 시선[the 'gaze']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떤 대상을 더 잘 보기 위해서는 주변을 정지상태에 두어야 되고, 중심형상으로 획득한 것을 배경에서는
잃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 자신이 그 대상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고, 대상들은 다른 것들을
감추지 않고서는 그것을 볼 수 없는 어떤 체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대상의 내적 지평은 주변 대상이 지평이 되지 않고서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영화)…
지평은 탐색의 와중에 대상의 동일성[the identity]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방금 조사된 대상에 대해 유지되는, 이제 막 발견하려고 하는 새로운 세부사항에 대해 이미 갖고
있는 근접 역능의 상관자이다.
어떤 분명한 기억도 어떤 명백한 추측도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추정적 종합만을 줄뿐인데 반해, 지각은 그 자체로서 현실적인 것이다.
… 대상-지평 구조, 즉 조망은 대상들이 숨겨지는 수단이라면 또한 대상들이 폭로되는 수단이기도 하다.
본다는 것은 드러나는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존재가 나의 뒤에 또는 서로에게 은폐될 수 없다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거주한다는 것이 되고, 그로부터 모든 사물을 모든 사물
이 표현하는 국면에 따라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모든 사물을 역시 보는 한에서 그것들은 나의 시선에 열린 주거지로 남아 있고, 나는 그것
들 속에 가상적으로 위치하고 있기에, 나의 현실적 시각의 중심 대상을 이미 여러 각도에서 통각한다.
따라서 개개의 대상은 여타의 모든 대상의 거울이다.
내가 탁자 위에 놓인 램프를 주시할 때, 나는 나의 자리에서 보일 수 있는 성질뿐만 아니라 벽난로, 벽
탁자가 ‘볼’ 수 있는 성질까지도 그것에 부속시키고, 나의 램프의 후면은 그 램프가 벽난로에게 ‘보여주는’
국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상들이 체계나 세계를 형성하고 개개의 대상이 자기 주위의 타자들을 자기의 숨겨진 측면들의
정관자로, 그 측면들의 영원한 보증으로 배치하는 한 나는 대상을 볼 수 있다.
… 즉 집 자체는 어느 곳에서도 보여지지 않는 집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보여지는 집이다.
우리는 공간적 조망에 대하여 방금 말한 것을 시간적 조망에 대해서도 역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하여 파지와 예지의 이중 지평 덕분으로 나의 현재는 지속의 흐름에 의해 순식간에 휩쓸려가고
완전히 사라지는 사실적 현재이기를 그만두고, 객관적 시간 안에서 고정되고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의 인간적 시선은 지평에 의하여 여타의 모든 것을 목표로 할지라도 대상
의 일면 이상을 정립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지평의 종합은 추정적 종합일 뿐이고, 대상의 직접적 주위에서만 확실하고 정확하게 작용할
뿐이다.
… 그것은 지각적 경험에서, 그것이 참으로 그러한 만큼, 대상을 완결되지 않고 개방된 채로 남겨둔다.
그러한 개방에 의해 그 대상의 실체성이 빠져나간다.
…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관한 어떤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세계의 방대한 기억[the world's vast Memory]에 근거 짓는다.
그 집은, 그 세계의 방대한 기억 안에서, 그 날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데로 자신의 위치를 갖고, 그 세계의
방대한 기억이 이 순간 그 집의 존재를 보증한다.
… 따라서 대상의 정립은 낯선 존재에서 부서지는 우리의 현실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고, 마침내
경험은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모든 것을 대상에서 이끌어낸다고 믿는다.
모든 지각이 어떤 것의 지각이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의 탈자성(active transcendence of the
subject in relation to the world) 때문이다.
2. 신체의 문제
나는 나의 신체를 세계의 대상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나는 인식 수단으로서 나의 시선에 대한 인식을 억압하고 나의 눈을 물질 조각으로 취급한다.
이때부터 눈은 내가 외부 대상을 위치 짓고자 하는 객관적 공간에 자리 잡고, 나는 대상이 망막에 투영됨
으로써 지각적 조망이 발생한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고유한 지각적 역사를 나와 객관적 세계와의 관계의 결과로 취급한다.
… 그래서 온전한 의미에서 단일 대상의 정립은 모든 경험을 단일한 행위 안에서 끌어 모을 것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단일 대상의 정립은 지각적 경험과 지평의 종합을 초월한다―마치, 관계들이 상호 규정적인,
완결된 명시적 전체성, 즉 우주의 개념이 상호 함축적인 관계들의 열린, 끝없는 다양성, 즉 세계의 개념을
초월하듯이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을 나의 경험에서 분리시키고, 이념으로 넘어간다.
… 이념으로서 신체, 이념으로서 세계, 공간의 이념, 시간의 이념.
… 의식의 모든 삶은 대상을 정립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 대상의 정체가 확립되는 데서 의식이 자기 자신을 되찾고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한에서만
의식이 의식, 즉 자기에 대한 앎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일 대상의 절대적 정립은 의식의 죽음이다.
우리는 주관이나 객관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이러한 대안에 머무를 수 없다.
우리는 객관의 근원을 우리의 경험의 핵 자체에서 되찾아야 하고, 존재의 출현을 기술해야 하며, 어떻게
역설적으로 우리에 대하여 즉자가 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 우리는 고유한 신체가 사람들이 그 신체에 강제로 부과하는 처우를 피해 가고 심지어 과학의 처우도
피해 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 신체의 발생은 대상의 구성의 한 계기일 뿐이므로, 신체는 객관적 세계로부터 퇴각함으로
써 자신을 주위에 연결하는 지향적 실마리를 스스로 끌어올 것이고, 마침내 우리에게 지각하는 주관을
지각된 세계로 폭로하게 될 것이다.
제1장 대상으로서의 신체와 기계론적 생리학
1. 인과적 사고를 초월하는 신경생리학
신체의 기능은 즉자 언어로 번역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자극과 수용기, 수용기와 감각 기구라는 선형적
의존성이 행동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틀림없이 사람들은 행동의 회로에서 새로운 규정들이 출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예컨대 특수
신경 에너지 이론은 유기체에서 물리적 세계를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을 분명히 허용했다.
그러나 그 이론은 경험의 상이한 구조를 창조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신경 체계의 탓으로 돌렸으며,
이 경험의 구조들을 사용된 기관들의 국소적 차이에서 파생된 응축된 성질로 변형된 것이라고 보았다.
… 신경 물질 내에서 이루어지는 손상의 진행은 기성의 모든 감각적 내용들을 하나씩하나씩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 체계의 본질적 기능으로서 나타나는 흥분의 능동적 분화를 점점 더 불확실하게 만든다.
… 따라서 동일한 감각의 흥분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물질적 도구들에 의해서 보다 기본적 자극이 그들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조직화되는 방식에 의해서 달라진다.
그러한 조직은 지각의 수준과 감각적 ‘성질’의 수준 모두에서 결정적인 요인이다.
… 자극의 수용에서 담당하는 유기체의 기능은 말하자면, 흥분의 어떤 형태를 ‘인식하는’ 데 있다.
‘정신물리학적 사건’은 더 이상 ‘세속적’ 인과성의 유형의 것이 아니며, 두뇌는 피질 단계 이전부터도 일어
나는, 그리고 신경 체계의 등장에서부터 자극과 유기체의 관계들을 뒤섞는 ‘유형화’ 과정의 장소가 된다.
흥분은 자신이 야기하려고 하는 지각을 바로 그 흥분이 닮게 만드는 횡단적 기능에 의해 파악되고 재조직
된다.
…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예측한다면, 그것은 신체를 대상, 즉 부분 외 부분으로는 포기함으로써이고, 내가
현실적 경험을 갖는 신체, 이를테면 자극을 예견함과 동시에 내가 지각하려고 하는 형태 자체를 그리면서
나의 손이 그 대상을 부여잡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신체로 되돌아감으로써이다.
나는 살아 있는 신체의 기능을 스스로 수행함으로써만, 세계를 향해 일어나는 신체인 한에서만, 그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외수용성, 내수용성, the highly polished machine, 환각지 현상)
2. 환각지 현상: 생리학적 설명과 심리학적 설명은 똑같이 불충분하다
(중추이론과 말초이론) 수술 뒤에 환각의 팔이 커지는 때가 있으나 곧 줄어들어 결국은 ‘절단했다는 환자
의 인정과 함께’ 절단하고 남은 부위 속으로 사라진다.
여기서 환각지 현상은 심리학적 설명을 분명히 필요로 하는 질병 부인 현상에 의해 분명해진다.
… 그러나 어떤 심리학적 설명도 뇌를 향해 가는 감각적 도관의 단절이 환각지를 없앴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심적 결정 인자들과 생리학적 조건들이 어떻게 상호 맞물리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심적인 것’과 ‘생리학적인 것’, ‘대자’와 ‘즉자’, 이 둘 중의 어느 하나에 대해서 다른 하나를
분명히 하는 수단을 발견하고 그 둘의 만남을 주선하는 수단을 발견할 때만, 제3자적 과정과 개인적
행동이 그들에게 공통적인 환경 속에서 통합될 수 있을 때만, 그 두 가지의 혼합일 수 있을 것이다.
3. 심적인 것과 생리학적인 것 사이의 존재
(다리가 잘린 혹은 묶인 곤충의 사례; an a priori of the species and not a personal)
사람들이 [곤충의] 대체 현상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존재가 세계로 향하는 운동이다.
우리가, 동물이 존재하고 동물이 세계를 가지며 동물이 세계에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세계에 대한 지각
이나 객관적 의식을 가진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 상황은 단지 실천적인 의미를 제공할 뿐이고, 몸에 의거한 재인을 요청할 뿐이고, “열려 있는” 상황
으로 체험된다.
그리고 상황은 동작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마치 멜로디의 첫 음들이 그 자체로서(즉자적으로) 인지되지
않고 어떤 화음을 요청하는 것과 같다.
… 반사는 자극들을 상황으로서 존재하게 하고 ‘인식’ 관계, 말하자면 자극들을 대면해야 할 것으로 지시
하는 인식 관계에서 자극들과 함께 존재한다.
반사는 그것이 상황의 의미와 지각에 열려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먼저 인식 대상을 정립하지 않고, 우리
의 모든 존재의 의도인 한, 우리가 세계-에로-존재라고 부르는 ‘선객관적 관점’의 양상들이다.
… 세계-에로-존재를 반사의 종합으로 취급하는 것을 금하는, 상대적으로 자극에서 독립되어 있는 ‘우리
의 세계’는 어떤 일관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로-존재를 의식의 작용으로 취급하는 것을 금하는, 상대적으로 우리의 자발적 사고
에 독립되어 있는 존재의 박동의 어떤 에너지가 있다.
4. 환각지의 애매성
이러한 현상은 세계-에로-존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절단과 결함을 거부하는 것은 물리적이고 상호 인간적인 어떤 세계에 참여된 자아이다.
이 자아는 결함이나 절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를 향해 계속해서 자신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그러
면서 결함이나 절단을 정식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 신체는 세계-에로-존재의 운반 도구이고, 신체를 가진다는 것은 일정한 환경에 가담하는 것이며 어떤
기획과 일체가 되는 것이고 계속적으로 거기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 내가 세계를 통하여 나의 신체를 의식하는 것이 사실이고, 나의 신체가 모든 대상들이 그 얼굴을 향해
있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비지각된 항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의 신체가 세계의 축이라는 것은 동일한
이유에서 사실이다.
… 나의 신체의 총체성에서 무언의 영역들이 한정되고 있다.
환자는 자신의 불구를 모르는 한에서만 그것을 알고 있고, 자신의 불구를 아는 한에서만 그것을 모른다.
이러한 역설은 모든 세계-에로-존재의 역설이다.
(선의식적 앎: 친구의 죽음, 컵의 뒷면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인다고 생각한다.)
5. 유기적 억압과 선천적 복합체로서의 신체
(정신분석이 말하는 억압) 비개인적 시간은 흘러가기를 계속하나 개인적 시간은 묶여 있다.
물론 이러한 고정은 기억과 혼동되지 않으며, 기억이 하나의 그림처럼 우리 앞에 예전의 경험을 펼치는 한
기억을 배제하기도 한다.
반면, 우리의 진정한 현재인 이 과거는 우리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우리의 시선 앞에 전개되는 대신 우리의
시선 뒤에 숨어 언제나 있다.
외상성 경험은 객관적 의식의 방식에서 표상으로서, 그리고 ‘날짜가 붙은/지난[dated]’ 순간으로서 지속
하지 않는다.
존재 양식으로서만 그리고 일반성의 특정한 정도와 함께 그 본질이 존속한다.
나는 그 세계들 가운데 하나를 위하여, ‘세계들’을 나에게 제공할 수 있는 지각적 능력을 소외시키며, 그로
인해서 그 특권적 세계는 자신의 실체를 상실하고 결국 어떤 불안에 다름아닌 것으로 끝나고 만다.
… 비개인적인 것의 출현으로서 억압은 보편적 현상이며 이것은 자신을 세계-에로-존재의 시간적 구조와
결부시킴으로써 우리의 조건을 육화된 존재로 이해시킨다.
… 사람들은 내가 시간을 통하여 거쳤던 순간적 세계들을 유지시키고, 그것을 나의 모든 삶의 형태로 만들
때, 억압을 제한된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유기체가 일반적 형태에 대한 선개인적
착근으로서, 익명적이고 일반적인 실존으로서, 나의 개인적 삶의 발아래에서 선천적 복합체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슬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시선은 내 앞에서 표류하고, 그것은 눈에 띄는 어떤 대상에
부지중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자율적인 존재를 다시 개시한다.
제2장 신체의 경험과 고전적 심리학
1. 고유한 신체의 영속성
고전적 심리학이 기술하는 대상의 지위와 양립할 수 없는 신체의 ‘특성’.
… 나는 나의 신체로써 외부의 대상을 관찰하고, 다루며, 검사하고, 조사하나, 나의 신체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나의 신체 자체를 관찰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 관찰될 수 없는 제2의 신체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나의 신체는 언제나 나에 의해서 지각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따라서 단순한 정적 의미에서 이해
되어서는 안 되고, 고유한 신체의 이러한 제시에는 그런 신체의 부재나 심지어 그런 신체의 변화를 생각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어떤 무엇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내가 숨겨진 그 국면들을 모두 포함하는 세계이자 이들과 공존하는 세계를 믿는 것처럼 저 숨겨진 국면
들을 믿는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에 대해 현존하면서도 객관적 관계에서 출발하여 그 국면들의 한가운데로
참여하는 나의 신체가 그 국면들을 자신과의 공존 속에서 유지하고 그 속에서 자기 지속의 박동을 울리게
하는 한에서이다.
2. 이중 감각들
한 기능에서 다른 기능으로 이행함에 있어 내가 만져지는 손을 즉시 만지고 있을 손과 동일자로 인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왼손에 대하여 나의 오른손인 저 뼈와 근육의 꾸러미에서, 내가 대상을 탐구하기 위해
대상을 향해 던지는 다른 손인 저 민첩하고 살아 있는 오른손의 육화 또는 외피를 즉각적으로 예지한다.
3. 감정적 대상으로서의 신체
고통이 자신의 국소를 지시한다. 고통이 ‘고통의 공간’을 구성한다. ‘나는 발이 아프다’는 ‘내가 나의 발이
그 아픔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나의 발에서 온다’ 또는 ‘나의
발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의 본원적 용적성’
4. 운동 감각들
내가 나의 신체로 수행하는 운동의 원래성. 나의 의도는 출발 지점에서 먼저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운동의 공간적 경로를 초벌질한다.
말하자면 2차적으로만 객관적 경로에서 전개되는 운동의 씨앗이 존재한다.
… 운동에 있어서 나의 결심과 나의 신체의 관계는 마술적 관계이다.
5. 필연적으로 현상에 복귀하는 심리학
고전적 심리학에서 행해지는 고유한 신체에 대한 기술이 신체를 대상과 구별 짓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제공했다면, 심리학자들이 그렇게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 또는 그들이 그로부터 어쨌든 어떤 철학적
귀결도 이끌어내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과학이, 관찰자의 상황에 속하는 것과 절대적 대상의 속성들을 관찰에서 분리시킬 수 있다고 믿는
한, 그들 자신을 과학이 의거하는 비개인적 장소에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 나의 지각의 불완전성은 나의 감관 장치의 조직에서 결과하는 사실적 불완전성으로 이해되었고, 나의
신체의 현존은 나의 신경 수용기에 대한 신체의 지속적 작용에서 결과하는 사실적 현존으로 이해되었다.
마침내 이러한 두 가지 설명을 전제한 채 영혼과 신체의 통일성은, 인식의 출발점이었던 그 사실은 자신의
완성된 결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사상에 따라 원리적 가능성이 확립될 필요가 없는
사실적 통일성으로 이해되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나는 지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메를로-퐁티는 프랑스의 '의식 철학자'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사르트르나 훗설의 현상학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그는 사르트르 식의 현상학이 주체-객체 관계를 특권화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의 '내부 세계'가 없이는 주체-객체 이분법의 유아론에 빠지게 된다.
"만약 주체-객체 이분법이 옳은 것이라면, 모든 의미는 사람들로부터 유래하고 나 자신을 위한 모든 의미는 나 자신으로
부터 유래할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언어, 지각, 육체의 본성을 이해함에 있어 생생한 경험의 중요성을 확증하는 철학적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펼친 지각과 사고 간 연계의 주요 측면을 개괄해
보자.
훗설과 마찬가지로 메를로-퐁티는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도입된 현상학적 환원 혹은 에포케(단절, 괄호
치기나 연결 끊기로 불리기도 한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본질'은 개인이 세계에 대해 가질 수 있는(시간과 공간과 관련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이나 통용되는 과학
분과에 주어져 있는 초월적 본질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현상학적 에포케는 '생험되는lived 경험'의 의식의 내적 본질들에 접근하게 한다.
에포케는 그 모든 객관성에 있어서 주어진 자연세계와 단절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출발점은 후설의 에포케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현상학을 설명하면서 후설이 했던 것처럼 데카르트의 회의철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체현된
경험의 핵심, 즉 지각에 이르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코기토cogito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가 가진 추상성과 공허함에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하나의 신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의 신체는 일차적으로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일부다".
사실 우리의 신체는 항상 이미 세계 속에 있다.
그러므로 즉자적 신체, 즉 객관화될 수 있고 보편적인 지위가 부여될 수 있는 신체는 없다.
그렇다면 지각은 항상 체현된 지각, 구체적인 맥락 혹은 상황 내에서만 존재하는 지각이다.
즉자적 지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하는 정신은 하나의 육화된 정신이다.
게다가 지각은 단순히 외부 세계가 신체에 가하는 충격의 결과가 아니다.
인식하는 기관과 그 환경의 배열 자체가 지각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현상학적 연구가 가능하고 또 필요하게 되는 까닭은 정확히 지각의 '생험'되는 성격 때문이다.
육화된 지각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지각하는 주체는 항상 변화하며, 항상 재탄생의 과정을 겪는다.
의식은 지각적이다.
현상학자가 보기에 사상의 층위에서는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확실성이란 없다.
이런 이유에서 메를로-퐁티 현상학은 다른 무엇보다도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나는 지각한다'는 '나는 생각한다'와 동일하지 않으며, 보편화될 수도 없다.
지각하는 주체가 가진 육화된 지위는 살아있는 현재에 대한 현상학적 묘사의 길을 튼다.
이 묘사 속에서(즉, 현상학적 에포케 속에서), 지각된 사물은 그것에 대하여 말해진 것과 등치된다.
육화된 것으로서 지각의 지위를 감안한다면, 현상학적 서술 그리고 현상학적 성찰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메를로-퐁티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지각은 그대로 놓아두면 "자신을 잊고, 자신이 성취할 일에 대해 모르게 된다".
어떤 무의식 이론도 거부하면서, 현상학은 모든 (설사 그것이 체현된 것일지라도) 주체적이 계기들을 자신에게 현전한
하나의 통일체로 취급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원화시키는 환 속에서 이 계기들을 '우리'의 권력으로 끌어올린다.
따라서 이 '우리'는 하나의 통일체, 집합성의 통일체가 된다.
그러므로 타자와 이질성은 이 현상학자가 가진 동질화하는 마법의 지팡이가 만들어낸 진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창조적인 대담성을 통해 그의 저작 속에서 현상학의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메를로-퐁티의
미덕일 것이다.
정신은, 물질에서 독립된 실체라기보다는 몸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사물로 향하는, 육화된 의식(embodied consciousness)
이다.
몸은, 그것을 통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체험된 몸(a lived body)이자 그것을 통해 세계와 관계맺는 몸이다.
몸은, "내 이해의 도구"이기에 대상 세계 또한 몸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나타나고 의식 역시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단다.
세계와 생생하게 의사소통하는 몸을 "모든 대상이 짜여져 들어가는 직물"에 은유했다.
인식적 지각과는 구별되는 성애적인(erotic) 지각이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이 지각은 하나의 몸을 통하여 다른 몸을 향하는 지각이다.
성애적인 이해가 존재하는 바, 욕망이 몸과 몸을 연결함으로써 맹목적으로 이해애 도달한다.
주어진 결정, 행위에 있어 성적 동기와 다른 동기들 간의 비율을 결정한다든가 혹은 특정한 행동을 '성적'이라 이름
붙이기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기능들 즉 성, 운동성, 지성 등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하나의 총합으로 통일되어 있다.
레비나스와 메를로 - 퐁티의 타자문제
신 인 섭(천안대)
[한글요약]
메를로-퐁티는 타자의 타자성을 데카르트적 이원론 및 사르트르적 이원론에 거슬러 이해하고 심지어는 자연적 태도를
무력화시키고, 타자지각을 가지고 다른 의식들 사이에서 의식의 표상행위를 만들어내는 훗설의 노에마-노에시스적
이원론에도 반대하게 되는데 여기서 다른 의식들의 특수성은 유비(analogie)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정당화될 수 없게 된다.
나 자신이 세계의 구성요소를 이루듯 타자도 세계의 일부가 됨을 인정하고 비록 나 자신이 동물 및 사물과 구별되듯 타자
도 그들과 구별될지라도 내가 나 자신을 지각하듯 타자를 지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나 동물을 지각하듯 그를
지각하게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선-지각적(pr -perceptif) 익명성과 세계의 익명적 살(chair anonyme du monde) 그리고
단번에 주어진 지각주체들의 복수성은 이러한 유비에의 호소를 피하게 해 준다.
그러나 E.레비나스는 M.메를로-퐁티의 이러한 내재주의를 비난하게 되고 메를로-퐁티의 공동주관성(intersubjectivit )을
대자관계(rapport moi)와 대타관계(rapport autrui) 사이의 절대적 비대칭성(dissym trie absolue)에 맹목적인 대칭적으로
나란한 공동체(collectivit du c te- -c te)로 취급해 버리고 만다.
이리하여 레비나스를 따라 우리는 절대적 초월성의 윤리를 두둔하는 '비대칭의 관계' (relation asym trique)라는 구실로
일종의 전도된 사르트르적 비대칭(asym trie sartrienne inverse) 위로 다시 떨어지게 되는데, 사르트르의 타자는 나의 자유
를 착복하고 나를 사물로 환원시키는 잠재적 적대자(ennemi en puissance)로 드러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표현성(후기사유)의 차원을 위해 실존적 애매성(전기사유)의 차원(registre)을 포기함으로 구체적
세계경험에 타자파악을 복구시킨다.
따라서 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substitut de Dieu)으로 절대화되지 않는다.
그 대신 타자는 세계와 역사의 현전에 참여하고 상호관계적 삶에로 되돌려진다.
그런데 이런 상관적 삶에서는 윤리가 일방통행이 아니고 무상(gratuit )과 증여(don)라는 비대칭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상호성(r ciprocit )의 합리적 기대(attente rationnelle)로도 이해된다.
1. 열면서
우리는 '애매성의 철학'을 주관-객관, 자아-세계의 데카르트的 이원론에 그치기를 원하지 않는 '실존의 사유'라고 부른다.
특히 그 이원론이 타자의 특수성을 식별하는데 무능한 독아론(solipsisme)으로 이끌 때 더욱 그러한 것이다.
타자는 주체에 대한 하나의 대상이 아니며, 세계 역시 주관에 대한 객관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주체는 세계의 익명적 살(la chair anonyme du monde)에 속하고 있으며 타자의 타자성 즉 타자본위(alt rit )는 내가
속한 익명의 살에 대한 나의 지각을 이미 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의 지각에 필수적인 것이다.
타자의 특수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동물과 사물의 지향성과는 다른 성질로써 타자에 변별적으로 호소하는 순수지향성의
특수한 권리를 정신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 그 대신 특수한 주체적 경험을 체득하고 독특한 인간관계의 행동들과
태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각의 현상학}으로 대표되고, 주지주의(intellec- tualisme)와 경험론(empiricisme)을 거부하는 메를로-퐁티의 전기
철학이 표방하는 애매성(ambigu t )의 개념은 이제 {세계의 산문}(La prose du monde)에서 특별히 부각되는 표현(expression)
의 철학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즉 주체는 그가 현전(pr sent)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의 표현성(expressivit ) 속에 항상 이미(toujours d j ) 붙잡혀 있는 것이다.
이 세계-내-존재( tre-au-monde)안에서 타자는 특수한 행동들(comportements)을 야기하는 동시에 세계의 표현성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타자를 외재성으로(en ext riorit )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외재성 속에서 지각함이 불가능함과 같다.
예컨대 우리가 타자의 얼굴과 몸에 근거하여 동물적 특징을 간파하고 또 그는 확실히 응고되어 있지 않고, 세공의 여지가
있는 그러나 그렇다고 객관화의 한 형태를 불허하지는 않는 표현성의 진원지(foyer d'expressivit )로서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게 된다.
타인은 타자이지 하나의 다른 나 자신(moi-m me)이 아니다.
요컨대, 애매성으로부터 표현성으로 옮겨가면서 타자는 세계의 사물의 용모로써 나타나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계와
친밀하게 되며, 무생물의 사물에게서 표현적 특징들(traits expressifs)을 찾게 되고 그것들을 의인화한다.
사물은 거의 동반자이다.
우리는 타자를 약간은 세계의 사물처럼 파악하는데 이 사물은 표현적이고 나를 닮은 것이다.
사람과 사물과 동물, 식물 사이의 차이는 보다 덜 뚜렷하다.
모든 것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적일 뿐이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이 타자도 조금은 사물이고(un peu chose) 사물은 조금쯤은 인간적(un peu humaine)이다.
2. 타자의 타자성(alt rit ) : 그 익명성과 복수성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타자는 통상적으로 익명의 우리(on)라는 성격 또는 주제화할 수 없고(inth matisable) 잠재적인
(virtuelle) 차원에 위치한 선-개인적(pr -personnel) 주체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사이에서 비젼(vision)의 상이성은 당연히 부각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의 현상학}(Ph nom nologie de la perception)에서 메를로-퐁티는 주인과 노예라는 유명한 헤겔
변증법의 후원아래 사르트르의 분석을 차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치와 당당함은 따라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그 내용이 되는 자아와 타자의 변증법 속에 자리를 차지한다.
내가 신체를 지닌 한, 타자 시선 아래 대상(objet)으로 환원될 수 있고 그에게 나는 더 이상 인격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정반대로 나도 그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이번에는 내가 그를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는 하나의 일방통행인데 왜냐하면 타자의 열망(d sir)에 의해 내 가치가 인정되는 순간 타자는 더 이상
그에 의해 내가 인정받기를 원했던 그러한 인격이기를 그친다.
그는 사로잡힌(fascin ) 존재요, 자유 없는 존재이다. 그는 이 자격으로는 나에게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다."
지배와 예속(ma trise et servitude)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같은 일방통행적 관계로서의 사르트르적 비젼에 반대하여
메를로-퐁티는 무엇보다 내 신체의 애매성을 강조하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오브제(objet)이자
나에겐 주체인 내 신체의 형이상학적 구조이다." 따라서 내가 신체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오브제로서 보일 수
있다는 것과 나 또한 주체로서 보이려고 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타자가 나의 주인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를로-퐁티의 사유는 비록 그 관계가 일방통행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주체/대상(오브제)의 틀 속
에서 전개된다.
사르트르가 오브제냐 주체냐, 또는 주인이냐 노예냐 식으로 의식의 단독성을 돋보이게 한 것이 사실이라면 메를로-퐁티
는 주체와 객체, 주인과 노예라는 배열로 의식들의 복수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의식들과의 공존(coexis- tence)이다." 즉 사회에서 중요한 타자들과의 공존이다.
한편, 내 신체의 애매성은 예속의 원리(principe de servitude)이자 자유의 원리(principe de libert )인 언어의 애매성(ambigu t
du langage)에 정확하게 상한다.
시선들 사이에 생기는 사르트르的 갈등 속에서 타자에 의해 응시되면서 주체는 오브제가 되고 반대로 타자를 응시하면서
내가 그를 오브제로 만든다.
타자가 오브제가 되면 그는 더 이상 그로서의 그(en tant que tel)가 아닌 셈이다.
타자의 제일차적 위상은 주체-타자 즉 응시하는 주체로서의 타자에 놓여 있다하겠다.
타자는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에게 오브제로서 주어지지 않는다.
타자의 객관화(objectivation)는 그의 응시-존재( tre-regard)를 붕괴시킬 것이다.
"응시 현상 속에서 타자는 원칙적으로 오브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메를로-퐁티에게도 마찬가지가 된다.
예컨대 사랑의 모순들(contradictions de l'amour)같은 대타관계(rapport l'autre)의 핵심은 자아(타자에 대한 오브제)를 위한
주체와 타자(자아에 대한 오브제)를 위한 주체 사이의 갈등 속에 본질적으로 놓여있다.
이런 의미에서 메를로-퐁티의 타자의 본질적 위상 역시 응시하는 주관으로서의 주체-타자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타자-주체는 구성하는 의식도 순수 대자존재(pur tre-pour-soi)도 아니다 :
가시적 세계와 맞물려 있는(en prise sur) 응시로서의 비젼(vision)인 타자-주체는 지각적 세계와 밀접한 지각적 의식
(conscience perceptive)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사회세계(monde social)에 개방이 세계의 수취인(partie prenante ce monde)
으로서의 세계-내-존재( tre-au-monde)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각의 익명적 주체(sujets anonymes)라는 자격으로 공존하고 있는데 이 지각이란 사물에 대한 우리의 내속
관계(notre inh rence)이다.
아니 익명적이고도 선-개인적인(pr - personnelle) 실존이 내 신체와 타자의 신체에 동시에 거주한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내 신체의 부분들이 함께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듯이, 타자의 신체와 나의 신체는 유일의 전체(un seul tout)이다.
그것은 유일한 현상의 표면과 이면(envers et endroit)이며, 내 신체가 매순간 그것의 흔적이 되는 익명의 실존이 지금부터
이 두 신체에 동시에 거하게 된다."
환언하면, 지각주관이 절대적 개체성(individualit absolue)이라는 의미에서 익명적(anonyme)이고 절대적 보편성(ge ralit
absolue)이란 의미에서도 익명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는 이런 이중의 익명성의 구체적 소지자(porteur concret)가 된다.
이중의 익명성이란 유일한 구조의 두 계기로 구성되고 이 구조는 바로 구체적 주체가 된다.
그런 식으로 해서 자아와 타자 사이의 긴장은 확실히 자아에 의한 것이다.
부연하자면, 자아 자신 안에 타자(Autrui)와 자기(soi)반성력 사이의 일종의 동등성( quivalence)이 존재하는데 이는 타자
와의 어떤 공존으로서 각자에 의해 도래한 것이다.
이 동등은 자아와 타자의 상호성 속에 내린다.
"타자는 더 이상 여기서 나의 선험적 영야(champ transcendantal) 속의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게다가 나 역시 그의 영역에서 그에 대한 단순한 행동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상호성(교호성)속에서 서로를 위한 공동저자(collaborateur)인 것이다.
우리들의 퍼스펙티브는 서로 서로 속으로 미끄러져 들고,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세계를 통하여 공존하고 있다."
3. 상호성으로서의 공동주관성 : 레비나스의 비판
어쨌든 각자가 이 유일한 세계를 기획하는(projeter)것은 그의 주관성의 토대로부터이고, 상호성(r ciprocit )은 타자아
(alter ego)의 구성에 필수적 조건이 된다.
"상호성이 없이는 타자아란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현실적 연루(implication r elle)인 상호주관적 사건(fait intersubjectif), 그것이다.
그래서 그 둘은 즉자(en-soi)와 대자(pour-soi)사이의 불가능한 변증법 같은 일종의 막다른 골목에로 연결되지 않고 서로를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갈등을 유발시키는 내 신체 자신에 관련하여서 볼 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 내용으로 하는 자아와
타자의 영원히 극복될 수 없는 변증법과 마
가지로 주체이자 동시에 오브제로서의 신체의 애매성은 지양(d passement)이 화해(r conciliation)없이 머물러 있다.
우리들의 갈등은 끝이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신체와 의식사이를 공유하는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애매성이란 용어가 주인/노예, 주체/객체와 같은 대립된 두 요소들의 공존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이 용어는 항상 주체자격의 의식과 객체자격의 신체 사이의 양분(이분법)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신체 점유(possession)는 모든 순간에 그것의 객관화에로 귀착될 위험에 처한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E.레비나스의 지적을 기억한다면 타자에의 관계 혹은 '나-너' 관계는 객관화에로 환원될 수 없는 데
말하자면 대상의 인식에로 환원될 수 없고 그 관계는 따라서 주관/객관 관계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메를로-퐁티가 주관/객관이라는 관계용어에 의거하는 한 우리는 자아와 타자의 비분할(indivision)로서의 공동주관성은
주관/객관의 관계의 부정적인 것으로 남는다고 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메를로-퐁티에 있어서의 공동주관적 타자는 진정으로 사르트르的 틀과 데카르트的 독아론을 넘어설 것인가?
그의 타자는 항상 이미(toujours d j ) 이러한 이원론과 독아론을 전제하지는 않는가?
동시성(simultan it )과 교환성(va-et- ient)의 장치 곧 예속과 지배관계의 상호성의 설치가 여전히 남아 있지는 않는가?
E.레비나스의 가혹한 비판이 목표로 하는 것이 바로 여기다.
공동주관성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이론은 바로 주관과 객관의 분할에 당연히 선행하고 있는 선-개인적(pr -personnelle)
단계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메를로-퐁티에게서도 주체-타자(sujet-autrui)가 문제로 되는 한에서는 이러한 관점은 항상
공동-주관성(inter-subjectivit )이라 불리는 거대한 독아론에 떨어질 위험에 처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노력들은 끊임없이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영야(champ)의 해명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 영야란 모든 객관화에
선행하고, 우리가 이미 거기에 위치지워진 '사회적 성격' (caract re social)을 갖춘 지대이다.
그러나 지각적 의미(sens perceptif)로부터 언어적 의미(sens langagier)에 이르는 통행의 문제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메를로-퐁티가 탈개인화(d personnalisation)의 과정 즉 개인들의 개체화(타자와 자아로의 분화)의 과정을 명확히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즉 익명의 '우리'가 개인들로 나누어지는 과정을 명백히 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메를로-퐁티의 관심은 주로 선-개인적영야 또는 공동의 영야에 쏠려 있다.
그는 능산적인(naturant) 동시에 소산적인(natur ) 주체의 애매성, 무한한 동시에 유한한 주체의 애매성을 파악하려고 하
는데 이 애매성은 신체와 타자와 세계의 애매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무한한 동시에 유한한 주체의 역설이란 시공간적 공존(coexistence)의 역설인 바 일종의 근본적 편재성
(ubiquit )과 영원성( ternit )을 말함이다.
공동주관적 타자가 결국 레비나스의 비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를 시험하기 전에 그가 옹호하는 바를 알아보도록 하자.
훗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에 나란히 맞대고 있던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식 타자를 비판하면서 타자의 타자성 곧 타자 本位를
해석하게 되고 주인/노예 관계뿐만 아니라 자아/타자 사이의 공동주관적 관계 역시 거부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지식으로 구조화되었고(지식적 구조를 지닌 것이고) 달리하자면 순수히 에고 중심적이고 이기
주의적인 지향성 즉 타자의 동일자에의 환원이라는 구조를 지닌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
"지식은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인데 거기서 타자는 동일자에게로 환원되고 자신의 이방성( tranget )을 포기하게 된다.
또 이 관계에서 사유는 타자에 관계되지만 그때 타자는(그 자신에 충실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타자로서의 타자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그는 이미 고유한 것(le propre), 자신의 것(le mien) 즉 동일자(le m me)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배우게 된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지식의 존재에의 일치(ad quation du savoir
l' tre)일 것이다.
또 그 어떤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도, 그 어떤 다른 것도, 그 어떤 낯선 것도, 그 어떤 초월적인 것도 모든 것을 관조하도록
약속된 사람을 진정 풍부하게 하고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거라고 말하게 하는 것과 티마이오스(Tim e)가 그렇게
원했듯이, 동일자의 (원환)순환은 타자의 그것을 둘러싸고 있다고 말하게 하는 것도 인식의 존에의 부합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레비나스의 입장은 현상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인식에 대한 일관된 비판에서 연원하는데 이 인식의 본질적인
것은 노에마와 노에시스 사이의 부합 내지 일치(correspondance)에 놓여있고 달리 말하자면 그것들의 절대적 동등성( galit )
과 동시성(simultan it )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타자의 말살이다.
부버의 나와 너의 일치(commuion)나 사르트르식의 시선(regard)의 갈등이 관건이 된 이상 레비나스는 그러한 타자에의
관계는 상호적(r ciproque)이고 대칭을 이룬(sym trique) 관계 즉 분리된 두 자유 사이의 연결(관계)이라고 단언한다.
거기엔 타자의 타자성(alt rit )은 존재치 않고, 대신 타자의 동일자에로의 동화(assimilation) 또는 통합(int gration)만이
있게 된다. 그것은 또한 메를로-퐁티의 공동주관성(intersubjectivit )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시도에 대해 레비나스는 "거기서도 훗설에게서 표상적으로 남아있는(rester repr sentative) 타자
관계와 윤리문제에 대해 그 자신(훗설)이 언급한 것 이상으로 갈 수 있는 훗설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잘 확인한다
(비록 메를로-퐁티는 다르게 해석하려고 노력했지만).
한편, 이념화(id alisa- tions)의 노에시스-노에마的 순환구조를 지양하는 선-이론적 구조를 명증화하는 메를로-퐁티의 독
창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레비나스는 메를로-퐁티의 인식이 여전히 하나의 지식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주목시킨다.
비록 이 지식이 다른 양식으로 되어 있을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선 이론적 구조는 그 구조가 조회하는 것 즉 이론적인 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메를로-퐁티의 시도는 빛과 그림자, 긍정과 부정의 상호적이고 대칭적인 관계 속에 마침내 틀어박히게 된다.
"서로를 만지는 두 손의 반성된 만짐에서 묘사된 감각성을 통하여 구성되는 상호주관성은 만짐과 만져짐의 사이공동체
(감각함과 감각됨이라는 공동 행위)에 따라 구조화되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사물과 세계로 구성된 '존재' 주변으로의 일치 속에서 명확해진다."
레비나스는 감각성(sensibilit )이 만짐과 봄의 그노시스(gnose) 즉 인식에 의하지 않고는 타자에 접근할 수 없는 현상학적
분석의 한계를 알린다.
비록 만짐과 봄이 살과 살의 접촉과 응시일지라도 말이다.
레비나스의 눈에는 공동 주관적 공간은 상호교환 가능한 두 용어의 상호적이고 중립적(indiff rente)인 관계 자체이기는
커녕 비대칭적이어야 한다.
결국 레비나스의 콘텍스트 속에서 타자는 절대개념에 이르는 타자성의 특색과, 초월성의 특징, 그리고 절대적 새로움의
기질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 절대 개념에서 비상호적(non r ciproque), 비대칭적(non sym trique) 관계가 도출된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사회생활을 특징짓는 타자와의 관계 심장부에서 타자성은 비상호적인 관계 즉 동시성(contemporan it )
과는 뚜렷이 변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로서의 타자는 단지 타자아(alter ego)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바의 것(ce que moi, je ne suis pas)이다.
그가 그러한 것은 그의 성격이나 외관 그리고 심리현상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타자성 자체 때문이다."
타자아(alter ego)를 인정치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레비나스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관계개념' 자체를 의문시한다.
무엇이 '관계'로서 확립되건 또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간에 상호성이 시작될 때는 타자의 타자성은 틀림없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용어들의 관념적인 절대적 동시성(simultan it absulue)을 아직 그 관계가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세계의 표현성과 타자의 특수성
고립된 주관성의 필연적 성격을 너무 평가 절하하는 Buber의 '나와 너' 관계로부터 조차 변별되는, 윤리적 요청에의
불균형의 관계(relation sans relation)가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비대칭적 관계이고 이러한 비대칭 관계(relation asym trique)
의 이름으로 레비나스는 나란히 연결된 대칭공동체(collectivit du c te- -c te)를 거부하는 것이다.
절대적 타자성으로서의 타자는 바로 이러한 레비나스의 비대칭적 관계로부터 발출되는 것이다.
만약 레비나스가 독아론(solipsisme)를 거부했다면 그것은 이성(raison)이 짜 맞추는 감각들(sensations) '주관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인식의 보편성(universalit de la connaiss- nce) 즉 말하자면 지식의 무제한성(illimit de la lumi re)과 어떤 사물의
외부서의 존재 불가능성 때문이다"(impossibilit pour aucune chose d' tre en dehors).
메를로-퐁티에 있어서의 타자란 정말 '자기 옆의 타자'(l'autre c t de soi) 곧 자기에게 덧붙여진 부수적으로 다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애매성이란 간판을 내걸고 등장한 메를로-퐁티의 '제일철학'은 선-합리적(pr -rationnelle) 지각과 비반성적(irr fl chie) 지각
을 파롤(parole)과 로고스logos)의 세계이자 철학적 반성과 이성, 법률 그리고 역사의 잠재성 속에서의 타자와의 교환의
세계로서의 언어와 진정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선-개인적 지각세계는 메를로-퐁티의 후기사유가 중시했던 표현성(expressi- vit )이란 모든 하중을 자신 속에
결국 싣게 된다.
지각세계는 이미 언어(langage)요, 잠재적 표현(expression en puissance)이다.
거기서 지각주체는 자신이 규정하여야 할, 그리고 말해주어야 할 표현성의 욕조 속에 담겨져 있음을 알게되고, 단번에
지각주체는 자신과 더불어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다른 지각주체들과 교류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따라서 레비나스에서처럼 일방통행적 재능을 가진 윤리가 특권을 누려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계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세계에 동일한 구조들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지각의 선차성(primat de la perception)은 또한 개체들에 대한 관계의 우선성(primat de la relation sur les individus)이요,
독아론적 주관성에 대한 표현성의 우선성(primat de l'expression sur la subjectivit solipsiste)이기도 한 것이다.
주체의 실존은 먼저 자신이 모든 주관성을 이미 객관적인 것으로 또 무한히 객관화 할 수 있는 것(즉 표현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고, 다음 으모든 객관성은 주관적 실존에게 하나의 의미요구(demande de sens)로서 또 표현요구로서 다가
오기 때문에 애매하다.
세계는 이해할 줄 아는 사람과 이해를 원하는 사람에게 말한다.
타자에의 관계는 우선 이러한 언어의 익명적이고 유동적 가능성이요, 사물과 타자들과 분리할 수 없는 구체적인 관계
경험의 한 가운데에서만 주관적일 수 있는 익명의 말(parole)이다.
결국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지각을 표현으로 사고함은 세계의 표현성 가운데서 타자에게 그 구체적 특수성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5. 레비나스의 윤리적 관계는 타자와의 원본적인 공동체를 깨트리지 못한다 :
애매성에 대한 표현성의 선차성은 타자와의 원본적인 공동체를 함축한다.
우리는 다음을 기억함으로 이 마지막 장을 서술해 보기로 한다.
메를로-퐁티는 우리와 세계의 연결을 끊는 것으로서의 환원 그리고 관념론적 방식으로 세계의 현존을 복구하는 것으
로서의 환원에 대한 훗설적 해석을 비판한다.
이때 세계란 노에시스에 대한 노에마로서 이해되는데 이는 독아론적 의식작용들의 상관자요, 지향성으로서의 의식의
초월론적 상관자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생활세계(Lebenswelt : monde de la vie)로 귀환하는 훗설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훗설이 이 생활세계의 구성을 의식 속에 기초짓는 것과 표상의 차원과 의식의 차원을 떠나지 않음을 비판한다.
생활세계로의 귀환은, 훗설이 원했던 것과 같이, 구성적 의식에로의 복귀를 통해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
훗설은 현상성(ph nom nalit )의 체험 즉 연결(relation)과 같은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rapport au monde)인
세계현현(appara tre du monde)의 체험에 이르기 위해 자연적 태도(attitude naturelle)를 괄호친다.
그때 그가 찾은 것은 지향성(vis e ou intentionalit )인데 이는 그 상관자로 표상들을 가진 의식의 개방이라 할 수 있다.
훗설에 따른 판단중지( poch )는 인식이라는 직접성의 관계로 결과된다.
마치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처럼 또 절대적 명증과 같이 의식은 스스로 드러난다.
이는 현상성에 대한 그러한 개념의 데카르트적 측면인데 데카르트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라는 단단한 명증을 그리고
훗설은 지향성(나는 무엇을 겨냥한다)을 발견한 것이다.
자연적 태도의 괄호 치기를 견뎌내는 것으로 여겨진 이 명증이 훗설에게는 지향적 의식, 노에마적 지향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적 선험의식을 되찾는 것이다 ;
현상들의 현상성, 세계의 나타남, 세계가 주어지는 차원은 이제 선험의식의 상관자인 의식의 소유물로 환원된다.
훗설의 이러한 관념론적 개념 속에서 나타남(appara tre)은 해소되어 지향물(vis es)로 되거나 표상 행위의 부스러기가
되는데 이 표상 속에서 우리는 세계의 본질적인 밀도 즉 지각된 세계의 수수께끼 같은 강도(r sistance)와 농도(consistance)
그리고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그 세계의 두께와 신비 및 표현성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계의 현상성은 세계 자체에 귀속된 현상잠재력과 자기 계시가능성 그리고 자기 현상화하는 능력 즉 표현성의 능력으로
파악되는 대신, 그 반대로 우리 의식의 관점에 제공된 것으로, 의식의 상관자로, 고등한 선험적 관점(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메를로-퐁티 입장에서 볼 때 사유의 자연적 태도에 속하게 되는 것은 의식의 철학이다.
이 의식철학은 저 자연적 태도를 괄호에 넣음으로 지양하려고 한다.
의식의 활동에 수동성을 주입하는 대신 세계의 활동에 그것을 집어넣는 것은 의식의 구성적 능력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세계가 아니며, 정작 수동적인 것은 의식이다.
훗설은 만약 반성(r flexion)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비반성적 삶이 토양(sol)이라면, 이 비반성적 삶은 사방에서 반성을
넘쳐흐르고(d border), 또 이 반성은 자신 안에서 세계의 가공되지 않은 잠재성과 불가사의한 현전을 흡수, 제거할 수 없는
것을 잊고 있다.
메를로-퐁티에게 세계는 선구성적이고 나의 의식 밖에서 구성된다.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선구성으로서의 세계 개념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이 점은 상호주관성을 위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생활세계에 뿌리내림이란 모든 의식철학과 그것의 타자관계에 관한 함축들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공동신체성의 차원과 나와는 다른 살의 신체로서의 타자지각의 차원에서 해결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타자의 발견은 그가 나의 의식에게 자신을 그의 특수성 속에서 구성해 달라고 요구하는 독특한 상관자일 거라는 의미
에서의 특수한 지향에 속하지 않는다. (특히 내 고유한 신체가 가진 의식과의 유비론적 표상에 의해서 구성되는 요구,
cf.훗설의 paarung)
오히려 타자는 보편의 특징과 현명한 상호소통의 특징을 띠고 파롤, 로고스, 및 사유교환의 가능성으로 인간 주체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표현성과 더불어 주어진다.
메를로-퐁티가 독특한 애매성이라는 차원으로 사고할 때 그는 신체와 정신, 경험론과 지성주의, 유한성과 보편성, 외재
성과 내면성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했다(메를로-퐁티의 미간행, Revue de m taphysique et de morale, n.4, 1962).
그 자신은 애매성의 불충분함이 문제라고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실존은 여전히 의식과 신체의 혼합, 종합으로 사유된다 ;
신체는 메를로-퐁티가 자신이 비판한 일방적 독트린들(경험론과 주지주의) 사이를 종합하면서 의식과 세계 사이의 중
재자로서 제시되는데 그친다.
그러나 세계의 내재적 표현성(expressivit immanente)이란 차원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신체를 의식과 세계의 중재자로서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로 생각함이다.
따라서 언어는 더 이상 신체주관의 제스트로서만 또 신체적 제스트의 변양체로서만 이해되지 않고 세계의 표현성 자체의
성질을 띠는 것으로 즉 원본적 표현(expression primordiale)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언어는 다른 표현양식들과 비교해 볼 때 특수성을 지니진 않았고 이는 곧 메를로-퐁티에게 간접적 언어로서의
예술에 대한 아름다운 반성과 침묵의 언어로서의 회화(peinture)에 대한 숙고를 허락하게 된다.
만약 언어 본연의(comme tel) 특수성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의 표현능력의 자질이 중재자로서의 자신을 잊게 하고 인간적
사유와 사상들의 보편적 교환을 위해 사라질 수 있다고 믿게 해 주는 데서 기원한다.
즉 언어가 사유와 의미, 그리고 의미탐구를 구성하는 차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유를 번역하기만 한
다고 믿는데 그것의 본질적 환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차원' 또는 메를로-퐁티가 이상성 또는 관념성(id alit )이라 명명한 것의 차원은 지각된 체험세계에 숨어있는
(latent) 것으로 이해된다.
의미차원(niveau du sens)은 인간에 대한 세계의 표현성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성은 당연히 세계와 인간의 관계 가운데서만 존재하고 이 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표현성의 개념은 상호소통의 한 형태를 의미하지만 이 형태란 내재성, 내재적 초월성으로 특징지어 진다.
표현된 것(exprim )은 표현(expression)과 분리되거나 그것에 선행적이지 않다.
우리가 말하고 번역할 수 있는 잠재적 사유로서의 표현된 것은 표현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된 것은 표현추구(qu te d'expression)에 부속하고 이 추구자체 속에서 구성된다.
표현된 것은 자신의 작업과 그에 따른 거북함과 황당함과 영감(enthousiasme)과 그리고 이 탐구(qu te)에 동행하는 미지
(inconnu)와 기대(attente)의 인상(impression)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를 본질적으로 언어적인 탐구(단어를 선택하고 한 언어 곧 우리에겐 언제나 낯선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말하고, 저술하는 탐구)에서뿐만 아니라 회화적이거나 음악적인 미학탐구(세계를 표현하고 말하기 위한) 속에
서도 찾게 된다.
6. 닫으면서
말한다는 것, 그것은 항상 타자에게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말함이요, 의사소통의 과정들 속에 등록되는 것이다.
타자 문제는 언어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타자 이해는 따라서 원본적 표현(expression primordiale)에의
관계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파롤(parole)이 파롤 그 훨씬 더 이상의 것인 것과 같이, (사랑 그것은 그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
샤르돈을 개작하면서) 타자는 그 자신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떤 세계의 표현성에의 관계인 것이다.
레비나스가 어떻게 생각할 지라도 사람들은 우리들의 실제적이고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세계에의 관계로부터 타자를
전적으로 분리시킬 수 없을 것이다.
타자에의 윤리적 관계는 도덕과 세계 사이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타자의 배고픔과 그의 불행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또 그가 나를 무한히 요구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하나의 세계라는 공통성과 또 세계-내-존재의 공동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배고픔은 나의 배고픔이요, 말하자면, 그의 배고픔은 나의 배고픔이 되어야 할 것이고, 나의 배고픔일 수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등장이 세계와 나의 자연스런 공모(complicit )와 나의 자연적 이기주의를 깨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결코 나의 것이 아니었고 세계와 나와의 공동체도 결코 본래적이지 않았다.
타자가 나를 위한 세계의 표현성 속에서 확실히 독특한 요소로서 항상 거기 있었다.
우리는 공동의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이 세계 없이 나는 타자의 배고픔이라는 위급한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고
그의 필요에 대한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의 사활이 걸린(vitale) 긴급사항 즉 경험론적 긴급성보다 우월한, 호소력 있고, 고상한 특징의 긴급사항으로서의
타자를 도와야할 불가피성을 내가 깨달을 수 있기 위하여 타자는 나를 그의 볼모로 삼는 외부적 존재가 아니라 다른 나
자신(un autre moi-m me)이기도 해야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공동의 세계는 우리 각자의 자아의 확대 장소로서 지각되어야 한다.
반면에 레비나스는 내재적 세계 속에서의 자아 확장(expansion)의 모든 개념이 타자의 출현으로 제거되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가 레비나스 보다 메를로-퐁티를 따른다면, 타자란 달에서 떨어져 나에게 계시를 가져다주는 ovni(미확인 비행물체 :
objet volant non identifi )가 아니다.
나는 이미 나에 대한 타자이고, 나 역시 나를 볼모(otage)로 삼고 있으며 나 또한 나에 대한 요구 수위가 높다.
결국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하나의 계시이다(une r v lation pour moi-m me).
요컨대, 진리는 세계라는 바탕 위에서의 또 세계의 표현성이라는 토대 위에서의 타자와의 심층적 관계(lien profond)이다.
그러나 이 표현성은 단지 기술적(descriptive)이거나 감성론적(esth tique)인 것만은 아니고 윤리적이며, 가치론적 요구
(exigences axiologiques)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예컨대 사람들은 지구를 배려하고 그들의 땅을 보호하는 요구를 하나의 가치로 발견케 된다.
인간은 그들의 세계-내-존재들이라는 공동체 바깥에서 인간에 대한 절대자가 아닌 것이다.
여러 행성들 사이에서 지구에 정박한 것은 이미 그들의 윤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표현적이지 않을 세계는 윤리의 담지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레비나스가 뭐라 얘기하든 윤리적 차원이란 감성적 차원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감성적인 것(esth tique)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이다.
(예컨대 음악과 미술과 모든 시각적, 감각적 즐거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아랍 에미리트(Emirats Arabes) 그리고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의 위선자들은 인류의 절반(여성)을 억압하는
자들이다.)
감성적인 것의 거부는 윤리적 허약함의 징표이고 인간에 대한 연민 결핍의 표시인데 위의 경우 특별히 여성에 대한 인간
적 동정 상실의 증거다.
또 감성적인 것의 경시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세계의 위험들에 대한 불안을 계시하며, 궁핍해진 자아 속으로의 움츠
러진 후퇴와 사후세계와 피안으로의 도피를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감성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은 표현성에 대한 공포요, 정확히는, 표현적 실재들과 상징적인 것과 풍부한 은유성을
무서워함이다.
만일 레비나스가 여자를 다른 타자(autre)보다 열등한 타자, 즉 보편성이 결여된 타자, 특별한 위상이 부여된 타자로
만들고, 그녀에게 자연성(naturalit )과 감성적인 것(esth tique)이 공모된, 전통적이고 축소된 자리를 할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이 공모란 레비나스 자신으로서는 윤리적으로 열등존재인 것과의 공모이므로 그의 여자에 대한 타자사유는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보다는 더 감각성에 가깝고, 자연에 더 근접해 있다. 열등하고 초월성이 결여된 자연성과 감성론의 본질은 감각적이고 내재적인 비젼인데 레비나스에게서 그것은 자아에 가까운 것이고, 주지하듯 이 자아는 그에게 부정적이다. 그가 보기에, 메를로-퐁티에게는 자아와 존재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 내재적이다. 인간과 존재의 유기적 분절에서 시작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이렇게 내재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도입시켜 그들(자아와 존재) 사이의 단절과 동시에 초월성의 가치 즉 윤리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내재적 초월성을 견지하는 메를로-퐁티의 눈에는 그가 선명한 이원론자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Merleau-Ponty, M., Ph nom nologie de la perception, Paris, Gallimard, 1945.
Merleau-Ponty, M., Le visible et l'invisible, Paris, Gallimard, 1964.
Levinas, E., De l'Existence l'existant, Paris, Vrin, 1947.
Levinas, E., Le Temps et l'autre, Montpellier, Fata Morgana, 1979.
Levinas, E., En d 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Paris, Vrin, 1974.
Levinas, E., Totalit et infini, La Haye, Nijhoff, 1974.
Levinas, E., Ethique et infini, Paris, Fayard, 1982.
Levinas, E., Transcendance et Intelligibilit .Suivi d'un entretien, Gen ve, Labor et Fides, 1984.
Sartre, J.P., L' tre et le n ant, Paris, Gallimard, 1942. [R sum ]
La question d'autrui chez Levinas et
Merleau-Ponty
Shin, In-sup(Chonan Univ.)
Autrui chez Merleau-Ponty est-il vraiment r ductible l'autre c t de soi ?
La premi re philosophie de Merleau-Ponty, plac e sous le signe de l'ambigu t ,
n'est pas parvenue mettre v ritablement en rapport une perception pr - rationnelle, irr fl chie, avec le langage, le monde de la
parole et du logos, de l' change avec autrui en puissance de r flexion de raison, de droit et d'histoire. Le monde perceptif pr -
personnel comporte en fait en lui-m me toute une charge d'expressivit que la seconde ou derni re pens e de l'Auteur a pris en compte.
Le monde perceptif est d j langage, expression en puissance. Le sujet percevant s'y
trouve dans un bain d'expressivit qu'il a d terminer, dire. D'embl e il s'y trouve en relation avec d'autres sujets percevants qui sont
galement en charge du monde, et il n'y a pas de raison pour que l'ethique privil gi e ait un don sens
unique : le monde parle tous, m me s'ils ne lui donnent pas des structures identiques (groupes en guerre, agressivit d'animaux h
umains qui inventent des mythes charg s de justifier leurs oppositions comme leur harmonie). Le pirmat de la perception est aussi
un primat de la relation sur les individus, un primat de l'expression sur la subjectivit solipsiste. L'existence subjective est ambiqu
d'abord parce qu'elle saisit toute subjectivit comme d j objective et objectiavale l'infini (expressive) et aussi parce que toute
objectivit vient elle comme une demande de sens, d'expression. Le monde parle qui sait entendre, veut entendre.
La relation autrui est d'abord cette possibilit et flottante de langage, cette parole anonyme qui ne devient subjective qu'au sein d'une
exp rience concr te de relation aux autres et aux chose, ins parablement.
Mots-Cl s : Ambigu t , Expressivit , R ciprocit ,Relation asym trique, Intercorpor it
(hip34)
메를로 퐁티와 들뢰즈의 미학세계
세잔느의 회의
메를로 퐁티는 세잔느의 회의를 통해 기존의 세잔느의 명화들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세잔느의 친구들이었던 에밀 졸라와 베르나르처럼 세잔느의 개인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봄은 세잔느의 심리 상태를
지나치게 염두한 것이란 말을 한다.
이런 세잔느의 심리 상태에만 의존 하여 그의 작품을 설명 하는 것은 적극적인 해석이 될 수 없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세잔의 회화를 그의 현상학 이론에 접목시켜 설명을 한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인간과 세계가 탄생하는 원초적 지각의 장을 해명하려 함에 있다.
사람이 어떤 대상(object)을 사람의 의식을 통해 지각하는데, 이것은 어떤 지향성을 의미하고, 그 지향성은 신체성에 영향을 받는다
설명을 하였다.
즉, 여태 object로만 간주되었던 신체를 지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신으로 들어가기 이전의 몸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도식의
중요성을 메를로 퐁티는 말을 하고 있다.
즉, 정신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신체는 이미 의식, 지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체와 세계와의 관계는 상호주관적인 것이 된다.
신체는 세계 안에 놓여있기도 하지만, 세계는 신체를 통해 펼쳐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이 회화론에 어떻게 접목이 되는 것일까?
그는 세잔느의 회화작업으로 그의 회화론을 설명한다.
일단 세잔느가 남긴 말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세잔느는 그가 설명하려는 것은 보다 신비스럽고 존재의 바탕에 닿아 있는,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감각의 근원에 관한 것이
라고 말을 한다.
여기서 세잔느 자신도 원초적 지각의 장에 관한 자각을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남긴 말 중, 우리는 봄으로써 사물이나 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과 일치하는 지점이다.
즉, 세잔느도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세계, 신체와 세계의 상호 관계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잔느는 그 결과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 감각적인 표면을 가지고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역설적인 목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우리가 보는 고정적인 사물과 그 사물이 나타나는 가변적 방식을 분리시키려 하질 않았다.
다만, 그는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의 자발적 조직과 관념 및 과학 등의 인간적인 조직을 구별하였다.
그 결과, 사진에서 보여지는 사진적 원근법이 그의 그림에서는 나타나질 않는다.
그는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는 생생한 원근법을 추구하였다.
또한, 그는 윤곽선도 색채들의 결과여야 한다 주장하였고, 인상파처럼 빛의 찰나를 포착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 고유의
색을 파악하여 그 존재를 객관화 하려 했다.
이처럼 메를로 퐁티는 기존의 철학자들과는 예술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예전에는 데카르트처럼 정신과 외부를 지나치게 단절시켰다 하면, 메를로 퐁티는 사람의 인식을 중점으로 설명을 하고, 대상에
대한 의식의 지향성인 지각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정신과 외부를 이으려 노력했다.
또한 무의식의 측면에 신체를 끌어들임으로써 단순히 대상으로만 취급되어온 신체를 지각의 한 측면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로 그는 회화를 단순히 정신에 의해서만 설명 한 것이 아니라, 그 작업에서 나타나는 정신과 외부로 가기 이전의 신체와 세계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신체가 표출해낸 세계로써의 회화로 세계와 회화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는 듯하다.
베이컨의 그림으로 본 들뢰즈의 회화론
나는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에 대해 평한 것들과 내가 베이컨의 그림을 보고 평한 것들을 합쳐 들뢰즈의 회화론을 좀더 자세히
재조명해보고자 하였다.
감각의 경험론적 실행은 이미 감각되어진 것을 뜻한다.
이미 오랫동안 감각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억의 과정으로 넘어갈 필요가 없이 즉각적으로 정보가 처리됨을 뜻한다.
난 회화에서 경험론적 실행이 드러나는 것은 일상 그대로의 재현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사진이 나오기 이전의 사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회화들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진이 나타난 이래로 더 이상 회화 내에서는 경쟁력이 사라진지 오래라고 들뢰즈는 말하는 듯했다.
베이컨의 회화에서 보면 그것은 일상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경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상에서는 감각할 수 없는 것들을
시각화 함으로써 그 그림은 관객들로 하여금 감각의 경험론적 작동을 막아버린다.
또한 감각의 논리라는 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감각에 대한 개념과는 달리 좀더 감각의 층위를 격상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베이컨의 그림에서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베이컨의 그림을 보면 그의 그림을 언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그의 그림 안에는 언어적 요소가 없다. 언어적 요소라 함은 칸트가 말하던 지성의 의미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언어의 역할 자체가 감성에서 수집된 자료를 보편적으로 범주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상징과 은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그림 그 자체일 뿐이지 언어적으로 어떠한 설명도 들어가 있질 않다.
위에 말한 것처럼 언어적 요소를 베이컨은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인물을 그릴 때 인간으로써 나올 수 있는 스토리 조차 배제시켜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인물, 즉 Figure라고 말해지는 것들을 그린 작품이 굉장히 중요하다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가장
회화다움을 추구하는 태도가 가장 잘 보여지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Figure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에게서 인간다움을 찾을 수가 없다.
비현실적인 공간 안에 놓인 그 형상은 뒤틀려있고,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어떠한 힌트도 주어져있지 않으며,
심지어 제목에서 조차도 그저 그 인물을 Figure라고 말하고 제작된 년도를 명시할 뿐 어떠한 것도 관객에게 힌트를 주질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베이컨이 '박제된 인간'을 그리려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박제된 동물들을 볼 때의 느낌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 동물들 자체를 볼 뿐 그 동물이 무엇을 하다가 박제되었는지, 어떠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갔을지는 전혀 생각질 않는다.
베이컨도 마치 인간들을 박제된 동물을 보듯이 냉철한 시각으로 그린다.
인간들을 캔버스 안에 박제시키고 가둠으로써, 그 형상들에 대한 경험적 판단을 할 수 없게 베이컨은 막아버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가 '박제된 인간을 그렸다'라는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베이컨이 인물의 형상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린다는 점에서다.
미술사적으로도 인물이 들어간 인물화들을 해석할 때 그 인물의 시선을 가장 중요시 생각하고 해석한다.
그것이 우릴 향해 뚜렷이 응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와 그 회화 속 인물간의 스토리를 형성한다고 판단하고, 회화 속 인물들의
시선의 흐름에 따라 그 그림의 스토리를 해석한다.
하지만 베이컨의 인물은 독특하게도 어느 곳에 시선을 둔 건지 잘 구분하질 못한다. 되려 일그러진 얼굴의 형상 속에 눈의 존재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베이컨이 얼마나 철저하게 언어적 스토리와 회화의 기능을 구분해 냈는지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놓고 보자면 들뢰즈는 회화가 가장 회화다울 때 빛을 발한다고 하는 것 같다.
그가 말하는 가장 회화다움은 베이컨이 보여준 것처럼 감각되어질 수 없는, 이미 언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평면적 이미지 고유의 느낌을 높게 평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들뢰즈가 기존에 잡혀있던 감각의 개념을 부수고 감각에도 논리가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이, 내가 들뢰즈의 회화론을 본 결과
회화도 또한 그 고유의 논리가 존재한다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권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