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5일 목요일 맑음
잘 잤다. 빵과 쨈, 그리고 포도로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항구를 향해 걸어 내려간다. 길게 늘어선 시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구시가지에 들어섰다. 구시가지는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오랜 황제의 도시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로 악명 높았던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집권을 끝낸 후 조용한 말년을 보내기 위한 곳이 스플릿이었다. 지중해에서 온화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으로는 아드리아의 잔잔한 바다가 넘실거리는 스플릿은 그에 딱 맞는 곳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들여온 대리석과 스플릿 앞 바다에서 채취한 석회암으로 장장 10년에 걸쳐 스플릿 항구에 궁전을 지었다.
바다를 향하는 외벽 길이가 215m(두께20m, 높이 20m), 다른 면이 180m로 궁이라기보다는 도시였다. 성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황제의 거처, 서쪽은 신하들과 군사들의 공간으로 분리되었지만 황제가 죽고 궁터 내부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해 지금은 10,000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우리는 동문(Silver Gate)으로 들어간다. 로마시대의 유적이 그대로다. 동문의 입구에는 그린 마겥이 있다. 남대문 냄새가 나는 옷가게와 싱싱한 야채와 각종 과일과 빵, 꽃들도 팔고 있어 언제 들려도 기분 좋은 곳이다. 동문을 통해 들어가 ⓘ건물에 들어갔다. 시내 지도와 작은 안내 책자를 들고 나왔다. 작은 광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구시가지의 중심 되는 곳이다. 도미니우스 성당의 종탑이 높게 세워져 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열주랑이 있다. 시민들과 관광객의 휴식 터인 테라스가 되어있다. 그리스도 교인들을 박해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묘가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개조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스플릿 사람들은 폐허가 된 궁전의 돌로 새로운 시를 건설했다. 지금도 170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뎌온 장대한 성벽과 기둥들, 대성당으로 바뀐 영묘, 세례당으로 바뀐 유피테르(쥬피터) 신전이 이 궁전이 누렸던 지난날의 영광을 말해 준다. 황제의 조용한 여생을 위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발적으로 제위를 물려준 유일한 로마 황제다. 제국을 황제 4명이 나누어 다스리는 4분 통치제를 도입하고 갖가지 개혁을 단행해 제국을 통일한 황제는 남은 생을 편안히 보내기위해 고향인 사로나 근교에 궁전을 짓기로 했다. 고대 일리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로나는 로마의 속주가 된 뒤부터는 달마치아주의 주도가 되었다. 지금 사로나는 폐허가 되었지만, 스플릿 시는 궁전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황제는 305년 권좌에서 물러나 316년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성의 전체 구조는 로마군 진영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지 중앙을 동서와 남북으로 양분해 넓은 도로가 지나게 함으로써 전체를 4구역으로 나누었다. 도로 끝에는 문이 있는데, 동문은 은문, 서쪽은 철문, 남쪽은 동문, 북쪽은 금문이라고 한다. 이 궁전은 성벽을 갖춘 요새로 견고함과, 도로와 광장에서 느껴지는 웅장함, 그리고 호화로운 빌라가 지닌 우아함 그리고 쾌적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궁전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다. 도로의 교차점에서 3계단 내려온 곳에 트여있는 테라스이다. 이집트 화강암과 돌결이 새겨진 원주 16개로 둘러싸인 이곳은 황제의 알현실로 통하는 열주랑 이었다. 원주 16개는 서방의 로마건축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반원형 아치를 떠받치고 있다. 이곳에는 기원전 15세기에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스핑크스가 지금도 이 테라스를 지키듯 서 있다. 시민과 관광객들의 휴식 터가 된 이 테라스에서는 축제 때 댄스파티가 열리기도하고 연극도 상연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 사용된 재료와 기술은 로마제국의 건축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달마치아 지방의 장인과 그 밖의 지역에서 온 장인들의 기술은 로마에서 운반되어 온 많은 대리석과 이 지방에서 나는 트래버틴(석회암)을 사용하여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세의 스플릿의 시가지는 궁전을 둘러싼 성벽 내에 만들어져 성벽 밖으로 확장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7세기 초에 아바르인과 슬라브인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사로나와 궁전은 심한 피해를 입었다. 사로나의 주민들은 집과 성당을 새로 짓기 위해 궁전의 돌까지 가져와 인도에 깔았다. 황제의 궁전 덕분에 훗날 스플릿 시의 초석이 마련된 셈이다. 스플릿 시는 원주 16개로 이루어진 열주랑 옆에 주거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의 건물이 잇달아 건설되었다. 남북으로 뻗은 사로나 거리의 북쪽 끝에 있는 ‘황금의 문’ 방어용 탑에도 사람이 살게 되면서 창을 벽돌로 막았다. 성벽 네 모퉁이에 있던 방어 탑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은 북동쪽의 탑으로 18세기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지오바니 다 라벤나 주교는 황제의 영묘를 기독교 교회로 개조해 버렸다. 쥬피터 신전은 세례 당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프리츠 동쪽에는 아직도 황제와 아내 프리스카의 조각상이 남아 있다. 영묘입구에는 2마리의 로마 사자 눈이 빛나고 있다. 영묘는 장식이 화려한 기둥머리가 달린 원주 24개가 떠받치고 있는 팔각형 구조로 중앙에는 황제의 석관이 놓여 있었다. 소박한 예배당에는 영묘를 대성당으로 바꾼 주교의 석관이 놓여있다. 세례당의 세례 반(통)에는 옥좌에 앉은 크로아티아 왕을 표현한 부조가 있다. 이것은 아드리아 해 연안에 남아있는 많지 않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품가운데 하나다.
남문을 향해 걸어가니 지하도가 나온다. 아드리아 해로 통하는 길이다. 여기에는 황제의 거실, 알현실, 쥬피터 신전이 있었다. 자신을 쥬피터의 양자라고 말했던 황제는 행정과 호위병들을 위한 장소로 쥬피터 신전이라 불렀다. 신전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세례 통이 하얀 대리석으로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고 안에는 많은 동전이 던져져 있다. 정면에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동상이 서 있는데, 쥬피터 인지 모르겠다. 구석에는 석관 두 개가 이름도 없이 놓여 져 있다.
신전에서 나와 지하도에 섰다. 황제를 알현하려는 신하나 손님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군사들이 부지런히 오갔을 거리에는 지금은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약간 어둡다. 가게들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악세사리는 붉은색 돌이다. 반지와 목걸이 특히 귀걸이가 많다. 산호초의 일종이라고 한다. 산호보석 Coral 이다.
구경하던 중에 한국 단체 관광객을 만났다. 좀 더 이곳에 대해 알고 싶어서 따라 다니기로 했다. 여자 가이드에 일행 중 한분이 통역을 한다. 우리 나이 비슷한 단체다. 남문 골든 게이트 로 이동했다. 아름다운 아치와 화려한 조각이 있어 황금의 문이라고 한다. 남문은 방어벽이 이중으로 되어있어 견고한 문이다. 남문을 나서니 커다란 동상이 하나있다. 크로아티아의 대표적인 조각가 이반 메스트로비치의 작품인 그레고리 닌스키 주교의 청동상이다. 주교의 오른발 엄지발가락을 보면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주교는 10세기 경 크로아티아 인들이 모국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개혁하는데 공헌한 인물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지극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라틴어 미사 전례를 서민들이 이해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개혁을 했으며, 크로아티아 어학 사전을 편찬한 크로아티아 종교 개혁자이다. 내가 보기에는 해리 포터 소설 속의 알버스 덤블도어(리쳐드 허리스)같은 모습이다. 가이드가 이동상을 보고 해리포터 영화의 인물 설정을 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우리도 엄지발가락을 만져보며 인증 샷을 했다.
다시 궁전 내부로 들어간다. 궁전내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곳곳에 작은 골목이 길이 만들어지고, 궁전을 중심으로 스플릿의 중심지가 발전한 터라 외곽부분에는 궁전과 외부의 경계가 모호하다. 아담한 레스토랑과 분위기 좋은 바, 명품 가게와 약국까지 궁전 내부에 있다.
골목길을 따라 서문으로 나오니 나로드니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다양한 건물들이 있다. 나폴레옹이 잠깐 지배했을 때 지은 프랑스 풍 건물, 16세기를 지나며 이탈리아 인들이 지배했을 때 지은 이탈리아 풍 건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지배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건축물 등이 섞여 있어 재미있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상하수도 등 도시계획 수립에 기초를 만들어준 나폴레옹 지배시의 프랑스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단다. 중세 시대 때 지어진 교회는 파리풍이다. 15세기에 지어진 베니스 공화국 시청사 건물은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을 구시가지 광장이라고도 한다. 광장 주변에는 노천카페가 자리 잡고 있다.
더 걸어가니 작은 수산시장이 나온다. 이곳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아드리아 해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도미 류, 바닷가재, 새우, 조개류, 오징어 등 해산물이 지천이다. 비릿한 냄새와 아우성 소리가 듣기 좋다. 다시 서쪽 문으로 들어와 골목길을 걷는다. 기계에 의해 작동되는 커다란, 오래되 보이는 시계가 눈에 들어오고 그 밑에 삼성 에어컨 박스가 있다. 골목길을 걷다보니 페어타 광장이다. 여기에는 책을 들고 뭔가를 쓰는 모습을 한 동상이 있다. Marko Marulic 라는 문학가 겸 학자인데, 최초로 크로아티아 어로 책을 쓴 사람이란다.
우리는 다시 RIVA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이 거리는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노천 카페에 앉아 느긋한 하루를 보내는 산책로다. 18세기에 와서야 매립되었다. 궁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바다에 바싹 붙도록 벽을 세워 바깥 외벽에 파도가 철썩 거렸다는 게 상상이 된다. 지금은 스플릿을 찾는 이들이 관광을 시작하고 끝내는 곳임과 동시에 궁전으로 향하는 정문이 있고, 로마의 흔적이 느껴지는 둥근 아치창이 있는 궁전의 외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공화국 광장으로 갔다. 어제 내전 종식 기념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이 나라의 추수 감사절 행사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이 점령했을 때 지어진 건물로 네오 크라식 양식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 지배기에 바다를 향해 디귿자 궁전으로 화려하게 개조하여 지금은 오페라 극장과 아파트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어제의 행사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놀랍다.
바닷가에 서니 배가 다양하다. 이탈리아로 가는 배도 있고, 드부로브닉으로 가는 배도 있으며 인근 섬으로 운행하는 배도 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여기는 육상교통 수단보다 해상 교통수단이 더욱 왕성해 보인다. 해안가를 산책하다가 남문으로 해서 다시 궁전으로 들어갔다. 골목길은 강열한 태양에 상대적으로 어두워 보인다. 교회 탑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시끄럽다. 급한 느낌이 든다.
다시 교회의 내부로 들어갔다. 화려하고 웅장했던 그의 사후의 안식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중세에 와서 그리스도교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수많은 사람을 사자우리에 던져 넣은 황제의 잔인한 악행에 분개한 크리스찬들이 그의 시신은 어딘가에 유기하고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은 성자들의 모습을 재현해 두었다. 교회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지만 화려한 프레스코 화 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설교단, 아름다운 조각품에 관광객들은 기회만 되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성당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해서 별 감동이 없다. 뜨거운 태양 볕을 피하게 해 주는 시원함이 고마울 뿐이다.
종탑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종탑을 오르려니 입장료를 내란다. 아내는 그늘이 있는 계단에서 쉬기로 하고 혼자 올라갔다. 입장료는 10 크로네다. 이 종탑은 13세기 초반에 세워졌는데, 파괴되었다가 그 후에 보수되었다. 높이는 60m 다. 어른 두 명은 절대 함께 오를 수 없는 비좁고 어두운 통로에 가파른 돌계단이다. 좀 오르니 종들이 보인다. 크고 작은 종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다. 1700이라는 뜻 모를 숫자가 보인다. 올라가는 길은 멀고도 가파르다. 흔들려 불안해 보이는 손잡이에 의지해서 올라간다.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이마에 땀이 맺힌다. 하지만 계단을 오를수록 눈 아래 보이는 스플릿 시가의 붉은 지붕들과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풍경이 궁금해 걸음이 빨라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사방으로 난 창을 내려다보려니 눈 닿는 곳마다 포토제닉 하다.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를 오고 갈 대형 쿠루즈 선이 정박한 항구가 눈 아래 한눈에 들어온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붉은 지붕의 물결이 불규칙하게 펼쳐져 있다. 그 지붕위에 드리워진 종탑은 꾸밈음 처럼 멋을 준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항구의 멋은 너무나도 아픈 역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동서남북을 번갈아 내려다보며 도시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느끼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남성 중창단의 아카펠라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울림이 너무 좋은 맑고 깨끗한 소리다.
노래 소리를 찾아보니 둥근 돔 지붕의 구멍 속에서 들려온다. 서둘러 좁은 계단을 내려왔다. 음악이 계속되기를 기대하면서......... 아내와 함께 서둘러 둥근 돔 지붕 홀로 갔다. 울림이 좋은 홀에서 건강해 보이는 청년 8명이 노래를 하는데, 정말 잘한다. 화음도 좋고, 힘도 느껴지고, 음악을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이다. 반바지에 흰 티를 입은 자유로운 복장이다.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 벽에 기대어 음악을 듣고 박수치고 놀았다. 이곳은 전쟁을 겪으며 폭격에 파손되어 지금은 뚫린 구멍으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구멍으로 종탑의 십자가가 눈에 들온다. 매년 여름이면 오페라 ‘나부코’ 가 열린다는데, 소식이 없고 8명으로 구성된 아카펠라 그룹이 절묘한 화음을 이루며 몇 곡을 부른다. 자기들이 만든 CD를 팔고 있는데, 제법 비싸다. 작은 타일에 예쁘게 만들어진 바닥에 누워 구경하는 이도 있고 앉아서, 또는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화려함도 없고 규모도 작지만 로마의 판테온이 생각나는 장소다. 뻥 뚫린 천장의 원형 구멍은 폭격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뚫어놓은 것 같다. 음악이 끝나자 우리도 나왔다.
생선시장 근처로 걸어가는데, 또 음악소리가 들린다. 공화국광장에 붙어있는 Marmentova 거리에서 나는 노래 소리다. 통 기타를 든 젊은이와 어코디언을 든 50대 남성 몇이 모여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주로 오래된 팝송이다. Love me tender, You rais me up 등 낯익은 노래를 불러주니 친근감이 간다. 지나가던 남자들도 합세하여 함께 부른다. 시끄럽게 신나게 불러 주변이 흥분되었는데, 흰 개와 검은 개 2마리는 주인의 악기상자 옆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다.
점심이다. 캐밥을 하나사서 버스터미널 위에 있는 그늘에 앉아서 먹었다. 시원한 그늘에서 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항구 쪽의 RIVA 거리는 늘 생동감이 있어 좋다. 내일 드부로브닉으로 가는 버스표를 미리 예매했다. 야채시장으로 가서 포도를 사다가 그늘에 앉아서 먹는다. 정말 달고 맛있다. 아드리아 해의 신선한 바람ㄱ솨 뜨거운 태양 볕이 만들어낸 과일이라 달고 풍성하다. 오후에는 날씨도 뜨겁고 몸도 지쳐있어 그늘에서 시간을 보낸다. 서둘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한가롭게 머물며 아내와 얘기하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여행의 참 맛은 쉼에 있는 것 같다. 입이 심심하여 콜라와 피자를 사다가 또 먹었다. 먼 이국땅에 와서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는 시간을 가져 보니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쉬는 장소를 달리해 보기로 하고 궁전 테라스로 갔다. 몇 개의 길게 늘어진 계단에는 방석도 있다.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늘이 진 층계에 주저앉아 생각과 몸을 멈추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TV 영상처럼 변화가 심하다. 궁전 지하 통로를 통해 나오는 사람들이 꼭 샘터에서 물이 솟아나오듯이 끊임없이 나온다.
갑자기 북소리가 들린다. 고함소리와 함께 로마병사들이 나오더니 네로황제 부부가 입장을 한다. 흰 옷에 월계관을 쓴고 진짜 황제처럼 연설을 한다. 6명의 로마 군인이 교대식을 겸한다. 황제의 연설이 끝나자 ‘아베’ 라고 외치니 군중도 따라한다. 아베가 무슨 말 일까? 재미있는 이벤트다. 정말 동화 속 나라 같다. 로마병사 2명만 광장으로 내려오고 박수와 함께 다 퇴장한다. 로마병사는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팁을 챙긴다. 2시간 정도를 앉아서 구경하다가 저녁을 해 먹기로 하고 슈퍼를 찾아갔다. 거리의 화가들이 작품을 걸어 팔고 있는 동문방향으로 향했다. 시원한 하늘색 그림이 작은 액자에 넣어져 벽에 걸려 있는데, 나름대로 멋지다. 슈퍼를 겨우 찾았는데,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단다. 숙소에서 끓여 먹을 것이라고 파스타와 계란 5개 등을 샀다. 숙소로 기대를 갖고 올라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주인 할머니와 파스타를 끓였는데, 실패다. 너무 짜다. 계란을 삶아서 내일 먹을 양식으로 준비했다. 주인할머니께서 주시는 크로아티아 전통 음식만 얻어먹었다. 이름도 모르지만 정말 맛있다. 주인 할아버지가 정성들여 키우는 새 한 마리가 화장실 둥근 창가에 서 목이 쉬도록 울어댄다. 낯선 우리 때문인 것 같다. 새가 상당히 예민하게 푸드덕 거리며 설쳐대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숙소에서 할 일이 없어 다시 항구로 나왔다. 저녁 분위기가 궁금했다. 또 오늘 뭔가가 있을 것 같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회색 군함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데, 관광객들에게 열려있어 누구나 들어가 본다. 배에는 두브로브닉 이라고 적혀있다. 아내는 올라가서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재미있단다.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모든 것이 관광객들을 위해 열려있는 분위기다.
부두 끝에서 궁전을 보니 또 다른 맛이 있다. 두브로부닉 으로 가는 커다란 배 JADROLINIJA 라는 유람선이 텅 빈 항구를 가득 매워준다. 항구에 붙여 세워둔 작은 배들은 깔끔하다. 우리나라는 폐타이어를 배에 붙여 정박할 때 충격을 흡수하는데, 여기 배들은 커다란 고무풍선을 달고 다녀 보기 좋다. 벤치에 앉아서 떨어지는 태양을 본다. 커다란 배에서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짐을 끌고 내린다. 도시로 향해 줄지어 걸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또 오는가보다. 날이 어두워진다.
RIVA 거리로 간다. 불 쇼를 하는 좀 모자라 보이는 젊은이를 둘러싸고 구경을 한다. 철사 링에 불을 붙여 몸 주위를 빙빙 돌려 흥겹게 한다. 꼬마들이 즐거워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작은 무대가 만들어져 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20여명이 무용연습을 한다. 오늘밤에 공연할 모양이다. 피아노를 치는 꼬마 인형을 구경하는 사람이 많다. 꼬마들은 앞에 앉아있고 어른들은 뒤에서 구경하는데, 인형을 음악에 맞추어 다루는 솜씨가 좋다. 꼬마들이 너무 재미있어 한다. 바이올린을 켜는 인형이 비발디의 4계의 음악에 맞추어 연주 흉내를 낸다. 유모차의 꼬마들이 신기한 듯 바라본다. 남미의 팬 플릇 과 타악기 팀은 여기도 있다. 천천히 걸어가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서쪽으로 걸어가니 좀 한가하고 어둡다. 부두 끝에 가보니 크로아티아 국기가 펄럭인다. 사람들이 적다. 가로등 불빛에 홍합을 잡은 젊은 어부가 망에 넣고 정리하는 모습이 건강해 보인다. 말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어부의 아내는 배가 불렀다. 시원한 밤 바다에 바람이 분다.
다시 산책로로 나왔다. 어두운 밤이다. 아이들이 많다. 깨끗하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평화로운 밤이다.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어떻게 술 먹는 사람이나 술 취한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까?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이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깨긋하고 평화로울 수 있을까? 어제부터 계속 궁금하다.
공연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밝게 웃으며 함께 해주는 모습이 좋다. 전통 복장을 하고 화장을 하고 순서가 되기를 기다린다. 이들의 무대를 기대하며 좀 기다렸다. 설치된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좌석이 없이 모두 서서 구경한다. 무대 끝에 악기 연주자들이 한 줄로 서 있는데, 만도링이 5명, 어커디온이 1명, 기타가 1명, 더블베이스가 1명이다. 청년들 남자 6명과 여자 6명이 경쾌하게 춤을 춘다. 힘이 있고 빠르다. 전통의상을 입고 종이부채, 꽃 등을 소품으로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는데 장르가 여러 가지다. 크로아티아 민속음악은 여러 양식이 뒤섞여 있다. 집시 풍의 바이올린과 탐부라와 만돌린 리듬의 반주에 맞추어 추는 생동감 있는 슬라브 원무인 콜로가 있다. 달마티아의 우아한 기타와 어코디언 밴드는 확실히 이탈리아 취향이다.
다음은 우리가 기다리던 중학생 팀이 나온다. 남자는 검은 조끼, 빨간 벨트, 붉은 모자가 인상적이고, 여자는 검은 치마에 앞치마, 흰색레이스, 머리 수건 등이 주를 이룬다. 의상도 춤에 따라 바뀐다. 건강해 보이는 음악에 흥겨운 스텝이 함께 돈다. 컴퓨터에 매달려있는 우리 아이들이 생각난다.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는 우리의 타령과 비슷하다. 구경을 하다 보니 다리가 아프다. 밤은 점점 깊어 간다. 반복되는 악기의 리듬과 비슷한 색깔의 멜로디가 좀 지겨워 들린다.
이젠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밤 10시다. 사람들은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안 한다. 궁전 남문을 통해 광장을 거쳐 북문으로 걸어간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술 먹는 사람이 없어도 모두 즐겁다. 참 인상 깊은 도시다. 호객하는 사람도 없고 거리는 청결하고, 비틀대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보고 싶은데....... 숙소에 와서 내일 출발할 준비를 해 놓고 자리에 누웠다. 주인은 자는지 조용하다. 참 즐거운 날이다. 여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루를 접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