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봉건 사회의 황금 시대라 일컬어졌던 당왕조의 개원 연간을 정점으로 그 후 이어지는 천보 연간(742~756)에는 그렇게 번영했던 당왕조의 발전상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잠재해 있던 경제·사회적인 병폐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당시 간신들의 횡포와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무분별한 총애가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종 때의 정계에는 과거(진사과)에 의해 등용된 관료와 문벌에 의해 등용된 관료들 사이에 파벌 싸움이 있었다. 당시 진사파(과거파)의 대표자는 장열·장구령 등이었고, 문벌파의 대표자는 이림보(李林甫)였다. 이림보는 그의 증조부가 고조 이연의 사촌이었으므로 황족의 일원이었다. 그가 예부 상서 겸 재상의 일원인 중서문하삼품(관직명)이 된 것은 개원 22년(734)의 일이다. 진사파의 대표 장구령을 실각시키고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재상의 정상 자리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의 일이었다.
간신 이림보는 감언이설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편 마음속으로는 상대를 모함하여 마침내는 죽여 없애는 음흉한 사람으로 ‘입에는 꿀, 마음에는 칼’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물이었다.
조정의 권리를 한손에 쥔 이림보는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는 모두 배척하여 충직한 신하 수백 명을 죽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황태자까지도 그의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림보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조정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짙게 드리워졌다.
그러나 현종은 이림보의 달콤한 말에 귀가 솔깃해 간신 이림보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현종은 늘 그의 곁에서 시중드는 환관 고역사(高力士)에게 말하였다.
“태평한 세상이로다. 국정은 이림보에게 맡기고 짐은 좀 쉴까 생각하는데….”
고역사는 현종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간하였다.
“막중 천하대사를 그렇게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는 아니되십니다 … 만약 이림보가 힘을 얻는 날에는 잘 눌러지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고역사의 말을 들은 현종의 얼굴에는 불쾌함과 성난 표정이 역력히 나타났다. 눈치빠른 고역사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사죄하였다.
이림보가 조정의 실권을 한손에 쥐게 된 736년에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武惠妃)를 잃었다. 무혜비를 잃은 현종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후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천 명이나 있었으나 누구 하나 현종의 마음을 끄는 여인은 없었다.
금
순나라 때부터 전해온 악기로 당대에도 사용되었다. 그림은 금을 연주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이럴 즈음 현종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한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수왕비(壽王妃)가 보기 드문 절세의 미녀라는 것이었다. 현종은 은근히 마음이 끌려 환관에게 명하여 일단 수왕비를 자신의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하였다.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수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수왕비가 훗날 양귀비(楊貴妃)로서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막이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의 본명은 옥환(玉環)으로 원래는 현종의 열여덟째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였다.
수왕 이모는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양귀비는 바로 현종의 며느리인 것이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선 양귀비 자신의 뜻이라 빙자하여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현종은 수왕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수왕에게 위씨의 딸을 보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하였다. 남궁에 들어온 지 1년도 채 못 되어 태진에게서는 마치 황후가 된 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다.
현종 황제와 태진은 추야장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 하여 일찍이 흥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 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셈이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
목욕을 한 양귀비가 붉은 옷감으로 몸을 감싸고 있고 시중드는 아이가 향로를 들고 옆에 서 있다.
양귀비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 하는 친척은 없었지만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楊釗)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요령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이 바로 양귀비의 6촌 오빠이다.
그런데 양귀비는 질투심이 몹시 강한 여자였다. 현종 황제로서도 그녀의 강짜에는 두 손을 바짝 들을 지경이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양귀비의 이 같은 질투심이 원인이 되어 두 차례나 현종으로부터 폐출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폐출된 양귀비는 사가에 돌아와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허구한 세월을 울음으로 지샐 뿐이었다. 양씨 일족들은 잘못하다간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여 갖가지 대책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현종은 현종대로 한때의 노여움으로 양귀비를 폐출시키긴 했으나 그녀가 없는 궁정은 마치 무덤과 같이 느껴져 하루 세 끼의 식사조차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현종의 이 같은 심정을 알아차린 환관 고역사는 두 사람을 다시 결합시킬 공작을 폈다.
우선 현종의 이름으로 어선(御膳)1) 을 양귀비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현종이 내리는 어선을 받은 양귀비는 곧바로 자신의 칠흑 같은 머리를 잘라 이를 곱게 묶어 고역사에게 건네주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이제 나는 죽음으로써 내가 지은 죄를 보상하려 합니다. 둘러보건대 나의 모든 것은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일 뿐, 오직 이 검은 머리만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폐하에게 바쳐 오늘 내가 폐하와 영원히 이별하는 마음을 표할까 합니다.”
고역사가 바치는 칠흑 같은 머리를 본 현종은 양귀비를 용서하여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본래의 관계를 회복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콧대가 높은 양귀비라도 두 차례나 폐출된 일에는 충격을 받았음인지 이것저것 자신의 장래 문제를 걱정하게 되었다.
천보 10년(751) 칠월 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궁에 거둥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도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인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며 두 사람은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였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될지이다.”
‘비익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개원 24년(736)부터 천보 연간에 걸쳐 조정에서는 간신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번영의 뒤에 숨겨져 있던 위기가 점점 심화되어 갔다.
우선 농촌에서는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져 국가의 세입원이 위협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조정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으며 군사 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부병제(府兵制)가 무너져 군대를 모집해도 응모하는 자가 없어 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그러나 변경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절도사(節度使)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어 유사시에 당왕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정세로 보아 현종 왕조의 위기는 폭발 일보 직전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출처]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작성자 새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