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뫼에서
시월 셋째 일요일이었다. 나는 창원 근교 웬만한 산자락 산등선은 손금 보듯 훤히 꿰차고 있다. 남녘엔 아직 단풍철이 이르다만 정상부터 물들고 있다. 내가 언젠가 남긴 글에서 봄 산은 연두 옷을 밑에서부터 위로 입어 올리고, 가을 산은 단풍 옷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벗어 내린다고 한 바 있다. 바야흐로 우리 지역도 한두 달 새 활엽수림은 낙엽이 모두 떨어져 나목이 되어갈 것이다.
단풍으로 물든 산은 훗날 오르기로 하고 강둑을 걸으려고 아침 일찍 도시락을 챙겨 길을 나섰다. 집 앞에서 105번을 타고 가다 도계동에 내려 만남의 광장으로 갔다. 그곳은 김해방면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는 길목이면서 동읍이나 대산면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서는 곳이다. 나는 주남저수지를 돌아 가술로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1번 종점은 신전마을이고 2번 종점은 유등마을이었다.
나는 유등마을로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1번은 자주 있었다만 2번은 배차 간격이 뜸했다. 내가 유등으로 가려는 데는 그간 1번 종점에서 본포까지는 많이 걸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유등 일대도 몇 차례 걸었다만 다시 한 번 찾아가보고 싶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유등으로 가는 2번 마을버스가 왔다. 유등마을로 가는 버스도 1번과 마찬가지로 가술까지는 같은 노선으로 운행하였다.
유등마을은 들판 샛강 배수장을 두고 창원과 김해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2번 마을버스는 아침안개를 뚫고 대산 들녘을 지났다. 가술에서 내린 손님이 나를 제외한 마지막 승객이었다. 짧은 시간 나보다 나이가 더 덜어 뵈는 기사양반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부산 태생으로 젊은 날 부모를 여의고 온갖 풍상을 겪고 창원의 마을버스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 세월이 십여 년 되었다.
나는 유등마을 종점에 내려 둑길로 올라섰다. 낙동강 강변과 들녘은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대개 강변 안개는 계절이 바뀌거나 일교차가 클 때 짙게 끼었다. 강변 안개는 아침 열 시가 지날 즈음까지 자육했다. 둑길은 유등배수장과 나란히 이어졌다. 배수장 갑문 밖에는 태공들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어디에서 민물낚시가 잘 되는 지 아는 꾼들이었다.
둑길을 걸어가다 간 둔치 자전거 길로 내려섰다. 광활한 둔치는 여름날 망초와 달맞이꽃이 무성했다가 시들어 있었다. 강변 가장자리는 은빛 물억새가 이삭을 내밀어 바람에 일렁거렸다. 강 건너는 밀양 명례로 오토캠핑장과 생태공원이 이어졌다. 내가 걸어가는 강변은 그보다 더 넓은 강 둔치로 술뫼생태공원이었다. 순우리말이 숟가락 시(匙)에 뫼 산(山)으로 바뀌어 시산마을로 불린다.
술뫼는 수산에서 흘러내란 낙동강이 뒷기미를 휘감아 흐르면서 굽이치는 곳이었다. 홍수가 나 강마을이 물에 잠길 때 피수대(避水臺) 가능을 하는 언덕이었다. 그 언덕 산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마을이 술뫼였다. 지형이 꼭 숟가락을 엎어놓은 형상이었다. 나는 아까 숟가락 손잡이에 해당하는 지점에 올라 이른 점심 도시락과 곡차를 비웠다. 강마을 먼 곳까지 훤히 조망하기 알맞았다.
숟가락 손잡이에 해당하는 곳에서 밥을 담는 부분으로 올랐다. 강둑 느티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을 즈음 현지주민 한 분이 나타났다. 인사를 건네고 보니 밀양의 사립학교 재단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내보다 연상이었다. 그의 일터는 밀양이고 생활근거지는 부산이었다. 주말이면 술뫼에서 텃밭을 일구고 살았다. 아침안개가 끼거나 석양이 비칠 때면 강마을 풍광이 기 막히게 좋은 곳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니 자신의 텃밭으로 인도했다. 그는 황토방이 딸린 텃밭을 일구고 살았다. 텃밭 뜰에서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보았다. 내가 배낭 속 곡차를 꺼내자 여름내 가꾼 끝물 토마토를 따오고 밀양 지인이 보냈다는 도토리묵을 잘라왔다. 내가 집에서 며칠째 잘 먹고 있는 도토리묵이었다. 초면이었지만 고향 형님 같은 분을 만나 푸근한 자리를 가지고 한림정역으로 향했다. 1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