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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안동] 반변천 수계-영양(2)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0년 10월 09일 (금요일) [별도 탐방] ① 안동 반변천 수계 영양(2)
영양 반변천의 지형 — 남이포, 선바위[立巖]
일월산 서쪽의 산곡에서 청기면을 지나온 동천(東川)이, 일월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영양읍을 지나온 반변천(半邊川)에 합류하는 곳이 '남이포(南怡浦)'이다. 이곳은 양쪽으로 우뚝 선 절벽들이 마치 문처럼 세워져 있어서 이곳을 석문(石門)이라고도 하는데, 왼쪽에 잘려진 것처럼 서 있는 바위를 선바위, 즉 입암(立巖)이라고 하며 이 주변인 ‘입암면(立巖面)’의 지명유래가 되었다.
‘선바위’는 경상북도 「영양군지지」에 자양산의 끝인 자양병과 함께 ‘석문(石門)’이라고 하였으며 예부터 ‘입암(立巖)’, ‘신선바위(仙巖)’, ‘선바우’라고도 하였다. 선바위와 석문에는 남이(南怡) 장군의 설화가 전해온다. 운룡지(雲龍池)의 지룡(地龍)에게는 아룡(아龍)과 자룡(子龍) 두 형제가 있었는데, 역모(逆謀)를 꾀하여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남이장군에게 토벌할 것을 명하니 남이 장군이 이곳까지 와서 아룡과 자룡을 물리치고 역도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까 염려하여 큰 칼로 산줄기를 잘라 물길을 돌렸다가 한다. 그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라는 것이다.
일월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영양 중앙지맥’의 끝자락인 이곳은 남이(南怡) 장군의 전설을 따라 ‘남이포(南怡浦)’라 부르지만, 사실 하천 절벽인 하식애(河蝕崖)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일월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하천 절벽의 왼쪽으로 흘러와 합류하는 동천과 오른쪽의 반변천이 좁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심하게 곡류(曲流)를 하면서 서로 측면을 깎았다. 결국 두 하천 사이의 분수령이었던 절벽을 절단하여 동천이 ‘신사천으로 흐르던 옛 물길’을 버리고 반변천에 합류된 곳이 ‘남이포’인 것이다.
즉 선바위는 반변천과 동천의 하천 쟁탈과 곡류 절단에 의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지형이다. 서쪽의 동천과 동쪽의 반변천이 흐르는 상태에서 두 하천 간에 활발한 측방(側方) 침식(浸蝕)으로 곡류 절단(切斷)이 나타나 물길이 단축된 것이다. 과거 동천의 물길이었던 신사리의 구 하도(河道)는 농경지로 이용되며 서석지가 있는 연당리 양반마을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에는 이처럼 곡류 절단 현상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영양읍이 자리 잡은 곳도 아득한 옛날 반변천이 유로 변경을 하면서 만들어 놓은 구 하도이며, 삼지리 일대도 이와 같은 작용으로 형성되어 과거 강바닥의 흔적을 3개의 연못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입곡류천(嵌入曲流川)’은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관광지로 이용된다.
영양읍에는 반변천에 의해 이루어진 하적호로 연지(蓮池), 원당지(元塘池), 파대지 등이 있으며, 곡강리, 합강리, 연당리, 감천리, 삼지리 등과 같이 하천과 관련된 땅이름이 많다. 이 하천은 심한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하면서 연안에 깊은 계곡을 이루었다.
석문 정영방 선생의 ‘서석지’
진보에서 영양(읍)으로 가는 31번도로 입암면 청암교차로에서 911번 지방도로 청암교(반변천)를 건너 강을 따라 올라가면 남이포-선바위[立巖]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입암면 연당리이다. 연당리에는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의 하나인 서석지가 있다. 영양 연당리 서석지(瑞石池,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는 광해군 때의 학자인 정영방(鄭榮邦)이 1613년(광해군5)에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석문을 외원(外苑)이라 하고 자신의 정원 서석지를 내원(內苑)이라 했다. 그리고 석문(石門)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영방의 내원(서석지)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영방(1577~1650)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이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대를 이어온 명문가였다. 정영방의 선조는 고려의 문신인 정목(鄭穆)으로, 시로 이름이 높았고 예부시랑을 거친 문단의 거목이었다. 고조인 정환(鄭渙) 또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연산군의 혼정을 직간하다 갑자사화에 휘말려 유배지 상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이 즉위해 그의 죽음을 모른 채 벼슬을 내렸는데 이후 후손들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꺼리게 된다. 증조는 성균관 생원 정윤기(鄭允奇), 조부는 성균관 진사 정원충(鄭元忠)이다. 아버지는 정식(鄭湜)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정영방은 1577년 지금의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憂忘里)에서 정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집안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정영방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열네 살 때인 1590년에 아버지의 사촌 형제였던 정조의 양자가 되어 안동에서 생활했다. 친형제 간 우애가 남달랐던 그는 이를 계기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16세였다. 한창 학문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에 난을 겪은 것이다. 게다가 형수(정영원의 부인 청주 한씨)와 누나(정말계)가 왜적에게 쫓기다 화를 면하기 위해 *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전쟁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 후에 이 절벽을 쌍절암(雙節巖)이라고 불렀다
전쟁이 끝나고 정영방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제자가 되었다. 우복은 그의 뛰어난 재주와 문학적 재능에 대해 "정영방과 나눈 하룻밤 대화가 자기의 3년 공부보다 낫다"라고 극찬했다. 정영방은 선조 38년인 160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후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존명배청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혼탁했다.
정영방은 광해군이 후금과 명나라를 두고 등거리 외교정책을 펼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혼란한 조선의 정계 속에서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수용되지 못하리라고 판단했고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공부하리라 마음 먹었다. 결국 그는 영양 연당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1610년부터 초당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와 어린아이들 때문에 완전한 이주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40세가 되던 161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정영방은 슬픔으로 병을 얻어 몇 번이나 기절하면서도 부축을 받으며 장례를 치렀다.
연못은 수려한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하였으며, 방지(方池, 네모난 연못)의 북단에 있는 3칸 서재인 주일재(主一齋)는 마루 안쪽에 ‘棲霞軒(서하헌)’이라 편액하였다.
서단(西壇)에는 6칸 대청과 2칸 온돌이 있는 규모가 큰 정자인 경정(敬亭)을 세우고 경정의 뒤편에는 수직사(守直舍) 두 채를 두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경정은 손님을 맞고 제자를 가르치던 공간으로 서석지의 중심 건물이다. 정영방은 성리학자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꽃과 풀, 모든 물상이 성리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원림을 이루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경정잡영(敬亭雜詠)' 32수 시로 남겼다.
有事無忘助 유사무망조 일삼음이 있되 잊지말고 조장하지 말며
臨深益戰兢 임심익전긍 깊은 못에 임한 듯 더욱 조심 조심하라
惺惺須照管 성성수조관 늘 깨어있는 자세로 세상을 관조하며
毋若西庵僧 무약서암승 서암승 같이 하지 말고 (정진하라.) ― 경정(敬亭)
경정의 경(敬)은 유학자들에게 있어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敬)이다. 퇴계는 경을 도의 관문이고 덕의 기본이라 했다. * '有事無忘助'은 맹자가 말한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공손추·상 제2장)을 압축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을) 일삼되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도 말며,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북단에는 서재인 주일재를 있고 그 앞에는 못 안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四友壇)을 축성하여 송(松)ㆍ죽(竹)ㆍ매(梅)ㆍ국(菊)을 심었다. 연못의 석벽은 그 구축법이 매우 가지런하고 깔끔하다. 동북 귀퉁이에는 산쪽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 '읍청거'를 내었고, 그 대각점이 되는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 '토예거'를 마련하였다. 몸이 쇠약해진 노경의 석문 정영방은 주일재(主一齋)에서 자식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자못 흐뭇하다.
爲學須要敬 위학수요경 학문을 할 때 반드시 경(敬)을 요체로 하고
行身莫近名 행신막근명 행실에서는 명예(名譽)를 가까이 하지 말라
吾衰無自得 오쇄무자득 내 이제 쇠약하여 스스로 하릴없는데
聞汝讀書聲 문여독서성 너의 글 읽는 소릴 듣는구나! ― 주일재(主一齋)
사방 온 벽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정영방은 날마다 단정히 앉아 주자와 퇴계를 읽었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이시명(李時明), 조전(趙佺), 조임(趙任), 신즙(申楫) 등과 교유하며 시를 짓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이 연못의 이름은 연못 안에 솟은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한다. 서석군은 연못바닥을 형성하는 크고 작은 암반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 있는 것으로 그 돌 하나하나에 모두 명칭이 붙어 있다. 돌들의 이름은 선유석(仙遊石)ㆍ통진교(通眞橋)ㆍ희접암(戱蝶巖)ㆍ어상석(魚狀石)ㆍ옥성대(玉成臺)ㆍ조천촉(調天燭)ㆍ낙성석(落星石) 등이며 20여개에 이른다. 이러한 명칭은 정영방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석지’ 외원 16수의 정취(한시)
한국의 3대 민간정원의 한 곳으로 꼽히는 연당리 서석지(瑞石池) 외원에 펼쳐진 입석, 선바위, 신선바위, 자양강 남쪽 끝자락에 깎아지른 절벽이 자금병(紫錦屛)이다.
* 입석(立石), 선바위, 신선바위 — 태극의 꼭지점에 영험한 신선바위
六鱻骨未朽 육선골미후 매우 큰(여섯 길) 거북뼈가 썩지 아니하고
撑柱五雲層 탱주오운층 다섯 길 층계 위에 기둥 되어 버티어주니
杞婦獨癡絶 기부독치절 기(杞)나라 아녀자들이 미치듯이 절규하면
謾憂天惑崩 만우천혹붕 하늘 혹시 무너질까 헛되이 근심하네
선바위는 동쪽의 영등산과 북쪽의 일월산, 청기천의 맥이 서로 만나 3갈래의 기운(氣運)이 응집되는 형상으로 연당마을 입구, 서석지 외원의 중심이며, 태극 형상의 꼭짓점으로 해와 달, 사람과 정기가 모여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모습이다.
* 紫錦屛(자금병) — 자줏빛 덧씌운 병풍과 같은 절경
紫蓋丹扆北 자개단의북 자줏빛 덧씌운 북쪽 붉은 병풍과
芙蓉壁月東 부용벽월동 부용정 절벽에 동쪽 달이 걸리니
人間奇絶地 인간기절지 사람들이 일컫는 기이한 절경인데
盡在一屛中 진재일병중 모두가 한 쌍의 병풍 가운데 있네
자금병은 뒤편 강 건너 자양산 남쪽 끝자락에 있는 깎아지를 절벽과, 전면 좌측 부용봉 아래에 위치한 절벽으로, 마치 커다란 병풍을 둘러친 형상을 하고 있어, 연당마을 포근하게 안아줌으로써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고 복을 가져다주어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영양이 낳은 문학가 —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
경상북도 영양은 문향(文香)이 넘치는 선비의 고장이다. 영양군 일월면은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의 고향이고, 영양읍 감천리에는 시인 오일도, 석보면에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가 있다.
* 조지훈 생가 ‘주실마을’ — 영양군 일월면
선비들의 고향,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청기면, 동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과 맞닿아 있다. 주실마을은 350여 년 전 조선 중기 때 한양 조씨(漢陽趙氏)가 입향하면서 만들어진 집성촌이다. 한 양조씨는 조인벽(趙仁璧)이 조선 태조의 매부로 대대로 한양에 살며 벼슬한다. 그러나 중종 조에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변을 당하자 한양조씨들은 화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는데 현감을 역임한 조종(趙宗)은 영주로 이거하여 그 후손이 경북 북부 지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주실마을은 그 전경이 배 모양이라 하며 산골등짝이 서로 맞닿아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注室) 또는 주곡(注谷)이라 부른다. 마을 앞으로 일월산에서 발원한 장군천이 흐른다. 장군천은 반변천의 지류이다.
주실마을에는 수많은 학자들이 나왔다. 풍수가들에 의하면, 주실의 370년된 종택 앞에 위치한 삼각형 모양의 문필봉(文筆峯)이 바로 인물배출의 진원지라고 주장한다. 집터나 묘터 앞에 문필봉이 자리잡고 있으면 그 후손들 가운데 문필을 다루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를 전적으로 수긍하기도 어렵고 부정하기도 어렵지만, 조지훈 집안에선 박사만 14명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저명한대학교수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사실이다.
고려대 교수를 지낸 조지훈(趙芝薰ㆍ본명 동탁東卓)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조동걸(趙東杰·국민대), 국문학 분야의 조동일(趙東一·서울대), 한국사의 조동원(趙東元·성균관대), 미생물학 분야의 조동택(趙東澤·경북대), 공학 분야의 조동성(趙東星·인하대), 경제학의 조성하(趙星河·고려대) 교수가 이 동네 출신이다.
조지훈의 아버지인 조헌영도 한의학 분야에 이름 있는 학자였다. 6·25 때 납북된 그는 1988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북에서 한학자로 계속 활동하였다. 현재 북한의 이름 있는 한의학자들 상당수가 그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일본 중앙대 영문학과를 나온 조헌영이 엉뚱하게 한의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친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연구하다가 그만 전문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해방 후 조헌영이 저술한 「동양의학사」와 「통속한의학원론」은 지금도 한의학계의 고전으로 일컬어진다.
주실마을 호은종택(壺隱宗宅)
주실마을 호은종택(壺隱宗宅)은 조광조(趙光祖)의 사건인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한양 조씨 일문이 화를 당하자, 안동과 영양을 거쳐 주실로 입향한 호은(壺隱) 조전(趙佺, 1576~1632)의 종택이다. 종택은 주실마을의 한복판에 있으며 1630년경 조선 중기 인조 때 입향조인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창건한 고택(古宅)이다. 조전이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앉은 자리인 늪지에 터를 잡고 숯으로 메우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입향조 호은 조전(趙佺)은 자식들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다. 아들과 증손자 등이 연이어 급제하면서 주실에 한양 조씨의 학문적 기틀을 다지게 된다. 특히 조전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趙德隣)은 문장과 경학(經學)이 뛰어나 숙종-영조 대에 여러 관직을 지냈다. 조덕린은 영조 1년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고, 영조 12년에는 서원의 난립을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노론의 탄핵을 받고 다시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로 향하던 길, 그는 강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덕린(趙德隣)의 죽음은 후손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 조희당(趙喜堂)은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덕린의 학문은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마암(磨巖) 조진도(趙進道),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형제가 계승했다. 형제들은 모두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선비의 사표로 이름을 떨쳤다.
‘월록서당(月麓書堂)’은 조운도(趙運道)의 발의로 건립된 것이다. 주실의 서쪽 천변에는 조술도(趙述道)의 정자인 ‘만곡정사(晩谷精舍)’가 위치한다. 만곡정사의 현판 역시 78세의 노구로 주실을 찾아 왔던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마을의 가운데에는 조운도의 손자인 조성복(趙星復)의 정자 ‘학파헌(鶴坡軒)’이 있다. 조성복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가학을 이어나간 인물로 학덕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고 한다. ‘鶴坡軒’(학파헌) 현판은 정약용(丁若鏞)의 글씨다. 평생 은거한 조성복에 대해 정약용은 그가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며 한탄했다. 가문에 홍패(대과급제증서)가 넉 장, 백패(소과급제증서)는 아홉 장이 있다. 그리고 63인의 후손들이 문집과 유고를 남김으로써 주실은 문한(文翰)의 땅으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문학과 사상 전환의 강요에 붓을 꺾고 지훈이 향한 곳도 고향 ‘주실’이었다.
시인 조지훈 생가 ― 호은종택
‘호은종택(壺隱宗宅)’은 한국 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국문학자이기도 한 ‘조지훈’(본명, 東卓)이 탄생한 집으로, 6·25 때 인민군에 의해 일부 소실되었던 것을 1963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대문 상부의 살창 사이 부착되어 있는 판재에 조각한 태극기는 한말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 한다.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은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이 개화한 마을이면서 진취적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마을이다. 교육열이 남달리 강했고, 아무리 힘들지라도 재산, 사람, 문장은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가 이 마을의 면면한 모습을 지켜내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조지훈의 ‘지조론’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
주실마을 옥천고택(玉川古宅)
‘옥천고택’은 한양 조씨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옛 집이다. 조덕린은 조선 숙종(肅宗) 17년(167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옥천고택은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글을 읽는 별당(別堂)인 초당(草堂)과 가묘(家廟)인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17세기 말 양반 주택의 대표적인 예이다. 살림채[正寢]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ㅁ자 집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앞면 5칸의 가운데에 대문을 달고 왼쪽에 안사랑방을 두고 있다. 살림채의 몸채는 양 옆에 꺾여서 위치하는 부분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안마당을 향하여 개방된 6칸 대청이 있다.
‘초당(草堂)’은 조선 숙종 21년(1695)에 지은 것으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노인이 머무는 곳이다. 이 지역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보이며 있으며,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칸이 좀 넓다. 안채의 오른편 뒤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담장을 두르고 있다. 안동지방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나 안방이 동쪽으로 오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이 다르다. 이러한 형식은 18세기부터 안방과 부엌이 서쪽으로 배치되는 평면구성으로 통일된다.
‘志行上方 分福下比’(지행상방 분복하비)는 한양 조씨 옥천공파 세전가훈이다.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선조(宣祖) 때 이원익(李元翼)의 시문집인 오리집(梧里集)에 나온다. 여기서 ‘上方’과 ‘下比’는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원 출전은 《진서·왕담전(晋書·王湛傳)》에 나오는 “湛上方山濤不足,下比魏舒有餘”이다. (왕담이 말하기를) “저는 위로는 산도(山濤, 205~283년)보다는 부족하지만, 아래로 비하면 위서(魏舒, 209~290년)보다는 좀 낫습니다.” 그래서 중국인은 지금도 上方不足,下比有餘(위로 보면 부족하고 내려 보면 남음이 있다)는 말을 분수와 자족의 경구로 즐겨 쓴다.
월록서당(月麓書堂) — 영양의 인재를 길러내던 곳
주실의 동쪽에 월록서당(月麓書堂)이 있다. '일월산 자락의 서당'이라는 뜻이다. 월록서당은 후학들을 교육하고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이 서원으로 승격된 이후 처음 세워진 서당이었다. 옥천(玉川) 공의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1718∼1796)의 제의로 주곡리의 한양 조씨, 도곡리의 함양 오씨(咸陽吳氏), 가곡리의 야성 정씨(野性鄭氏)가 힘을 모아 영조 49년인 1773년에 건립했다. 현판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기문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를 가진 한 일자형 건물로 전망이 좋고 한적하여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월록서당은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만들어 대청으로 꾸몄고 양쪽은 방을 만들어 놓았는데 오른쪽은 ‘극복재(克復齋)’, 왼쪽에는 ‘존성재(存省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간직한 건물이다. 많은 명현석학을 배출하였다.
영양 ‘주실마을 숲’
영양 ‘주실마을 숲’은 마을 주민들이 오랜 세월 지극 정성 가꾸어온 숲이다. 예부터 영양에서 봉화로 가기 위해서는 주실마을을 지나야 하는데 ‘주실숲’은 그 길목에 위치하여 마을을 살짝 가려주고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원래 천연림이었으나 100여 년 전에 숲의 서북쪽 밭을 구입하여 소나무를 보식, 현재 규모의 숲으로 확장되었다. 숲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으며 상충목, 중층목, 하층목이 빼곡히 들어선 매우 건강하고 아름다운 숲이다. 2008년 제 9회 아름다운 마을 숲 대상을 받았다.
마을 숲에는 조지훈과 20살에 요절한 그의 형 조동진의 시비가 있어 ‘시인의 숲’이라 불리며 지난 2007년 ‘지훈문학관’ 개관 이후 매년 5월이면 시인 조지훈을 기리기 위한 백일장 등 ‘지훈 예술제’가 다채롭게 펼쳐지는 등 매년 수만 명의 문학도가 찾는 문학 마을이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인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은 본관이 한양(漢陽).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8·15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조헌영(趙憲泳)과 어머니 전주 류씨(全州柳氏)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남 1녀 중 2남이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시집〉을 펴낸 시인이었다.
주실마을 호은종택은 시인 ‘조지훈의 생가(生家)’이다. 1920년 12월 3일 호은종택 중앙의 가장 좋은 방에서 조지훈이 태어났다. 생가의 뒤편에 시인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본가가 있다. 조지훈 일가가 떠난 이후 상당 기간 폐옥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10년에 복원했다. 대문에는 ‘放牛山莊’(방우산장)'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는 수필 '방우산장가'에서 '방우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집 이름'이라고 했다. 소년 동탁(東卓)은 일제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마을의 '월록서당(月麓書堂)'에서 한학,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공부했다 한다. —
조지훈(趙芝薰)은 열일곱이 되던 1936년 상경하여 고향 선배인 시인 오일도(吳一道. 1901~1946)의 《시원(詩苑)》사에서 근무하며 독서와 시(詩)를 썼다. 그리고 드디어 1939~40년 《문장(文章)》지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시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가 발표되어 문단에 올랐다.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에의 향수, 민족의 한(恨)을 고전적 운율로 노래하였다. 1946년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등과 《청록집》을 간행한 것을 계기로 이들은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들의 성격이나 시세계는 각각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조지훈은 고전미와 불교적 선미(禪味)를 드러냈고, 박두진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으며, 박목월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민요풍으로 노래하였다.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조지훈은 특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되는 〈승무〉는 그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시로, 섬세한 미의식과 불교세계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 그밖에 불교적 인간의식을 보여준 시로 〈고사 1〉·〈고사 2〉·〈낙화〉 등이 있고, 박목월의 〈나그네〉에 화답하는 시 〈완화삼〉을 발표했다. 이어 시 〈색시〉(죽순, 1949. 4), 〈편지〉(민성, 1949. 11), 〈그리움〉(문예, 1950. 6) 등을 발표하고, 시집 《풀잎단장》(1952), 《조지훈시선》(1956)을 펴냈다.
그는 불교의식이나 서정세계만을 읊은 것이 아니라 현실사회를 시 창작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 민족의 참상을 보면서 쓴 〈동물원의 오후〉에는 시대적 처지가 역설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시적 감회는 6·25전쟁 중 종군작가로 참전하면서 쓴 〈다부원에서〉, 〈패강무정 浿江無情〉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 후 황폐화된 다부원에 무수히 널린 시체더미를 목격하고 전쟁의 비참함과 파괴성을 읊은 시이다. 총 2백 50여 편의 시를 창작했다.
'4월 혁명의 사회시'라는 부제를 붙인 시집 《여운(餘韻)》에는 자유당 말기 정치풍토의 고발과 4·19혁명의 정치적 개선을 읊은 〈터져 오르는 함성〉 등의 시가 실려 있다.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두진은 그를 "투명한 감성, 밝은 지성, 예리한 감각과 윤택한 정서를 통하여 한국의 현대시사에 하나의 불멸의 업적을 남겨놓았다"고 평가했다. 그밖에 시집으로 《역사 앞에서》(1959), 수필집으로 《창에 기대어》(1958), 《시와 인생》(1959), 《돌의 미학》(1964), 《지조론》(1963), 평론집으로 《시의 원리》(1953), 《한국문화사 서설》(1964) 등이 있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후에 한국 시인 협회장. ‘한국신시60년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년서 한국 시단을 위해 지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강개(慷慨)한 시정신이 스민 가사도 많이 지었으니, 〈사육신 추도가〉, 〈인촌 조가(仁村弔歌)〉, 〈해공 조가〉, 〈유석 조가〉, 〈영양군민의 노래〉, 〈영양중학교 교가〉 등을 지었다.
조지훈의 지사적(志士的) 생애 및 저술활동
청록파 시인,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조지훈(1920~1968)은 김소월과 김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문학사에 연속성을 부여해준 큰 시인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청년 지훈은 열일곱이 되던 1936년 상경하여 고향 선배인 시인 오일도(吳一道. 1901~1946)의 '시원사'에서 근무하며 시작활동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열아홉 살 되던 1939년 3월 《문장(文章)》지에 정지용(鄭芝溶)의 추천으로 〈고풍의상(古風衣裳)〉을, 그해 10월에는 〈승무(僧舞)〉를 발표하고 이듬해 2월에 〈봉황수(鳳凰愁)〉가 추천되어 문단에 올랐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그의 시풍은 그를 추천한 정지용이 감탄했으며, 당대의 문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 시작한다.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현 동국대학교 전신)를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우리말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우리말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추진하였다.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이어 조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尋牛莊)’에 참례한 것이 열일곱(1937년)이었으니 조지훈이 뜻을 확립한 시기가 얼마나 일렀던가를 알 수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스스로 자신의 전공이라고 여겼다. 조부 조인석(趙寅錫)과 부친 조헌영(趙憲泳)으로부터 한학(漢學)과 절의(節義)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학교와 월정사에서 익힌 불경과 참선 또한 평생토록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 《우리말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형성된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광복이 되자 10월에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그 이후 1968년 기관지 확장으로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멋의 연구》, 《한국문화사서설》, 《한국민족운동사》, 《시의 원리》 등의 저서는 한국학 연구의 명저로 꼽힌다.
시인 조지훈의 또 다른 화두, 지조론(志操論)
주실의 한양 조씨들이 세인의 주목받는 이유는 이 집안의 독특한 가풍 때문이다. ‘지조(志操)’를 중시하는 가풍이다. 이 집안 사람들은 일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한집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평판을 얻기까지는 현실적 불이익을감수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 전통은 10~20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 집안은 ‘검남’(劍南)으로 불리웠다. ‘칼 같은 남인 집안’이라는 뜻이다. 조선후기는 노론의 시대였으므로 야당이었던 남인은 대략 200년 동안 정권중심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소외된 집단이 취하는 행동은 2가지이다. 하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체제 밑으로 들어가 굴복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굶어 죽더라도 아쉬운 소리는 절대로 안하는 노선이다.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들은 200년 넘게 후자의 길을 택하였다. 자존심을 지키면서 사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기상이 칼과 같이 예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검남’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삼불차’(三不借)라고 하는 가훈을 수백년 동안 지켜왔다. ‘삼불차’는 ‘3가지를 빌리지 않겠다’는 정신으로서, '첫째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 둘째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셋째 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이다. 이러한 ‘삼불차’의 정신은 수백년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주실 조씨들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에도 당당하게 인생을 살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보여주었던 인생 행보도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하여야 이해가 간다. 그는 시인이라기 보다는 지사(志士)로서의 삶을 살았다. ☜ 이상 조용헌(趙龍憲) 교수의 글에서
주실마을 출신의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지조론(志操論)〉에 나타나는 추상같은 질책은 민족을 위해 터뜨린 양심의 절규였다. 민족문화와 민주정치를 살리기 위하여 조지훈은 한 시대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 말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의 내부적 통합을 이끌러 나가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집권 자유당은 정권 연장에만 집착하는 반(反) 민주주의적 모습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정치현실은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가 만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이 없이 정치 일선에 나섰고, 정치 지도자들마저 신념이나 지조 없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志操論)〉은 이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 글이다.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確執)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와 추종자를 하루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 「지조론」중에서
「지조론(志操論)」을 펴낸 조지훈은 50평생 올곧게 살아온 생애였으니. 일제 강점기엔 온 집안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제(日帝)를 배척했으며, 해방 후에는 좌익세력의 발악을 물리치려고 경륜 있는 논객으로서 바르고 날카로운 논평을 폈다. 그 후 자유당 독재 정권에 저력 있는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5.16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불의(不義)가 엿보이자 박차고 나왔다. 세상에 허다한 아세군상(阿勢群像)과 대척점에 있는 조지훈은, 맑고 곧은 지조 있는 선비였다.
한양 조씨의 ‘삼불차’의 정신은 수백년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주실 조씨들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에도 당당하게 인생을 살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보여주었던 인생행보도 그러한 가풍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조지훈이 매천(梅泉)과 만해(萬海)를 사숙(私淑)한 것은 두 분의 강직한 성격과 대쪽 같은 절개를 흠숭함이었다. 그는 강직하면서도 편협하거나 완고함이 없었으니,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유교와 불교의 교양에 서구(西歐)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조화(調和)시키고자 했다. 1968년 5월 17일 새벽에 숙환(宿患)으로 별세하니 향년 49세였다.
1972년 서울 남산에 ‘조지훈 선생 시비’(趙芝薰先生詩碑)가 건립되었다. 1982년 8월 15일 37회 광복절, 어린 시절 시심(詩心)을 키우던 ‘주실마을’ 울창한 숲에 지훈시비(芝薰詩碑)가 문하생들의 정성으로 건립되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 문학의 건립을 주창한 순수 서정 시인이다. 그는 아름다운 정서에 민족의 정한을 녹여서 노래한 전형적(典型的)인 시인이었다.
영양 ‘지훈문학관’
영양의 호은종택과 월록서당 사이에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이 있다. 정면 열두 칸의 긴 한옥 건물로 2007년 5월 개관했다. 170여 평 규모에 단층으로 지어진 'ㅁ'자 모양의 목조 기와집이다. ‘芝薰文學館’ 현판은 부인 연담(蓮潭) 김난희(金蘭姬) 여사가 쓴 것이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조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조지훈의 삶과 그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동선을 따라가 보면 지훈의 소년시절 자료들, 특히 소년 동탁이 읽었다는 '피터 팬' '파랑새' '행복한 왕자' 등의 동화들이 놓여 있다. 광복과 청록집 관련 자료들, 격정의 현대사 속에 남긴 여운, 지훈의 가족 이야기, 미망인 김난희 여사의 글씨나 그림 작품, 지사로서의 지훈 선생의 삶, 지훈의 시와 산문, 학문 연구의 핵심 내용, 조지훈 선생의 선비로서의 삶의 모습 등등을 살펴볼 수 있다.
조지훈의 생애도 살펴볼 수 있다. 책 읽던 소년은 9세 때부터 글을 썼고, 그의 형 세림과 함께 마을 소년들의 모임인 '꽃탑회'를 조직해 동인지 '꽃탑'을 펴내기도 했다. '문장'지에 추천을 받았던 20대, 고문, 절필, 그리고 광복. 문학 소년은 문학청년으로 커져 있다. 곧이어 전쟁의 시편들, 산문과 학술연구들, 추상같은 비평과 선언들이 전시되어 있다. 커다란 벽에서 '지조론(志操論)'을 마주한다. 1950년 말 과거의 친일파들은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 나왔고, 지도자들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은 그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다.
그의 유품들도 남아 있다. 평소 썼던 문갑과 가방, 30대 중반에 쓴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다는 부채, 외출할 때 즐겨 입었던 외투와 삼베 바지, 그리고 세상을 뜨기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 벽에 그 생의 조각들이 100여 장의 사진으로 걸려 있다. 곁에 마련된 헤드폰을 써 본다. 시인 조지훈이 여동생과 함께 시 '낙화'를 들려준다. 병색 짙은 음성이 말한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문학관 뒤 산자락을 타고 산책로가 이어진다. 길섶에는 시비(詩碑)들이 늘어서 있다. 산책로는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운데 봉우리의 기슭에 닿는다. 그곳에는 지훈의 시비공원이 있다.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 시인 오일도 생가 ‘감천마을’ —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주실마을에서 나와 영양읍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감천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에 시인(詩人) 오일도(吳一島)의 생가(生家)가 있다. 항일시인 오일도(吳一島)가 태어난 곳이다. 영양읍 중심에서 약 5km 떨어진 ‘영양읍 감천1길 34’에 위치해 있다. ‘감천마을’은 낙안 오씨(樂安吳氏) 집성촌이다. '큰 내가 마을 앞을 감아 흐른다'고 하여 ‘감들내’, ‘감내’, ‘감천’이라 했다. 감천마을에는 낙안 오씨들이 주로 사는데, 마을 안에 ‘화수재’, ‘송산재’ 등의 여러 채의 문중 재실(齋室)이 있다.
영양읍으로 들어가는 31번 국도변에 ‘오일도 시비’가 서 있고, 마을 앞 반변천 절벽에 천연기념물인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감천마을 중앙에 터를 잡은 그의 생가(生家)는 44칸짜리 건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5칸 반,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전면에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이 있는 팔작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 웅장한 느낌이 든다.
‘오일도 생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의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는 '菊雲軒‘(국운헌)' 당호와 '翰墨淸綠’(한묵청록)' 편액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선조 ‘오수눌’의 아호 '국헌(菊軒)'에 구름 '운(雲)'자를 더해 '국운헌'이다. 국화와 같은 절개와 구름과 같은 유유자적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 '한묵청록'은 바른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다. 중문채에 딸린 작은 방은 글방인데, 어린 시절 오일도가 공부한 곳이다.
▶ 시인 오일도(吳一島, , 1901~1946)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본명은 희병(熙秉)이다. 아버지 오익휴는 천석의 거부로 오일도는 넉넉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생가는 고종 원년인 1864년 오일도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건립했다. 오일도는 1901년에 태어나 14세까지 마을의 사숙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이후 영양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의 리쿄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시를 썼고, 24세 때인 1925년 《조선문단》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한가람 백사장은 흰 갈매기 놀던 곳 / 흰 갈매기 어디가고 갈가마귀 놀단 말가 / 교하(橋下)에 푸른 물은 의구히 흐르건만 이처럼 변하였노.” - 오일도, 〈한가람 백사장에서〉
오일도는 1935년 2월에 사재를 들여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이다. 이로 인해 우리 현대시가 빠르게 발전했다고 평가되는데, 이 《시원(詩苑)》을 통해 많은 시인이 세상에 나왔지만 정작 자신의 시집은 생전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
"작은 방 안에 /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피우고 /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 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놀 //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 또 무엇이랴 / 저녁놀타고 나는 간다 // 붉은 꽃밭 속으로 / 붉은 꿈나라로" ― 오일도의 시 〈저녁〉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즈음에 그는 일제의 통제를 절감하며 낙향했다. 그는 절필하고 긴 칩거에 들었다. 광복 후 다시 상경한 그는 《시원(詩苑)》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우울로 인한 폭음으로 나날을 보내다 결국 죽음을 맞았다. 45세였다. 오일도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고향의 선배이다.
…♣ [계속] ☞ 반변천 영양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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