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년6월 1일 일요일 맑음 해동 사 법회 날이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세수를 하고 조금 있으니 신도님 들이 한분 두 분 법회보로 모여 들었다
총무 율산 부전스님 보살님 들은 휘장을 치고 반찬 준비와 점심공양 준비에 바빠다 법당에 올라가다니 강월스님 보살님도 오시고 친구 모친 태익 조모님도 만났다 류 보살님도 만났다 여러 보살님을 만났다 노 이보살님도 만났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갔슴에도 이렇게 모든 분들을 만나고 법회를 제수씨 기성이 업고 손수건과 치 솔을 사가지고 오셨다 김형오 황칠용 전 간부님도 만났다 법당에서 종형 내외 백모 도 만났다 나를 만나는게 그렇게 거북하면 만나지 않아도 될 텐데 보는 눈 인상이 안 좋타 본산 법전스님 이 오셔 는데 설법이 모두 나 한태 해당된 설법이다 다음은 주지스님 공지사항 회장님 인사말씀이계셨다
제수씨께서 시목 으네 엄마가 주었다며 돈 만원을 주셨다 분회장 내외분도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금강지 책을 사가지고 종보와 함께 제수씨 한태 집으로 보냈다 대조사님 열반대제 동참 헌금도 했다 오늘도 많은 불연을 맺었다 오신 모든 분들은 법회를 맡이고 점심 공양을 하시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간부님 들은 공양함에 돈을 계산하여 월급을 주고 지출을 결산을 하셨다
누구를 물론하고 병원에 아픈 사람 문병을 가서 도움 되지 안는 말을 함부로 하면 환자에게 큰 상처를 준 다는 것을 알 아야 한다 오늘은 절에서 하루 더 묵었다 공양주 보살님 따뜻 한마음처럼 음식 솜씨가 좋아 맛 잇게 잘 먹었다 나는 언제 성불하여 이렇게 많은 분들에게 은혜를 갚을 날이 올 런지 강월 스님은 인자하시고 자상하게 나를 위하여 염려하여 주신다. 저녁에는 법당에서 청년 법회를 동참하고 기도하고 조용히 잤다
6월 2일 월요일 맑음 옥동 재활원을 방문 하였다
오늘은 아침 공양을 끝내고 아버지와 정산 동생 삼재풀이 축원을 부탁드리고 나와 대구동생은 인등 축원을 6월10일부터 부탁드렸다 법회 날 금강지에 종정 큰스님 진영과 대조사님 에 자비하신 모습이 실려 쓰므로 구입하였다 점심 공양을 끝내고 3시10분경에 내려와서 청소하시는
아저씨께 부탁하여 택시 잡아주시는 것을 타고 옥동 재활원 까지 1500원 요금 나왔다 재활원에 도착하여 사무실로 들어가니 조양 경리아가씨와 총무가 근무하고 있다
인사를 하고 조양이 원장 님 계시는 곳으로 안내 하였다 원장님은 건물 뒤 정원에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원생들과 예기를 나누고 계셨으며 운전기사 부인 영양사께서는 자녀 들을 대리고 원생들이 일년 동안 먹을 간장을 끓이고 있다
원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사무실로가자고하여 앉아서 걸어가고 원장님은 60세가 넘은 것 같았다 젊은 원생이 원장님을 덜렁 안아서 사무실로 모셨다 보행이 아주 불편하신 분이 셨다 나에 예기를 들으시고 성소병원 김 신근 과장님께 전화를 하니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까지 협조하면
좋겠다. 시청에 가서 신고하고 시 복지 계에 가서 예기하니까 그냥 가있어라 했다 원장님은 자상하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나는 인쇄기술이 어떤지 여쭈우니까 인쇄는 힘이 들무로 인장 기술이재일 좋을 것 갔다고 말씀 하셨다 자가용 승합차 운전기사께서 많은 수고를 하셨다 시청에 다녀온 시간이 5시 반쯤 되어서 다시 재활원에 도착 하여 몇이 인사를 나누고 그네들이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휠췌에 물을 싣고 잔디에 물을 주며 비틀거리며 넘어 질 듯 질듯 하면서도 장난을 치며 활동하는 자연스런 모습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협동하며 살아가는 일들이 즐거워 보였다. 팔목이 절단 다리가 절단 뇌성마비 소아마비 등등 여러 가지 장애자 난장이 곱사 다양한 장애자를 한눈에 보았다.
부처님이시여 이곳 중생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더 많이 내리 소서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칼라 TV가 한대 저쪽 벽에 얹혀있었다. 식당 안은 깨끗할 수 없었다. 음식냄새가 풍겼다.
식탁에 앉아 있다니 한상 같다 주었다. 밥 먹는 모습도 다양했으며 이렇게 먹고 어떻게 살수 있을까 먹어보자 남들이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을까 먹어야지 나는 어느 곳에 가서든지 그 자리 그때그때 처지에 따라 생각과 행동을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총무와 조양
부회장 원장님한테 절에 다닌 이야기 철학 관 경험을 등을 얘기하고 저녁 잠자리 방으로 안내되었다. 들어갔더니 전라도 임 희석 23세와 편지를 나누어떠니 거기서 만날 줄이야. 여러 가지 물어보았다. 모든 의문이 다 풀렸다. 사주관상 봤다니깐 관상 좀 봐달란다. 휠체어 타고 서울까지 갔다 왔다는 얘기를 하고 검정고시 중학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왔다. 제대로 글씨가 되지 않으면서도 배우려는 집념과 목각을 연마하고 있다고 했다. 장하다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박 종수 34세 예천이 고향 여동생이 수녀보조로 일하며 장남인데 결혼문제로 부모님께 불효하고 있다며 하루 빨리 걱정을 덜어주어야 한단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함께 보냈다. 부처님 하나님 천주님 자비와 사랑으로 모두 불상하게 여기시여 가피력을 내려서 모두가 원하는 소원 이뤄지게 하소서.
6월 3일 화요일 맑음 병원으로 해동사로 재활 원 으로 20여일만 에 집으로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면장과 변소 실태를 구경하고 사용하였다. 나는 용변기 사용이 불편하였다. 욕탕 안에는 따뜻한 물이 나와서 목욕도 하고 세수하기에는 좋았다. 아침을 먹고 나니 9시경 출근한 총무와 실습 견학을 하려하는데 못했다. 조양은 출근하여 사무실과 원장실 청소를 깨끗이 했다. 원장실을 구경하니 표창장 감사패가 많았다. 정말 수고 많이 하신 원장님 아낌없는 노력의 값이니 삶에 아낌없는 찬사도 마음으로부터 보냈다.
원장님이 출근하셨다. 시청에 들려 이러 이렇게 하면 집에 갔다. 올
여비 준다고 원장님이 일러주시고 곧바로 자가용으로 시청까지 갔다. 운전기사는 나보다 한살아래이고 불교신자였다. 포항 산다는 고 창환 28세 집에 갔다 온다며 함께 나왔다.
나는 시청에 가봤다. 그러나 군민이니 군청에 가보란다. 기다리다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나오니깐 양심 있는 담당직원이 따라 나와서 군에 신청하여 휠체어를 타도 록 하라고 하며 그냥 재활원에 가 있으면 어떻게 서류해준다고 했다 .고마웠다.
나는 11시쯤 되서 시청마당에 나무 밑에 앉아 집으로 갈까 재활원으로 갈까 생가하다 점심을 시켜서 먹고 있는데 두 아가씨가 승용차에서 무엇을 가지고 오더니 내가 점심을 다 먹고 혼자 앉아있다니 콘을 들고 와서 준다 아가씨이름은 최원혜 고맙다하고 받았으나 그것을 빼 먹을 줄 몰라 종이를 입으로 물어서 뜯으니까 나이 19세20세 정도 된 아가씨가 다정하게 와서 아저씨 이렇게 해서 잡수면 되요 하면서 빼내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다정하게 인정을 베푸는 아가씨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왜 이런 인정을 베푸느냐 하니까 나의 뒤 모습을 보니 오빠가 생각이 나서란다. 오빠가 20살 때 교통사고로 3년 동안 병원에서 치료하다 집에 퇴원하여 3년 동안 어머님 간호로 대소변 받아내면서 살았으나 오빠에게 따뜻이 못해준 것이 후회된다면서 26세 때 저 세상으로 떠났다 했다. 살았을 때 못해준 것이 마음이 괴롭다며 오빠생각이 나서 그렇다하며 가까이 앉아 나를 쳐다보는 모습은 깜찍하고 귀엽고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 아가씨 모습이 흡사 내 동생 춘희와 같았다. 생김새가 가만히 보니 많이 닮았다.
나는 처음 본 아가씨들께 무례하게 편지하고 싶다고 주소 가르쳐 달라고 하니 최원혜 아가씨가 적어 주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 입원할지 모르니 그때 면회올수 없을까 하니 갈수 있단다. 병원이라면 몸서리 칠 아가씨한테 그런 얘기 하였으니 나도 너무하였다.
그 아가씨 엄마도 절에 다닌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 이런 얘기하다 콘을 하나 더 주는 것을 사양하니 시청에 청소하는 아저씨를 주었다. 작은 아가씨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손바닥에 적었으며 1시반경 승용차를 몰고 아저씨가 왔다. 아빠냐니까 그렇다 자매냐니까 그렇다 했으나 아닌 것 같다.
작은아가씨 택시 타고 떠날 때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흔들었다.
집으로 오기로 마음먹고 시청 작업하는 아저씨께 부탁하여 택시를 잡아달라니까 최신형 택시를 잡아왔다. 1만1천원에 얘기하여 아저씨 도움으로 타고 집으로 왔다. 계속 혼자였다.
오다보니 큰집 모심기했다 운전기사 아저씨 좋은 분이였다.
학생들도 태워주었다 백모 점심 가지고 오신다. 타라고 하니까 못 들었는가보다. 그냥 와서 내리고 잘 가시라하니 몸조리 잘하여 건강 회복하라고 하시였다.
재종형도 봤다. 이제 오냐 했다. 큰집에 들렸다. 물 한 컵 마시고 조금 앉아 있다가 좁은 길로 집터로 해서 고란 밭에 고추 밭에 미리 갔다. 고추는 괜찮았다. 거기서 영구 기현이도 봤다 금화, 혜숙 이도보고 내려오다 상명아빠 할 배 상명모 등 보았다. 건강하게 돌아와 주어 반갑다고 했다 저녁 백부님 고단하신데 병원 갔다 퇴원해서 집으로 왔다고 쉬지 않으시고 나오셨다 가셨다. 몸은 성치 못하나 이 가정을 이끌어 온 나에 정신력으로 시목 으네 집과 두 가정을 내가 지켜온 셈이다
그러니까 나이40을 바라본 나에 가엾은 인생을 돌아와 주어 고맙다는 뜻이리라 생각했다.
절에서 집안에서 동리 반민들 모두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주신 은혜감사하게 생각하며 대조사님 진영 앞에서 감사기도 올리고 집에 왔다는 전화 정산에 했다 오락실에 안 들리고 바로 집에 넘어왔다. 제수씨는 그동안 잘 못해주었습니다.
집에 계시면 앞으로 잘 해드리겠습니다. 빈 말씀이나마 고마웠다 무슨 일이나 말보다 실천이 앞서야 한다. 부처님 모든 것이 다 감사합니다. 집을 나가 병원으로 절로 재활원으로 이십 여 일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점 나에게는 많은 가르침 이였다. 오늘로 병원일기 끝이다.
6월 4일 수요일 맑음 동만 이께 부탁 과수원에 물을 실었다
류 기원 어른 댁으로 전화를 해서 숙모한태병원 갔다 무사히 집으로 왔다고 얘기 좀 해 달라 하였다 오후 에는 동만 이가 과수원에 물을 실어 주로 온다고 전화가 와서 그렇게 하라하고 상명 으네 논에 물을 3통 실었다 제수씨도 선예 기성이 대리고 반찬 사가지고 넘어왔다 뒤 집 태수아제 병원 갔다 왔다고 오셨다 얼굴 보니 별탈 업다며 사사 망염을 버리고 아무 걱정 말라고 위로와 격려 말씀 주시고 조금 놀다 가셨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하여 이렇게 모두 염려해 주시오니 은혜를 갚을 수 있게 건강을 다시 찾도록 가피력을 주소서 관세음보살 관세 음 보살
5일 목요일 맑음
금화는 적과 하로 가고 아침 먹고 저근 집 걱정 때문에 얘기하다가 들 로 가고 정산 동생이 와서 대구 오건이 신원 증명 띠 보내라 하고 내 입원 서류도 시간나면 하라하고 동력 분무기 정비를 해놓고 점심을 먹고 넘어갔다
<회관 기도실 문제는 > 대조사님 진영은 해동사로 모시고 평신도로 생활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오후 상철 모 의견도 같았다 강월 스님도 해동사로 반환하면 된 다고 하셨다
계수씨께서 누가 그러는데 두더지가 간장 나쁜 데는 특효 하다고 하셨다
생강 묘종 심어 둔 것은 싹이 나오지 안는 되 썩어서 끓려먹었다 오후 재활원에 전화하니까 진단서 병원에 전화해놓으면 손수 띠다 서류한다고 했으며 정형외과 김 신근 과장님은 두 번 전화해도 자리에 안계셨다 설 의원께 전화 하니 까 옻이 올라 10여 일간 고생 했다며 내가 몸이 아파다니까 시간 내서 한번 찾아온다 하여 다 시방에 계시는 모든 권속이
나에 건강을 회 복하기를 기원하며 발원했다 나는 기필코 건강을 회복하리라 마음 굳게 먹고 병마와 싸워서 기어이 물리치고 나에 삶을 종보에 올려볼까. 이런 생각도 했다 자비하신 부처님 모든 잘못은 용서하시고 굽어 살펴주소서
6월 6일 금요일 맑음
오늘은 하는 일 없이 편지을 3곳에 보내려고 초안을 잡아 놓았다
7일 토요일 맑음
작은 아버지 상망 시목이네 올라가고 아무도 못 올라갔다
밤 동만이 하고 숙모가 왔다 만이 먼저 올라가고 숙모는 큰며느리 흉을 보고 미제네 흉을 보고 큰아버지 흉을 집안 모두 욕을욕을 하는데 듣기가 거북스러워 좋은 말로 달래고 위로하고 하는데도 원망 뿐 이다 자신은 돌아 볼 줄 모르고 반성하지 않으며 남을 탓하니까 숙모가 불쌍하고 가엾다 탐욕이 앞을 가려 세상을 분간 못할 정도니 정말로 한심하다
부처님은 자비와 가피력을 어느 누구에게나 골 고루 항상 베푸시는데 본인들이 지은 데로 받으니 누구 을 원망하고 탓하랴 아무 소용이 없다 숙모는 함께 자고 아침에 올라갔다
아버지와 나하고 숙모가 함께 잤는데 이상하다 무엇을 느낀 것이 있다 왜 그럴까 이성과 함께여서 그럴까
86년6월8일 일요일 맑음
숙모가 아침에 우리 집 에서 올라갔다 백부님이 오셨다 가시고 낮에는 미제엄마 형수씨가 왔다 큰집 모심기 거들고 밤에 오병이 한테서 엄마가 누워서 일어나지 안는 다는 전화 때문에 제수씨와 큰집 형수씨가 올라갔다왔다 정말 낭패다
금화는 어제 안동 가서 8일 날 하회 동 놀러갔다 부처님이시여 우리집안 편하게 도와 주 소서 가피력을 내려주소서 관세음보살 관세 음 보살 고추 곁에 있는 풀을 고란 에 것 내가 다 뽑았다 우실 이와 사장어른 이해하는 것 같았다
86년6월9일 월요일 맑음 편지 셋 통을 우송 한날
장날 농협 돈 볼일을 봐왔다 쌀일두 받았으며 해동 사 에 삼제풀이 부친과 동생 인등 축원은 오건이 와 내 것 합 24000원보 냈다 절에 다녀도 그런 것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해보았다 경북의대 이 수영 교수님과 고려의대 구로병원 재활과로 최 원 혜 아가씨께 편지 써둔 것을 우송했다
6월 10일 화요일 맑음
과수원 에 약을 치고 동생이 넘어와서 약을 치로 가는데 나도 소달구지 타고 간 는데 과원에 들려다 안골로 가서 고추 심어 둔 것을 얼마나 좋 하 전 나 구경하고 관찰도 해보고 베나 들로 넘어 가는 길에 서도 할 배 산소와 저근 아버지 산소 써둔 것을 보았다
만년유택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곁으로 가신 숙부님 모든 근심걱정 잊어버리시고 편히 쉬 세요 못난 족하는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왕생극락을 기도합니다. 마음으로 축원하고서 과수원으로 와서 금화가 가지고온 점심을 먹고 나는 리어카 타고 아부 물 실 으로 오시는 길에 집에 왔다 모자라는 물을 실어다 잡초 약을 다 치고 동생은 넘어갔다
재 수씨께서 재생 한약방과 안동 대성 한의원에서 구하고 설 의원 댁에 들렸다가 한약재료 모두 갈아서 만드는데 1만원 들었다 모두 서 근 반을 두 근은 만들고 한 근 반은 그냥 가지고 왔다 동생과 재 수씨 나를 위해 애쓰고 수고 하오니 나는 늘 고마움을 느끼며 부처님이시여 병마를 떨치고 이모든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하소서 라고 기 도 한 다
11일수요일 맑음 단오 날이다
제수씨께서 떡을 하고 과일을 사가지고 오셨다 그네도매고 낙 시 대회도하고 우리 논 있는데서 씨름대회도하고 제수씨 금화 선 예 기성이 모두 구경 갔다 왔다고 한 다 아버지도 꼴도 베 고 구경하며 잡순 술에 취하여 꼴을 지고 겨우 오셨다 오늘은 즐거운 하루가 지나갔다나는 지난 81년 5월 5일 단오 날에 우리 집 에서 예안 분회 을 발족한 그때를 회상하면서 기도하고 염불 정진하며 하루를 보냈다
12일 목요일 맑음 참깨 솎은 날
오늘 계수씨는 아이들 데리고 정산으로 가시고 아버지는 깨 속 그로 금화 한태가자고 하신 다 부녀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오전에는 들로 가지 않고 그냥 집에서 일했다
오후에는 함께 들로 갔으나 깨를 속는데 아 부지 는 두포 기씩 세우라하고 금화는 한포기 씩 세우자하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들에 온 사람들 부끄러워 그냥 집으로 와 버렸다고 했으며 속이상해 못살겠다. 며 울먹였다 모두가 불쌍하다 이해가 부족한 아버지를 현대 과학 영농으로 가르쳐가며 농사일 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하랴 이해 못하시는 아버지 방법대로 이렇게 저렇게 참고 살아야지 뜻 데로 안데 어도 할수업는 일이니 참고 살다보면 복이 오 게지 부처님께서 가피력 주시리라 이렇게 설득하며 오늘을 보내고 하루가 지나갔다
86년6월13일 금요일 맑음
오늘부터 다시 일하여 저녁 때 까지 모두마칠 수 있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도와주시고 살펴주소서 날마다 염불로 생 활 하며 기도로 세월을 보낸 다
14일 토요일 맑음 장날이라 아부지하고 장에 가서 하루 쉬고 왔으며 평소와 같이 보냈다
15일 일요일 비가내림 오늘은 사주운명 철학 책을 독서하였다
비는 내리고 운명의 관한 책을 독서하며 풀어 보기도 하였다 한집에 한 형제자매로 태어나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살아가게 데는 것은 무량겁 토록 지나온 인연에 공덕이라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바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16일 일요일 연일 비가내림
아부지 아침일 가셨다 안 와서 금화가 찾아서 돌아다녔다
큰집 종형수오셨다 아부지 식전일 가셔는데 9시 넘도록 오시지 않아 금화 해숙이 하고 찾아서 전밭 골 논으로 안골 밭으로 돌아서왔다 아부지 재 넘어 참깨 묘종을 이식 하느라 늦었다 아침을 잡수시고 물가 논둑 바르로가셨다. 나는 날마다 하는 일 없이 독서나 하며 기도하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다
17일월요일 맑음
대구 기훈아빠 종제 집에 왔다 나 한태 왔다 갔다
저근 집 가정일로 다녀간다고 했다
18일화요일 맑음
오늘도 서너 시간 기도염불 정진하며 참회하고 감사기도를 한다.
19일 수요일 맑음
계수씨장날이라고 넘어가시고 나와 금화 아부지는 같은 일 반복하며 일과를 보냈다
20일목요일 맑음
계수씨어제 같다 오늘 애들 데리고 다시 오셨다
21일금요일 맑음 음력5월 보름날이다
옥신 금화 시목 엄마 하계 아 지매 대조사님 진영 앞에 3배 올리고 집에서 토마토 수박 공양 올 였다 오늘 음 보름날 기도 하는 것은 마지막 다음 달부터는 양력 15일 날로 오전 11시에 기도하고 공양도 올리고 하는 날로 정하고 타인도 함께 동참 하시고 싶은 분은 참석 하시게 하여 기도정진을 하자고 했다
나는 계정혜를 닦으려고 노력하며 용맹 정진하여 병마를 물리치려고 노력 한다
22일 토요일 맑음 하지 날이다
단전 기해 힘을 넣어 기도해야 빨리 효력 있다 모든 병마는 물러간다. 오늘도 참회기도를 하며 하루해가진다 영봉 할아버지 큰제사 에 소를 잡아서 간을 조금 얻어먹어다
23일 일요일 비가 내린다
식전에 아부지 안마을 영조씨네 집에 가서 소 교배를 시켜오셨다. 영봉 할배 제사에 참석하고 오셨다
24일 25일
전법 논 모심기 어제 비가 많이 와서 논물이 데 무로26일27일 까지 모심기를 마칠 수 있었다.
올해는 큰집과 함께하니 일이 쉬운 것 같다
28일 금요일 맑음
오늘은 계수씨 안동 갔다 내일 사촌 오종 결혼식 있 으 무로 준비하는데 가보고 왔다
29일 토요일 맑음
종제 결혼식에 금화 아부지 제수씨 동생 모두 갔다.
나는가지는 못하지만 한 시간동안 축하 기도를 올리고 누웠다 잠깐 잠이 들어 는데 하늘에서 사촌 결혼식에 꽃비 가내렸다
축복받은 결혼 식이였다 는 생각이 든다. 이런 꿈은 처음 있는 일이다
30일 일요일 맑음
집안에서 손 모아 작은집 모심기한날
저근아버지 돌아가시고 안계시니 모내기를 못하여 집안에서 손모아 모내기를 안해 주면 욕먹을 일이라고 하루해 주었다.
이럴 때는 집안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카페지기 옮김★
|
첫댓글 일기를 계속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거 같은데..이렇게 빠짐없이 정말 대단 하심을 느끼면서 잘 읽고 갑니다..
저도 항상 써야지 하면서 ㅠㅠ 이젠 하루에 한줄이라도 써야 겠어요.
예, 저도 1977년 귀향하면서부터 쓴 일기노트가 20권은 되는것 같은데 요즘은 일기 쓰기가 괜히 귀찮아져요.^^
형님께서는 노트에 깨알같이 쓴 일기를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한글문서로 옮겨 적다가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생전에 그 일기에 쏟은 정성이 대단하여서 한글파일로 옮긴 것이나 이따금씩 올려두려고요.
내용에 부끄러운 일도 있겠으나.... 이해하며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용에 부끄러운 일도 있겠으나 === 일기란 있는 그대로 쓰니까 그런 생각은 할수 없어요
고인에 글을 읽으니까 그저 짠 하네요 ㅠ
그 해 (1986년) 유월의 일상은 오월에 비하여 그나마 건강적인 문제는 좋아 지셨나봅니다.
절에도 가시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시고 ...
예, 그때 5월의 경북대병원 입원해서 종합검사하고 나서 건강은 점차 좋아졌어요.
어쩌면 형님께서 건강염려증으로 더 크게 해석하셨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