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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야마가타 여행2 - 푸른물이 가득한 해자를 건너 야마가타성에 혼마루를 보다!
동해(일본해) 니가타 에서 기차를 타고 아이즈 와카마쓰에 내려 엣 성을 구경하고
다시 고리야마와 후쿠시마시를 지나 요네자와를 거쳐서...... 혼슈
북부 야마가타 山形(산형) 에 도착해 이자카야 에서 저녁을 떼우고는 1박 합니다.
여행 나흘째인 7월 2일 아침 6시에 야마가타역 서구 에 있는 호텔에서 일어나
6시 30분 부터 준다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는..... 7시경에 호텔을 나서
야마가타시 북부에 위치한 가조 공원 을 목표로 10여분을 걸어서 올라 갑니다.
아침 7시를 조금 넘은 시각인데도 벌써 세일러복 을 입은 여학생들이 등교하는데
치마를 입고 자전거 를 타고 가는 여학생들도 보이니.... 일본은 네델란드
처럼 도처에서 사람들이 자전거로 등교 내지 출근 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 입니다.
여학생의 교복인 세일러복 セ-ラ- ( 세라 ) 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인 19세기 후반 일본
에서 근대교육 이 시작되어 여학생 교복 이 필요해졌으니 처음에는 각 여학교에서는
야가스리나 하카마 전통 의상 을 교복을 정했으니 교복은 부잣집 딸의 표식 이 되었습니다.
이후 여학교가 늘어나면서 평민 집안의 여학생 들에게 교복값이 부담 이 되자 가격을 낮추기
위해 대량생산 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때 일본은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군국주의 길을 걷고 있었던지라 해군복 이 흔하면서도 멋진 디자인으로 꼽히고 있었습니다.
1920년 교토 헤이안 여학원 에서 처음으로 해군 병사의 복장인 세일러복 원피스 를 교복
으로 채택하였고.... 1930년대에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여학생들은 흰저고리 검정
치마 대신에 일본의 세일러복 을 입게 되었으니 해방 후에도 수십년간 이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세계 최초로 세일러복을 아이들에게 입힌 사람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었다는데
여왕은 1845년에 영국 왕립 해군에서 선물한 해군복을 에드워드 왕자 에게
입히게 되자 재단사 피터 톰슨 이 군복을 손질해 어린이용 세일러복 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유럽 귀족 사이에서 세일복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니 지금도 빈 소년합창단 은 전통의 세일러복
단복을 고집하고 있으며.... 저 세일러복 이 일본으로 그리고 조선으로 전해졌는데, 전두환 시절
교복 자율화 가 되었으나 미련이 남았던지 잡지 하이틴에서는 해군 복장 머린룩 을 추천 했던가요?
고교시절에 입은 목에 후크를 잠그는 검정색 남학생 교복 은 한국에서는 1980년경에 사라졌는데 일본
은 아직도 옛 교복을 입는 학교가 있으니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 이 무섭네요? 하기사 100년
이 넘는 기업이 한국은 10개 가 안되는 반면에, 일본은 무려 4천개 가 넘고 천년이 넘는 기업도 있다니....
그러고는 지금은 가조 공원 이라고 불리는 옛날 야마가타성 을 둘러싼 해자 에 도착했는
데.... 푸른 물이 가득하니 예전에 일본의 성들은 적군의 공격에 대비해 이런 해자를
두어개씩 둘렀습니다. 다리를 건너 남문 으로 해서 성으로 들어가니 니노마루 입니다.
오랜 세월에 성문은 없어지고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성벽 만이 남은 모습을 봅니다.
15~6세기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에 일본은 200여개의 나라 로 나뉘어
약육강식 전쟁과 전투로 날을 지샜으니.... 성이 전국에 3천개 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란에 성이 무느진데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와 도쿠가와 가 일본을 통일하고는 한개 번에
번주가 거처하는 성 단 하나 만을 제하고는 나머지는 다 허물었다고 하네요? 현재 옛날 천수각이
남은게 13개 성이고 그중에 히메지성과 이누야마성, 히코네성, 마쓰모토성에 마쓰에성이 국보 입니다.
막부에서는 아마 지방에서의 반란 의 소지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 이었으리라..... 그리고
1868년 메이지 유신후 폐번치현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성도 허물었으니, 구마모토성과
오사카성에 나고야성과 도쿄성이 국보가 아닌 이유는 남대문 처럼 새로 지었기 때문 입니다.
태평양전쟁시 미군의 공습 으로 파괴되고 전후에 도시계획 으로 인해 시가지가 발전
되면서 허물었으니 남은게 얼마되지 않는 것인데, 가조 공원 안내도를 보니 해자
는 건재하고 옛날 성벽 도 그런대로 남아있는게 놀라운데.... 성벽과 해자와의 사이
흙길에 벚꽃 을 수백그루 심었으니, 봄이면 참으로 환상적일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은 옛날 서양 의학 을 가르치던 제생관 으로 지금은 야마가타시
향토관 인데, 동판이 보이니 무사는 아니고 야마가타시 출신 유명한 학자나
시인 일러나? 해서 여기 비치된 설명문을 읽어보니..... 로-레시 ロ-レシ 라고
메이지 초기에 서양 의학 을 공부해서 제생관에서 후진을 양성한 교수인가 보네요?
그 전에도 서양 의학에 관심을 가졌으니 "해체신서 解體新書" 는 에도시대 번역 의학서로 독일
의사 쿨무스의 “해부도보” 라는 책의 네덜란드어판인 “타펠 아나토미아” 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인데.... 1771년 서양서적 완역으로는 일본 최초이니, 총 책임자 스기타 겐파쿠는
네델란드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의사 마에노 료타쿠 와 의사 나카가와 쥰안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은 사형수의 시체 해부 광경 을 직접 보고는 타펠 아나토미아의 해부도 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번역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네델란드어
를 모르는 그들은 먼저 도판 에 주목했으니.... 도판에 있는 단어들과
인체의 위치를 이용해 그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추리하듯 찾아 나갔습니다.
문법은 무시 하고 추상적 어휘들은 유추해서 의미를 파악했으니 “코는 후루헷헨도” 라 보았는데
“나뭇가지를 잘라 쌓으면 후루헷헨도”, “마당을 쓸면 먼지가 쌓여 후루헷헨도” 라는
설명을 일본에서 발간된 네델란드어 사전이나 어휘집에서 발견을 하고는, “후루헷헨도” 의
의미를 솟아오르다, 봉긋하다(堆) 로 정하여서는 이것이 바로 사람의 "코의 이름" 으로 봅니다?
먼저 도판을 번역 하고 나중에 본문을 번역 했으며 각주는 미뤄두었는데, 일반인들의 반응을 보기위해 도판
부터 “해체약도” 란 이름으로 1773년에 간행했으며.... 일본 의술은 지석영 이 1880년 친일파 김홍집을
수행하여 일본에서 배운 종두법 으로 조선인들을 공포스러운 병인 천연두에서 해방시켰으며, 1894년에
토포사(討捕使) 로 동학군 토벌에 앞장서니 안중근도 부친 안태훈과 박석골 전투에서 동학군을 쳐부숩니다.
일본인들은 도쿠가와 막부하에서도 260개 나라(번) 로 갈라져 자치 를 했습니다.
자기 고향에 대한 향토 의식 이 매우 강하여 이토록 고향의 인물을 자랑하고
기리는 것인가 본데, 우리는 서울에서 지방의 고향으로 내려가면 “귀향”
한다고 하는데..... 일본인들은 21세기인 지금도 “귀국” 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 국경 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의 귀절로 “국경” 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토록 애향심 이 강한지라..... 지방마다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마쓰리 가 이어지고 있으며, 시민들은 자기일 처럼 애착 을 갖고 열심히 참가하는 것이지요?
또 다른 이는 야마가타시 북부 쓰루오카 鶴岡(학강) 시 출신 이시하라 간지 는 소위 "만주사변
의 주모자" 로.... 미국과 최종 결전을 위해 만주를 점령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아시아
각 민족을 동아연맹으로 결집해야 하니 중일전쟁 확전과 미국과 성급한 전쟁에 반대 했습니다.
이시하라 간지 추종자들은 미국과 전쟁도 불사 해야 한다는 도조 히데키 총리 암살 을 기도합니다.
일본군이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점령하자 미국은 철수를 요구하는데,
중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및 미국의 시장 인데..... 일본이 "서구의 이익" 을 침범한 것이라?
도조 히데키 총리가 미국의 압력을 거부하고 성급하게 전쟁하려는걸 간지는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시하라 간지 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으니 일본 총리를 지내고 마지막 조선
총독 에 부임한 "아베 노부유키" 이니..... 준비 될때 까지 당분간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조선과 만주 지배를 공고히 한 후에야 미국과 결전 하자는 것입니다.
일본은 1800년 8개국의 북경점령 의 일원이었고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볼세비키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시베리아 출병등 4차례나 미국 및 영국과 연합국 이었으니.... 이를
계속 유지하면서, 조선인은 모두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 지배의 하수인으로 삼고, 빈 땅인
조선에는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반도를 완전히 일본화한 다음에 미국과 결전 하자는 것이지요?
해방후인 1947년 동경 무도대회 가라데 부문 우승자로 이후 민단 단장이 되는 극진 가라테
창시자 최영의(최배달) 는 우리나라에서도 "바람의 파이터" 라는 만화 주인공 입니다.
가라테 라면 일제 감점기에 우리나라에서 당수 로 불렸는데 "어당 8단" 이란 말도 있지요?
그런 최영의를 지도한 스승 조영주 는 '내선 일체' 가 아닌 "조선의 자치"
를 주장한 이시하라 간지의 열렬한 지지자 였다는데, 일본이
이시하라 간지나 아베 노부유키등 신중한 온건파들이 세력 을 쥐었다면....
중국과 북베트남에서 철수 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을 일단 피하고 러일전쟁과 1차 대전
처럼 미국, 영국과 연합국 이 되었다면 일본은 2차대전에서도 승전국 이 되어 오늘날
일본의 영토는 일본과 한반도에 만주, 몽골 까지 차지한 대국을 유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마른 해자 를 건너 내성 을 보는데 大手橋(대수교) 너머 건물은 성주가
거처하던 혼마루 本丸(본환) 인가 본데.... 천수각 은 복원하지 못했나 봅니다?
정문인 일문자문 과 성벽 을 보는데 성벽 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우리 치맛자락
처럼 바깥쪽으로 날렵하게 내어 지어진 것을 “산기즈미” 축성 방식이라고 했던가요?
야마가타성에 동서남북 4대문이 항상 열려 있는지라 성을 통과하여 반대편 으로
질러갈 수 있는 모양인지 자전거 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는데,
그리고 현립 박물관에 찾아가니 “조몬의 여신 토기” 특별 전시회를 알리는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으니..... 조몬 이라면 일본 원주민인 “아이누족” 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조몬인은 일본의 원주민 인데, BC 3세기에 한반도에서 벼농사를 짓고 청동기 도구
를 사용하는 무리가 규슈로 건너와 저들 조몬인들을 쫓아내거나 동화시켜 지배하면서
이룩한 문명을 야요이문화 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바로 왜인 이며 AD 3세기에 한반도
가야인 들이 건너와서는 이들을 복속시켜서 왕국을 세우니 야마토로 고분 문화 라고 합니다.
혼슈의 서북부인 여기 야마가타 와 아키타 는 엣날에 데와국 (出羽国, でわのくに)
이라고 불리웠는데...... 달리 우슈 ( 羽州 うしゅう ) 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
나라시대인 서기 708년에 에치고국 (越後国 니가타현) 내에 쇼나이 지방에 설치된 이데와군
을 기원으로 한다는데.... 712년에 독립되어 데와국 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
무쓰국의 오키타마군과 모가미군을 더해 쿠니(國 국) 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호쿠리쿠
등에서 1천호 주민이 이주되었다니, 그럼 "아이누족을 쫓아내고 왜인" 들이 이주한 것이지요!
야마토 조정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초반에 걸쳐 에미시(아이누족) 의 땅에 성을 쌓고 군을 설치해 지배
판도를 넓히는 확장 정책을 펼쳤던 것인데, 이는 세종대왕 이 최윤덕과 김종서 를 보내 수백년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여진족들을 죽이고 쫓아내서 4군과 6진 을 개척한 것에 비견되는 일인데....
여진족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으로 침략당했지만 우린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 으로 만들었다는?
헤이안 시대 초기 동북 변경의 에미시 를 서쪽 데와국 에서는 蝦狄(하적) 으로
적고 동쪽 무쓰국 (아오야마현등 일대) 에서는 에조 蝦夷(하이) 로 기록
하는데....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오슈 후지와라씨 가 이곳을 지배하게 됩니다.
1869년 1월 19일 메이지유신 보신전쟁에서 패한 무쓰ㆍ데와ㆍ에치고 여러 동맹제번 중에
데와국은 현재 야마가타현 에 해당하는 우젠국 과 아키타현 에 상당하는
우고국으로 양분되었으며, 무쓰국 (아오모리등)도 5개 현 으로 분할되어 세력이 약해집니다.
서쪽 데와국(야마가타와 아키타) 은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에미시(아이누족)
와 국경 을 맞대었으나.... 실제로는 동쪽 무쓰국(아오모리) 이
혼슈 북쪽인 동북방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독점 했습니다.
8세기 부터 9세기 초 까지 성과 요새가 데와국 에 활발하게 축조되었고 에미시와의 전쟁 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했으니 황금 이 산출되어 조정에 공납하는데.... 당시
일본은 금이 생산되지 않았지만 백제인 채굴 기술자 들이 여기서 사금을 채취 했던 것입니다.
743년 11월 5일 쇼무왕이 나라 동대사 에 거대한 청동 대불을 지을때 황금 900냥 을 대불
도색용으로 바친 자는 백제계 후손인 경복 慶福 왕 이라고 하는데.... 그는 백제부흥군
에 의해 왕에 추대되었던 의자왕의 아들(동생?) 풍왕의 동생인 선광 善光 의 증손자 입니다.
660년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등 1만 2천명이 당나라로 잡혀간후 복신등 부흥운동 이 일어나자
일본 제명여제와 나카노오에는 풍왕자에게 5천 왜군 을 주어 백제로 보내 백제 왕위 를 잇게
한후 3만명 대군 을 보내나 백강(금강) 에서 당나라 수군에게 화공을 당해 패하게 됩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귀국해서 백제왕에 오른 이는 479년 동성왕과 501년 무령왕 이 더 있습니다)
왜군이 철수할때 백제인들도 대거 왜국 으로 도망치는데 일본서기에는 663년 백제 부흥
운동 실패후에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을 오미국 간자키군(오사카 일대) 에 거주
하도록 했으며..... 2,000여 명에게 3년간 관식(官食) 을 지급했다고 하는데, 이때
정착한 백제인들이 오사카 북동쪽에 히라가타 枚方 시를 건설했으니 후손이 경복왕 이라!
야마토(나라) 와 교토의 왜인 들은 원주민인 에미시(아이누족) 들을 조금씩 북쪽으로
밀어 붙이며 영토를 확장해 야마가타와 아오모리 까지 개척(?) 했으나....
미국의 인디언 처럼 쫃겨나던 에미시의 반란(?) 으로 733년에 데와의 고쿠후 는
아키타의 타카키요 미즈오카로 옮겼으나 그후에도 에미시의 공격을 피해 여러번 옮깁니다.
이는 마치 세종 시대인 1432년 건주위 추장 이만주가 침입(?) 하자 다음해 최윤덕 이
병사 1만 5000명을 이끌고 평안북도 동부의 여진족 을 정벌 한 것이 연상됩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대부분의 고구려인이 중국으로 잡혀간후 통일신라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 인데, 고려가 들어선후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에 잡혀갔으니 사람이 살지않아 황폐해진
평양을 개척(?) 한 후에 청천강에 이르고 동쪽은 영흥에 이르렀는데, 서희 장군이 거란과
담판해서 평안북도 서부 강동6주 를 얻었으며 조선초에 평안북도 절반에 함경남도 까지 였습니다.
이후 평안북도에 수백년간 거주하던 여진족 들을 내쫒고 여연· 자성· 무창· 우예 네 군을 설치해
남도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키니..... 평안북도 동북부 지방이 비로소 조선땅 이 됐는데, 그러니
세종대왕이 군대를 일으켜 여진족들을 죽이며 쫓아내지 않고 평화주의자 였다면, 우리 국경선은?
하지만 여진족들은 고구려 시절부터 무려 천년을 살아온 고향 땅 을 뺏긴지라 침범을 그치지
않으니 세종대왕은 1437년 이천 에게 병사 8,000명을 주어 재차 여진족을 격퇴 합니다.
( 고구려는 예맥족 단일민족이 아니고 훗날 여진족으로 불리는 말갈족 들이 함께 거주 했음 )
고구려 시절 부터 발해와 거란족 요나라 지배를 거쳐 금나라를 세우고 몽고와 명나라시대
까지 한자리에서 천년을 살아온 자기 고향땅을 뺏긴 여진족들이 집요하게 침범 하니
견디다 못한 조선은 1455년(단종3년) 에 이르러 네 군 중에 여연·무창·우예를 폐지 합니다.
여연·무창·우예 세 군을 폐지 하고 주민을 강계부와 구성부로 옮기니 우리 국경선이
축소 되었던 것 처럼..... 왜국(일본) 도 치소를 자주 옮겼던 것 이네요?
조선은 300년이 흐른 후인 정조 시대에야 북상하여 다시 옛 3군에 진을 설치 합니다.
통일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와 원산 으로 세종 때에 압록강과 두만강 까지 확보했는데 여진족
들은 침략전쟁 이라고 하겠지만 우린 "진출이나 개척"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 키요하라 (淸原) 집안이 데와국의 재정관인으로서 힘을 길렀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망하고..... 오슈 후지와라씨 집안이 무쓰ㆍ 데와 양국의 지배자 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