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시나이까?
벗들이여!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생케비치가 쓴 소설 <쿼바디스 도미네>를 만나고 그 신기한 외국어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고 길가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어디로 가시나이까?"하면서 장난을 치던 생각이 납니다. 우리 나이도 이제 왠만큼 먹은지라 꿈을 꾸는 시간 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진 탓일 것입니다.
아무튼 벗들이여, 우리가 탄 기차가 어디로 갔던지 머지 않아 우리는 곧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니 잃어버린 짐을 잘 챙겨서 내리실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종착역에 도착하시면 곧 하나 둘씩 서로에게서 떨어져서 어디론가 가시겠지요. 누군가는 나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도위에 낙엽이 한 장 대구루루 굴러가버리는 모습을 보듯이 “아! 그 친구도 갔네”하고 말겠지요.
중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에서 엄청 눈물이 나서 울었더니 선생님께서 “할아버지가 너를 무척 사랑헀는가 보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집으로 돌아오니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어요. 그 때는 보통 5일장, 7일장을 했는데 장손이라고 계속 곡을 하라고 집안어른들이 시켜서 눈물도 안 나오는 가짜곡을 하면서, 할아버지 주검을 앞에 두고 정작 눈물이 나와야 할 이 시점에서는 왜 눈물이 나오지 않는지가 궁금했고, 슬퍼야 할 때에 슬프지 않는 게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할아버지와함께 했던 가장 아름다웠던 날의 기억을 억지로라도 회상해 내면서 눈물을 짜내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질 않아 내가 참 이상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요. 그 시절에는 산소 쓰는 곳(장지)에는 여자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던 시절이라 밥이랑 술이랑 전부 남정네들이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갔는데 종고모가 슬피 울면서 상여 뒤를 따라오니 당숙들이 여럿이 떼어내고 또 떼어내도 슬피울며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억지로 떼어내고 나니 50보 뒤 쯤에서 흰 광목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울면서 계속 따라오는지라 당숙들이 돌팔매질까지 해서 쫒아버리더군요. 나는 그때에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데 대한 슬픔은 일어나질 않았고 종고모가 우리 할아버지와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저리도 슬피 우는가하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산막을 치고 나서 일하는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이 종고모가 왜정(일제강점기)시절에 일본에서 살다가 아들 둘만 데리고 친정 피붙이들이 사는 집도절도 없는 고향마을로 귀향했는데 할아버지가 삼촌인지라 움막집 같은 오두막도 지어주고 어떻게든 자식 키우고 살아내라고 엄청 다독여 주었다고 하더군요. 그 종 고종 형제들이 내 조부의 보살핌을 잊지 않고 장성하여서도 오랜 세월동안 외가의 한 가지이기도 한 우리 집에 자주 연락이 왔었고 그 형들이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 나이가 이제 곧 70줄에 들어가는 데 일생칠십 고래희란 말의 희는 기쁠 희(喜)가 아니고 드물 희(稀)자를 쓰는데 시대를 잘 만나 건강과 영양이 좋아져서 구십이 넘어야 호상이라고들 하지만 가는 날자는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자꾸 과거가 돌아 보이고 할아버지 상여 뒤를 한없는 걸음으로 뒤따르던 종고모의 소복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내기 위해서 발버둥쳐온 것들에게 단 한사람에게라도 내 진정한 마음으로 물 한잔 건낸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는데 내 영정 앞에서 슬피 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래서 못 쓰는 글이지만 열심히 쓰면서 이 땅의 생명들이 저마다의 삶을 행복하게 가꾸어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으로 동기 카톡방이 소란한데 저는 오늘 관세사회 윤리위원회가 있어서 서울 갑니다. 저가 윤리위원장 한 것은 처벌을 능사로 권세를 휘두르려는 것이 아니고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자기 스스로 자기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회원들의 정서를 변화시키는 일에 마음을 다 하려는 것입니다. 힘도 없는 연약한 것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그 마음들 속에는 힘없는 여인의 정조를 지켜주려는 것이 아니고, 가련한 것들이 살아내기 위해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 어쩔수 없이 던지는 돌도 있고, 세상을 향한 증오심을 담은 자기 한풀이 성 돌도 있고, 입신영달을 위해서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던지는 돌도 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공산당들이 “종교는 아편이다”고 하며 교회를 탄압했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는데 공산당들이 나에게 총부리를 대며 십자가를 발로 밟으라고 하면 살기 위해서 밟기는 하겠지만 나는 내 불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꽝꽝 밟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의 속마음에 참 사랑이 내재해 있느냐하는 그것을 보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면에서 조용히 나를 부르는 소리, 버럭버럭 화내지 말고 너 자신의 참 모습이 어떠한 지를 보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이런 글도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살아오면서 혹여 나로 인해 마음을 다친 친구가 있다면 그건 내 본의가 아니었으니 용서를 바랍니다. 용서란 이웃을 향해서 행하는 일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내 마음의 매듭을 푸는 일입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속의 매듭이 풀리지 않으니 선한일이라고 강조하면서 하기는 하는데 속에서 독한 기운이 펄펄 뿜어져 나오니 사람들이 멀어지고 그로인해 내 마음이 먼저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저 홀로 피어있는 꽃이 벌과 나비를 불러오는 것은 그가 내뿜는 향기가 아릅답기 때문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느 강론에서 “삶은 계란이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는지라 오늘 강론장에 기차를 타고 오는데 열차 안에서 계란장수가 “삶은 계란~”이라고 외치더라고 하시니 점잖으신 어른의 해학에 청중들의 마음 문이 열리면서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많이 남지 않는 시간이지만 계란처럼 연약한 것들이 바위를 향해 제 몸을 던질 때는 살고 싶다는 몸부림으로 여기시고 부디 계란이라도 한판 사주는 마음을 가지면 그 공덕으로 누군가가 내 빈소를 찾아와서 내 영혼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도록 기원을 할 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 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내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길 기원하지 않는데 죽은 영혼인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극락왕생 하겠는지요.
벗들이여!
우리가 탄 기차도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울리네요. 꼭 귀에 들려야 들리는게 아니고 우리 나이쯤 되면 그걸 느낀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잊어버린 짐이 없는지 잘 챙기시고 사랑하는 부모형제 피붙이들이 사는 곳으로 어두운 밤길 조심하며 안녕히 가십시요.
굿 바이
자이지엔
사요나라~(2021.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