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6일 러시아와의 전쟁을 현장에서 진두 지휘하는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이 처음으로 공식 전황 브리핑을 갖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말 기자회견 내용을 반박하는 등 기존 정치 권력(대통령실과 국가 국방안보회의, 집권여당 등/편집자)과 선명하게 각을 세웠다. 대통령 등 정치권을 치받는 모습은 물론,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달여가 지난 2월 1일, 잘루즈니 총참모장은 미 CNN에 '2024년 우크라이나 군사전략'을 소개하는 기고문에서 또다시 정치적 리더십(젤렌스키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권력 핵심/편집자)을 문제 삼았다. 오는 5월 법적으로 임기가 끝나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분명한 '레임덕' 현상이었다.
잘루즈니 총참모장과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President.gov.ua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현재 '전시 상태'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점. 젤렌스키 대통령은 5일 기존의 계엄령과 총동원령을 90일 연장하는 안을 최고라다(의회)에 제출했다. 계엄령 하에서는 선거를 실시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차기 대통령을 뽑는 3월 대선을 이미 물건너 갔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퇴임도 늦춰질 수 밖에 없다. 다만, 공식 임기가 끝난 뒤 대통령의 권위가 예전같을 수 있을까?
전쟁 중 정치권력과 군부가 충돌하는 듯한 모습은 제 3자에게는 '적전 분열' 우려를 안겨준다. 우크라이나에게는 큰 악재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6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 체제를 뒤흔든, 군사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우크라이나에도 나타났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잘루즈니 참모장과 프리고진이 군 안팎에서 인기가 높고 높았던 것도 비슷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도 인사권이라는 '확실한 칼'이 있다. 하지만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는 것은 전장에서 '장수'를 바꾸는 건 어느 모로 보나 위험하기 때문이다. 특히 두 사람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전시 최고지휘관의 교체는 우크라이나의 '적전 분열' 양상을 확인해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군내 동요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국민이나 서방 진영에 불안감을 안겨줄 게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국민의 인기가 높은 잘루즈니 총참모장을 해임할 경우, 자칫하면 그를 단번에 정치적 거물, 혹은 자신에 맞서는 강력한 대항마로 키워주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생일에 권총 선물을 전달하는 젤렌스키 대통령. 왼쪽에서 웃으며 박수치는 이는 다닐로프 국가안보회의 서기(장관급)/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최선의 방법은 그를 해임하더라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넉넉하게 계산하고 명분을 충분히 쌓아두는 것이다. 지난 몇 개월간 젤렌스키-잘루즈니 갈등설과 잘루즈니 해임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조만간 잘루즈니 총참모장을 해임할 지 여부는 미지수다. 다만, 4일 공개된 이탈리아 TV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해임 결심을 굳힌' 듯한 태도를 보였다. 5일 대국민 연설에서도 국가 주요 인력의 '재부팅'(컴퓨터의 재설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타이밍(시기)이다. 또 명분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이고르 모세이추크 전 최고라다(의회) 의원은 5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격전지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가 러시아군에 함락될 경우,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해임을 미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대통령은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해임과 국가 보안 분야의 인적 교체, 내각의 개편 등을 의도적으로 미루고 있다"며 "그 이유는 잘루즈니 총참모장에게 아브데예프카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럴 경우 잘루즈니는 침묵할 것이고, 때로는 침묵도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노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해임에 부정적인 일반 국민과 군 내부의 목소리를 담은 영상 2개를 공개했다. 나머지 1개 영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람이 등장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날(4일) 처음으로 잘루즈니 총참모장을 해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이탈리아 TV 채널 'Rai1'과 인터뷰에서 "잘루즈니 뿐만아니라 국가 주요 부서 관리들도 교체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며 이를 (컴퓨터의) 재부팅과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자, 현지 언론은 그의 오른팔 격인 세르게이 샤프탈라 참모장도 해임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해임은 이번 주 중반에 발표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공교롭게도 이날 생일을 맞은 샤프탈라 참모장에게 잘루즈니 총참모장이 축하 인사를 건넸는데, 그 표현도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매우 어려울 것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서 또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에게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사람인 당신(샤프탈라 참모장)이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쁘다. 생일 축하한다. 친구! 우리는 최고다.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샤프탈라 참모장과 함께 한 잘루즈니 총참모장/사진출처:텔레그램 캡처
잘루즈니 총참모장이 주영 대사직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주장도 집권 여당인 '인민의 종'에서 나왔다. 발언 중 주목되는 것은 대사로 나가는 건 '정치적 연금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대목이다. "대사로 나가 제대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잘루즈니의 해임이 늦어지는 것은, 그를 설득하고 후임자를 찾는 작업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는 게 스트라나.ua의 추측이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이 스스로 직을 그만둔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그만큼 정치적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해임을 포함한 국가 지도 체제의 변혁은 서방 측에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FT는 G7 국가의 두 관리의 말을 인용, 우크라이나 국민과 군내 인기가 높은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해임은 '국가적 단결'이 중요한 시기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미 NBC 방송도 잘루즈니 총참모장 해임설은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분열을 드러내고 있다며 전쟁의 장기화 국면에서 군과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려 정치 지도부의 신뢰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크라이나가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해고 문제에 대해 협의를 요청해왔다"며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인사권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