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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월요일. - 여김에 대하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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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여김에 대하여
“나, 주 너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위의 레위기와 복음의 말씀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우리가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면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랑을 할 것이고,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님처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레위기는 계명을 지키라고 하면서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을 후렴구처럼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인 내가 너의 주인님인 것이 맞다면
너흰 내가 명령한 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계명으로 실천하라고 하신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하느님이신 것은 맞지만 나의 주님은 아닌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것을 비유한다면 바이든이 대통령인 것은 맞지만
그가 나의 대통령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고,
나의 대통령이 아니기에 아무리 명령해도 명이 서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여기는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여긴다면 이웃을 너 자신처럼 여기라는
하느님 말씀대로 우리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여기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웃을 주님처럼 여기면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이웃을 쓰레기처럼 여기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쓰레기처럼 여기면 쓰레기더미에서 살 것이고,
주님처럼 여기면 누구를 만나든 주님과 함께 살 것이며
자신처럼만 여겨도 이 세상 사는 동안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니 이웃을 아무렇게나 여기지 말고 잘 여기며 살 것입니다.
여기기를 신중히 하고 소중히 하여 행복을 살고 천국을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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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본당 교우들이 제게 늘 바빠 보인다고 하십니다. 단체 모임에 강복 주러 갈 때 거의 뛰다시피 다니는 모습을 보고, 또 무슨 일이든 서두르게 하는 모습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 책상을 보며 충분히 공감합니다.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책상을 채우고 있는 책과 노트, 그리고 필기구들은 저의 바쁨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정표를 두 달 치씩 확인하며 사는 것 역시 바쁘게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그리고 아는 지인의 부고 소식을 계속 들으면서 제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십 중반을 살았으니 분명한 것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바쁘게 지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려고 늘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던 중에, 운동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허리가 아프니 다 힘들어졌습니다. 걷는 것도, 눕는 것도 심지어 양말 신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앉았다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힘들어서 천천히 또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겸손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면서 살았는데, 무엇이든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 나와 함께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떠올리고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영광스러운 심판관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시지요. 즉,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 신심 행위가 심판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 이웃에게 어떻게 실행했는지가 그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묵묵히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능력과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기준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와 희생, 봉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나의 구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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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그저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려고 태어난 것이다(헬라스 브릿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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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을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성덕으로의 부르심은 나중에 바오로 사도에 의해 “아버지의 뜻”으로 선포됩니다.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그리고 이 부르심은 오늘 <복음>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행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기준은 신앙이나 종파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안했느냐가 아닙니다. 초월적인 신비체험이나 관상도 아니요, 기적이나 예배도 아닙니다. 교리나 신심도, 신분이나 성공도, 부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일 뿐입니다. 특별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 25,40)에게 해준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준 것이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요한 4,20)
한편, 이 심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벌을 받은 왼 편의 사람들이 어떤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적극적인 사랑을 하지 않은 사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음, 곧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그런데, 이 심판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베푼 이든 베풀지 않는 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둘은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지 않은 이가 자신이 행한 것을 모름은 마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에게 빠져 타인에게 무관심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사랑을 베푼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이기적인 자신을 떠나서 온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베푼 것임을 말해줍니다. 전자는 자신에게 푹 빠져 눈이 멀어져 버린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자신이 사라지고 빛이 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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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줬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진정한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처럼 보였습니다. 내심 걱정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저는 눈을 마주하거나 손을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 아니면 염소,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많이 사랑하면서 살았니?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 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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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어린 시절에 공산주의는 함께 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반공 포스터를 그리면 그 구호가 섬뜩했습니다.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그 시기는 ‘냉전’의 시대였음을 알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상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였습니다. 그 깃발아래 아메리카, 서유럽, 남유럽, 북유럽이 함께 있었습니다. 아시아에는 남한, 일본, 대만이 함께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공산주의였습니다. 그 깃발아래 동유럽, 중국, 북한, 베트남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념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념의 대립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마무리 되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논리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가난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한국도 북방외교를 채택하면서 중국, 러시아와 수교를 하였습니다. 이념의 벽은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파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국제질서는 자본과 자국의 이익이라는 논리에 의해서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 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 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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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주간의 월요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불길 같은 화려하고 커다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작은 이들을 따뜻하게 해 줄 작은 손길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사랑은 나중 아주 큰 은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내용을 비유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임금이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내가 아플 때와 곤경 중에 있을 때 나를 도와줘서 고맙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에서처럼 오른쪽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임금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작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작은 헌신과 나눔이 필요합니다. 크지 않아도 좋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작은 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 임금께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작은 사랑이 하늘나라를 가득 채우길 바랍니다. 우리 작은 희생이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이 한 겨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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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를 시작하는 나만의 방법
사순시기는 몸과 영혼을 정화하는 시기입니다.
정화는 깨끗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 안에는
정돈, 정리 등의 의미도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순시기를 시작할 때
잡동사니를 정리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널브러져 있었던 것을 정리합니다.
언젠가 다시 널브러지게 되겠지만요.
사순시기의 정화에 동참해 보세요.
그 시작을 정돈이나 정리로 시작해 보세요.
그리고 천천히 겉에서부터 시작된 정리를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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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심판
-나는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우리 모두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에 ‘한 사람’이다”
오늘 다산의 말씀과 공자의 말씀도 귀한 깨우침이 됩니다.
“배움에도 용기가 필요하듯, 용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무모한 용기를 앞세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어지럽힌다.”-다산
무지, 무식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맨몸으로 범을 잡고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자와는 함께하지 않겠다.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논어
다산은 물론 공자역시 얼마나 신중하고 합리적인지, 또 겸손하고 지혜로운지 깨닫습니다. 무모하고 용감한 어리석은 이들과는 거리가 먼 분들입니다. 무모(無謀)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새벽 일어나 열심하고 한결같은 사제도반들의 매일 말씀을 바탕한 묵상글을 몇편 대략 읽어봤습니다. 정말 다양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똑같은 복음과 독서 말씀을 기본으로한 묵상글이지만 사제마다 참 다양합니다. 모두가 진리를 반영하나 진리의 한 부분만 반영할뿐 진리자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참으로 겸허하게 합니다.
올해 사순시기 교황님 담화문은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지 사순시기 동안 독본(讀本)으로 삼고 싶습니다. 유다인들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의 전통적 수행인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한 설명도 참 명쾌했습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서로 관계 없는 세가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우상들과 우리를 구속하는 집착을 쫓아버리는, ‘개방과 자기비움의 단일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들은 회복될 것입니다.”
‘개방과 자기비움의 단일한 행위’로 요약되는 겸손과 사랑과 자유요, 이래야 비로소 참된 자유인의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자유에로 인도하는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권고 말씀으로 제가 참 많이 자주 인용했던 말마디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이런 가르침이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겸손히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결국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오늘 레위기는 거룩한 삶이 사랑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 레위기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해 가르치시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금령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뤄짐을 봅니다. 한번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도둑질해서는 안된다.
2.속여서는 안된다.
3.사기해서는 안된다.
4.거짓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5.이웃을 억눌러서는 안된다.
6.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7.이웃에 줄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8.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된다.
9.눈먼이에게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된다.
10.재판할 때에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11.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되고, 세력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된다.
12.중상해서는 안된다.
13.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된다.
14.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15.앙갚음 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참으로 구체적 금령들로 표현된 섬세하고 자상한 실천해야 할 사랑의 내용들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열거해 봤습니다. 새삼 디테일에 강해야 하는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사랑의 내용들입니다. 주님 친히 명령하는 다음 두마디 말씀이 이 모두를 요약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참으로 거룩한 사람은 이런 하느님 경외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의 잣대는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기도나 전례, 계명의 준수도 아닌 사랑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오른쪽의 구원받은 양들과 왼쪽의 심판받은 염소들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2.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3.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4.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5.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6.너희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아주 구체적 사안에 어떻게 응답했느냐가 최후심판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국적, 종교, 인종, 남녀노소를 넘어 곤궁한 이들과 자기를 동일시 하는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전인류가 구원의 대상입니다. 구체적 사랑을 실천한 오른쪽 양들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응답 말씀에 이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왼쪽 염소들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요 어느 누구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바로 이들 하나하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주님이니, 이들은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요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중 주님의 성체를 귀히 대하듯 살아있는 주님의 성체인 이웃 하나하나를 귀히 대해야 함을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한 성녀 마더 데레사요, 성 샤를로 후고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사순시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오늘 복음 말씀이요, 마지막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화두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요 심판과 구원의 날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최후심판과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성체를 귀히 모시듯 오늘 하루도 만나는 하나하나 형제를 주님의 성체처럼 귀히 대하며 구원의 삶을 살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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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사람만이라도>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잊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떠올리는 것이
잊힌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떠올리는 것이요
잊히신 하느님을
소중하게 떠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짓밟힌 한 사람을
정성스럽게 일으키는 것이
짓밟힌 모든 사람을
정성스럽게 일으키는 것이요
짓밟히신 하느님을
정성스럽게 일으켜드리는 것입니다
움츠린 한 사람을
푸르게 북돋우는 것이
움츠린 모든 사람을
푸르게 북돋우는 것이요
움츠리신 하느님을
푸르게 북돋아드리는 것입니다
외로운 한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
외로운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요
외로우신 하느님을
따뜻하게 안아드리는 것입니다
굶주린 한 사람을
넉넉하게 배부르게 하는 것이
굶주린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배부르게 하는 것이요
굶주리신 하느님을
넉넉하게 배부르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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