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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 23. 큐티
사무엘상 17:1 ~ 16
블레셋의 침공과 골리앗의 등장
관찰 :
1) 블레셋의 침공
- 1절.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 블레셋은 삼상 14:31의 믹마스 전투를 설욕하고자 사울에게 전쟁을 일으켰다. 사울이 악신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황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한 상황이다. “소고”는 ‘가시가 많은 곳’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원, 곧 세펠라 지역에 위치한 요새이자 도시인 중요한 거점이었다. 베들레헴 서쪽 약 22.5km, 아세가 남동쪽 4.8km지점에 위치한다. 블레셋이 소고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의 거점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세가”는 ‘파헤친 땅’이라는 의미의 지명이다. 이곳은 아얄론 골짜기 남부의 견고한 도시이다. “에베스담밈”은 ‘피의 경계선’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에서는 블레셋과 더불어 잦은 전투가 일어났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 2절.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비겁함으로 전투는 일어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대치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엘 라 골짜기”는 ‘소고’의 북쪽에서 동서로 가로질러 있다. 여름철을 빼고는 항상 물이 흐르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의 블레셋과의 전투는 물이 마른 여림에 벌어졌음이 분명하게 된다.
- 3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 블레셋이 자신들의 본진 에베스담밈을 떠나 엘라 골짜기로 쳐들어왔다. 이 때 양군은 전투태세만 갖춘 채 전면전을 벌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2) 골리앗의 등장
- 4절.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 “싸움을 돋우는 자”(אִֽישׁ־הַבֵּנַיִם, 아쉬 하베나임)는 문자적으로는 '둘 사이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단신으로 싸워 단번에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하기 위해 두 군대 사이에 개입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곧 선봉장을 가리킨다. 이러한 전투의 방식은 근동 지역에 있는 부족들 간의 전투에서는 보기 드문 일었다. 그와 같은 전투의 방식은 헬라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를 통해서 블레셋이 헬라문화권에서 이민 온 민족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가드에는 거인족인 아낙 자손들이 살았다. 골리앗의 키는 규빗을 약 45cm로, 한 뼘을 약 13cm로 하면, 골리앗의 키는 약 283cm가 된다. 다른 셈으로 키를 측정하더라도 골리앗은 270cm가량의 거대한 사람이었다. 현대에서도 20세기 초에 로버트 워드로라는 사람이 272cm의 키로 기네스북에 최장신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
- 5절.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 “비늘 갑옷”은 천 위에 비늘 모양의 놋이나 철판 조각을 다닥다닥 붙여서 만든 갑옷으로 적의 화살을 비껴가게 하고, 칼날이 급소를 피하도록 하여 보호해준다. “놋 오천 세겔”이면 1세겔이 약 11.4g이기 때문에 약 57kg의 무게이다. 이런 갑옷을 입고도 전투를 치를 수 있으리만치 엄청난 장사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6절.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매었으니” => “놋 각반”은 무릎 아래를 보호하기 위해 놋으로 만든 ‘다리 보호대’이다. “놋 단창”에는 창자루에 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감아놓아서 베틀 채 같은 모양이었다. 칼 보다 멀리 있는 대상을 찌르기 위한 용도와 더 멀리 있는 대상에게 집어 던지고 신속하게 거두어들일 수 있는 대단한 무기였다.
- 7절.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드는 자가 앞서 행하더라” => 육백 세겔이면 약 7kg이다. 그의 창이 얼마나 크고 강력했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골리앗의 무기들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이 거대함과 강력한 무기들을 지니고 있는 이 거인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군대에는 없었다.
4) 골리앗의 조롱
- 8절.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일대일의 전투를 요청하고 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일대일의 전투를 신청하는 이유들은 첫째로, 협곡을 경계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지형 형편상 전면 공격은 곤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골리앗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이스라엘의 그 누구라도 쉽사리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런 형태의 일대일 결투는 고대 이방의 전투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에 선봉장의 승리는 곧 전체의 승리로 간주되어 패배한 이들은 상대방 국가에 대하여 패전국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해야 했다. 골리앗은 자신은 블레셋 사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의 신복으로 묘사했다.
- 9절.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 골리앗의 말은 결국 헛된 맹세에 불과한 것이 된다. 골리앗이 죽고, 이스라엘이 이겼지만 골리앗의 이 이야기는 지켜지지 않는 헛된 약속에 불과한 것이었다.
- 10절.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 골리앗은 자신이 참가한 이 전투에서 정말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워낙 중무장을 했기 때문에 그가 골짜기를 건너 이스라엘의 군인들과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아무리 골리앗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상황이기에 자신의 지경에서 싸움을 벌이고자 모욕을 하고 있었다.
- 11절.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 하나님의 영이 거두어져 간 사울과 그 군사들은 골리앗의 이러한 모욕에 대하여 제대로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있다.
4) 다윗의 등장
- 12절 ~ 13절.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 이새의 아들들의 숫자가 역대상 2:13 ~ 15에서는 일곱으로 말한다. 그 이유는 어려서 죽은 다윗의 형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다윗은 장차 메시야가 오시는 동네 베들레헴 사람이었다.
- 14절.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 다윗은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이 전투에 군사로 징집되지 못했다. 대략 16세 전후의 나이로 짐작한다.
- 15절.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 다윗은 사울의 병세가 호전이 되자 수금을 타던 일을 그만 두고, 자신이 하던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던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양을 칠 때에”는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기 위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KJV에서는 그렇게 번역을 했다.
- 16절. “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는 소강상태의 대처로 이어지고 있었다. 골리앗이 그처럼 모욕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쩔쩔매면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40일이나 지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가르침 :
1) 이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는 인과응보적인 차원이 맞다. 블레셋은 기브아에서의 패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힘을 모으고 사람들을 모아서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이다. 사울의 용맹을 보았던 그들이기에 그 보다 더 용맹하고 무서운 골리앗을 내세워서 이스라엘과 싸우고자 했고, 그들의 전략은 거의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사울의 목숨은 끝나는 형편이 되는 것이었다.
2)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골리앗은 대단한 거인이자 엄청난 힘을 가진 장수였다. 일대일의 싸움에서 진적이 없는 존재였다. 그는 선봉장으로서 적의 예봉을 꺾는 일에 능한 사람이었다. 사울이라 할지라도 골리앗과 싸우는 것에 대해서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심지어는 사울보다 더 용맹하다 할 수 있는 요나단마저도 골리앗과 40여일이 지나도록 싸움을 걸어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존재였다. 그런 골리앗이 그렇게 악독하게 이스라엘을 모욕했다. 그의 모욕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치명적인 실패를 가장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런 말을 들은 이스라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의 조롱에 대하여 반항하지도 못한 채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블레셋에게 유리한 형국으로 흘러가게 되고 있었다. 사울은 여전히 그 리더십에 도전을 받고 있었고, 그러한 위기가 이방인들로부터도 지적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은 사울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3) 사울이 자신의 키와 힘과 용맹을 의지했기 때문에 블레셋의 골리앗이 나타난 것이다. 사울보다 더 크고, 사울보다 더 힘이 쎄고, 사울보다 더 용맹한 자가 나오자 그야말로 “깨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그리스도인 리더십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은 세상의 리더십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의 리더십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이 하나님의 영이 떠난 것으로 인해서 이렇듯 골리앗 앞에서 꼼짝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은 다윗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4) 사무엘상 기자는 그렇듯 다윗의 등장의 배경으로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게 된 것을 집중해서 드러내고 있다. 사울에게 임한 악신을 내쫓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다윗이 세상적인 육체와 힘과 용맹에 있어서 이스라엘 최고인 사울보다 비교할 수 없는 골리앗에 대하여 어떠한 대적함이 있게 될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5) 다윗은 이미 사울이 차도가 많이 있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 원래대로의 양을 치는 삶으로 돌아가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그러는 중에 형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참여하게 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다윗도 그 일에 엮어지게 되는 배경이 설명되었다.
적용 :
1) 사울이 추구한 것은 외모와 힘과 용맹이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크고, 더 힘이 쎄고, 더 용맹한 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 상황에서 붙잡아야 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40여일이 지나도록 모욕을 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오명이 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꼼짝 못하고 있는 상황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자. 그것이 최선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소망해야 한다. 다른 길은 그것이 상식적이고 최선인 듯 보이지만, 결코 최선이 아니다.
2) 골리앗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벽의 크기만 본 사울은 그것을 넘을 수 없었다. 그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의지함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골리앗은 보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진짜 능력이다. 나의 인생 가운데에서도 보이지 않는 실재가 보이는 실상보다 더 크고 분명한 실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가 되는 것이다.
3) 미얀마에서 일어난 싸움은 마치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과 같은 유형의 것이다. 이 싸움의 핵심은 주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주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역사가 있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