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케브
경청의 영성
때로는 듣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이자, 동시에 가장 잘 이해되지 않는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가 가장 유명하게 등장하는 두 곳은 지난주 파라샤와 이번 주 파르샤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계명,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온 마음과 온 영혼을 다해 그분을 섬기라는 명령을 너희가 확실히 지키면”입니다. — 이는 ‘쉐마’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단락의 서두입니다. 또한 이번 파르샤의 첫 문장인 “너희가 이 율법을 들으면”에도 등장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쉐마(שְׁמַע)’입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이 단어가 ‘듣다’, ‘경청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이해하다’, ‘내면화하다’, ‘응답하다’, ‘순종하다’ 등 너무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근본적으로 영어로 번역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는 데바림서의 주요 모티프 단어 중 하나로, 이 책에서 무려 92회나 등장하는데, 이는 토라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많은 횟수입니다.
모쉐는 생애 마지막 한 달 동안 끊임없이 백성들에게 ‘쉐마(שְׁמַע)’라고 말했습니다.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 주의를 기울여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경청하라. 너희가 그저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유대교는 경청의 종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가 문명에 기여한 가장 독창적인 공헌 중 하나입니다.
서양 문화가 세워진 두 가지 토대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 둘은 더 이상 서로 다를 수 없을 정도로 달랐습니다. 그리스는 지극히 시각적인 문화였습니다. 그 문화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눈, 즉 ‘보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세계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위대한 예술, 조각, 건축물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스의 가장 대표적인 집단 행사인 연극 공연과 올림픽 경기는 모두 ‘구경거리’, 즉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연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지식을 일종의 심도 있는 시각, 즉 표면 아래에 있는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는 것은 보는 것’이라는 이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서구에서 지배적인 은유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통찰력, 예지력, 후지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관찰 결과를 제시하고, 관점을 취하며, 예시를 들고, 명료하게 설명하며, 어떤 문제에 대해 빛을 비춥니다. 무언가를 이해했을 때 우리는 “알겠어”라고 말합니다.
유대교는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새긴 형상—시각적 상징—을 만드는 행위 그 자체가 우상 숭배의 한 형태입니다. 지난주 파라샤에서 모쉐가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과 직접 만났을 때, “너희는 말씀의 소리는 들었으나 형상은 보지 못했고, 오직 음성만 있었습니다.” (신명기 4:12).
하나님은 시각이 아닌 소리로 소통하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며, 부르십니다. 그렇기에 최고의 종교적 행위는 ‘쉐마(שְׁמַע)’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경청합니다. 그분이 명령하실 때, 우리는 순종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지리트(Nazirite)’로 알려진 랍비 데이비드 코헨(1887-1972)은 라브 쿠크의 제자이자 하이파의 수석 랍비인 R. 셰아르-야슈브 코헨의 아버지였는데, 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이해에 관한 모든 비유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타 쉐마(Ta shema), “와서 들어라.” ‘카 마슈마 란(Ka mashma lan)’,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이다.” ‘쉐마 미나(Shema mina)’, “이것에서 추론하라.” ‘로 쉐미야 레이(Lo shemiyah lei)’,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가르침을 ‘샤마야타(shamaytta)’, “들어진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것은 ‘쉐마(shema)’라는 단어의 변형들입니다.
이는 사소한 차이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지식의 이상적인 형태는 초연함을 수반했습니다. 보는 자, 즉 주체가 있고, 보이는 것, 즉 대상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두 영역에 속합니다. 그림이나 조각품, 극장에서의 연극, 혹은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은 그 예술이나 드라마, 또는 스포츠 경기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 또는 그녀는 참가자가 아니라 관중입니다.
말하기와 듣기는 거리두기의 형태가 아닙니다. 이는 참여의 형태입니다. 이를 통해 관계가 형성됩니다. 히브리어로 ‘지식’을 뜻하는 ‘다아트(דַּעַת, da’at- 어원: yada (יָדַע). 알다)’는 참여, 친밀함, 깊은 유대감을 내포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하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더라(וְהָאָדָם יָדַע אֶת־חַוָּה אִשְׁתּוֹ וַתַּהַר וַתֵּלֶד) ”(창세기 4:1).
이것이 바로 그리스어적 의미가 아닌, 히브리어적 의미에서의 ‘알다’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통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계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부부, 부모와 자녀, 고용주와 직원 등 어떤 관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서로 어떻게 말하고 경청하는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 외의 모든 것은 무시하십시오.
그리스인들은 관찰과 추론에서 비롯되는 지식의 형태, 즉 과학과 철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최초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 사이에 그리스에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단지 보고 겉모습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기 상에 이와 관련된 강력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겉모습만 보면 왕다운 자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키가 컸습니다. “어깨 위로는 백성 중 누구보다 컸다”(삼상 9:2, 10:23). 그는 왕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나 기질적으로 그는 전혀 지도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추종자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 대신 다른 왕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시며, 그 왕은 이새의 아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가서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엘리압의 외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엘리압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외모나 키에 감명받지 말라. 내가 그를 버렸노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과 같이 보지 않으시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다(사무엘상 16:7).
유대인과 유대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께서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말하기와 듣기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부모, 동반자, 주권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분으로서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하나님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유대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저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시도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십니다. 유대인의 방식은 경외와 존경뿐만 아니라 친밀함과 사랑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현대의 사례 하나는, 평생 대부분을 유대교와 소원하게 지낸 한 유대인, 즉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정신분석을 “말하는 치료”라고 불렀지만, 이를 “듣는 치료”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는 적극적인 경청 그 자체가 치료적 효과를 지닌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이 널리 퍼진 후에야 비로소 “I hear you(당신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공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영어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경청에는 지극히 영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는 제가 아는 가장 효과적인 갈등 해결 방식입니다. 갈등을 야기하는 요인은 많지만, 갈등을 지속시키는 것은 적어도 한쪽 당사자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경청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공감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거나, 나아가 보이콧을 하는 것은 지극히 자멸적인 행위입니다. 당장은 갈등을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며, 종종 이전보다 더 격렬하게 되돌아옵니다. 부당하게 고통을 겪은 욥은 그를 위로하는 이들의 말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정의가 ‘상대방의 말도 들어라(audi alteram partem)’라는 원칙을 전제로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경청은 관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존중하며, 상대방의 인식과 감정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솔직해질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비록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이 취약해질지라도 말입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의 말을 경청합니다. 좋은 고용주는 직원들의 말을 경청합니다. 좋은 기업은 고객이나 의뢰인의 말을 경청합니다. 좋은 리더는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합니다. 경청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경청은 사랑과 존중이 자라나는 토양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타인과의 관계를 다지는 지속적인 배움의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배우자나 자녀, 혹은 우리의 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경청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자신이 회오리바람이나 지진, 불 속에 계신 것이 아니라 ‘קול דממה דקה - 콜 데마마 다카(kol demamah dakah)’, 즉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⁷ 속에 계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이 목소리를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고 정의합니다.
훌륭한 연설가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지만, 훌륭한 경청자는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든, 경청은 사랑의 서막입니다.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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