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에 있는 한 교회는 해마다 대학가의 청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3명의 전문 사역자들에게 3년 동안 재정을 지원한다. 그들의 사역 세미나에 한 번 참여했는데 홍대 앞에서 나이트클럽에 다니면서 대학생들을 만나 선교하는 목회자를 만났다. 그 젊은 목사는 복장과 스타일부터 달랐다. 청바지에 머리카락은 노랗게 물들인 전혀 목사 같아 보이지 않는 목사였다. 인생의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몰라서 술과 연락에 취해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나이트클럽에 간다는 그는 이미 카페 집회소를 열어서 제법 많은 청년과 모임을 하고 있다고 했다.
목사가 나이트클럽을 출입해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왜 굳이 나이트클럽에 가서 전도해야 하는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도 유혹받을 수 있는 위치까지 가서 전도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라며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나이트클럽 입구도 구경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젊은 목사가 참 존경스러웠다. 신학을 하고 다른 많은 사역의 길도 있을 터인데 어렵고 힘든 사역을 맡아서 어쩌면 불모지와 같은 곳에서 혼신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밤이면 흥청거리며 춤을 추고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구토해대는 젊은이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는 이 젊은 목사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종종 이런 문제를 접할 때 아주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생각은 그 행위 자체를 비난하고 그 동기는 지나친다. 물론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는 행위들이 있다. 도둑을 전도하려고 도둑질을 배울 필요는 없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마실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도둑을 전도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거나 술에 취한 젊은이들을 전도하기 위해 나이트클럽 주변을 배회하거나 때론 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가는 것을 비난하면 안 된다.
법궤를 붙잡은 웃사를 친 사건이 벌어지고 난 석 달 후 다시 다윗은 법궤를 옮기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살핀 다음 다시 옮기기로 결심하고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어깨에 메고 조심스럽게 행진하였다.
(삼하 6: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삼하 6: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그런데 다윗이 경망스럽게 춤을 추었다고 그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비난했다. 미갈은 다윗이 춤을 춘 이유와 동기는 보지 않고 춤을 춘 행위만 보고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삼하 6: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삼하 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이 춘 춤과 연락을 사랑해서 주연에 취해 추는 춤은 다르다. 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춤을 춤으로 누구를 영화롭게 하느냐가 판단의 시금석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행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마치 다윗을 비난하던 미갈과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 똑같은 행위라도 죄가 될 수도 안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예수님의 행위를 공격했듯이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은 늘 행위 자체를 문제 삼고 그것을 행하는 동기와 정신은 간과함으로 미갈의 실수를 반복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타인의 동기도 물어보지 않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죄를 범치 않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주사 바른길을 가게 하소서. 어리석게 행위나 공간 자체를 선과 악으로 규정해 두고 율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 유대인들의 실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도와주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