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에 올인하는 부모들] ‘무조건 헌신이 자식사랑 아니다
‘자녀 교육에 올인하는 게 자식 사랑은 아니다.’
자녀 교육에 성공했다고 자평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무조건적인 헌신보다는 자녀의 재능과 적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검찰청 기능공무원인 손혁수씨(52·경기 의정부)는 한달 월급이 2백50원이 채 안된다.
그러나 그는 재작년부터 45평형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다.
손씨는 "이 집은 아이들이 장만해 준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손씨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울 방배동에 살다가 의정부로 이사했다.
당시만 해도 방배동 아이들 사이에서는 과외가 일상화돼 있었지만 의정부엔 학원조차 없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손씨의 두 딸은 학원 한 번 가지 않았다.
사교육비 부담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내집마련을 위한 저축이 많아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큰 딸(24)은 현재 교편을 잡고 있고 매달 50만원을 용돈 겸 숙식비 명목으로 부모님께 드린다.
작은 딸(21)은 연세대에 재학 중이며 최우수학생으로 뽑혀 총장이 주는 장학금 등으로
학비를 해결하고 있다.
손씨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고 모든 일을 토론하며 아버지로서 역할에
의식적으로 충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매일 아침 5시면 일어났다.
잠이 많은 아이들을 생각해 1시간이 넘도록 깨우면서도 화내지 않았다.
6시30분이면 네 식구가 둘러앉아 여유롭게 아침을 함께했다.
자연스럽게 식탁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아이들의 고민, 연예인 평가들이 오갔고
성교육도 식탁에서 이뤄졌다.
주말이면 같이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하면서 아이들과의 공감대를 넓혀갔다.
이를 통해 부모가 바라는 자식들의 진로를 아이들 스스로 깨닫게 했다.
손씨는 “대부분 아버지들이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면서
학원을 보낸다”면서 “부모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서 공부할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들을
무조건 교육시킨다고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획취재부>
[자식에 올인하는 부모들] 下. ‘빈털털이 노후’에 남는건 무시와 학대
외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남편과 사별한 김모 할머니(78·서울 관악구).
남편의 죽음은 살림만 챙기던 할머니를 아무런 준비 없이 냉정한 세상으로 내몰았다.
가진 기술이나 밑천이 없던 할머니는 파출부를 전전했다.
그렇지만 하나뿐인 아들 교육만큼은 소홀하지 않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 흉을 보일까,
혹 자신의 가난이 그대로 물려질까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끼니도 걸렀다.
재혼할 기회도 있었지만 포기했다. 아들만을 ‘삶의 희망’으로 삼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았다.
그런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일류대학’을 졸업했다.
아들이 결혼한 뒤에도 할머니는 입주파출부 생활을 계속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사치란 생각에 조금이라도 목돈이 생기면 아들의 사업자금에 보탰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돌아온 아들 가족의 태도는 냉담했다.
파출부도 힘에 부쳐 1년 전부터 어쩔 수 없이 아들집으로 들어갔지만 손자 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예 밥도 같이 먹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더 나이 들어 병이라도 걸리면 양로원에 버리겠다”는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김할머니는 “지금까지 자식 하나만을 위해 내 앞으로 된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하고 살았지만
이런 대우를 받으니 너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부모들의 상당수가 노후에는 자식들에게
재정적·정서적 학대뿐만 아니라 신체적 학대까지 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고 있기에
김할머니와 같은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같은 노인 학대의 근본 원인 중의 하나가 대부분 경제적 문제에서 시작되고 있다.
충북 청주에 사는 정모 할머니(73)의 남편은 공무원으로 정년퇴임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남들만큼은 공부시키려고 옷 수선 가게를 꾸려가며
3남1녀를 모두 대학에 진학시켰다.
억척스럽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자식에게 모든 것을 헌신한 정할머니도
남편의 폭행과 자녀의 무관심에 노출되어 있다.
정할머니는 10년 전 제일 믿던 큰 아들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고 몇 년 전부터는 치매증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남편은 아내를 때리기 시작했다.
회사원이던 두 아들은 맏아들의 책임이던 부모 모시기가 자신들에게 넘어오는 것을 꺼리고
막내딸은 연락이 두절되다시피 했다.
특히 둘째 아들은 실직으로 이혼위기에 처하면서 가끔 보내주던 생활비마저 끊었다.
베트남 호찌민시에 사는 김모 할아버지(74)의 사연은 ‘현대판 고려장’을 연상케 한다.
사업으로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은 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사업체를 물려받은
큰아들이 베트남 여행길에 아버지를 버렸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할아버지를 발견한 현지 교포가 자식의 처사에 분개,
서울의 큰아들을 수소문해서 매달 생활비를 부쳐 드리라고 강권했다.
현지 베트남 간병인 여성(23)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병이 완치되어
그녀와 결혼까지한 할아버지는 “자신을 버리고 갔던 아들을 생각하면 피가 끓는다.
일찌감치 사업체를 물려준 것이 화근”이라고 말했다.
충북 노인학대예방센터 김순예 실장은 “학대를 받는 어르신은 자식을 위해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자식들 또한 ‘나 살기도 바쁜데
부모까지 어떻게 모시느냐’는 경제적 부담이 부양 스트레스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실장은 이어 “자신이 노인이 됐을 때 학대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경제사정을 여유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학대 노인의 대부분이 병을 앓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중년 이후엔 건강에 투자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지나친 사교육비 지출은 자녀의 미래까지 망칠 수 있다.
서울 강남에 사는 안모씨(67)는 요즘 답답한 마음에 밤잠을 못 이룬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손을 벌리는 아들(35) 때문이다. 대기업 임원 출신인 안씨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중학교부터 한달에 2백만원 이상을 쏟아부어 영어·수학은 물론
체육과외까지 시켰고 대학졸업 후에는 미국유학도 보내줬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아들은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회사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 이직을 반복했고 돈이 들어오는 족족 몽땅 써버리기 일쑤였다.
안씨는 “아들이 미국 유학 비용으로 너무 많은 돈을 써 아내가 할인점 판매대에서 일한다”면서
“더이상 도와줄 여력도, 도와줄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재무컨설턴트업체 ‘포도에셋’의 라의형 대표(43)는 “교육비를 많이 쏟아부을수록
자녀들은 ‘부모는 나를 위해 언제든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
나이를 먹고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며 “노후준비뿐 아니라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도 과도한 교육비 지출은 금물”이라고 지적했다.
‘가문의 영광’ 위해 자녀에 올인 위험한 가족공리주의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고학년 교실에서 학생들 휴대폰에 입력된 엄마 이름을 알아보니
‘안 받아’가 1위, ‘중전마마’가 2위로 나타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빠의 휴대폰 번호는 입력조차 안 된 경우가 허다했다 하니,
우리네 가족소통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부모자녀 관계가 매우 심각한 위기상황에 놓여 있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새삼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곪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 사립대학 신입생 설문조사를 보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도
부모가 1위요, 동시에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도 부모(특히 엄마)가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부모를 향한 애증(愛憎)이 복잡하게 얽혀 공존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2학년 여고생을 대상으로 “결혼해서 자녀를 낳을 계획이 있느냐”는 주제로 심층 인터뷰를 해보니,
두 명 중 한 명꼴로 “자녀를 낳을 생각이 없다”는 충격적 답변이 돌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부모님이 하찮은 나를 위해 너무 큰 희생을 하고 계신데 나는
그런 부모가 될 자신이 없다”는 것이요, “어린 시절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기에
자식을 낳아 똑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게다.
이처럼 왜곡된 부모자녀 관계의 기저에 대한민국 특유의 입시만능 교육제도가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미국 대통령조차 부러워하는 뜨거운 교육열에 세계 1위의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지만,
하루 3~4시간 쪽잠을 자며 오로지 대입 준비에 목숨을 거는 한국 수험생의 초인적 일과는
타임지에서 ‘믿거나 말거나’란 제목하에 소개한 바 있고,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행복지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매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우리네 교육풍토는 학벌주의를 등에 업은 ‘가족 공리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가족 공리주의(功利主義·utilitarianism)란 가족의 제한된 자원을 끌어 모아 가족 구성원의 성공을 위해
집중 투자하는 것으로, 자녀의 미래를 위해 부부가 희생을 무릅쓰는 기러기 가족은 이의 대표적 실례라 할 수 있다.
결국 개인의 소신 있는 선택이나 소박한 행복에 가치를 두기보다 가족 구성원의 출세와 성공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가족 공리주의의 핵심인 셈이다.
여기서 가족 공리주의를 진두지휘하는 인물이 전업엄마라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하랴.
이로부터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과잉 모성(intensive mothering)’이
‘좋은 엄마’의 전형으로 화하고, 전일제 엄마와 시간제 엄마(일하는 엄마)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이 유발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게다가 행여라도 자녀가 대학입시에 실패할 경우 그건 곧 엄마의 무능력·무책임·무관심의 결과로 치부된다.
더더욱 ‘엄마’라는 지위에 무소불위의 파워를 허용하는 우리네 가족문화에서 엄마는 모처럼 얻은 파워를
마음껏 행사할 밖에. 그러고 보면 엄마 자신도 가족 공리주의가 낳은 피해자인지도 모를 일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회적 경쟁은 치열해지고 우리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한 상황에서,
부모의 불안 심리를 효율적으로 활용한 사교육 마케팅의 승리는, 밥상머리 교육의 실종과
공교육 위기를 불러일으키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사교육시장의 상품으로 몰아내고 있다.
이 상황에 순응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저항과 반항이 점차 드세지면서,
자신이 가족 공리주의의 도구가 되고 있음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가족 자화상 아니겠는지.
부모로서의 행복을 자녀의 성적 및 성공과 동일시함은 공허한 허위의식이다.
‘어릴 적 맞아본 자식이 효도한다 했다’는 옛말을 ‘엄친아’의 부모들은 새겨들을 일이다.
어차피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믿고 기다려주는 일뿐.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자식에 올인하는 부모들] 조기교육에 올인 자녀미래 망친다
〈신의진/ 연세대 의대 정신과 교수〉
극단적인 형태의 조기교육이 성행하고 있다.
각 가정마다 한 두 명의 아이들밖에 없으니 있는 힘을 다해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은 한편 이해가 된다.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들이 대접 받는 사회 분위기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게 기르고 싶은 부모의 기대와 달리 ‘빨리빨리 교육’ 열풍이 아이들의 창의성이나
정신적 안정감을 앗아가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최근 발표된 뇌 발달 연구에 의하면 뇌 성장이 활발한 어린 나이에 만성적 스트레스가 주어지면
성장 후 조그마한 좌절도 견디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경쟁을 견디기 어려운 어린 나이부터 조기 교육에 ‘올인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조그만 스트레스에도
무너져버리고, 쉽게 극단적인 행동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아이들은 부모가 공부시키느라 과잉보호를 해 실수를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박탈 당한다.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면 비교적 경쟁을 견뎌낼 수 있고,
원만한 학습이 가능한 나이부터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낫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 양육에 대해서 나름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하지만 과학적 결과를 바탕으로 육아관의 효율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신경과학 연구 방법이 획기적으로 발전돼 두뇌 발달에 대한 신비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신경 과학, 발달 과학 영역과 기존의 교육학적 관점이 합해져 더욱 명확하고 효율적인 자녀 양육 및
교육 분야의 방향 설정이 가능한 시점이다.
이러한 작업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요구되므로 정부와 관련 전문가들의 협력과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미 많은 나라에서 교육은 윤리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결정짓는
효율성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과학과 철학, 교육적 관점이 어우러져 부모들에게 명확한 자녀 교육 방향을 제시하는
공적 차원의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과열된 조기 교육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으로 돌아올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부 명예기자가 간다!]자식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되자
배를 곯을 때 먹을것을 남에게 양보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무리 양보해도
전혀 아깝지않은 대상이 있다면 100% 자식일게다.
본능에 가까운 자녀사랑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따지고 이성적으로 대하려고해도 잘 되지않는게
부모의 마음이다. 자녀를 위해 돈을 벌고 그 자녀가 내 돈을 써도 아깝지않은게 신기할 정도다.
전생에 부모 자식간은 빚쟁이와 빚진자라고 그래서 그렇게 당당하게 돈, 돈 돈한다는데 그 말이 딱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임신한 순간부터 돈이 드는 자녀 양육은 갈수록 그 비용부담이 커져서 결혼도 만혼,
아이는 하나만 그것도 어느정도 기반을 잡고 낳겠다는게 요즘의 추세란다.
그렇다면 옛날, 아주 옛날도 아닌 불과 3-40년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많이들 낳아서 기를 수 있었을까?
낳기만하면 자기 먹을 숟가락은 자기가 들고 태어난다며 대여섯은 기본이었으니말이다.
어른들은 이 궁금증에 하나같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엔 큰 돈이 안들었잖여. 식구 수대로 방이 다 있는
집이 어딨어? 남자방 여자방, 아예 한방에 몰아서 자던가 했지. 밥은 어뗘? 김치만 갖고 먹였지.
고기반찬이 어딨어? 옷은 누가 사주간? 큰 애가 입던 거 막내까지 물려입히고 교복은 오바까지
큰 언니것을 주욱 내려 입혔고 , 학교만 보내놓으면 지들이 알아서 크는데…
대학가는 것도 공부잘하는 놈, 아들만 보냈으니까 큰 돈이 들어가는게 뭐 있었겠어. "
과연 가능한 얘기일까? 학교만 보내면 지들이 알아서 컸다는 말이…
지금은 큰애가 입던 교복, 막내까지 내려가지도 않고 밥반찬도 고기가 들어가야 젓가락을 들고
학교만 보내기엔 너무 이상하고 부족하다.
거기에 대학은 동기생 60만명이 다 지원하는바람에 사교육비만 잔득 들고…
그러니 아이를 낳기만 해다오. 조금은 지원해주겠다란 정부의 말이 외계인의 말처럼 들리는거다.
하지만 옛날의 자식이라고 하고싶은거 먹고싶은 거 가지고싶은 게 없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동네에서 한 두집 있을까말까한 귀한 흑백TV가 왜 우리집에는 없냐고 투정했었고
나도 내방을 가지고싶다고 노래를 했었고 새해가 되면 설빔을 찾다가 없으면 울기도 했었고
쌀밥에 소시지 반찬 먹는 아이가 부러워서 김치냄새 팍팍 풍기는 내 도시락의 뚜껑을 반만 열었던 때도 있었다.
큰 언니의 교복은 유행이 바꾸어도 한참 바뀌었지만 우리 형편에…
3년만 입으면 되니까라며 체념하고 고등학교 올라가면 진짜 해주신다란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었다.
(고등학교 교복은 다 다르기때문에 물려입을 수 없었던게다) 연필도 몽당연필이 되어야지만 새 연필이 생겼었다.
운동화는 또 어떠했는지 '말표' 운동화를 신고싶어서 일부러 흙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다가
그 현장을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놈의 기집애" 하면서 혼도 엄청났었다.
내가 아주 아주 어려운 집안이었냐… 그건 아니었다.
그냥 그 시대가 그렇듯 덜 가져도 더 많이 가지고싶어서 안달복달하지않았고 부모님의 안돼란 말을 하기전에
자식들이 알아서 체념하는가하면 설사 부모님이 안돼라는 말을 하는 상황까지 갔어도
그것때문에 집안내분이 일어나거나 학교를 가지않는 일도 없었다.
당신은 부모니까 지불하고 나는 자식이니까 꼭 얻어내야하는 그런 분리적 개념이 아니라
경제적 형편까지 서로 이해하고 함께 걱정하는 가족, 진짜 가족이었다.
비단 우리집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부모님들이 비상식적으로 그것도 무식하게 무조건 반대하고 안돼라고 하는게 아니니까…
부모님의 생각과 결정에 우리들의 철없는 투정은 이렇게 밀리고 없어지고 체념되어졌다.
그렇다고 자식의 모든 부탁과 간청이 다 무시되는 것도 아니었다.
열번 스무번의 진실한 간청에 부모님이 허락해서 얻어지는 것도 적잖이 있었다.
솔직히 계산해보면 허락되어 얻어진게 더 많았을게다.
교실바닥에 떨어진 자기 물건조차 집으려고 하지않는 요즘 아이들이다.
내 방이 꼭 있어야하고 생일 졸업등 자신의 기념일에는 근사한 곳에서 파티를 해주거나
고가의 물건을 당당히 요구하는 요즘 아이들이다.
하지만 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요즘의 아이들에게만 돌리고싶지않다.
문제는 너무 쉽게 들어주던 우리 부모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보았다.
나역시 많아야 둘인 내 새끼들. 저들이 원하는거라면 뭐든 해줘야지….
자식사랑이란 비논리하에 열번 스무번은 커녕 단 한번에 오케이하면서 사주었던 물건이 한두개가 아니다.
휠리스란 바퀴달린 운동화는 한국에 들어오기전 이미 미국에서 공수해왔었고
남에게 없어보이고싶지않아 한 해 신으면 작아져서 더 신을 수 없는 신발도 무조건 메이커를 사주었다.
내 욕심이다. 남에게 있어보이고싶은 욕심, 더 많이 가지지않았어도 덜 가진게 들키고싶지않은
공연한 자만심...
최근 등골브레이커라고 불리우는 고가의 옷들이나 고가의 사교육, 고가의 양육비는
어쩌면 바로 부모의 허영심이 먼저일는지도 모른다.
예전의 부모님들이 우리를 덜 사랑해서 "안돼!"라고 하신게아니다.
열번 스무번 간청해야 들어주셨던 건 그만치 우리들의 잦은 변덕을 알고 계셨던 지혜였었고
어려운 시대, 가족 모두가 버틸 수 있었던 지혜였다.
예전에 그렇게 아껴가면서 자식을 키웠어도 당신들의 노후는 일절 준비못해서
전전긍긍 쩔쩔매는 전후세대가 아닌가? 하물며 우리는 어떠할까?
무엇보다도 우리 부모가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도 "노"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건 부모 자식간이 아니라 정말 빚쟁이와 빚진 자이다. 생각해보라.
지금, 자식들에게 투자하는 게 올인에 가까운 과한 금액은 아닌지…
교육은 둘째치자. 생각해보라, 아이들의 투정과 졸라댐이 얼마나 시시각각 변하는 변덕인지…
지금 이 유행이 지나고나면 또 다른 유행에 또 말려서 내 허리 휘는 것 모를 정도로
쏟아붓는게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지…
휘어진 허리를 자식이 펴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 흰 허리의 통증, 자식이 알아줄까?
자식들은 부자요. 부모들만 가난하다란 요즘 말, 자식들도 알게해야한다.
자식은 돈, 돈, 돈을 외치는 빚쟁이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의 한 사람이 아닌가?
SC페이퍼진 명예주부기자 1기 최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