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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대사神秀大師와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오도송悟道頌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이는 세간의 상법常法이다. 출세간에서도 또한 통용通用한다. 오호라, 가비가통可悲可痛이로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 헤아릴 수 없는 도인이 이 세간에 출현했다. 특히 마명보살은 당시인當時人이 둘째 부처님(第二佛)이라 칭송했고, 용수보살은 제이서가第二釋迦라는 찬탄을 받았지만, 자기 저술을 경이라 참칭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혜능스님의 후손은 그 법문을 법보기단경法寶記壇經이라 추앙했다. 나는 이를 신수와 혜능의 남북종 비교우위의 산물이라 본다. 육조스님이 자기 법문을 친히 경經이라 일컫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스스로 경이라 호칭했다면, 5조부터 초조 달마대사까지 발로 짓밟는 것이고, 또한 제이불 제이서가도 눈밖에 있는 것이다. 자칭 타칭 서가후신釋迦後身이라 해야 옳다. 이 때문에 나는 법보기法寶記라 호칭하고자 한다.
법보기는 여러 판본이 있다. 하택신회何澤神會스님의 제자들이 최초 편찬할 당시부터 진위 논란이 있었다. 후대 판본은 각 종파의 종취宗趣가 얼마나 덧씌워졌을까? 아무도 모른다. 어떻든 최초 판본은 돈황본敦煌本이다. 이를 의거하여 신수스님과 혜능스님 양사兩師의 오도송을 논해보고자 한다.
1. 신수대사 오도송
몸은 보리의 나무이고,
마음은 명경의 받침대와 같도다.
때때로 털고 닦기를 바라노니,
티끌이 있게 하지 말지니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몸은 보리의 나무이다.” 이 몸은 범부의 몸이다.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되어 있다. 피부로 감싸고 있지만 결코 청정체淸淨體는 아니다. 그런데 이 몸이 비로자나불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정각正覺의 나무이다. 이 몸이 곧 보리이다. 중생이 바로 부처이다. 정예淨穢가 둘이 아니다. 다르지 않다. 원각경 청정혜보살장도 또한 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천명하고 있다. 아래와 같다.
“선남자야,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니, 정념과 망념이 해탈이 아님이 없고, 성법과 파법이 모두 열반을 일컬으며, 지혜와 우치가 죄다 반야가 되고,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함께 보리이며,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고, 모든 계정혜와 음로치가 다 범행이며,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고,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가 되며, 유성과 무성이 가지런히 불도를 이루니, 일체 번뇌가 구경의 해탈이다. 법계해의 지혜로 조견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를 여래의 수순각성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一切障礙 即究竟覺 得念失念 無非解脫 成法破法 皆名涅槃 智慧愚癡 通爲般若 菩薩外道 所成就法 同是菩提 無明眞如 無異境界 諸戒定慧 及婬怒癡 俱是梵行 衆生國土 同一法性 地獄天宮 皆爲淨土 有性無性 齊成佛道 一切煩惱 畢竟解脫 法界海慧 照了諸相 猶如虛空 此名如來 隨順覺性)
“마음은 명경의 받침대와 같도다.” 나는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을 긍정하지 않고, 심선설心善說 심악설心惡說을 지지한다. 이 마음은 선악이 출몰하는 중생심衆生心이다. 이 중생심이 또한 제불보리諸佛菩提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명경明鏡은 해인海印이고, 바로 제불보리이기 때문이다. 그 인유는 아래와 같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을 인용한다. “불자여, 비유하면 대해大海는 일사천하一四天下 안에 일체중생의 색신色身의 형상을 도장 찍듯이 두루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함께 말하기를 이를 대해라 한다. 제불보리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일체중생의 심념心念과 근성根性 욕락欲樂을 두루 나타내지만 나타내는 바가 없느니라. 이 때문에 함께 말하기를 제불보리라 하느니라.”(佛子 譬如大海普能印現四天下中一切衆生色身形像 是故共說以爲大海 諸佛菩提亦復如是 普現一切衆生心念根性樂欲而無所現 是故說名諸佛菩提)
신수대사의 제1구와 제2구는 불교의 구경究竟이다. 언어로는 이보다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다. 비로자나 청정법신을 백날 이야기해도, 중생신衆生身과 관련이 없다면, 범부의 분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로자나 청정법신이 범부의 중생신심衆生身心과 추호도 다름이 없다. 정안正眼이 없으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없다.
“때때로 털고 닦기를 바라노라.” 이는 또 어떠한 경계인가? 제1구와 제2구는 여래경계이고, 또한 중생의 본연경계本然境界이다. 여래와 중생이 차별이 없는 경계이다. 이 제3구는 보살을 포함한 중생경계이다. 범부라면 일어나는 망상을 알아차리는 경계이고, 보살이라면 보림경계保任境界이다. “망념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로지 알아차림이 더딘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不怕念起 唯恐覺遲) 보살은 어떻게 망념을 단속하는가?
“선남자여, 다만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이 일체 시각時刻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말고, 모든 망심妄心에서 또한 가라앉혀 없애지도 말며, 망상 경계에 머물러 명백히 알려고 힘쓰지도 말고, 명백히 알려고 함이 없는 곳에서 진실을 변별하지도 말지니라. 저 모든 중생이 이 법문을 듣고서 신해하고 수지하며 두려움을 내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청정각성을 수순하는 것이니라.”(善男子 但諸菩薩 及末世衆生 居一切時 不起妄念 於諸妄心 亦不息滅 住妄想境 不加了知 於無了知 不辨眞實 彼諸衆生 聞是法門 信解受持 不生驚畏 是則名爲 隨順覺性)
“티끌이 있게 하지 말지니라.” 고구정녕苦口丁寧하다. 망념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의 청정한 경계는 어떠한가? 추천秋天에 구름 한 점도 없다. 청정무구하다.
만일 부처 경계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그 생각을 허공처럼 맑게 하라.
망상과 모든 번뇌를 멀리 여의고,
마음이 나아가는 길에 모두 걸림이 없게 하라.
若有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取 令心所向皆無礙
“마음이 나아가는 길에 모두 걸림이 없게 하라.” “티끌이 있게 하지 말지니라.” 그 경계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2. 혜능대사의 오도송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또한 받침대가 없더라.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랴.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清淨 何處有塵埃
마음은 보리의 나무이고,
몸은 명경의 받침대니라.
명경은 본래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묻으랴.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明鏡本清淨 何處染塵埃
신수대사는 “몸은 보리의 나무이고, 마음은 명경의 받침대와 같도다.”(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라고 하고, 혜능대사는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또한 받침대가 없더라.”(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라고 하니, 이는 양사의 경계가 사뭇 달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의 의지가 어떠하냐?”
“해중일어海中一魚이니라.”
“명경역무대明鏡亦無臺의 의지는 또한 어떠하냐?”
“화원서방畵圓書方이니라.”
만일 도인의 문답이 이와 같다면 해중일어와 화원서방이 하나의 공안이 될 것이다.
“바다에 한 마리 고기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중간에 뼈도 없다. 무슨 고기이냐?”(海中一魚 無頭無尾中無骨 甚麽魚)
“화원서방畵圓書方이니라.”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또한 받침대가 없더라.”(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라고 하니, 혜능대사의 그 의지는 무엇인가? 신수대사를 즐겨 폄하하는 이들은 여기에 미묘난사微妙難思한 이치가 있는 줄 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다.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라. 간택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보면 그만이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으니, 나무 수樹자를 없애고, 명경도 또한 받침대가 없으니, 받침대 대臺자를 없애버린다. 그러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몸은 보리이고, 마음은 명경과 같도다.”(身是菩提 心如明鏡) 이것이 바로 혜능대사 오도송의 제1구와 제2구의 본의이다. 그러면 신수대사의 “몸은 보리의 나무이고, 마음은 명경의 받침대와 같도다.”(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와 차이가 있는가? 보리와 명경이 본의本義이고, 나무와 받침대는 장식裝飾이다. 장식이란 원래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양사의 의지는 전혀 다르지 않다.
다음 후구는 어떠한가? 신수대사는 “때때로 털고 닦기를 바라노니, 티끌이 있게 하지 말지니라.”(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라고 하고, 혜능대사는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랴.”(佛性常清淨 何處有塵埃)라고 하니, 그 의지가 명백히 다른 듯하다. 하나는 후수後修를 말하고, 또 하나는 무수無修를 말한다고 논하며, 또한 이를 세칭 돈오점수頓悟漸修 또는 돈오돈수頓悟頓修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논법에는 중차대한 문제가 있다. 만일 혜능대사가 노행자盧行者 신분으로 이 오도송을 읊을 때 돈오돈수했다면, 삼경에 오조스님의 금강경 강설을 들을 필요가 없고, 또한 굳이 숨어서 보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什麼物 恁麼來)
“한 물건과 같다고 말해도 바로 맞지는 않습니다.”(說似一物即不中)
“도리어 닦아서 증득할 수 있느냐?”(還可修證否)
“수증修證은 곧 없지 않습니다만, 오염污染은 이를 수 없습니다.”(修證即不無 污染即不得)
“다만 이와 같이 오염되지 않을 따름이니, 제불이 호념護念하는 곳이니라. 그대가 이미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只此不污染 諸佛之所護念 汝既如是 吾亦如是)
육조스님과 남악회양南嶽懷讓스님의 문답이 위와 같다. “한 물건과 같다고 말해도 바로 맞지는 않습니다.” 만일 말씀 설說자가 아니고, 베풀 설設자라면, “설령 한 물건이라 해도 바로 맞지는 않습니다.”(設似一物即不中)라고 해석할 것이다.
“수증修證은 곧 없지 않습니다만, 오염污染은 이를 수 없다.”(修證即不無 污染即不得) 이 즉即자는 앞은 부사이고, 뒤는 동사이다. 다그다 접근하다 가까이하다 접촉하다 이르다 붙다 등의 뜻이 있다. 관계가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부즉불리不卽不離의 즉자와 뜻이 같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랴.”라는 오도송은 “오염은 이를 수 없다.”에 상당하고, 또한 이는 돈오돈수의 경계가 아니고, “수증은 곧 없지 않다.”에 상당하기도 한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랴.” 이는 중생심 중에 불성을 말한 것이다. 불지의 원각묘심을 말한 것이 아니다. “때때로 털고 닦기를 바라노니, 티끌이 있게 하지 말지니라.” 이는 불성 중에 중생심을 말한 것이다.
돈오돈수설은 혜능대사의 본의가 아니다. 그 후손의 조작이다. 법보기 돈황본에는 돈오돈수란 말이 없다. 오직 덕이본德異本의 지성장志城章에 딱 한 차례만 나올 뿐이다. 위 회양스님의 문답도 또한 돈황본에는 없다.
또 다시 물을 수 있다. 역대조사 중에 돈오돈수한 조사가 과연 있는가? 용수보살을 제이서가라 추앙하지만, 능가경은 환희지보살이라 단정한다. 십일지보살도 오히려 미세한 망상을 완벽하게 끊지 못한다고 하는데, 어찌 초지보살이 돈오돈수할 수 있으랴. 돈오돈수하여 후수가 끊어진 경계는 오직 불지 하나뿐이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너의 계정혜戒定慧는 여러 소근인小根人에게 권하는 것이고, 나의 계정혜는 상근인上根人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으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느니라.”(能大師言 汝戒定惠 勸小根諸人 吾戒定惠 勸上根人 得悟自性 亦不立戒定惠)
지성志誠이 사뢰었다. “청컨대 대사께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 그 뜻은 어떠합니까?”(志誠言 請大師說不立 如何)
대사가 말씀하셨다. “자성은 그릇됨이 없고, 어지러움이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염념念念에 반야로 관조觀照하여 항상 법상法相을 여의는데, 무엇을 세울만한 것이 있으랴. 자성을 돈수頓修할지니라. 계정혜를 세우면 점수漸修가 있다. 이것이 계정혜를 세우지 않는 까닭이니라.”(大師言 自性無非無亂無癡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有何可立 自性頓修 立有漸 此所以不立)
지성은 예배하고, 바로 조계산을 떠나지 않았으며, 즉시 문인門人이 되고, 대사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志誠禮拜 便不離曹溪山 卽爲門人 不離大師左右)
이상은 돈황본이다. 아래는 덕이본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문단만 인용한다.
지성이 거듭 여쭈어보았다. “어떤 것이 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까?”(志誠再啟師曰 如何是不立義)
대사가 말씀하셨다. “자성은 그릇됨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으며, 어지러움도 없다. 염념에 반야로 관조하여 항상 법상을 여의고, 자유자재로 종횡하며 일체가 득의得意한데, 무엇을 세울만한 것이 있으랴. 자성을 자신이 깨닫고 돈오돈수頓悟頓修하면 또한 점차漸次가 없느니라. 그래서 일체법一切法을 세우지 않는다. 제법이 적멸한데 무슨 차제次第가 있으랴.”(師曰 自性無非無癡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所以不立一切法 諸法寂滅 有何次第)
우리는 여기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돈황본의 ‘자성돈수自性頓修’가 후대 덕이본에서 ‘자성자오自性自悟 돈오돈수頓悟頓修’로 전변되었다. 나는 돈오돈수는 혜능대사의 본의가 아닐 것이라 확신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돈오돈수는 불지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혜능대사의 둘째 오도송과 다시 비교해본다. 신수대사는 “몸은 보리의 나무이고, 마음은 명경의 받침대와 같도다.”(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라고 하고, 혜능대사는 “마음은 보리의 나무이고, 몸은 명경의 받침대니라.”(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라고 하니, 혜능대사는 제1구와 제2구의 몸통은 그대로 두고, 그 주체만 바꾸어버렸다. 이는 그 의지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이다. 굳이 하나를 취하라고 강요한다면 나는 전자를 간택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보리를 본체로 보고 명경을 묘용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다음 후구는 어떠한가?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랴.” “명경은 본래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묻으랴.” 신수대사 오도송의 후구와 비교할 혜능대사 오도송의 2개 후구가 위와 같이 서로 대동소이하다. 위 해설로 대신한다. 이에 생략한다.
3. 결어
신수대사 오도송과 대비되는 혜능대사의 오도송을 위에서는 돈황본을 의거했다. 세간의 통용본은 덕이본이다. 아래와 같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또한 받침대가 없더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엉기랴.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제2구 중에 무대無臺나 비대非臺는 그 뜻이 같다. 위 게송 중에 제3구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남악회양스님의 문답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什麼物 恁麼來)
“한 물건과 같다고 말해도 바로 맞지는 않습니다.”(說似一物即不中)
어떻든 위 게송 중에 제3구는 혜능스님의 작품이 아님이 명백하다. 법보기를 의거하여 증명을 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매우 많다. 이 때문에 비교대상으로 위 게송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오조홍인대사는 어째서 혜능대사에게 의발을 전했는가? 인연이 그러해서 전한 것이다. 오조대사가 신수대사한테는 점법을 전하고, 혜능대사에게만 돈법을 전한 것은 아니다. 측천무후 성신황제는 어째서 의발을 빼앗아 신수의 제자 처적대사에게 전했는가? 인연이 그러해서 전한 것이다. 남전스님과 조주스님의 문손은 오래지않아 단절되었지만, 백장스님과 황벽스님의 문손은 오래 흥성했다. 남전스님과 조주스님의 법력이 백장스님과 황벽스님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인연이 그러해서 그러한 것일 따름이다. 돈점과 고저로 신수대사와 혜능대사를 비교하여 그 우열을 논하지 말라. 신수대사의 법손 처적스님이나 무상스님이 점법을 전수받은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법보기의 신수대사 관련 글은 모두 소설에 가깝다. 아니 완벽한 소설이다. 취할 점이 전혀 없다. 법보기 편찬자는 신수대사를 폄하함에 완전히 도취되어 혜능대사의 면목이 곧바로 나락에 떨어짐을 보지 못했다. 오호라, 가비가통可悲可痛이로다.
2022년 11월 27일 74세 길상묘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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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호라, 가비가통可悲可痛이로다.
이로 시작하고, 또다시 이로 마쳤도다.
오호라, 가비가통可悲可痛이로다
감사합니다.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이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