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 저자 - 레이 황 역자 - 김한식 외 에서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1555년 척계광이 왜구들이 출몰하는 동남해안지역의 절강(浙江)성에 부임했을 때, 북쪽 변방지역에서는 알탄이 이끄는 몽골군이 황군의 방어력을 뚫고 침입하였다. 몽골군은 포로들에게 가져갈 수 있는 물건 일체를 지워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황군의 군사력이 허약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어이없이 손을 놓고 있을 만큼 허약하다는 사실을 조정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동남해안지역이 왜구의 출몰로 인해 절망감과 당혹감에 빠져있는 동안, 50명이나 70명 쯤 되는 왜구가 상륙하여 대담하게도 남경 주위 지방을 약탈하였다. 남경은 제 2의 수도로서 12만에 달하는 수비군이 있는 곳이었으니 이러한 약탈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정은 명의 방어체계와 후방 관리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척계광이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서 나섰다.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우선 새로운 군사를 조직해야만 했다. 그의 군사저작인 <기효신서(紀效新書)>라는 책에는 병사모집 절차, 월급 액수, 병사 배치의 기본 원칙, 직접 고안한 군기와 군호(軍號), 직접 기안한 전략과 훈련 계획, 군대 내부의 예절, 직접 규정한 군법회의의 규칙 등의 내용이 실려있다. 특히 군법회의의 규칙은 집단책임의 원칙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전투 중에 다른 병사의 임무 수행을 엄호해 주지 않는 군관이나 병사들은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전투시의 식량 조리방법까지 적어놓고 있다. 척계광이 <기효신서>에 적힌 것과 같은 세부사항들까지 관리해야 했다는 사실은 그 이전까지는 명의 군사제도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효율적인 보급 쳬계도 없었고, 군사기술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군사 책자나 전투 요령, 군사학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군사조직 구성도와 군수품 목록, 전투 요령 등을 다룬 문서가 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활용되지 않고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척계광의 저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지난 수십년 간 임했던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왜구는 항상 고지에 앉아서 아군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그들은 저녁때까지 움직이지 않다가, 아군이 지치고 나면 달려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군이 퇴각을 시작할 때, 반격을 개시해서 아군을 바짝 따라붙었다. 왜구는 항상 자신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사기가 높을 때에만 부대를 움직였다. 그들은 투구에 여러 가지 색의 색줄이나 금은으로 만든 소뿔 모양의 장식을 달았는데 그 괴이한 모양에 아군은 겁을 먹었다. 적군은 창과 검을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릴 정도로 갈고 닦았기 때문에, 아군은 싸우지 않고 여러 시간 기다리는 과정에서 그 창검의 위용에 기가 죽어 버렸다.
척계광은 군대를 조직할 때, 군호(軍戶)와 군진(軍鎭)을 외면했다. 그의 군대에 지원한 병사들은 절강성 출신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정부는 군사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기존의 세금에다가 부가세를 추가하였기에 병사들에게 지급할 자금을 공급할 수 있었다. 척계광은 그의 병사들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비나 바람이 심해서 아무알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다 해도 군복무중에는 어김없이 은 3분(分)이 지급된다. 이 은화는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므로 그 중에는 병사들 자신의 고향에서 온 돈도 있을 것이다. 고향에 가면 귀병들은 농사꾼이다. 그렇지 않은 자가 누가 있는가? 여러분은 이 세금을 내려고 논바닥에 흘렸던 땀방울을 생각하고, 편하게 쉬면서도 은화를 받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생각해야 한다.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일년 간 귀병들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면서도 일하라고 독촉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귀병들에게 바라는 것은 왜구와의 싸움에서 그들을 무찌르는 것이다. 귀병들이 왜구를 죽여서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누가 여러분을 먹여주겠는가? 왜구와의 싸움에서 도망쳐서 만에 하나 군법회의를 모면하더라도, 하늘은 어딘가에서 누구로 하여금 여러분의 목숨을 빼앗게 할 것이다..
척계광은 도덕적인 설득과 고유의 종교신앙을 적절히 조화시켜서 지원병들의 군율을 세웠다. 그는 부대 전원이 적을 피해 퇴각하면 부대장을 처형할 것이며, 퇴각하는 부대를 저지하던 부대장이 전사한 경우에는 그 부대의 부관을 처형할 것이고, 부대원들이 부대장을 엄호하지 않아서 부대장이 죽게되면 그 부대원 전원을 처형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규율이 실제로 집행된 사례는 아주 적었지만, 그런 협박은 목적을 달성하였다. 척계광의 군대와 싸워 이기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이런 효과를 달성하기 위하여 군율에 자주 의존했다. 싸움은 참담한 패배로 끝났어도 전투 중 훌륭한 행동을 한 병사에 대해서는 포상을 해야 하며, 반대로 싸움이 크게 승리를 거두었어도 전투 중에 의무를 소홀히 한 사람은 결코 묵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 중에는 1562년의 전투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의 부대는 왜구에게 빼앗긴 다리를 탈환하는 작전을 수행 중이었는데 첫번째 탈환 전에 나섰던 소대원 36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두 번째 탈환작전에 나선 소대원도 절반이 전사하였다. 그러자 나머지 병사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그 때 척계광은 공격 재개를 위해서 퇴각한 소대장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래서 결국 척계광이 이끄는 부대는 적군을 패퇴시켰으며, 그 전투는 척계광에게 만족할 만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척계광의 군율은 때때로 잔혹할 정도였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병사들의 귀를 잘라서 군율을 유지했다. 확증은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가 자신의 둘째 아들의 처형을 명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잔인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는 고집과 끊임없는 감독을 통해서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냈다. 그의 군대는 우천 시에도 쉬지 않고 여러 시간 동안 훈련 및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히 전투 중의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기를 고무해야 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병사들의 자존심과 자신감은 전투기술과 훈련을 통한 숙달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었다. 그는 왜구와 같이 창검을 잘 쓸 수 있도록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기본기 중의 기본인 나무 막대기 사용법을 숙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척계광이 채택한 군사훈련법은 군사교관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수해왔던 것이다. 유대유는 그 훈련법을 구술로 전수하는데 힘을 쏟았지만, 척계광은 그 훈련법을 모아서 군사기술 지도서를 펴냈다.
그의 전법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부대의 협동작전에 관한 것이었다. 각 보병 분대는 길이가 긴 무기와 짧은 무기르 배합하고 방어와 공격을 조화시켜서 창검을 사용했다. 왜구와 대적할 때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길이가 12척이 넘는 창이었다. 창은 위장 동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무기로 창을 사용할 때는 적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아군이 창으로 목표물을 맞추지 못했는데 적군의 사정거리 내에 남게 된다면 아군은 아무런 반격도 가할 수 없었다. 한 분대에 있는 네 명의 창수를 엄호하기 위해서 그들 전면에 네 명의 병사를 배치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오른 손에 대형 오각형 방패를 쥐고, 다른 한명은 소형 둥근 방패를 쥐었으며, 그 뒤에 선 두 명은 가지를 친 낭선이라는 대나무를 휴대했다. 창수 뒤로는 쇠스랑 모양의 당파라는 무기를 쥔 두 명의 병사를 배치했다. 이 열명 이외에 분대장과 취사병을 포함한 열두 명이 분대를 구성했다.
이렇게 완전히 균형잡힌 부대의 명칭은 '원앙진(鴛鴦陣)'이었다. 두명의 방패수는 검을 쥐었는데 그중 큰 방패를 든 오른쪽 사람은 분대의 선두에 서서 전진했고, 왼쪽에서 작은 방패를 든 사람은 표창을 던지면서 적이 있는 곳까지 포복해가서 적을 공격하기에 좋은 장소로 유인했다. 적이 유인되면, 낭선수들은 창수의 공격이 용이한 거리까지 적군을 몰아갔다. 나머지 두명의 당파수는 측면과 후위를 엄호하다가 필요할 때는 두 번째의 공격을 가했다.그들이 든 당파는 위장 동작을 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정확하게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이러한 전법은 성공할 수 없었다. 한 병사가 독단적으로 영웅적 행위를 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각 분대의 병사들에 대해서는 집단으로 포상이나 처벌을 주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창수가 엄호병사와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척계광은 거듭 강조했다. 지형이나 적군의 위치 때문에 엄호가 불가능할 때는 분대를 둘로 나누어서 나란히 전진하거나, 당파수를 뒤에 남겨두고 여덟명의 병사가 일렬 횡대로 서되, 두 명의 창수는 각각 등패수와 낭선수 사이에 섰다.
등나무 방패와 쇠스랑 모양의 당파, 대나무로 만든 낭선을 기본 무기로 사용한 것을 보더라도 척계광의 군대는 농민군의 외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후일에는 대나무로 만든 낭선 대신 사슴 뿔 모양의 금속무기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금속 낭선의 기능도 적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적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동종의 무기를 두 명의 병사가 사용하게 하는 척계광의 전술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그리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척계광은 화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교전시에 화기를 많이 사용했으며 군관 이하 병사들에게 화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황제에게도 그 사실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는 원앙진법을 폐기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 사용되었던 무기들에 비하면 원앙진법은 일 백년 이상 뒤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화기 등의 발달된 무기와 원앙진법의 부조화는 해결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였다.
척계광의 군대는 1559년 3,000명의 병사로 출발하였다. 1561년 군사의 수는 두배가 되었고, 1562년에는 10,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척계광의 군대에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보급관은 일체 없었다. 그의 군대는 여러 부현으로부터 보급품을 제공받았기 때문에, 현대화된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지속적이며 통합적인 군수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통의 군수품 조달 과정은 지방관이 부현에 대해 세금 총액을 부과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휘무장인 척계광이 견본을 만들어 보내면 지방관들은 자신의 관할 내에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견본품과 유사한 물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제조된 보급품은 극히 품질이 나빠서 제조된 조총이 터져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병사들은 두손으로 조총을 잡고 목표물을 겨냥하려 하지 않았다. 조총에 탄환을 장전할 때마다 척계광은 조총의 한계를 경험하였다. 척계광은 후일, 보병 분대마다 두 정의 조총을 지급하면서 조총수들을 각종 총검류를 휴대한 병사와 함께 배치했다. 현실적으로 조총수를 더 많이 배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게 하면 부대 전체를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척계광이 배치한 보병 분대의 구성은 농경 사회의 구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척계광은 병사를 모집할 때, 성시 출신 자원자는 받아들이지 않고, 농민 출신 자원자만 받아들였다. 그는 성시 출신자들은 교활하고 불량끼가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안정된 수입을 가진 성시의 상업 종사자들이 군대에 자원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병사의 봉급은 적었고, 승진의 가능성도 적었기 때문이었다. 성시의 건달들은 다른 일이 생길 때까지 임시적으로 숙식을 해결할 방책으로 입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척계광이 입대를 거부한 불량배들은 '용모가 준수하고 눈빛이 밝고 움직임이 가볍고 민첩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군대에는 민첩한 병사가 필요하지 않았는가? 척계광의 경험에 의하면, 민첩한 몸놀림을 가진 자들은 적과 대적하면 자기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모색하고 위험에 처하면 탈영하거나 다른 병사의 탈영을 조장하곤 했다. 하여 척계광은 '건실하고 믿음직한' 성격의 병사들을 확보하기 위해 농촌 젊은이들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의 원앙진 전술은 병사들의 개별적인 특성에 맞도록 조직되었다. 예를 들면 두 명의 낭선수는 강한 근육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지략이 뛰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우직한 농민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낭선이 무기로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척계광은 전통적인 정치 체계와 농경 중시 사상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묵묵히 군사를 창설하였다. 척계광의 군대는 세습적인 군호 출신의 병사들과 나란히 싸웠으며, 일당 노동자 수준의 봉급을 받았다. 전투가 끝나면 포상으로 특별 수당이 지급되기도 했는데, 적군의 목을 하나 베어가지고 오면 은 30냥을 지급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1559년 군사 창설 이후, 척계광 군대가 방어된 적진을 공격하고, 정면 공격을 가하면 포위망을 뚫고 근해의 섬까지 왜구를 추격하면서도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은 그의 독특한 전법 덕택이었다. 척계광은 능력에 맞지 않는 전술이나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어떤 일에 몰두하면 그것을 철저히 파고들었다. 그의 전술서는 세부적인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병사들이 행군 중에 소속 부대를 벗어나기 위해서 용변이 급하다는 핑계를 댄다든지, 적군의 공격이 있으면 어떤 병사들은 '얼굴빛이 노래지고 입안이 말라붙어서 그 동안 배웠던 모든 전법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화기 중에서 불발하는 화기의 비율이나 발사되었지만 적군을 맞추지 못한 탄환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예견하기도 했다. 그는 솔직히 지적하기를, 전투 중에 자신이 가진 기술의 5분의 1 이상을 활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자신이 가진 기술의 절반이라도 활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하무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을 남긴 것은 비관적인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엄연히 인정하면서, 적군과의 싸움이 있기 전에 보다 강도높은 훈련과 신중한 계획에 몰두했다.
전투 2, 3일 전에 척계광은 두 시간마다 전투계획서를 다시 쓰도록 지시했다. 그는 정찰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붉은 색과 검은 색 물감으로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여 군관들에게 작전지시를 했으며, 지형을 본뜬 진흙 모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부대는 그해 특정한 날의 일출시각과 일몰시각을 표시한 도표를 휴대하였고, 시각을 계산하기 위해서 740 개의 구슬이 꿰어진 줄을 사용해서 보통 사람의 한걸음에 구슬 하나씩을 헤아렸다. 이런 방식으로 척계광은 공격 개시 전에 여러 가지 가능한 각도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또한 그는 공격에 직접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총사령관으로서 척계광은 그의 병사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격부대를 지휘한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울 정도였다.
1563년 척계광은 당시 무관 중의 최고 직위라고 할 수 있는 복건 총병(總兵)으로 임명되지만, 그의 군대를 전략적 계획에 거의 관여시키지 않았다. 척계광의 군사는 전술 부대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전투시에 화기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고 논이 많은 남쪽 지역에서는 기병대를 사용한 공격도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무기를 혼합 사용하는 다양한 전술을 발견 시킬 기회가 없었다. 그는 대부분 평야에서의 전투는 피했다. 척계광이 선호하던 전술은 적군의 요새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강력한 적진을 공격할 때는 적군이 예측하지 못했던 공격로를 선택하여 재빨리 공격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척계광의 군대는 험한 지형에서의 어려운 기습 작전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부대였다. 매복이 가능한 지점에서는 항상 매복공격을 구사하였다. 그의 군사는 간소한 장비만을 지녔기 때문에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총병 척계광은 전투 개시 직후에는 일부러 손실을 감수하였다. 그는 실전 경험을 통해서 대접전 후에는 왜구의 전열이 흩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구들을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 특히 중국인 원주민들이 저항할 의지를 잃고 무기를 버리곤 했다. 그의 군대는 승전을 거듭해서 다른 관군은 몇 달이 걸려도 진압할 수 없는 왜구의 분대를 몇 시간 안에 전멸시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척계광은 이러한 작전을 구사할 때는 대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기 위하여, 적군보다 월등히 많은 병사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1563년 말의 동계 전투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그가 거느린 군사들은 수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거의 5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1564년 봄, 명군이 적의 근거지를 포위하게 되면서 왜구 소탕 작전은 양상이 달라졌다. 해안지방의 약탈이 더 이상 이득이 없다고 생각한 왜구는 퇴각하기 시작했다. 약탈을 계속하는 자들은 광동으로 몰려드는 중국인 집단이었다. 광동은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 중심지와는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명은 드디어 왜구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나머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해적들은 중국 내부의 반도로 규정하고 엄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1583년 초에 척계광은 북방 국경을 지키는 임무에서 벗어나 광동의 한가로운 직위를 담당하게 된다. 그는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2년 후 고향에서 보던 업무에서 은퇴하게 된다. 척계광은 결국 새해가 오기 전인 1588년 말에 숨을 거두고 만다. 자작시로 남긴 아래 구절은 척계광의 생애를 가장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첫댓글 아 척계광 자료네요 전에도 봤었는데 왕마귀님 이런 자료 많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일본 니혼마루에 대한 자료도 있나요??(그 배가 진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배의 크기가...)
...중국에는 왜구가 아예 한 지역에 상주하고 있었던 겁니까...?
정확히는 왜구라는 것이 일본인만 가르키는게 아닙니다 중국인도 여기에 속해있었고(어떤면에서 보면 오히려 왜구 대부분이 중국인 ㅡ.ㅡ;;;)여러 민족들이 섞여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