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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최대의 장물아비 이또 히로부미
이구열(문화재 연구가)
19세기 말엽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의 근대사를 완전히 짓밟고, 국토까지 빼앗었던 일제와 일본인들의 온갖 죄악상을 낱낱이 밝혀 기록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중의 한 영역인 역사 유적과 문화재의 약탈, 도굴, 파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불법반출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히 제한된 일본인들 자신의 기록과 역시 제한된 국내의 목격담 혹은 증언들이 그 윤곽과 만행의 일면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빙산일각의 확실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과거 일제와 일본인들에 의한 민족문화재의 수난이 어느 정도 극악한 상태였는가를 능히 파악할 수가 있다. 일제의 침략세력에 편승하여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일본인 골동상과 호리꾼('호리'는 '도굴'의 일본말) 패거리가 부산과 인천항으로 줄지어 상륙하여 고려의 왕도인 개성 일원의 왕릉을 포함한 고분들을 닥치는 대로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전후의 일이었다. 그들이 노린 것은 수백 년 전부터 일본인들이 최고의 진품으로 여겨 오던 고려자기였다.
이 20세기 초의 왜구들은 장총으로 주민들을 위협하는 한편 이 땅의 가난하고 무지한 일부 백성을 돈으로 매수하여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서 수백 수천의 고려고분을 모조리 파헤치면서 그들이 목적한 각종 고려자기와 부장품을 노다지로 약탈했는데, 이는 일제에 의한 한국문화재 수난 초기의 최대의 만행이었다. 예부터 한국에서는 어떤 무덤이라도 그것을 고의적으로 파헤치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회윤리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예부터 내려오는 가장 심한 욕 가운데 '굴총(掘 )할 놈'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것은 못된 짓이었다. 그런데 '굴총한 놈'의 정도가 아니라 '굴총하는 놈'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줄지어 밀어닥쳤으니 친인이 공노할 노릇이었다.
1894년의 칭일전쟁에 이어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침략과 지배권을 장악한 일제세력을 따라 일본에서 건너온 골동상의 앞잡이들과 현지에서 눈뜬 일본인 호리꾼, 곧 '굴총하는 왜놈'들이 개성 일대의 고분 속에서 파낸 고려자기들은 일단 서울로 모아졌다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엔 벌써 서울에서도 이 고려자기의 도굴품들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세력이 있는 일본인 수집가가 하나씩 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한 일본인의 기록은 당시 서울에서의 고려청자 수집가로 이미 소문나 있던 일본인으로 아유가이, 아가와 등의 이름을 들고 있다. 또 개성 일원에서 같은 패거리의 일본인들이 도굴해 온 고려청자들을 산같이 쌓아놓고 서울의 일본인 수집가나 일본 본토로 그것들을 중개한 골동상으로는 곤도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지금의 충무로 입구 근처에 가게를 갖고 있었다. 1905년 11월에 일제의 군사적 협박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이후 소위 보호정치의 초대 통감으로 온 한국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저희 천황과 기타 일본의 귀족사회에 선물한다고 실어내간 무려 수천점의 고려청자도 대개 곤도를 통해서 무더기로 입수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문화재 약탈 및 반출에서도 원흉의 역할을 했다. 그의 고려청자 대량 반출과 수집은 일본인들의 도굴행위를 최악의 상태로 조장시켰기 때문이다. 서울에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군림한 1906년에 서울에 건너왔던 일본인 가운데 미야케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이미 개성지방에서 일본인들이 도굴하여 가져간 고려자기들을 접촉 혹은 입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뒷날 그는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전부터 나는 옛 도자기에 깊은 감동을 느꼈었는데, 애써 한국까지 가게 된 것도 실은 한국의 옛 도자기의 친밀감에 이끌린 때문이었다." 이 미야케라는 사나이는 당시 한국에 몰려 와서 온갖 못된짓을 다하던 일본인 무리들 속에선 그래도 약식이 있는 지식층이었다. 그도 결국은 고려자기 같은 한국 도굴품들을 현지에서 헐값으로 마음껏 입수해서 즐기려고 서울을 찾아온 일본인의 한 사람이긴 했으나 당시 그의 눈에도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비쳤었던지 약 30년 후에 가서 과거의 죄스런 비화들을 비교적 풍부하게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다음의 「그때의 기억―고려고분 발굴(도굴)시대」라는 표제로 된 미야케의 회고기에서 추린 일제침략과 한국문화재 수난의 초기 기록이다.
"(1906년 현재) 서울에는 곤도라는 일본인의 골동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는 다카하시라는 사나이가 가게는 따로 없이 고려자기를 들고 다니며 우리들에게 팔곤 했다. 이 다카하시란 사나이는 본시 순사(경찰)로 오랫동안 개성 방면에 근무했었다는 관계로 개성 부근에서 도굴한 물건들을 사들이고 혹은 직접 개성에 가서 모아 가지고 오돈 했다. 곤도의 골동가게에 들어오는 고려시대의 발굴품(도굴품)들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가져 갔다. 그러자 재미를 붙인 누군가가(물론 일본인) 자꾸 시켰던지, 그후 가게에는 고려자기의 수가 날로 급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서울의 한국인 지식층 가운데 고려청자의 존재나 진가에 눈뜬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었고, 또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고려자기는 일본인들이 무덤 속에서 파내어 일본인들끼리만 서고 파는 진기한 물건이었다. 미야케는 다키하시에게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언젠가는 박힉한 한국인이 왔길래 앞에 있는 고려청자를 보였다니 '이건 대체 어디 것이냐?'고 진귀해 하는지라, '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미야케의 증언을 빌리면, 일본인들에 의한 고려자기의 도굴과 수집이 절정에 이른 시기는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던 1909년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토 통감이 서울에서 고려자기를 어떤 식으로 얼마나 휩쓸어 가져 갔는지에 대해서도 미야케는 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자기를 모으는 사람(일본인)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감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토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괴장히 수집한 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 무렵 닛타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이토 통감의 연회석에 대기하고 있다가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던 자인데, 그러다가 여관을 개업했었다.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이 여관에 나타나 닛타를 시켜 '얼마든지라도 좋으니 고려자기를 가져오라. 몸땅 사자' 하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서 저기까지 30점, 50점' 하는 식으로 선물하기가 일쑤였다. 언젠가는 곤도의 가게에 있는 고려자기를 몽땅 사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서울 장안에 고려자기의 매품이 동이 난 적도 있었다." ]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는 데 성공한 일제침략의 괴수이자, 개성 일원에서의 고려고분 파괴와 고려자기 도굴을 크게 조장시킨 원흉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 임진왜란 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졸개들을 시켜 이 땅에서 저질렀던 대대적인 문화재 약탈과 유적 파괴의 범죄 행위를 또다시 반복한 불법침입자의 두목이었다. 이토가 통감 재임 2∼3년 동안에 그를 믿고 무법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 호리꾼들의 도굴품인 고려청자를 수천 점 이상이나 무더기로 사들이게 되자 도굴사태는 절정기로 치닫게 되고 서울과 본토의 일본인들 사이에 고려자기 장사와 수집이 큰 유행을 이루게 되었다.
미야케는 자신도 참가했던 당시의 상황을 앞의 회고기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이토 통감이 공동가게의 고려자기를 몽땅 사들이는 일이 있은 후), 그 경기에 자극되었는지 바야흐로 고려청자에 열광하는 시대가 출현하였고, 한때 그것(도굴과 장사)으로 생활하는 자가 수천 명이란 얘기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도굴을 당한 개성, 강화도, 해주 방면의 대소(大小)고분의 수는 놀라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난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한역(征韓役:임진왜란) 때에도 고려고분 몇 개를 발굴(도굴)하여, 오늘날 우리나라(일본)에 전해져 있는 '운학문청자' 같은 명품은 그때에 가져온 것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선조에 대한 공경심이 깊고 특히 분묘는 소중히 여기는 습관이 있어 꿈에라도 그것을 발굴하여 예전 일을 알려고 한다든지 혹은 옛 기물(器物)을 파내어 그것을 즐기려고 한 사람은 전적으로 없었다. 이 일(고려자기 도굴)은 춘추의 필법으로 말하면 일본인이 발굴(도굴)한 것이다."
일본인 조차도 이 정도로 쓰고 있으니 그 실제의 양상이 어떠했을까. 미야케는 "그러나 하수인은 언제나 조선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얼마간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난하고 무지했던 그들은 총을 가진 해적 같은 일본인의 위협과 다소의 품삯에 매수되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로부터 가장 꺼리고 몹쓸 짓으로 알고 있던 '굴총'짓을 시켜서 얻은 출토품으로 뒤에 가서 한껏 돈을 번 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청자를 포함한 고려고분의 매장 문화재들은 당시 일본인들에겐 그것은 특히 눈을 까뒤집고 덤빌만한 노다지 금광 같은 치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개성 일원의 지리와 정보에 익숙해지면서, 그리고 서울의 일본인 골동품상과 수집가를 통한 판로가 갈수록 확대·보장되면서 만행의 도굴장소를 개성에서 강화도와 해주 쪽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모든 지역의 고려고분이 파헤쳐졌다.
일본인 호리꾼의 수효는 날로 늘어갔고, 한국인 하수인 없이 직접 도굴을 감행하는 자도 많아졌다. 미야케도 그 사실을 마지못해 시인하고 있다. "고려자기 도굴이 최고조에 달한 때엔 일본인도 직접 참가했는지 모드지만, 일본인은 대체로 뒤에서 앉아 출토품을 사들여서는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호사가들 사이로 들고 다니며 이익을 취했다."
미야케 말고 또 다른 일본인의 기록을 인용해 보자. 1930년대에 평양박물관장을 지낸 고이즈미의 증언이다. "(조선의 고분들이) 오늘과 같은 참상을 겪게 된 것은 병합(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일본인이 조선의 시골까지 들어가게 된 후의 일이며, 일확천금을 꿈꾸며 건너온 자들(일본인)이 황금의 사발이 묻혀 있다든지 정월 초하룻날에는 금닭〔金鷄〕이 무덤 속에서 운다든지 하는 전설이 있는 고분을 금광이라도 파는 심산으로 파고 다녔다. 곳에 따라서는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일본인)까지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자가 있었다니 딱한 일이었다."(『조선』6월호, 1932년, 조선 총독부 간행)
일본인 무법자들이 고려고분에서 약탈해 온 고려자기의 대대적인 장물아비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한편으로 친일매국의 앞잡이였던 이완용(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창덕궁의 고종황제를 정신적으로 위로해 드린다고 동물원과 함께 박물관을 창설하게 함으로써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한 고려자기와 기타 고분유물들을 고가로 팔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국권을 상실하는 을사보호조약을 앞장서서 이토와 체결했던 매국노 이완용은 그때 이미 허수아비였고, 미술품과 유물 수집을 실제로 맡은 자는 이토의 지시를 받은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이었다. 결국 일제 통감부 시절에 한반도에 상륙해 있던 일본인 호리꾼과 골동상들은 한국땅에서 빈손으로 갈취하고 도굴한 고려자기들을 통감부 관리들을 통해 한국 왕실에 고가로 팔아넣음으로써 이중의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일본인의 한 증언기록을 빌리면 한 개에 보통 5원, 비싸야 10원에서 30원 정도가 그 시절의 고려자기 값이었는데 당시 화제가 되었던 최고 기록은 창덕궁박물관에서 사들인 '청자진사포도동자문표형병'으로 정확히 950원이 지불되었다. 그런 식으로 벼락부자가 된 일본인이 당시 서울에 얼마나 많았을까 능히 상상된다.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것을 불법으로 파 온 그 자들에게 그런 식의 거액의 돈을 왕실에서 지불하도록 한 이중의 역적이 또한 당시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하고 있던 이완용 총리대신이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창덕궁 이왕가박물관(해방 후엔 덕수궁 미술관으로 불리다가 1969년 5월에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됨) 컬렛션의 고려자기 6,562점의 출토지를 보면 99%가 개성 부근으로 기록돠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앞서와 같은 경위로 일본인들로부터 사들인 도굴품들이었다. 이완용이 어지러운 국운에 처한 고종황제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 박물관을 꾸미게 되었다지만, 거기에 어떤 물건들이 수집된다는 것을 임금으로선 알 리도 없었고 또 그 시기에 그런 일을 원했을 리도 없다.
그것이 이완용이 이토 통감의 문화적 음모에 맞장구친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고종황제에게 생색을 내려고 한 자는 다음의 일화에서 확인되듯이 이토였기 때문이다. 본래 조각가로 1913년에 이 땅에 건너와서 한국의 옛 드자기 문화를 연구했던 일본인 아사가와가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쓰에게 들었다는 확실한 기록이다. "어느날 이태왕(고종황제) 전하께서 처음으로 구경을 하시게 되었을 때,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들어진 거요?' 하고 묻자, 이토 통감이 '이것은 이 나라 고려시대의 것입니다' 하고 설명을 하니, 전하께서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거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토는 밀을 못하고 침묵해 버렸다. 알다시피 출토품(굴총해서 꺼낸 물건)이라는 설명은 그 경우 할 수가 없었으니까."(「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1945년)
결국, 고종황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궁중에도 전래품이라곤 없던 고려청자를 처음 보고, "저런 것은 어디서 가져왔느냐?"고 의아해 했을 때 이토는 아마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는 결국 대답을 못하고 쩔쩔맸다. 만일 그때에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보는 그 신기하게 아름다운 고려청자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왕릉을 포함한 귀인의 무덤들이 모두 굴총되어 나온 물건들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1년 후에 가서 영영 나라를 빼앗기게 될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비애와 망국의 한을 통감했으리라.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의 한국 혼 말살 및 국가병합 음모를 확고히 굳히는 동안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도굴한 수천 점 이상의 고려자기를 무더기로 수집했었다. 그중에서 그는 일품(逸品) 103점을 골라 저희 메이지천황에게 진상했고. 그 외에도 당시 일본의 권력사회와 귀족들에게 한 무더기씩 보내어 한국에서의 최대의 선물로 삼았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다른 숱한 경로를 통한 도굴품의 대량 반출과 병행됨으로써 일본 본토의 상류층과 돈 있는 수집가들에게 고려자기 수집의 대유행을 일으켰다.
그때의 정황을 말해주는 구체적인 사례의 하나로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가을에 도쿄에서 열렸던 대대적인 고려자기 경매전시를 들 수 있다. 여기 얇은 가죽과 비단으로 장정된 고급 카달로그가 하나 있다.
표제는 '고려소'(高麗燒), 곧 고려자기란 뜻이다. 앞의 경매전 때의 출판물인데, 서문에 이런 말이 씌어 있다. "이 고려자기는 옛날에 외국으로 건너간 것을 제외하면 한국 안에서는 한 1점도 지상에서 그것을 볼 수가 없었고, 모두 고분에서 파내고 있다."
"고려자기의 미술상의 가치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일본)의 호사가들 사이에 애완돼 왔고 또 귀중시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송도(개성)를 중심으로 구워진 본고장의 참으로 정교한 물건은 아직도 세간(일본 사회)에 널리 소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번 고분 속에서 나온 고려청자와 백자들을 여기서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물건들이 '나이치'(內地:일본 본토)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년 이래(이 점은 주목할 만한 증언이다)의 일이다." "다음에 고려자기의 출토지를 보면, 특히 정교한 것들은 송도를 중심으로 하여 100여 리 안팎의 분묘에서 나오고 있고, 강화도의 고려 귀인 묘에서도 나오고 있다. 해주 등지에서도 때때로 나온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나오는 것들은 고려자기임에는 틀림없으나 질이 좀 다르다." 이 서문의 필자는 일찍이 한국에 건너와서 고려자기 도굴을 진두 지휘한 자였거나 아니면 뒤에서 적극적으로 조종했던 악질적인 장물아비였던 듯, 당시의 실태와 정보에 너무나 환하다. 거기에 죄의식이라고는 털긑만큼도 비치지 않고 뻔뻔스럽게도 이런 말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지금은 우리 일본인들이 (한국의) 어디라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만일 있는 물건(고분속의 고려자기)이라면 반드시 출토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필자는 또 저들이 고려자기를 도굴하면서 하수인으로 부려먹은 몇몇 한국인의 행동을 고의적으로 과장시키면서 정작 저희 일본인들의 죄과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의 무덤들은 모두 오랜 세월의 풍우 속에 꺼져버려 우리들(일본인) 눈에는 분별할 수가 없으나 한국인은 막대기(쇠꼬챙이)로 그것들을 찔러보고 그 속의 음향으로 감정을 하고 파내는 것이다." 이외에도 너무나 뻔뻔스런 말이 많으나 생략한다. 도판들을 살펴보면 5명의 일본 귀족과 도쿄·오사카 등지에서 21명의 수장가가 출품했던 약 120점의 각종 고려자기가 확인되는데, 개중엔 현재 국내의 국보 혹은 보물급에 들어갈 일품들도 수두룩하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당시 서울에 있던 수집가 아유가이와 골동상 곤도를 비롯하여 시라이시·아카보시란 이름의 일본인들이 출품하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의 고분 도굴과 고려자기 약탈행위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을 물러난 지 몇 달 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한국침략에 항거하는 안중근 의사에게 통렬히 사살되는 사건 같은 한국인의 분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2대 통감으로 온 소네아라스케가 한국인들의 눈초리를 두려워하여 다소 신경을 썼던 모양이지만 그도 엄중한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굴욕의 한일합방 후에도 일제 총독부는 일본인의 도굴행위를 한동안 묵인해주었다.
미야케는 「그때의 기억」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발굴(도굴)이 성해짐에 따라 조선인들의 반감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러나 금지시키려고 했을 무렵엔 벌써 수천 명이라는 사람(일본인)이 그 짓으로 생업을 하고 있어 별안간 금지한다는 것은 그들의 사활 문제라서 총독부에서도 정책상 서서히 금지하는 방침을 세우고 당분간은 묵인하는 상태였다." 결국 일본인 도굴꾼들은 통감부와 총독부로부터 그들의 식민지 정착과 생활기반이 확고해질 때까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곳곳에서 분노한 한국인에게 혼나는 일도 많았다. 가령 1916년에 강화도의 고려고분을 조사하러 갔던 이마니시 류는 뒤에 이런 말을 기록하고 있다. "수년 전에 한 일본인이 도굴하여 유물의 일부를 꺼냈는데, 폭도(분노한 한국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들에게 습격을 받고 도망 쳤다고도 하고 혹은 무사히 도굴품을 갖고 갔다는 설도 있었다." 이마니시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자고로 조선인은 그 조상의 묘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는데 악질 일본인들이 남의 나라의 조상의 무덤을 그토록 비정하게 도굴하였다." 총독부 초기 이후 조선의 고적조사와 각종 고분 발굴에 참가했던 우메하라 스에지도 과거의 죄스런 사실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들의 학술조사는) 고물 수집가(일본인 도굴꾼과 장물아비)들에 의한 유적의 파괴를 조장시킨 좋지 못한 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체로 조선에서의 유적의 파괴, 특히 고분 도굴은 러일전쟁 후 고려청자가 부장되었던 개성지역으로부터 시작되어 대정(大正, 일본 연호, 한일합방 후) 연간에 들어와 경북 선산 부근을 주로 하는 낙동강 유역의 유적이 도굴되었고, 1923∼1937년에 이런 증언기록을 남기고 있다. "1911∼1912년께에는 고려자기의 수집열이 최고조에 이르러 당시 그것들의 도굴과 판매로 생활하는 자가 수백 수천 명에 달했었다고 하며, 그 후 금령(禁令)이 엄해져 한때 발굴(도굴)은 뜸해진 듯했으나 오늘날까지 고려고분의 도굴은 끊인 날이 없고, 그동안 출토시킨 고려 고도기(古陶器)의 수는 몇 십 몇 백만 점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고야마후지오, 『陶器講座』 권22의 「고려의 고도기」)
여기서 고야마가 말하는 몇 십만 혹은 몇 백만 점이란 그만큼 엄청난 숫자였다는 뜻이겠으나 어쨌든 그 대다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학자 이홍직(李弘稙) 교수는 현재 일본의 민간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자기만 약 2만 점으로 칠 때, 배 혹은 그 이상을 지금도 일본인들이 갖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을 거라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 한국 문화재 수난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