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으면 평안해진다고들 한다.
역설적으로 평안이 없으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가르침도 공공연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서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는 많은 사람들의 간증이 있기에
일견 그러한 가르침이 사실인듯도 싶다.
그리고 성경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으므로 이론과 실제가 딱 들어맞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평안'이라는 예수의 말씀에 있다.
아울러 '세상'도 평안을 준다는 것이 본문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가 소유한 평안이 '세상의 평안'인지 '예수의 평안'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되고 나아가서는 착각과 미혹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성경 말씀이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세상의 평안'과 '예수의 평안'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 질문을 유심히 보면, 놀라운 것은 '평안'이라는 말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다만 그 평안이 누구로부터 온 것이냐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도 예수도 똑같이 제공할 수 있는 '평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먼저 알 필요가 있겠다.
평안(에이레네)이란 무엇인가.
「에이로」 즉 연합하다(to join)는 뜻으로부터 유래된
「eijrhvnh(에이레네)」는 따라서 '하나가 됨, 고요, 안식,
다시 하나가 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James Strong의 사전참고).
즉, '평안(eijrhvnh)'이라는 것은 분리된 상태거나
두 개 이상의 별개의 존재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평안(평화)의 반대말인 전쟁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전쟁이란 적대하는 두개 이상의 나라나 단체 혹은 개인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상대적으로 평안은 어느 한쪽으로 통일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평안하다고 할 수 있으려면 우리 내부에
다투는 두개의 존재(즉 갈등구조)가 있을 때는 불가능하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투항하든지 쫓겨나든지 해야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가는'(롬 7:22-23)
상황에서는 평안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의 시작은 내 속에 두 존재가 있음을 알아채는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그 이전 상태는 어떤 것인가. 전기했듯이 평안이란
'하나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자기 속에서 두 존재가 갈등구조를
그리고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할 때에는 그쪽도 '평안'이란 말이다.
마치 대낮에는 한 점 어두움이 없어 평안인 것처럼 칠흑같은 한밤중도
한 점 빛이 없어도 평안인 것과 같다. 갈등 즉 싸움이 일어나 평안이
깨지는 시점은 칠흑의 어두움에 빛이 비추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때로부터 두 '평안'의 다툼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곧
해산의 아픔(요 16:21)이요, 이 고통을 지난 기쁨이 곧 새로운 평안,
어두운 곳이 하나도 없는 '빛 안에서의 평안(눅 11:36)'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세상의 평안'은 세상과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의 평안'은 예수와의 연합(엡 2:14-17)을 의미한다.
이렇게 써 놓고보니까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민망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란
모두 세상과 연합된 과거가 있었고 이제는 예수와 연합되어
'그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신자들의 대부분이 과연 '세상'과 '예수'라는
두 상극의 갈등구조(롬 7장)를 몸으로 살고 예수에게 연합되었느냐에 있다.
그 갈등과 고통의 심연없이(시간적인 문제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감히 단언하건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세상과 연합하여(우리 인간은
누구나 세상과 하나되어 살던 존재들이다, 엡 2:1-3) 평안한 삶을
누리던 사람이 예수를 만나게 되면 그 가치체계의 다름 때문에
심각한 근심과 갈등을 했던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예수 믿으면 평안해 진다'든지
'예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위로해 준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한 분이
아니다'라는 철두철미한 신념이다.
그 신념의 근거가 무엇인지 필자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성경역사를 통하여 예수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과연 그랬는가.
그렇지 못했음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보자.
재물이라는 세상과 하나되어 평안히 살던 부자 청년이
그래도 영생에 관심이 있어서 예수께 질문한다(마 19:16-22).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이 평안히 가서 예수의 말씀대로
재산을 처분했던가.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그 후에 이 청년이 과연 재산을 처분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예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 '근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은 근심도 없이 잘도 신앙생활 하는가.
그 이유는 오늘날 교회의 멧시지가 '네 소유를 다 팔아'라는
예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고 '십일조만 바치면'이라는
지어낸 말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안이다.
누구의 평안인가. 바로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부자 청년은 돈만 알고 예수를 못 믿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좀 나은 면이 있었던가.
계속되는 마태복음 19장 23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성경말씀이 선포될 때에 심히 놀라는 '제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경외스러운 놀람이 아니라 이런 어처구니없는
놀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런즉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제자들의 말에 동의한 예수의 말씀(마 19:26)을 듣고도 근심이 되지 않고
'평안' 하셨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평안하게 하는 위로제 정도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서 꿈꾸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를 믿는 길은 세상 사람에게 미움받고 핍박받는 길이요(마 5:11)
좁고 협착한 길이다(마 7:14).
그래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은 길이요(눅 13:24)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는 길이다(마 19:29).
뿐만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며
나아가 자기 목숨을 잃는 길이다(마 10:34-39).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의 길을 가는(히 11:13)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목이 아프게 외치고 있는데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요
그러므로써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본이 된다는,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
(벧후 2:3)에 잘도 속아 넘어가고 있으니 딱하고도 한심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망대(望臺)를 세우기 전에 미리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해 보라고 가르친다(눅 14:28). 그리고 비용 예산이
맞지 않거든 아예 기초공사도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길은 '나의 목숨'이라는 비용이 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냥 '믿으면'이 아니란 말이다.
내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괜히 공사를 시작만하고 이루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 된다(고전 15:19)는 말이다.
그러므로 좁고 협착한 길이다.
자기 목숨을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사는 삶이 주는 평안이 있는데
이것이 곧 '세상이 주는 평안'이요,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 얻는 평안이 있는데
이것이 곧 '예수의 평안'이다.
둘 다 평안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전자는
자기 목숨 이외의 것이 보이지 않음으로 평안이요
후자는 자기 목숨이 없어지고(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음, 갈 2:20)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주어지는 평안이다.
근심이 있고 갈등이 있다는 얘기는 자기 목숨과
그리스도의 생명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말이다.
몸으로는 자기 목숨을 위하여 살면서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 -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아니다.
즉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는 저 '로마'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던 '유대'백성들이 곧 '세상(눅 12:30)'이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가지고(e[cw,에코)
지키는(threvw,테레오) 것(요 14:21)은 무엇인지 모르는,
그래서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하는 대상이 곧 세상이라는 말이다(요14:17).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목숨을 위하여'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성경적 '세상사람'이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의 평안을 선물하는데
이것이 곧 '기도함으로써' 누리는 평안이요,
'구제함으로써' 가지는 평안이다.
그래서 어렵사리 '큰 일' 한 건 하고 나면 몸은 피곤해도
소위 영혼은 하나님 앞에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평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떠한 일을 '자기가 함으로써' 주어지는 것들이요
자기 신앙의 수준(?)에 따라 조령모개(朝令暮改)로 변하는 평안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살지 못하면 죄송스럽고,
그래서 또 눈물 흘리며 회개 기도하고 나면 속이 후련하고
그러면 또 그 용서에 감격해서 평안하고, 마치 냄비에 죽 끓듯,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것이 오늘날의 신앙 행태이다.
신앙의 주체가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체의 옮김을 뜻한다.
즉 나의 평안이 아니라 '예수의 평안'을 가지게 된다는 말인데,
따라서 주체가 '예수'이므로 '나'의 행위나 감정적 변화에
전혀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내가 기도를 하건 아니하건, 예배를 드리건 안드리건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평안한 사람은 아직 예수의 평안이 무엇인지 모르고
세상이 주는 평안을 예수의 그것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므로 평안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누리는 평안이
곧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의 평안'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누리는 평안이요
후자는 그냥 내 속에 존재하는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의 '끼치노니'라는 말은 「ajfivhmi(앞히에미)」로서
'허락하다, 곁에 두다' 는 말이다.
즉 너희를 평안하게 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에게 '평안'을 허락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나의 평안'인데 26절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시요,
다른 보혜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1:12)이면서
평안(엡 2:14)의 아들(눅 10:6)이다.
세상이 주는 평안도 맛보고 예수께서 주는 평안도 맛을 본
사람만이 세상의 평안을 알 수 있다.
세상이 주는 평안으로 잘 먹고 잘 살던 경험이 과거지사가 아닌 사람은
현재의 삶이 그것이라는 반증이다(물론 예수 '믿고'나서부터이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안이 크면 클수록
힘써 하나님의 평안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므로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 5:3)
모쪼록 하나님의 평안을 선물로 받아서 세상의 평안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소개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란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글: 이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