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34〉 전주최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2-07-24 18:17:51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인조반정 공신 최명길
영의정 6번 한 최석정
조선시대 명문가 명성
전주최씨(全州崔氏)에는 4개 계통이 있는데,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사도공파(司徒公派),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가 그것이다.
이들의 상계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적인 고증이 없어 통일된 시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일부에서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상계에서 갈라진 계통(최군옥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과 최치원 이후에서 갈라진 계통(최순작과 최균을 시조로하는 문열공파와 사도공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또다른 계통(최아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에서는 중국 전래설이 거론되는 형편이다. 따라서 전주최씨는 하나의 본관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같은 시조의 자손으로 여기기엔 무리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주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 109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최균의 자손인 사도공파의 인물들이 많다.
전주최씨를 명문가 반열로 일으킨 사람은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최유경(崔有慶)을 들 수 있다. 상신·대제학·청백리가 모두 그의 자손에서 나왔다. 대표적 인물은 최명길(崔鳴吉)이 있다.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숙종 때 영의정), 최석항(崔錫恒·경종 때 좌의정) 형제도 정승을 지냈다. 특히 최석정은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또 최군옥의 후손인 문충공파에서는 고려 말기에 ‘두문동(杜門洞 72현’에 들어 있는 최양(崔瀁)이 있다.
그 외에도 고려 말기에 좌참찬을 지낸 최부(崔府), 태종 때의 예문관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 선조 때의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최철견(崔鐵堅)과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최기필(崔琦弼)·최균(崔均)·최경행(崔敬行) 등도 있다.
전주최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총 12만2147가구에 39만254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최씨의 18%를 차지하는 숫자다.
또한 전주최씨에서 분적된 본관들도 다수 존재한다.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강릉최씨, 최호를 시조로 하는 곡강최씨, 최원을 시조로 하는 양천최씨와 양천최씨에서 갈라진 금천최씨, 최한을 시조로 하는 영천최씨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완산최씨, 진산최씨, 초계최씨, 황주최씨, 흥해최씨 등도 전주최씨에서 분적한 본관들이라고 알려진다.
전주최씨 4계통의 연혁과 인물
문열공파
전주최씨 문열공파의 시조인 최순작은 조선 초기(태종)에 청백리로 녹선된 평도공 최유경의 7세조이다. 그는 고려 정종 때 벼슬에 나가고 고려 문종 때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그는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병부상서 겸 신호위 상장군이 되었으며, 완주개국백(完州開國伯)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로써 그의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행적을 기록한 문열공 사적에는 “최순작은 완산 사람으로 신라시대 3최의 하나이면서 고려 초기에 평장사를 지낸 완산백 최언위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경주최씨였던 최언위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최언위로부터 최순작까지의 계보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의 아들 최숭은 이부시랑에, 최공은 개성소윤에 올랐다.
문열공파는 다시 안렴사공파, 중랑장공파, 별장공파, 좌윤공파, 판윤공파, 양도공파, 경절공파, 검추공파, 감무공파 등으로 갈라진다. 그 후손으로는 고려 의종과 문종 때 공부상서와 수문전태학 겸 대장군을 역임한 최남부(崔南敷), 청백리 최유경과 그의 조부인 선부전서를 지낸 최득평이며, 아버지는 감찰대부를 지낸 문정공 최재(崔宰)가 있다.
특히 최유경의 집안은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크게 흥해 그의 아들들이 모두 큰 벼슬을 지냈다. 한성부판윤을 지낸 최사위(崔士威), 청백리에 녹선되고 판돈령부사를 지낸 최사의(崔士儀), 사헌부 지평을 지낸 최사규, 우찬성을 지낸 최사강(崔士康), 첨중추원사를 지낸 최사용(崔士庸), 그리고 막내인 최사흥이 있다.
넷째인 최사강은 3남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좌참찬을 지낸 최승녕이고, 차남은 군수를 지낸 최승정, 그리고 막내는 첨정을 지낸 최승종이다. 그의 딸들도 태종의 서자인 성녕군 이인과 혼인하고,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 이유와 혼인하였다. 또 장남 최승녕의 딸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과 혼인하였고, 증손녀가 예종의 후궁이었던 공빈최씨이다.
그리고 최유경·최사강의 직계 후손들은 인조반정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청나라와 화해할 것을 주장하던 주화론의 대표주자인 문충공 최명길(영의정)이 최사강의 7대손이다. 또한 최명길의 손자로는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과 좌의정을 지낸 최석항도 있다.
사도공파
전주최씨 사도공파는 최균을 시조로 하고 있다. 사도공 최균은 고려 중기의 충신으로 완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의종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제수되었으며, 명종 때에는 예부낭중 겸 태자문학을 역임했다. 하지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다가 패하여 살해되었다. 그래서 훗날 예부상서에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최균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의 지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최치원의 몇 대손인지 그의 상계가 어떤지에 대해선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전주최씨 가운데에서 최균의 후손인 사도공파가 가장 숫자가 많고 인물도 많이 배출했다. 시조 최균의 아들이 최보순(崔甫淳)이다. 그는 참지정사와 형부상서를 지내고 수태사 판이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최보연(崔甫延)은 형부상서를 지냈다.
최균의 손자인 최비일(崔毗一)은 대제학과 첨의찬성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최성지(崔誠之)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을 거쳐 첨의찬성사에 이르고 광양군에 봉해졌다. 그는 충선왕을 도와 개혁정치를 주도했는데, 조정의 기강 확립·조세 공평·농잠업 장려·동성결혼 금지와 귀족횡포를 엄단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그가 원나라에서 배워온 역학(易學)과 수학(數學)은 고려시대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와 최문도(崔文度)는 전법판서와 첨의참리를 지냈으며, 최용의 아들 최부(崔府)는 세종 때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다녀온 후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최현(崔晛)은 병조참지와 대사성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대사헌에 증직된 최명룡(崔命龍)은 역학과 음양은 물론 불교경전에도 정통해서 전주의 인산서원과 부안의 옹정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성공파
전주최씨 문성공파의 시조는 문성공 최아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하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선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의 아들들이 크게 이름을 떨쳤다. 큰아들 최용생(崔龍生)은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내 안렴사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아들 최용각(崔龍角)은 검교대호군을 지내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의 시조가 되었고, 셋째아들 최용갑(崔龍甲)은 원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여 판사공파(判事公)의 시조가 되었다. 또 막내인 최용봉은 중랑장을 지냈다.
최아를 시조로 한 것은 조선후기 감찰공 최세영(監察公 崔世榮)이 전주최씨 문성공계 족보를 발간하면서 고증을 통해 시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최씨 각 계파(系派)의 역사를 전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성공의 선조는 최균이라고 하기도 하고 최순작이라고 하기도 하며…”라고 적어놓았다. 또 문성공 제단 비문에는 “전주최씨는 문성공을 시조로 하니 공의 선조는 전해오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문성공파에서는 문성공의 막내아들인 중랑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공민왕 때 공조참의를 역임했던 월당공 최담(月塘公 崔?)이 유명하다. 그는 세상이 혼탁함을 비관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냈으나 아들 4형제가 모두 큰 벼슬을 하였다. 첫째인 최광지(崔匡之)는 조선 태종 때 집현전 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우 최직지(崔直之)는 나주판관과 순창도사를, 셋째 최득지(崔得之)는 사헌부 감찰을, 막내 최덕지(崔德之)는 남원부사를 역임했다.
그 외에도 ‘동국통감’ 편찬에 관여했던 최명손, 세조 때 호조참판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최한경, 충청감사와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룡, 청백리에 녹선된 최여림 등이 유명하다. 또 최운철의 아들 최균과 최강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최기필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또 영조 때 최광벽은 돈령부 도정과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문충공파
전주최씨 문충공파의 시조는 최군옥이다. 문충공 최군옥은 동주최씨(철원최씨)의 시조 최준옹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로 동주최씨는 경주최씨의 시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갈라진 본관이다. 최군옥은 고려 선종 때 삼중대광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고 보국승록대부로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맏아들 최송년(崔松年)은 의종 때 밀직사사를 역임했고, 둘째 최구년(崔龜年)은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문하찬성을 역임한 후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문숙공 최유의 아들인 최선능(崔善能)은 삼중대광 문하찬성사에 올라 상산부원군에 봉작되었고, 그의 둘째아들인 최칠석(崔七夕)은 정남대장군 겸 원수가 되어 칠월칠석에 대마도정벌을 함으로써 칠석(七夕)이라는 이름을 사명받았다. 조선개국 후에도 경기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문충공파에서는 정몽주의 생질로 우왕 때 이부상서와 대제학을 역임했던 만육당 최양(崔瀁)이 특히 유명하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전주 봉강리에 은거하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태조 이성계는 물론 태종이 친구의 예로 대하며 전답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고, 끝까지 절개를 지켜 ‘최고집’이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시호는 충익공이며 두문 72현록에 기재되었다.
그 후손으로는 인조 때 이괄의 난을 평정한 최응일이 진무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아우 최응수는 결성군에 봉해진 후 선천부사를 역임했다. 문충공계는 최여징의 부사공파, 최진강의 목사공파, 최여녕의 군수공파, 최여정의 도사공파, 최여관의 현감공파, 최여달의 판서공파, 최만득의 교위공파 등이 있다.
전주최씨의 근현대 인물
전주최씨에서 현대의 정관계 인물 중에는 최재유 전 보사부장관, 최광수 전 외무부장관과 최동규 전 산자부장관이 있으며, 전·현직 국회의원으로 최순주 전 국회부의장, 최병국 최갑환 최석림 최경식 최치환 등이 있다. 또 재계와 학계에서는 최주호(우성산업회장), 최정호(연세대 교수) 등이 있고, 연예계에서는 최진실과 최재성이 전주최씨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