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꿈'- 마술피리에 깨어나는 아니마의 숲
꿈과 현실의 결합…'밤의 여왕'의 시크릿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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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루소가 생의 마지막 시점에 그린 '꿈'(1910년).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
- 현실의 소파에 누워있는 여인
- 달빛에 흠뻑 젖은 미세한 초록의 촉감
- 습지 연꽃과 야수가
- 두런대며 깨는 듯한 동화 같은 밀림…
- 마술피리를 불고 뱀을 다루는 검은 여인
- 루소의 '그림자'인가
- 잃어버린 무의식인가
- 아마 사랑하는 이를 모두 떠나보낸
- 외로운 화가의 마지막 열정
- 마지막 꿈이었으리라
아마 늙은 화가의 마지막 꿈이었으리라.
아내도 떠나고, 마지막 남은 혈육으로 그의 노년을 보살피던 딸마저 저 세계로 떠난 뒤 이 세계의 끝,
그 쓸쓸한 소파에서 잠시 꾼 늙은 화가의 마지막 꿈이었으리라.
화가의 꿈속의 여인, 다시 그 여인의 꿈속으로 들어서면 수런거리며 깨어나는 달밤의 세계. 꿈과 꿈속의 꿈,
현실과 환상을 가로지르는 조용한 마술피리의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한다.
마술피리의 선율을 타고 달빛에 젖어 눈뜨는 녹색의 세계, 여기가 바로 외로운 예술 혼,
앙리 루소(1844-1910)의 숲이다.
쥐뿔도 없으면서 권위적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천성이 단순했던 루소는 25년간 세관 하급관리로 근무하다가 49세에 오직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표를 낸다.
그는 파리의 뒷골목, 창문이 하나 밖에 없는 아틀리에에서 편지 대필과 바이올린 교습으로 푼돈을 벌어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무척이나 궁핍한 삶이었으리라.
생전에 그의 그림 값은 100프랑을 넘은 적이 없다.
그 사이 아내와 자식들이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갔다.
그리고 빈 화실과 한 편의 꿈만 남았다.
■ 달과 초록의 숲과 연꽃
'꿈'(1910)은 루소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그림에 대해 루소는 '야드비가'라는 한 여인이 소파에 누워 꾼 꿈의 풍경을 그렸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야드비가가 누구인지는 화가 자신 외에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화가 자신도 모를지 모른다,
그러나 루소는 그녀의 꿈속으로 들어간다.
현실의 소파와 꿈의 이국 풍경(밀림)이 한 화면에 병치돼, 곧잘 이질적인 것을 병치해 충격 주기를 즐기는
초현실주의 기법을 연상케 한다.
물론, 루소는 그 말 많고 요란한 초현실주의자들보다 앞 세대임은 말할 것도 없다.
꿈의 몽상은 초현실주의의 이론보다 앞선다.
야드비가가 소파에서 꿈꾼 이 숲은 풍요로운 아니마(anima·여성성)의 공간이다.
미묘하게 변하는 초록의 뉘앙스(누군가는 여기에 54개의 다른 녹색을 찾아내기도 했다 한다)로 가득한 숲은
여성성의 근원인 달빛에 흠뻑 젖어 있다.
달빛이 형상과 색채를 어루만진다.
달빛을 향하여 부드럽게 촉수를 뻗는 나뭇잎과 기이한 풀들이 자신의 촉각을 연다.
우리는 시각적 즐거움보다 먼저 그 미세한 초록의 촉감을 느낀다.
그리고 소파의 여인을 둘러싸고 고요한 몽상처럼 피어오르는 연꽃은 이곳이 습지임을 알려준다.
습지와 습지에 핀 연꽃은 전통적으로 여음(女陰)의 상징이다.
초록의 숲 속에 유실수가 한 그루 있어 이채롭다.
나무는 사과처럼 보이는 과일을 달고 있다.
오래된 여신들의 정원에서 우리는 저와 같은 나무를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은 생명의 나무, 혹은 지혜의 나무라 불린다.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의 하나인 황금사과는 서쪽 세상 끝 헤라의 정원에 있으며
님프들(헤스페리데스)과 라돈이라는 뱀(용)이 사과나무를 지키고 있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역시 저 오래된 여신 신화 속 나무가 변용된 것이리라.
보통 지혜(생명)의 나무를 지키는 동물은 뱀이다.
그런데 야드비가의 꿈에서 뱀은 어딘가로 가고 있는지 꼬리만 보인다.
대신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보이는 코끼리가 이 나무를 지키는 영물이거나 신성인지도 모르겠다.
이미지의 상상계에서는 얼마든지 코끼리의 코가 뱀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숨은 그림처럼 배치된 원숭이, 암사자 둘, 새들과 함께 조용한 아니마의 숲은 두런두런 깨어나는
원시적인 생명의 신비로 가득 찼다.
■ 세밀하게 묘사한 숲의 '환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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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소의 '뱀을 부리는 여인'(1907). 파리 인상파미술관 소장 |
루소는 만년에 주로 이와 같은 밀림을 그렸는데
'뱀을 부리는 여인'(1907)이 그러하다.
이러한 밀림 풍경은 1889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루소가 아프리카와 멕시코의 열대식물을 보게 되면서 시작했다.
그러나 잎사귀와 잎맥 하나하나까지 그리는, 일견 유치해 보여
동화의 세계를 만나는 듯한 루소의 세밀한 묘사는 현실성보다는
환상성을 더 강화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사물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느 미술 사학자가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에게
루소가 그린 열대 식물의 감정을 의뢰했는데 돌아온 답은
'실존하는 식물과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였다고 한다.
루소의 밀림은 루소의 몽상 세계이다.
'꿈'의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소파에 알몸으로 누운 여인 야드비가와 피리를 불고 있는 검은 여인이다.
야드비가의 알몸은 그녀가 문명의 세계를 벗어나 원초적 세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정적의 밀림에 문득 소리를 불어넣는 검은 여인, 그 여인은 아마 야드비가, 아니
루소 자신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림자'는 우리 심층 속에 감추어진 친숙하고도 낯선 또 다른 '나'이다.
야드비가의 시선과 손이 그녀를 향하고 그녀와 이어지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야드비가(루소)가 문명의 세계, 의식의 세계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오래된 자연, 심층의 무의식 속에
거주하는 여왕이다.
보디가드인 양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녀를 호위하는 두 마리 암사자는 그녀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야드비가의 무의식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마적)'처럼 밤의 여왕으로 영상화되고 있다.
피리소리, 마술피리의 소리가 소파를 떠나 꿈과 몽상의 세계로 우리를 유혹하고, 몽환의 숲을 깨어나게 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마술피리'는 부성의 원리를 대표하는
철학자 자라스트로와 모성의 원리를 대변하는 밤의 여왕의 대립 구도로 극이 구성된다.
극은 표면적으로는 자라스트로의 승리로 나타나지만 그 심층의 흐름은 밤의 여왕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심리학자 에리히 노이만은 밝혔다.
그에 따르면, 마술과 음악은 여성적인 것이 관장한다.
■ 숲속에서 사물은 '형용사'가 된다
밤과 무의식, 아니마의 꿈이 마술피리의 선율이 되어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원초적 생명의 신비를 깨운다.
숲의 모든 존재는 루소 특유의 명확한 윤곽선 속에 자신의 형상과 색채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마법적인 모호한 분위기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
마술피리가 숲을 휘감으면서 달빛에 젖은 신비로운 원시의 습지 속으로 모든 것을 융해하고 있는 것일까.
숲의 모든 사물은 명사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형용사가 되고 있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형용사로 이야기한다"(허만하).
이러한 환상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는 '뱀을 부리는 여인'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는 루소가 만년에 이룬 득의의 풍경이다.
야드비가가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다.
헤어진 젊은 날의 연인이라는 사람도 있다.
혹은 일찍 그를 두고 다른 세계로 훌쩍 떠나버린, 루소가 그녀를 위해 바이올린 연주곡까지 작곡했던
아내 클레망스, 아니면 그를 평생 보살피다 얼마 전 죽은 딸 줄리아의 영상인지 모른다.
아니, 이 모든 여인을 담은 루소 내면의 예술혼인 아니마일 것이다.
이곳은 야드비가의 꿈이며, 야드비가는 루소 자신의 아니마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떠나보내고 캔버스 앞에 앉은 외롭고 쓸쓸한 늙은 화가의 마지막 열정,
마지막 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