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자 악마
Tolstoi(1828~1910,러시아의 시인, 소설가)의
민화집에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토지가 있을까』라고 하는 단편이 있다.
어느 남자가 악마와 약속하여
하루 동안 걸려 걸은 토지 전부를
천 루불에 판다고 약속을 했다.
즉 어느 출발점에서 출발하여
그 남자가 다시 그 출발점에
돌아올 때까지 걸은 그 족적으로
에워싼 토지전부를 천 루불에 손에 넣는 것이다.
때문에 남자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간다.
그는 탐욕을 부려 조금 멀리 갔다.
해가 저물 때까지 출발점에 돌아올지 어떨지 걱정이다.
그는 달린다. 입은 바짝 말라버렸다.
가슴은 대장간의 풀무처럼 부풀어 오르고,
심장은 망치로 못을 박고, 다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휘청휘청거린다.
그러나, 그는 죽을 듯이 달려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출발점에 돌아온
동시에 죽어버렸다. 그를 위한 묘혈이 파진다.
결국, 그가 필요로 한 토지는 자신의
묘혈 분밖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정도로 욕심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넓은 토지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도 있다. 더 넓은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넓은 집은 청소가 너무 힘들다고 욕망에 브레이크를 거는 마음도 작용한다.
“놀 때는 좁다고 생각한 운동장이 청소할 때는 왜 이렇게 넓은가”라고 초등학생이 말했다고 하는데, 분명히 말 그대로이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지나치게 욕심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을 지나치게 욕심부리게 하는 것은 악마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악마에게 부추김을 당해 우리들은 탐욕부리게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들을 탐욕시키게 하는 악마는 도대체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인간은 원래 탐욕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악마는 내측에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과연, 그 생각에도 일리는 있다. 기독교에서는 악마를 ‘사탄’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신에 대적하는 자’의 의미다.
그럼 어떠한 식으로 악마가 신에게 대적하는가 하면, 악마는 인간을 유혹하여, 신이 인간을 걸어가게 하려고 생각하시는 길에서, 인간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마는 유혹자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 있는 악으로 향하는 유혹을, 그것을 外在化시켜 擬人的으로 표현한 것이 악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번뇌’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간인 이상, 누구라도 많은 번뇌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108의 번뇌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의 경우도 악마는 인간의 내측에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