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8일 발레리 잘루즈니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을 해임했다.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자진 사퇴를 거듭 요청했으나, 잘루즈니 총참모장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만약 대선이 치러질 경우) 젤렌스키 대통령의 공식 임기가 끝나는 5월 이후, (현실적으로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제로'이므로) 그는 강력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적으로, 또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게 현지 언론의 전망이다.
그의 경질 이유로는 향후 군사 전략에 대한 군최고통수권자(대통령)와의 이견,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몸값, '교착 상태'란 불경한(?) 표현으로 군내에 패배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한 죄(?) 등등이 거론되지만, 거의 2년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가라앉은 정치, 군사적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의지도 무시할 수 없다. '전쟁중에 장수를 바꾼' 대통령의 선택이 어떤 결말을 낳을 것인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잘루즈니 전 총참모장과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다만, 장수 교체에 맞춰, 또 교체를 계기로 드러난 우크라이나가 처한 국내외 문제를 '잘루즈니 경질 이후'란 코너를 통해 몇차례 짚어본다/편집자
◇ 잘루즈니 뒤를 이은 시르스키 총참모장의 작전은?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후임으로는 우리에게도 낯익은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지상군(육군 격) 사령관이 임명됐다. 시르스키 신임 총참모장은 13, 14일 술렁거리고 있는 군 내부를 다독거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양새다.
그는 14일 루스템 우메로프 국방장관과 함께 러시아군의 공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네츠크주(州) 최전선을 방문, 장병을 격려한 뒤 소셜미디어(SNS)로 소통을 시작했다. 전임 잘루즈니 총참모장은 해임 직전 '작전 계획 짤 생각은 안하고 컴퓨터(SNS)만 갖고 논다'는 비아냥을 정치적 반대 세력에게 들었지만, 현대전에서 군 안팎으로 최고지휘관의 소통은 이제 필수다. 시르스키 신임 총참모장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러시아군의 거친 공세에 방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네츠크주 아브데예프카와 쿠퍈스크 등을 시찰한 뒤 SNS를 통해 "러시아 점령군이 계속 병력을 늘리며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며 "매우 어렵고 스트레스가 많은 작전 상황"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같은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군은 적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며 "우리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군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시르스키 총참모장이 아브데예프카와 쿠퍈스크 방어를 위해 예비병력을 투입할 계획을 밝혔다고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이날 전했다.
우메로프 국방장관(왼쪽)과 함께 동부지역 최전선을 방문한 시르스키 총참모장(가운데)/사진출처:페이스북
이 매체에 따르면 시르스키 총참모장은 전황 분석 결과를 토대로 예비군과 전투 시스템, 화력 보강 등을 지원하고, 군 병력을 재편성해 적의 공격력을 분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또 전장의 급격한 변화를 감안해 현장 부대 지휘관에게 병사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했다. 여차하면 퇴각할 수 있도록 현장 지휘권을 강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시르스키 총참모장은 총참모장으로 임명되기 며칠 전 독일 TV 채널 ZDF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방어 작전으로 전환했으며, 그 목표는 러시아 측에 최대한 손실을 입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군인의 생명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으며 "병력을 희생하기보다는 어떤 자리에서든 후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했다.
그의 이같은 인터뷰 발언은 일부 서방 언론에게는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5월 최대 격전지 바흐무트 방어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기로 했으며, 그 결과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이다. 일부 외신은 그가 총참모장에 임명되자 '영웅(잘루즈니)이 가고 '도살자'(시르스키)가 왔다'고 평하기도 했다(미 정치전문 폴리티코). 그런 그가 총참모장 임명을 앞두고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장병들의 생명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겠다고 강조한 것이다.
지난해 5월 바흐무트 방어선을 돌아보는 시르스키 당시 지상군사령관/사진출처:스트라나.ua
스트라나.ua는 14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의 군사전망(Военные перспективы) 코너에서 "그가 총참모장 임명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투로 ZDF 방송과 인터뷰를 진행했다"며 "그가 총참모장 자격으로 역점을 둘 두가지 중요한 사실, 즉 방어전략으로의 전환과 부하들의 생명 보호를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 매체는 그의 전략을 현재의 방어 진지를 고집하지 않고, 방어에 가장 유리한 곳으로 후퇴한 뒤 적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 함락 위기에 몰린 아브데예프카
우크라이나군이 방어에 불리한 지역이 바로 함락 직전으로 몰린 아브데예프카다. 시르스키 총참모장은 방어 부대에 후퇴 명령을 내려 무의미한 희생을 피할지, 추가 병력을 투입해 현 진지를 고수할 지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곳이기도 하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아브데예프카는 현재 러시아군의 공격에 함락 위기에 몰려 있다. 독일 일간지 빌트의 군사 전문가 분석가 율리안 뢰프케(Julian Röpke)는 12일 "아브데예프카가 앞으로 몇 주 내에 함락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아브데예프카의 위치. 바로 밑에 도네츠크주의 주도 도네츠크가 있고, 맨위쪽에 바흐무트가 보인다. 왼쪽 아래에는 또다른 격전지 벨리카야 노보셀카가 위치해 있다/사진출처:얀덱스 지도
러시아군은 13일 코크스(열처리된 석탄/편집자) 공장 등이 있는 아브데예프카 산업단지에서 서쪽으로 난 산업도로(Индустриальный проспект)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 도로는 아브데예프카 방어군의 물자 공급로다. 우크라이나군에게는 도시 남쪽에 또다른 공급로가 있지만, 이 역시 위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군이 2㎞ 앞으로 진격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방어군의 물자 공급로가 모두 러시아군의 사정권 안에 곧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러시아군의 '산업도로' 장악 시도는 안개가 낀 지난 10일 시작됐다고 한다. 안개 때문에 우크라이나군의 'FPV 드론'(운영자가 직접 눈으로 보면서 조종하는 드론/편집자)이 뜨지 못하는 날씨를 이용한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의 정찰 드론이 뜨지 못하니, 러시아군은 마음 놓고 진격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우크라이나 군사정보 텔레그램 채널 '딥스테이트'(Deep State)는 "군 수뇌부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고, 다음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조만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며 사실상 후퇴 명령을 촉구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당국은 (공급로가 막히는) '생명의 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다. 이 지역을 방어하는 타브리아 여단의 대변인은 "며칠 동안 아브데예프카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상황은 작전 변경을 요구한다"면서 그러나 "아브데예프카 방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돌더미와 숯더미(파괴되고 불탄 아브데예프카/편집자)를 계속 붙잡고 있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한마디로 철수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다.
아브데예프카 전선에 등장한 미 에이브럼스 전차(탱크)/영상 캡처
아브데예프카 방어군에게는 두가지 옵션이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주장했다. 하나는 러시아군의 공세가 심한 도시 남부지역에서 북쪽으로 후퇴한 뒤, 코크스 공장을 거점으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심에 진지를 구축한 뒤 반격을 시도하는 방안이다. 우크라이나 군 수뇌부는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파병설이 나돌던 우크라이나 제3돌격여단이 이 지역에 긴급배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 제2, 제3의 전선은 지금?
우크라이나군이 수세에 밀린 곳은 아브데예프카 외에 쿠퍈스키 지역도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군을 오스콜강 너머로 밀어낸 뒤, 오스콜 강을 자연 요새로 삼아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계속 공격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곳을 방문한 시르스키 총참모장은 예비병력 투입 여지를 남기고 돌아왔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세 번째로 '핫한' 지역은 지난해 6월 함락된 바흐무트에서 서쪽 '차소프 야르'로 향하는 길이다. 러시아군은 지난해 여름철 우크라이나의 반격으로 빼앗긴 땅을 다시 점령한 뒤, 서진하면서 철광 산업도시 '차소프 야르'를 노리고 있다. '차소프 야르'에 대한 러시아군의 폭격이 대대적으로 시작됐다고 텔레그램 채널 '딥 스테이트'는 썼다. 러시아군은 지난해 가을부터 포 전력의 우위를 내세워, 도시 진입 공격에 앞서 도시(와 우크라이나의 방어진지)를 초토화하는 작전을 쓰고 있다.
'딥 스테이트' 채널은 러시아군이 지난 주말 '차소프 야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능선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군의 진격에는 FPV 드론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군은 FPV 드론으로 우크라이나 방어망을 확인, 파괴한 뒤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작전으로 우크라이군 주둔지를 하나씩 점령하고 있다고 이 채널은 설명했다.
이 밖에도 아브데예프카의 남쪽 마린카 인근의 노보미하일로프카에도 러시아군이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 흑해 해전서 전과 올리는 우크라 수상드론?
그나마 우크라이나군이 승전을 올리는 곳은 흑해 해전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방부 산하 정보총국(GUR)은 14일 "정보 총국 소속 '그룹 13' 특수 부대가 우크라이나군과 협력해 러시아 흑해함대의 대형 상륙함 '체사르 쿠니코프"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며 관련 영상을 공개했다. 크림반도 남부의 흑해 해안에서 '마구라 V5' 수상 공격용 드론으로 '체사르 쿠니코프'함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1989년 진수된 이 군함은 러시아 해군 상륙전력의 주축인 '로푸카'급 상륙함으로 모두 87명의 승조원이 탑승할 수 있다.
우크라 수상드론이 러 흑해함대 체사르 쿠니코프함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영상캡처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2022년 3월에도 '케사르 쿠니코프'함을 소련제 '토치카-U'미사일로 격침시켰다고 주장한 바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케사르 쿠니코프'함은 격침되지 않았다고 했다.
앞서 우크라이나군 스트랫컴(Стратком ВСУ)은 2022년 2월 개전이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흑해함대 전함 중 약 33%를 무력화시켰다고 밝혔다. 그동안 러시아 군함 24척과 잠수함 1척을 못쓰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우크라이나군 전략홍보팀의 주장이다.
rbc 등 러시아 언론은 14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에게 '케사르 쿠니코프'함에 대해 질의했으나, 국방부에 물어보라고 했다고 전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그동안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GUR) 주도의 '사보타주'(비밀 폭파 작전)에 의한 러시아군 피해에 대한 확인은 국방부로 미루곤했다. 추후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