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38
10월9일[연중 제2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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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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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Z1vtWC64gc?si=0iP8YehDT2nBPcFx
[서울대교구 문필정 바실리오 신부님 집전(동작동 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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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 눈앞에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수많은 법 가운데서, 사형제도, 종교나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와 함께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입니다.
이법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위험에 처한 사람 앞에서 ‘구조 불이행’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구조거부죄’ 또는 ‘불구조죄’라고도 하지요. 이 법의 근거이자 원천은 루카복음 10장 30~37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유다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으슥한 산길을 홀로 걷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하면서, 있는 돈 없는 돈 순순히 다 털어주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목돈이었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무자비한 폭행을 당합니다. 그는 큰 부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제, 레위인이 황급히 자리를 피해갔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과 적대관계에 놓여있던 한 사마리아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갑니다.
지극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여관 주인에게 숙식비며 모든 경비 일체를 지불합니다. 뿐만 아니라 잘 치료해 줄 것을 당부하며, 추가로 지출되는 경비는 돌아오는 길에 계산하겠노라고 다짐까지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다른 동료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어려운 최선의 도움을 제공한 것입니다. 피범벅이 된 사람을 나귀에 태우는 과정에서 자신도 피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숙식비며 치료비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잡혀있던 중요한 약속을 취소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눈앞에 죽어가고 있는 한 인간 존재, 그를 돕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우리 눈앞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갖은 박해와 고초를 겪고 있는 사람들, 억울하게 무고당해 눈물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주님이며, 또 다른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변장하고 찾아오신 예수님이시며,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그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드려야 하고, 그들을 신속히 위험에서 구출해드려야 마땅합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지금 이순간 가장 시급하게 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혹시라도 우리는 은연중에 무심코 스쳐 지나간 사제나 레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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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w1maSUhRgU?si=5CbeU33m49bkxJ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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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사랑은 어부의 그물처럼 파견 받은 사랑>
세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면서도 가장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단어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알면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교사는 구원에 대해 묻고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금방 눈치챕니다. 골라서 사랑해보겠다는 뜻인데, 그 속내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상대를 이용하겠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하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주려 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파견 받지 않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500일의 섬머’(2009)는 남녀가 왜 서로 노력하는데 그 사랑이 완성되지 않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톰은 로스앤젤레스의 소규모 카드 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로, 운명적이고 진정한 사랑을 믿는 젊은이입니다. 반면 섬머는 독립적이며 자유분방한 성격의 여성으로,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으로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습니다. 그런 둘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500일 뒤에 헤어졌습니다. 영화는 둘이 헤어지게 된 것이 누구의 탓인지를 묻습니다. 먼저 느닷없이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한 섬머에게 탓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보다 보면 톰도 탓이 있습니다. 어쩌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톰은 섬머의 미온적인 태도에 지쳐갑니다. 함께 잠자리까지 하는 사이지만, 자신만을 사랑하겠다는 확답을 주지 않습니다. 섬머는 확신을 주지 않으면서도 노력합니다.
어느 날 헤어짐의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술집에서 둘이 술을 마시는데 어떤 잘 생기고 멋진 남성이 섬머에게 치근덕댑니다. 섬머는 계속 싫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마치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일처럼 톰은 술만 마십니다. 섬머에게 치근덕대던 남자가 톰을 모욕했을 때 그제야 톰은 그 사람과 싸웁니다. 이 일로 섬머는 헤어지자고 합니다. 톰은 섬머를 구해주려 한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누가 봐도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지 섬머를 위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둘은 다시 만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섬머는 이제 운명을 믿는 사람처럼 이야기합니다. 둘의 만남은 운명이었지만, 짝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고. 그렇지만 여전히 톰의 손을 놓지 못합니다. 톰은 운명을 거부하며 노력만 하는 그녀와 이별을 선언합니다. 그러며 이젠 섬머처럼 운명의 여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운명을 개척하려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도전합니다. 한 사람은 사랑은 노력하며 성장 시키는 것으로 여겼고 한 사람은 먼저 운명이라고 믿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무리는 서로의 연애관이 바뀌며 끝납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을 만날까요? 영원히 쳇바퀴 돌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사랑이 파견 받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연애 결혼보다 중매 결혼이 이혼율이 낮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하도록 파견 받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웃을 찾아 나서려는 율법교사를 사랑하도록 파견하십니다. 파견 받아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적일 수 없습니다. 그 파견한 분을 위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를 잘 키워 달라고 파견 받습니다. 현대에서는 여성들에게 비난 받을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자녀에 대해 남성이 할 수 없는 여성들만의 능력이 있습니다. 남성은 여성 만큼이나 자녀의 감정을 알아차릴 감수성이 없고 자녀에게만 집중할 능력도 없습니다. 반면 남편들은 나가서 돈을 버는 데는 여성보다 유리합니다. 본인이 아기를 낳을 일도 없고 감수성이 무뎌서 더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돈을 주며 자녀에게 파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파견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자녀를 키우려 한다면 어떨까요?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외로움을 자녀를 통해 채우려 합니다. 본인은 이유 없이 자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자녀를 통해 부활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한다면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며 서운해 합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항상 부활을 전제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파견한 이로부터 그 보상과 부활을 추구합니다. 마치 어부에게 던져진 그물처럼 물고기에게 보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물에 대한 보상은 그 그물을 던진 어부가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파견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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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동창신부님이 번역한 ‘황금전설’을 읽고 있습니다. 1,100페이지가 넘으니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저자는 책의 구성을 4부분으로 정리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탈선’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아담이 죄를 지었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탈선의 시간은 모세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실 때까지입니다. 둘째는 ‘갱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예언자들은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하며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예언은 앞날을 미리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갱신은 모세부터 예수님의 탄생 때까지입니다.
셋째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성령강림까지입니다. 넷째는 ‘순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고, 그분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소풍이 끝나면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는 성령강림부터 지금까지입니다. 황금전설은 이런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시작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야기합니다. 탈선보다 대림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한권의 책이 800년 전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특히 구약성서를 보면 신약의 예표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온 ‘요나’는 그의 삶이 예수님의 예표와 같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원했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둘째, 요나는 뱃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셋째, 요나는 삼일동안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3일 동안 저승에 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넷째,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요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히브리 사람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하느님을 따르는 진정한 이웃인지를 말해 주십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은 이의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길을 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강도를 만나서 상처를 입은 이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착한 이웃인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인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뜻을 이웃에게 전하는 ‘예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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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25-3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 교사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율법 학자지만 법조문만 잘 알 뿐 그 정신은 모르는 자들임을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첫 줄부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묻는다.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만이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가르치신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분을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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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웃>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10,29)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여기서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라는 말은, ‘의로운 척 하면서’라는 뜻인데, 자기는 ‘하느님 사랑 실천’과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잘난 체 했다는 뜻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알고 싶어서’ 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논쟁을 하고 싶어서’ 한 질문입니다. <아마도 이웃의 범위나 대상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그의 질문에는, 이웃인 사람과 이웃이 아닌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고, 이웃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정한 다음에 그 이웃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 있습니다.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포함해서 유대인들은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만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모두 우상 숭배자들이고,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고, 유대교를 박해하는 박해자들이고, 사랑하면 안 되는 ‘원수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유대인들의 그런 사고방식을 깨부수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3-45ㄱ)
사실, 구약성경에도 ‘원수’를, 또는 ‘이방인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율법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탈출 22,20)
“너희는 이방인과 고아의 권리를 왜곡해서는 안 되고, 과부의 옷을 담보로 잡아서도 안 된다."(신명 24,17)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만 이웃으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방인들을 미워해야 할 원수로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이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6-47)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말은 ‘죄를 짓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 율법학자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냥 질문이 아니라,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묻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이 다 너의 이웃이다.”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들에게는 원수인 사람도 없고, 이웃이 아닌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사랑해야 할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주다.”는 “모든 사람들이 이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다."입니다. 아무도 자기 마음대로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서 “너는 나의 이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네가 먼저 모든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라.”라는 뜻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나’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나’를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예수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같은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11-12.19-21)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 사랑 실천으로 이루어지고, 이웃 사랑 실천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두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신 것은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 유대인들은 ‘박해자들’이었고, ‘원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냥 가버린 사람들을 사제와 레위인으로 설정하신 것은,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위선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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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율법 교사 한 명을 만나십니다. 대화의 상대가 제자들에서 율법 교사로 바뀝니다. 율법 교사의 등장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 줍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이와 관련한 율법 규정이 무엇인지 되물으십니다. 율법 교사는 두 가지 계명을 말합니다. 먼저 인용한 율법 조문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등장하는데,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하던 확장된 ‘쉐마’(‘너희는 들어라.’, 신명 6,4-9 참조)의 일부분입니다. 이 계명은 하느님을 헌신적으로 전인적 차원에서 갈림 없이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두 번째 계명으로 레위기 19장 18절이 인용됩니다. 이 계명은 이른바 성결법에(레위 17―26장 참조) 속하는 규범으로서 주님이신 하느님처럼 이웃, 곧 동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언급한 율법 조문의 유효성을 예수님께서 확실히 증언하십니다.(루카 10,28 참조) 이로써 사랑의 이중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규범을 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규범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가르침, 곧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율법 교사에게 자비로운 사마리아인처럼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임을 배웁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십자가 죽음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증언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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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장 25절)
예수님은 당신을 시험하려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주십니다. 비유 속에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어떤 사람과,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제가/ 레위인도 ...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장 31절.32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장 33절)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인인 사제,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의 반응이 사뭇 다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머리가 먼저 반응한 것 같지요. 율법의 관점에서, 주검에 몸이 닿으면 부정하게 되어 자기들 앞에 놓인 창창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별 고민 없이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마음이 먼저 반응을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자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그의 내면에서 솟아난 '가엾은 마음'이 바로 야훼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검처럼 쓰러져 있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살피고 돌봅니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루카 복음 10장 35절)
여관에서 사마리아인은 피로도 잊고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습니다. 이로써 충분할 법한데도 떠날 때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지요. 두 데나리온은 일꾼의 이틀치 품삯이니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는 다친 이의 현재에만이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래를 계산해 현재를 모면하려 한 앞의 두 사람과 상당히 큰 차이가 보입니다.
제1독서는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피하여"(요나 1장 3절.10절) 요나는 주님이 부르셨을 때 그분을 피해 달아납니다. 그가 향한 곳은 주님 쪽도 아니고,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니네베 쪽도 물론 아닙니다. 정 반대쪽으로 작정한 듯 멀리멀리 떠나는 요나의 모습에서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의 냉정한 발걸음이 겹칩니다.
요나도 주님을 떠나면서 니네베의 미래에 손을 놓은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서도 손을 뗀 것입니다. '나 아니어도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어도 그만이고...'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요나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사실 요나는 니네베를, 그리고 니네베를 통해 하느님을 버린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나를 쫓아가십니다. 요나가 겪은 폭풍과 물고기 뱃속 이야기는 어린이들도 귀가 솔깃할 만큼 다이나믹하고 흥미지진하지요. 사실 그분께는 순종적이고 성실하며 잘 준비된 예언자들이 많이 있으시니, 도망간 사람은 말고 다른 누구라도 부르시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요나야, 너 말고도 니네베를 도울 사람은 많다. 그런데 나는 꼭 너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고 싶단다. 너의 구원도 이 일에 포함되기 때문이란다." 하시는 마음이었을까요...
복음의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피하면서 자신들의 하느님도 피한 것이고, 피함으로써 버린 것이기도 합니다.
초주검이 되었던 사람 입장에서 보면 강도를 만난 것도 통탄할 일인데 거기에 더해 외면 당하고 버림받기까지 한 거지요.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강도 당한 뒤 고통 속에 버려지기까지 한 그 사람의 존엄성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다가가서 치료하고 돌보며 미래까지 염려해 손을 내민 사마리아인을 통해 영육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던 이가 되살아납니다.
목숨을 건진 것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존엄함도 회복하게 된 거지요. 듣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겠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사마리아인은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였던 것입니다.
구원은 자비를 베푼 사람은 물론 자비를 입은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이웃이 되어주는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늘 하시는 일이니까요. "누가 너의 이웃이냐?"
사랑하는 벗님! 이번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자비가 필요한 사람, 이웃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덕분에 그가 구원을 체험하고 그 덕분에 우리가 구원되니 이웃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요!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표같이 느껴집니다. 만민의 형제, 성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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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지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지 물으시는데, 율법 학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을 꼽습니다.
이 대화의 골자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누가 이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이웃과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분명히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 역시 다른 유다인들이나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들만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이해했지, 사마리아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을 사랑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율법 교사가 가지고 있던 이웃의 범위를 확장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이란 특정 국적이나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나와 사이가 좋지 않거나 내가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포함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마음에만 간직하는 사랑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사랑입니다.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본은 연민입니다. 그 사람의 아픔과 필요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느끼시는 마음이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기를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도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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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너무도 익숙한 말씀이기에, 오늘은 ‘사마리아인’이 아닌 ‘율법 교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또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그의 의도가 몹시 불순합니다. 아울러 그의 질문은 매우 형식적이며 기계적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지만, 이 질문을 다시 살펴보면, “나는 그 ‘무엇을’ 잘하고 있으며,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라는 교만함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화법으로 접근하십니다. “누가 이웃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율법 교사에게는 ‘아무개’라는 이웃의 이름이 중요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되어 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율법 교사에게 하느님의 가르침, 곧 율법은 일종의 수학 공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니, 율법의 계명에 관한 지적인 앎은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계명을 바탕으로 ‘무엇’과 ‘누구’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계명을 통해서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지는 못하였고, 따라서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며 이웃이 되어 줄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그분의 계명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읽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율법 교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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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우리 본당은 ‘아나빔’자선함을 비치하고 어려운 이웃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물적 예물을 모읍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렵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남모르게 돕기 위해서입니다. 매월 10가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알맞게 채워집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강복을 청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곧바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 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 27,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 하고 이르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마더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우리는 누가 내 이웃인가를 찾지 않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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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소문의 속도는 대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인구 3만 명이 사는 소도시에 깜짝 놀랄만한 소문을 가지고 아침 8시 회사에 출근해 세 사람에게 소문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세 사람은 각자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이 소문을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 단계 걸리는 시간이 15분이라고 했을 때, 3만 명이 사는 소도시 전체가 이 소문을 알게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계산을 해보면 간단합니다. 딱 2시간 30분이면 도시 전체의 사람에게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있다고 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소문은 이론보다도 실제로 더 빠릅니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것보다도 더 빠른 전달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종 메신저(전화, 문자, SNS 등)의 발달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빠르게 전달됩니다. 특히 그 소문이 좋은 소문이 아닌 나쁜 소문이라면 훨씬 더 빠르게 전달됩니다. 소위 ‘아니면 말고’ 식의 ‘카더라’ 통신으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과연 어떤 소문을 전달해야 할까요? 나쁜 소문, 가짜 소문이 아니라, 좋은 소문을 그리고 진리를 전달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픔과 상처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드는 내가 아니라, 사랑과 희망으로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나쁜 소문, 가짜 소문은 나 자신이 아니어도 빠르게 전달됩니다. 그 빠른 속도에 내가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문, 기쁜 소식은 그 속도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나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기쁜 소식을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편이 아니면 무시하고 경멸하는 이기주의가 더 강해지는 요즘에 이 말씀은 우리를 크게 반성하게 합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피하여 달아나는 위선적인 사제나 레위인과는 달리, 오로지 가엾은 마음 하나로 아무런 편견과 조건 없이 애덕을 실천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으려고만 해서 주님의 기쁜 소식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이 점점 줄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좋은 소문, 기쁜 소식이 계속해서 이 세상 안에서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로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으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리적인 이유나 제한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조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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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걸음>
2023. 10. 09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루카 10,25-37 (가장 큰 계명,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한걸음>
그대
거기에 있으니
다가가는
한걸음으로
그대의
이웃이 되는
사랑
그대
거기에 있어도
물러서는
한걸음으로
그대를
지워버리는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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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만 하면 영원한 생명은 공짜>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큰 차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마태오복음과 루카 복음 사이에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이에 비해 마태오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시는 분은 물론 같은 하느님이시지만 어떤 사람은 얻고 어떤 사람은 받는 것인데 어떤 차이입니까?
얻는 것은, 받는 것에 비해 더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받는 것은, 얻는 것에 비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애써 얻는 것에 비해 받는 것은 가만 있다가 받기만 합니다.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자세일까요? 우리 인간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기만 하면 얌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은 얄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애써 얻는 것보다 그저 받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은총이란 완전한 수동태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이란 거저 받는 선물이잖습니까?
인간의 공로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부모와 자식 간에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자식은 자기가 잘해야 부모가 사랑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사랑받기 위해 자기는 형제들보다 공부를 잘해야 하고, 부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심부름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식을 볼 때 부모는 오히려 불편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무것도 안 해도 밥을 주는 존재이고, 선행을 안 하고 오히려 나쁜 짓을 해도 밥을 주는 사랑의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믿는다면 애써 받으려는 그런 태도보다는 수동태가 낫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조건을 주님께서 거시는 것이 아닙니까? 영원한 생명의 조건은 사랑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은 애쓰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편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편지는 받지 않습니다. 싫어하는 이의 편지는 더더욱 받지 않습니다.
이런 뜻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랑이 좋다고, 당신 사랑을 싫다고 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쓸 필요도 없이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쉬운 사랑이 어려워 애를 씁니다.
아직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인데 아무튼, 언젠가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게 되면,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서 이웃과 나누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은 공짜로 주시겠다는 오늘 주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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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주님은 최고의 스승이시다-
세계가 참 어수선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0월7일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팔레스틴인들은 최소 198명이 사망하고 1610명이 다쳤으며, 앞서 팔레스틴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인들 역시 150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 부상했으며 양측의 전쟁은 계속중입니다. 교황님은 양측에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청했고 담화중 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모든 전쟁은 패배다!(Every war is a defeat!)”
전쟁은 무조건 인재요 악입니다. 그 자체로 이긴자든 진자든 결국은 패배의 어리석음임을 배웁니다. 그런가하며 10월8일 아프카니스탄에서는 강력한 지진으로 2천명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전자가 인재라면 후자는 천재입니다. 새삼 이렇게 살아있음이 순전히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기도하며 깨어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삶자체가 스승입니다. 저에겐 공동체가, 주님이 최고의 스승입니다. 깨어 겸손히 잘 보고 또 경청하며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래서 잘 보고 잘 듣고 배우기 위해 침묵입니다. 오늘은 제577돌을 맞이하는 한글날입니다. 1446년 9월29일 훈민정음이 반포됨을 기념하는, 또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고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이자 법정 공휴일입니다. 세종실록을 통해 성군이라 일컫는 세종대왕의 백성 사랑을 배웁니다. 저는 전주 이씨로 세종대왕의 17남인 영해군파에 속합니다.
“우리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유통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끝내 제 생각을 표현할 수가 없다. 내가 이를 가엾이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쉽게 배워서 일용에 쓰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민족의 스승인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학자의 평가입니다.
“세종의 최대업적인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의 사상과 학문의 종합판이자 결정판이다. 여기에는 홍익정신, 애민사상, 통합적 학문관, 전통문화의 존중, 중국문화의 수용등이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그래서 민족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문자가 되었다.”
이 역사학자의 세종과 정조에 대한 비교도 유익합니다.
“두분은 너무 닮았다. 무엇보다 책벌레로 불릴만큼 무서운 독서력이 똑같다. 천재적인 두뇌도 서로 같다. 팔방미인처럼 박식하고 다재다능한 것도 비슷하다. 백성 사랑도, 정사에 부지런함도 같고, 과로 때문에 장수하지 못한 것도 서로 닮았다. 세종이 54세요, 정조가 49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세종대왕이요 한글임을 깨닫고 배웁니다.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 시절 간혹 불렀던 한글날 노래 가사가 아름다워 찾아 1,2절 인용합니다. 곡도 듣고 불러보니 흥겹고 느낌이 성가같습니다. 유명한 최현배 한글학자의 나라 사랑, 한글 사랑이 가득담긴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역사 오랜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이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자랑 문화의 터전
이글로 이나라의 힘을 기르자
볼수록 아름다운 스물넉자는
그속에 모든이치 갖추어있고
누구나 쉬배우며 쓰기편하니
세계의 글자중에 으뜸이도다
한글은 우리자랑 민주의근본”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한글날을 통해서도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한민족인지 새삼 참 많이 깨닫고 배웁니다. 이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때 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바치는 만세육창입니다.
수도승의 두 기본자질은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꼽습니다.중국의 현자 공자의 논어의 핵심도 호학好學,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 역시 일상의 삶을 통해, 또 오늘 미사중 복음과 독서를 통해 깊은 진리를 깨닫고 배웁니다. 새삼 우리가 배워야 할 최고의 스승은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복음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율법학자도 최고의 스승 예수님께 크게 배웠을 것입니다. 율법학자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되받아치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학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을 꼽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참 기막힌 답변입니다. 최고의 스승 예수님의 진면목이 환히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네가 삶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며 그때 영원한 생명의 선물도 받을 것이란 율법학자의 허점을 정확히 직격한 예수님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정담함을 드러내고 싶은 허영에 또 율법학자는 또 누가 나의 이웃인가 묻습니다. 참 좋은 스승 예수님은 귀찮게 여기지 않고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율법학자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독자讀者인 우리들에게도 깊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곤경에 처한 이를 구원해 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너도 곤경중에 있는 이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피해 간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이를 돌본 자비로운 사마리아인중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물음에 율법학자는 아직도 사마리아인에 대한 무시하는 마음은 남아 있어 사마리아인 대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앞서의 대답과 대동소이합니다. 이제 말장난 같은 질문은 그만하고 삶의 현장에 가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 말씀하시는 주님입니다. 율법학자뿐 아니라 최고의 스승이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가르침이자 복음의 결론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우리는 또 복음에서 놀라운 사실도 배웁니다. 하느님을 잘 믿는다는 사제와 레위인이 아니라 이교인 사마리아인이 더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며 분발케 합니다. 아마 내심 율법학자도 부끄러워하며 크게 깨닫고 배웠을 것입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제1독서의 요나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싫어 도망치다 주님께 사로잡힙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요나는 최고의 스승인 주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섭리와 자신의 성소를 깊이 깨닫고 배웠을 것입니다.
한번 주님께 불림 받은 자를 주님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주님을 떠나 피해갈 곳은 아무곳도 없다는 사실을 요나는 참 깊이 깨닫고 배웠을 것입니다. 다음 고백에서 요나의 주님께 승복하는 자포자기적 솔직한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이 왜 요나를 좋아하시는지 다음 요나의 매력적인 면모를 통해 깨닫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이런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을 체험하고 배우면서 요나의 성소는 더욱 굳건해졌을 것입니다. 새삼 우리 성소 여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알게 모르게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 중에도 하느님은 나를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이래서 각자 개인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 묵상을 강력히 권하고 싶습니다. 또 복음에서 사마리아 이교인들에게 놀랐는데 제1독서 요나서에서 역시 이방인들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질 때의 그 기도와 고백에 놀랍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하느님을 믿는 신자임을 깨닫습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이방인들 마음속 깊이 잠재한 하느님 신앙을 불러 일으켰으니 요나의 자발적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가 참 기막힌 복음 선포였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요나가 사흘낮과 사흘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육지에 뱉어 내게 하시니 그대로 사흘만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예표가 된 요나입니다.
삶은 배움이 여정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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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 10,25-37)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25)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10,26) 그가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해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 물음에 응답하신 것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30-37)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 안에 머물러 봅니다.
믿는 이들이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지?
믿는 이들이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최고의 목적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다면 지금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바뀔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도 그를 피해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는 사제나 레위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준 '또 하나의 착한 사마리인들'이 여기저기에서 넘쳐 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앙의 지식이 아니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단순하게 믿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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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OJxXuL97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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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을 알려면
먼저 이웃으로 오신
실천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못난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반성합니다.
소중한
마음을 덮고 있는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시작입니다.
마음을 살리는 것이
곧 생명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이웃을 위한 일이
가장 존귀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일입니다.
자비를 실천한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며
예수님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쓰러진 이웃을
도와주고 살리는
길은 이와 같이
복음의 정신과
상통합니다.
폭력을
치유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쓰러지고 넘어진
이웃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손길이
바로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고약한 이웃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쓰러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웃의 손길이
필요함을 압니다.
이웃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며
복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웃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집니다.
우리가 먼저
선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을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을 닮은
우리가 좋은
이웃입니다.
자비를 나누는
좋은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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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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