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시모음 8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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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 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샅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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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도종환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 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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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 사랑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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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을 오후
도종환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날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엇다
쓸쓸하지만 마음이 선해진다는 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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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 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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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
도종환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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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강가에서
도종환
강물이 우리에게 주는 소리를
더 오래 듣고 있어야 했다
강물이 흘러 아래로 가는 뜻을
다 아는 듯 성급하게 전하러 다니기 전에
가르치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강물의 힘줄이건 멈추지 않는 빛깔이건
오히려 물줄기 만날 때마다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먼저 생각해야 했다
흘러가며 반짝이는 풀과 꽃들 만날 때마다
꽃으로 열매로 올라가려 기를 쓰지 말고
뿌리 쪽으로 소리 없이 내려가야 했다
어디서 이 실패는 비롯되었는가 골똘해지기 전에
조금 고였다 싶으면 서둘러 바다로
이끌고 가려 한 건 잘못이었다
고여 넘쳐 저절로 흐름을 찾아갈 때까지
한사리 가득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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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개나리꽃
도종환
산 속에서 제일 먼저 노랗게
봄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나
뒤뜰에서 맨 먼저 피어 노랗게 봄을 전하는
산수유나무 앞에 서 있으면
며칠 전부터 기다리던 손님을 마주한 것 같다
잎에서 나는 싸아한 생강 냄새에
상처받은 뼈마디가 가뿐해질 것 같고
햇볕 잘 들고 물 잘 빠지는 곳에서 환하게 웃는
산수유나무를 보면 그날은
근심도 불편함도 뒷전으로 밀어두게 된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개나리꽃에 마음이 더 간다
그늘진 곳과 햇볕 드는 곳을 가리지 않고
본래 살던 곳과 옮겨 심은 곳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산 속이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산동네든 공장 울타리든 먼지 많은 도심이든
구분하지 않고 바람과 티끌 속에서
그곳을 환하게 바꾸며 피기 때문이다.
검은 물이 흐르는 하천 둑에서도 피고
소음과 아우성 소리에도 귀 막지 않고 피고
세속이 눅눅한 땅이나 메마른 땅을
가리지 않고 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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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대 힘겨워하지 마세요
도종환
그대 힘겨워 하지 마세요
그대의 모습이
다른 이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힘겨움을 이기지 않고
아름답게 거듭나는 것은 없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도
땡볕과 어두움과 비바람을
똑같이 견딥니다.
마을 어귀의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견디는
비와 바람을
채송화와 분꽃도 똑같이 견딥니다.
그대 거기 있다고
외로워 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것 중에
외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들판의 미루나무는 늘 들판 한 가운데서 외롭고
산비탈의 백양나무는 산비탈에서 외롭습니다.
노루는 노루대로
제 동굴에서 외롭게 밤을 지새고
다람쥐는 다람쥐대로 외롭게 잠을 청합니다.
여럿이 어울려 흔들리는 들풀도 다
저 혼자씩은 외롭습니다
제 목숨과 함께 외롭습니다.
모두들 세상에 나와 혼자 먼 길을 갑니다.
가장 힘들때에도 혼자 스스로를 다독이고
혼자 결정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외로운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나만 외로운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외롭습니다.
지금 그대 곁에 있는
사람도 그대만큼 외롭습니다.
그대가 거기 있어 외로운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대가 거기 있는 것처럼
소박한 모습으로 서서 자기들이 있는 곳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이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꽃밭으로 가꾸는 것처럼
그대도 그렇게 꽃으로 있습니다
그대 힘겨워 마세요
그대의 모습이 다른 이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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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도종환
말없이 마음이 통하고,
그래서…
말없이 서로의 일을 챙겨서 도와주고,
그래서 늘 서로 고맙게 생각하고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습니다.
방풍림처럼 바람을 막아주지만,
바람을 막아주고는
그 자리에
늘 그대로 서 있는 나무처럼
그대와 나도 그렇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이 맑아서
산 그림자를 깊게 안고 있고,
산이 높아서
물을 깊고 푸르게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산과 물이 억지로 섞여 있으려 하지 않고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거기 있지만,
그래서…
서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듯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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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런 사람
도종환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또한 헤어진다
만남과 이별의 반복 속에서
우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건만
우린 그것보다 더한 만남도
그저 쉽게 생각하고 쉽게 헤어진다
가슴 깊이 간직되어지는 그런 만남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 아닌
서로를 보듬어주고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그런 인연
한 마디의 말도 조심스럽게 하는
보이지 않는 배려로 상대방을 생각하는
작은 것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그런 만남으로 점점 더 깊어가는 인생길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정의 동무로
가슴을 열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밤이 새도록 같이 있어도 낯설지 않고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이야기보따리에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오는 것도 모른 체
같이 있고 싶은
그런 사람이 그립다?
오늘은 저 벤취에 앉아 아스라이 멀어진
그 옛날을 회상하며 옆에 있어도 없는 듯이
편안한 사람을 그리워
그런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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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움의 가을 낙엽
도종환
당신이 보고픈 마음에
높은 하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가슴에서 그리움이 복받치는데
하늘을 올려다봐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움의 흔적이
목을 타고 넘어 갑니다
당신 보고픈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까 봐
하늘을 향해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리움이
가슴에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파란 가을하늘처럼
맑은 눈 속에서
당신 보고파 자아내는
그리움의 흔적이
가슴을 적시어 옵니다
차곡차곡 쌓이는 그리움으로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처럼
내 마음에도 고운
가을의 낙엽을 쌓아보렵니다
책장 속에 넣어서
훗날 추억의 가을을 꺼내보듯이
훗날
아름다운 사랑의 가을이 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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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깊은 가을
도종환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다운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부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 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 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 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 노울의 복숭아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속으로 스이는
가을 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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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깊은 물
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 이 시냇가 여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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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꽃 밭
도종환
내가 분꽃씨 만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
내가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내 발걸음마다 채송화가 기우뚱거리며 따라왔고
무엇을 잡으려고 푸른 단풍잎 같은 손가락을
햇살 속에 내밀 때면
분꽃이 입을 열어 나팔소리를 들려주었다
왜 내가 처음 본 것이 검푸른 바다 빛이거나
짐승의 윤기 흐르는 잔등이 아니라
과꽃이 진보라 빛 향기를 흔드는 꽃밭이었을까
민들레 만하던 내가 달리아처럼 자라서
장뜰을 떠나온 뒤에도 꽃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사나운 짐승처럼 도시의 골목을 치달려갈 때면
거칠어지지 말라고 꽃들은 다가와 발목을 붙잡는다
슬픔 속에 잠겨 젖은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면
괜찮다고 괜찮다고 다독이며
꽃잎의 손수건을 내민다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다
내가 산맥을 먼저 보고 꽃밭을 보았다면
꽃밭은 작고 시시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꽃밭을 보고 앵두나무와 두타산을 보았기 때문에
산 너머 하늘이 푸르고 싱싱하게 보였다
꽃밭을 보고 살구꽃 향기를 알게 되고
연분홍 그 향기를 따라가다 강물을 만났기 때문에
삶의 유장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눈을 열어 세상을 보았을 때
거기 꽃밭이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지금도 내 옷 소매에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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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꽃 소식
도종환
날이 풀리면 한번 내려오겠다곤 했지만
햇살 좋은 날 오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물 묻은 손 바지춤에 문지르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하듯
나 화사하게 웃으며 나타난 살구꽃 앞에 섰네
헝클어진 머리 빗지도 않았는데
흙 묻고 먼지 묻은 손 털지도 않았는데
해맑은 얼굴로 소리 없이 웃으며
기다리던 그이 문 앞에 와 서 있듯
백목련 배시시 피어 내 앞에 서 있네
몇 달째 소식 없어 보고 싶던 제자들
한꺼번에 몰려와 재잘대는 날
내 더 철없이 들떠서 떠들어쌓는 날
그날 그 들뜬 목소리들처럼
언덕 아래 개나리꽃 왁자하게 피었네
나는 아직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
어어 이 일을 어쩌나
이렇게 갑자기 몰려오면 어쩌나
개나리꽃 목련꽃 살구꽃
이렇게 몰려오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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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꽃나무
도종환
성취 앞에서 저렇게 절제할 수 있을까
시련 앞에서 저렇게 겸허할 수 있을까
나무 가득 꽃피워놓고
교만하지 않는 백매화처럼
단 한잎도 붙잡지 못하고 날려보내면서
비통해하지 않는 산 벚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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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꽃다지
도종환
바람 한 줄기에도 살이 떨리는
이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이라고
내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처음 돋는 풀 한 포기보다 소중히 여겨지지 않고
민들레만큼도 화려하지 못하여
나는 흙바람 속에 조용히
내 몸을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안 뒤부터는
지나가는 당신의 그림자에
몸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고
건넛산 언덕에 살구꽃들이
당신을 향해 피는 것까지도 즐거워했습니다
내 마음은 이제 열을 지어
보아주지 않는 당신 가까이 왔습니다
당신이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로 흘러오리라 믿으며
다만 내가 당신의 무엇이 될까만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이름이 없는 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너무도 가까이 계심을 고마워하는
당신으로 인해 피어있는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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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꽃잎 인연
도종환
몸 끝을 스치고 간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 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 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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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꽃잎
도종환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시작도 알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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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비
도종환
누가 너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네가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모습의 벌레로 살았다 할지라도
누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온 몸에 독기를 가시처럼 품고
음습한 곳을 떠돌았을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의 고통스러운 변신을
기뻐하는 것이다.
네가 지금은 한 마리
작은 나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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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 마음이 그대마음
도종환
눈뜨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바로 당신이랍니다.
창 너머로
당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마음은 지금 당신의 숨소리를 느끼는 순간이고
짜릿함으로 다가오는 당신..
그리워하는 마음보고 싶어하는 마음
우리 두 사람 이 같겠지요.
마음은 나 역시 당신밖에 없으니까
모든게 당신과 연관되어 떠오르고
이 나이에 이렇게
그리운 마음 간절한거 보면
내가 당신을 많이 사랑하나 봅니다.
조금씩 조금씩 내 마음을 차지해 버린
당신이라는 사람
당신하고 밤새도록 함께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것같군요.
하루 온종일 바라봐도
또 보고 싶을 당신
내가 좋아하는 이런날엔
당신이 옆에 있다면 더 없이 좋은날이 될터인데
이제는 혼자 술을 마셔도 외롭지 않습니다.
내 곁에 언제나 있어주는 당신이니까?
당신의 아름다운 기다림에
마음이 편해집니다.
비록 만날 수는 없지만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싶은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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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
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
《24》
내가 원하던 삶을 살고 있지 않더라도
도종환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건 아니다.
삼백예순닷새 중 꽃 피우고 있는 날보다
빈 가지로 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행운목처럼 한 생에
겨우 몇번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겨울 안개를 들판 끝으로 쓸러내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나무는 빈 가지만으로도 아름답고
나무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임을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운 숲처럼 벗이 되어주고
먼 산처럼 배경 되어주면
꽃 다시 피고 잎 무성해지겠지만
꼭 그런 가능성만으로
나무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빈 몸 빈 줄기만으로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만 버림받은 듯 바람 앞에 섰다고
엄살떨지 않고 꽃 피던 날의 기억으로
허세부리지 않고 담담할 수 있어서
담백할 수 있어서 나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나무들이 다 꽃 피우고 있는 게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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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너를 만나고
도종환
버즘나무 밑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너를 만났다
시 몇 줄 쓰는 것 때문에 붉은 도장을 끊임없이 찍게 만들던
네가 아들 딸 남매와 네 아내를 데리고 그 앞에 서 있었다
나도 네 아이들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으며
집에서 초롱초롱 기다리고 있을 내 자식들을 생각했다
네가 네 자식과 네 나날의 삶을 위해 시를 썼었다
그들 모두의 사람다운 삶을 위해
나도 때론 분노하고 때론 눈물지었다
그리고 너의 그 질긴 발길과 눈매 때문에
나는 몇 해 동안 꼭 너의 그 어린 남매만 한
에미 없는 내 아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다
오늘 이 밤거리에 버스를 기다리다 너를 만나서
너와 반가운 듯이 손을 잡았다
너를 보면서 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힘주어 너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그리고 네 편안한 삶과 안녕을 물었다
너는 진정 나의 죄인가 원수인가
나는 차창 밖의 별 하나 뜨지 않은 하늘을 보며 도리질했다
칠흑의 하늘 저 뒤에 서서 결코 뉘우치지 아니 할
너무도 당당한 얼굴들을 나는 잊지 않는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변하지 않은 네 표정을 자구 지우려 애를 쓰며
그러나 나는 네가 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도리질쳤다
내가 내 작은 고난이나 어려움 따위로
너를 미워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도리질쳤다
☆★☆★☆★☆★☆★☆★☆★☆★☆★☆★☆★☆★
《26》
노란 잎
도종환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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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28》
다시 떠나는 날
도종환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
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갯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 하지만은 않기로
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두기로
산맥 앞에서도 바람 앞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기로
☆★☆★☆★☆★☆★☆★☆★☆★☆★☆★☆★☆★
《29》
다시 아침
도종환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돌아와 빗자루로 방을 쓴다
떨어져 나가고 흩어진 것들을
천천히 쓰레받기에 담는다
요란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아온 날은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찬물에 차르를 차르를 씻겨나가는
뽀얀 소리를 듣는다
앞차를 쫓아가듯 하루를 보내고 온 날은
초록에 물을 준다
꽃잎이 자라는 속도를 한참씩 바라본다
다투고 대립하고 각을 세웠던 날은
건조대에 널린 빨래와 양말을 갠다
수건과 내복을 판판하게 접으며 음악을 듣는다
가느다란 선율이 링거액처럼 몸 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다
☆★☆★☆★☆★☆★☆★☆★☆★☆★☆★☆★☆★
《30》
다시 오는 봄
도종환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 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 납니다
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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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다시 피는 꽃
도종환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돌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고 아름답게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나무도 풀 한 포기도 사람도
그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제 목숨 다 건져 수천의 알을 낳고
조용히 물밑으로 돌아가는 연어를 보라
물고기 한 마리도 영원히 살고자 할 때는
저를 버리고 가는 걸 보라
저를 살게 한 강물의 소리 알아듣고
물밑 가장 낮은 곳으로 말없이 돌아가는 물고기
제가 뿌리내렸던 대지의 목소리 귀담아 듣고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내주는 꽃과 나무
깨끗이 버리지 않고는 영원히 살 수 없다는
☆★☆★☆★☆★☆★☆★☆★☆★☆★☆★☆★☆★
《32》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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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당신은 누구십니까?
도종환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날 몇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세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때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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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도종환
우리가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했다면
더 기다리는 사람이 됩시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는 승리의 기억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더욱 세차게 달려가는 우리가 됩시다
사랑했던 사람을 미워하지 맙시다
우리의 사랑은 옳았습니다
어제까지도 우리가 거친 바람 속에 살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합시다
더 많은 땀과 눈물이 필요한 때문이라고 생각합시다
다만 내 손으로 내 살에 못을 박은 듯한 아픔은 잊지 맙시다
그가 나를 사랑한 것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하지 못해
살을 찢는 듯한 아픔으로 돌아서야 했던 것을 잊지 맙시다
아직도 때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합시다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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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동행
도종환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아픔일 때
그 위로 찬바람 불어 거리를 쓸고 갈 때
혼자 버리기엔 통증의 칼날이 너무 깊을 때
그 위로 저녁이 오고 어두워질 때
혼자 견디기엔 슬픔의 여진이 너무 클 때
그 세월 너무 길어 가늠하기 어려울 때
큰 눈물이
작은 눈물을 잠시 안아준다면
별 하나가 다른 별 하나 불러
상처의 주위를 따스하게 비춘다면
먼 길 가다 만난 나무처럼
지친 몸 기대게 해 줄 푸른 그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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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도종환
우리는 누군가 나를 정말로
포근히 안아주길 바랍니다.
편안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여자만 그렇게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남자도 그렇습니다.
젊은 남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어린이도 누군가 자기를 안아주고
인정해 주길 바라고
늙고 쇠잔해져 가는 사람들도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다 사랑 받기를 갈구합니다.
우린 너무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먼저 안아 줘 보세요.
나무든 사람이든 먼저 안아주면
그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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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따뜻한 찻잔
도종환
맨살에 손을 댔는데 참 따뜻하다
한 손으로 아래를 받치고
한 손을 둥글게 감싸 살에 대는 순간
손바닥 전체를 가득하게 밀고 들어오는 온기
오래오래 사랑스러운 사람은
뜨거운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다
아침부터 희끗희끗 눈발 치는데
두 손 감싸 뿌듯하게 살을 만지고 있다가
공손히 입술을 대는 순간
가만히 눈이 감긴다
몸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르르 녹아 내리는
한 잔의 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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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에 등대 하나 세우며
도종환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한 삶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한 삶
역경이 닥쳤을 때든
그것을 극복했을 때든
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삶
유연하되 원칙을 잃지 않는 삶
어려울 때마다 근본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삶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
《39》
만들 수만 있다면
도종환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남길 수만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며 삽시다.
가슴이 성에 낀 듯 시리고 외로웠던 뒤에도
당신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무참히 짓밟히고 으깨어진 뒤에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사나운 바람 속에서 풀잎처럼 쓰러졌다가도
우두둑 우두둑 다시 일어섰습니다.
꽃 피던 시절의 짧은 기쁨보다
꽃 지고 서리 내린 뒤의 오랜 황량함 속에서
당신과 나는 가만히 손을 잡고 마주서서
적막한 한세상을 살았습니다.
돌아서 뉘우치지 맙시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온 뒤에도 후회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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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맑은 물
도종환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 준다
만상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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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멀리 가는 물
도종환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렵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길을 가지 않는가.
때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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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무심천
도종환
한 세상 사는 동안
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욕심이라서
인연이라서
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
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
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
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
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사는 동안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어긋나고 어긋나는 사랑의 매듭
다 풀어 물살에 주고
달맞이꽃 속에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
돌아서는 텅 빈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
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욕심 다 버린 뒤
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
《43》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도종환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그리움도 설레임도 없이
날이 저문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얼굴엔 검버섯 피는데
눈물도 고통도 없이
밤이 온다
빗방울 하나에
산수유 피고 개나리도 피는데
물결도 파도도 없이
내가 저문다
☆★☆★☆★☆★☆★☆★☆★☆★☆★☆★☆★☆★
《44》
민들레
도종환
날이 가물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때가 되면 햇살 가득 넘치고 빗물 넉넉해
꽃 피고 열매맺는 일 순탄하기만 한 삶도 많지만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리 만만치 않아
어느 해엔 늦도록 추위가 물러가지 않거나
가뭄이 깊어 튼실한 꽃은커녕
몸을 지키기 어려운 때도 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들판을 떠나고
남아 있는 것들도 삶의 반경 절반으로 줄이며
떨어져나가는 제 살과 이파리들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겉보기엔 많이 빈약해지고 초췌하여 지쳐 있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남들은 제 꽃이 어떤 모양 어떤 빛깔로 비칠까 걱정할 때
곁뿌리 다 데리고 원뿌리를 곧게 곧게 아래로 내린다
꽃 피기 어려운 때일수록 두 배 세 배 깊어져간다
더욱 말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아서
☆★☆★☆★☆★☆★☆★☆★☆★☆★☆★☆★☆★
《45》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도종환
노랫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밤마다 뒤척이며 돌아눕고 있구나
그대 있는 곳까지 가다가
끝내 철썩철썩 파도소리로 변하고 마는
내 목소리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수없이 던진 소리들이
그대의 기슭에 다 못 가고
툭툭 물방울로 치솟다 떨어지는
바다 바다 음~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대가 밤마다 아름답게 별빛으로 깜박일 때
나는 대낮의 거리에서 그대를 부르고 있구나
내가 마른 꽃 한 송이 들고 물가로 갈 때
언덕 아래 가득한 어둠으로 저물던
그대와의 자전하는 이 거리 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오늘도
밤마다 뒤척이며 돌아눕고 있구나
그대 있는 곳까지 가다가
끝내 앙상한 바람소리로 흩어지고 마는
내 목소리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도종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밤마다 뒤척이며 돌아눕고 있구나
그대 있는 곳까지 가다가
끝내 철썩철썩 파도소리로 변하고 마는
내 목소리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수없이 던진 소리들이
그대의 기슭에 다 못 가고
툭툭 물방울로 치솟다 떨어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대가 별빛으로 깜박일 때
나는 대낮의 거리에서 그대를 부르고 있구나
내가 마른 꽃 한 송이 들고 물가로 갈 때
언덕 아래 가득한 어둠으로 저물던
그대와의 자전하는 이 거리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오늘도
밤마다 뒤척이며 돌아눕고 있구나
☆★☆★☆★☆★☆★☆★☆★☆★☆★☆★☆★☆★
《46》
마음에 등대 하나 세우며
도종환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한 삶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한 삶
역경이 닥쳤을 때든
그것을 극복했을 때든
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삶
유연하되 원칙을 잃지 않는 삶
어려울 때마다 근본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삶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
《47》
바람이 오면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48》
벗 하나 있었으면
도종환
마음이 울적 할때 저녁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 그리메처럼 어두워 올때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 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때
낮은 소리로 내게 다가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 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등을 쓰다뜸어 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길 갈 수 있는 벗하나 있었으면.
☆★☆★☆★☆★☆★☆★☆★☆★☆★☆★☆★☆★
《49》
벼랑에 지는 꽃
도종환
바람도 없는 허공에
들 찔레꽃 하얀 잎 하나 혼자 지고 있네요
치열하게 살았으나
욕되게 살수는 없어
벼랑 끝에 한 생애를 던진 저 한 점 꽃잎의 영혼을
하늘이여, 당신의 두 팔로 받아 안아 주소서
그의 좌절은 나의 좌절
그의 한계는 이 나라의 한계
그의 굴욕은 우리들의 굴욕
그의 자존심은 우리 모두의 자존심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뉘우치노니
그의 늑골에 금이 가는 것은
권위주의를 벗으려는 노력에 금이 가는 것
그의 정강이뼈가 부서지는 것은
지역주의를 깨보려던 시도가 부서지는 것
그가 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은
정의로운 역사를 세우려던 몸부림이 쓰러지는 것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균형발전, 평화로운 나라를 향한
간절한 소망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므로
역사여, 당신의 가슴으로
이 조각난 육신을 받아 안아 주소서
다시는 손녀딸을 자전거에 태우고 논길을 달리는
대통령을 가질 수 없을지 모르니
밀짚모자를 쓰고 구멍가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무는
소탈한 우리의 대통령을 만나지 못할지 모르니
그가 꿈꾸던 아름다운 가치들이
모조리 불에 타
허망한 연기, 한 주먹의 재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으니
잔혹한 시대여, 그를 우리의 벗으로 다시 돌려주소서
그를 조롱하고 손가락질 하던 야만의 시간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그를 업신여기고 비아냥거리던 비겁한 권력들은
지금 무슨 혀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가장 뜨거웠으나 가장 외로웠던 그
가장 도전적이었으나 가장 힘들어했던 그를
혼자 벼랑으로 걸어가게 한 이는 누구였을까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뉘우치는 눈물 발등을 적시지만
이제 어디서 그를 만나야 합니까
이 땅의 슬픈 역사여,
아아, 대한민국이여!
☆★☆★☆★☆★☆★☆★☆★☆★☆★☆★☆★☆★
《50》
별 아래 서서
도종환
별 하나 흐르다 머리 위에 머뭅니다
나도 따라 흐르다 별 아래에 섭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섰어도
늘상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함께 사랑하고 기뻐한 시간보다
헤어져 그리워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만났던 시간은 짧고
나머지는 기다리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어느 하늘 어느 땅 아래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떠나간 마음들 그리워 별만 바라봅니다
☆★☆★☆★☆★☆★☆★☆★☆★☆★☆★☆★☆★
《51》
별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도종환
흐린 차창 밖으로
별 하나가 따라온다.
참 오래되었다.
저 별이 내 주위를 맴돈 지
돌아보면 문득
저 별이 있다.
내가 별을 떠날 때가 있어도
별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 별처럼 있고 싶다.
상처받고 돌아오는 밤길
돌아보면 문득
거기 있는 별 하나
괜찮다고 나는 네 편이라고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
이만치의 거리에서
손 흔들어주는
따뜻한 눈빛으로 있고 싶다.
☆★☆★☆★☆★☆★☆★☆★☆★☆★☆★☆★☆★
《52》
부드러운 직선
도종환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 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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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빗속에서
도종환
눈을 감고 당신을 생각합니다
눈을 뜨고 당신을 생각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눈물을 씻으며 당신을 잊으리라 합니다
비 오는 거리를 걸으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비를 맞으며 걷다가 당신을 잊으리라 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또다시 잊으리라 잊으리라 돌아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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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빛깔
도종환
봄에는 봄의 빛깔이 있고 여름에는 여름의 빛깔이 있다
겨울 지등산은 지등산의 빛깔이 있고
가을 달래강에는 달래강의 빛깔이 있다
오늘 거리에서 만난 입 다문 이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살아오면서 몸에 밴 저마다의 빛깔이 있다
아직도 찾지 못한 나의 빛깔은 무엇일까
산에서도 거리에서도 변치 않을 나의 빛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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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도종환
우리는 누군가 나를 정말로
포근히 안아주길 바랍니다.
편안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여자만 그렇게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남자도 그렇습니다.
젊은 남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어린이도 누군가 자기를 안아주고
인정해 주길 바라고,
늙고 쇠잔해져 가는 사람들도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다 사랑 받기를 갈구합니다.
우린 너무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먼저 안아줘 보세요.
나무든 사람이든 먼저 안아주면
그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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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사랑 업
도종환
이 세상에는 저만 모른 채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저만 모른 채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동안
제가 불을 붙이고
창을 열어 꺼뜨린 촛불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쌓은 선업과 악업이
사랑과 미움으로 자라는 동안
저만 모르는 채 떴다 지는
별 몇 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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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도종환
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움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 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하늘 한복판으로 달아오르며 가는 태양처럼
한번 사랑하고 난 뒤
서쪽 산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노을처럼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면서 얼지 않아
골짝의 언 것들을 녹이며 가는 물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인데
제 사랑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둔 숲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닮아 얼굴이 따라 닮아 오래 묵은 벗처럼
그렇게 살며 늙어 가는 일인데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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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사랑의 길
도종환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 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 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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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사랑의 침묵
도종환
꽃들에게 내 아픔 숨기고 싶네
내 슬픔 알게 되면 꽃들도 울 테니까
얼음이 녹고 다시 봄은 찾아와
강물이 내게 부드럽게 말 걸어올 때도
내 슬픔 강물에게 말하지 않겠네
강물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아파하며
눈물로 온 들을 적시며 갈 테니까
겨울이 끝나고 북서풍 물러갈 무렵엔
우리 사랑 끝나야 하는 이유를
나는 바람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이제 막 눈을 뜨는 햇살에게도
삶이 왜 괴로움인지 말하지 않겠네
새 떼들 돌아오고 들꽃 잠에서 깨어나도
아직은 아직은 말하지 않겠네
떠나는 사랑 붙잡을 수 없는 진짜 이유를
꽃들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슬퍼하며
아름다운 꽃잎 일찍 떨구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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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아픈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들판일수록 좋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한 장일수록 좋다.
누군가가 와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단 한 가지 빛깔의 여백으로 가득 찬 마음,
그 마음의 한쪽 페이지에는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을 마시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우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마르지 않고,
나누어 마시면 마실수록 단맛이 난다.
사랑은 가난할수록 좋다.
사랑은 풍부하거나 화려하면 빛을 잃는다.
겉으로 보아 가난한 사람은 속으로는
알찬 수확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풍요롭게,
포장은 검소해야 오래 가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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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 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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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사랑하면 보인다
도종환
그렇다. 사랑하면 보인다
꽃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사랑하면 비로소 그가 보인다
어디에 있어도 늘 함께 있는
그가 보인다.
참으로 아름다워
그 꽃을 떠나지 못하다가
돌아서면 다시 그리워지는 꽃
배롱나무가 내게 그런 꽃이 되어 버렸듯
사람마다 그런 사랑이 있을 것이다
눈 들어 잘 보라
당신 가까이에 그런 꽃이 있다.
늘 보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다가
비로소 눈에 보이는 꽃
그런 사랑스러운 꽃이
당신 곁 어딘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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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사려니 숲길
도종환
어제도 사막 모래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배 열배나 큰 나무들이
몇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준 걸
고맙게 받아 들일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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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산경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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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산을 오르며
도종환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며 느끼고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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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새해 기도
도종환
새해 첫 아침 햇살은
창문 열고 기지개를 켜는 아이의
밝은 얼굴 위에
제일 먼저 비치게 하소서
숲의 나뭇가지 하나하나에
햇뱇이 골고루 내려앉듯
이 땅의 모든 아이들 빛나는 눈동자 위에
맑게 출렁이는 가슴 위에
빠짐없이 내리게 하소서
골짜기 깊은 곳에도
손잡을 곳 하나 없는 바위 벼랑에도
늪가의 젖은 풀 위에도
아침 챗살이 환하게 번져 가듯
그늘 지고 가파르고 슾한 곳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도 새날의 햇볕이
따뜻한 걸음으로 찾아가게 하소서
산과 개울과 숲 어디에나 내리는 햇뱇이지만
산은 산대로
개울과 나무는 개울과 나무대로
저마다 저를 위해 햇빛이 와 있다고 믿듯
아이들도 늘 저를 위해 준비된
사랑이 따스하게 떠오르고 있다고
믿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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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설레임
도종환
들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다가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 몇 송이를 골라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다가
그 음악의 가장 가슴 저미는 부분을 모아
누군가에게 전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동강처럼 아름다운 강가에 갔다가
푸른 산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오는 맑은 물과
한 폭의 한국화 같은 풍경 속에
꼭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지금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마음이 푸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푸른 잎새로 살아가는 사람을 오늘 만나고 싶다”
이런 시를 읽다 말고 시집을 덮으며
편지지에 옮겨 적게 되는 사람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판대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서서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물건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단순하고 솔직한, 그래서 한편으론 통속적이기도 한
유행가의 노랫말 몇 구절이 자신도 모르게
며칠씩 입에서 되풀이해서 흘러나오는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비록 혼자 사랑일지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때처럼 아름다운 때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빗발과 나뭇가지처럼
서로 스미지 못하고 바람과 구름처럼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자기 생에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만큼
아름다운 시절은 없습니다.
그 시절만큼 마음이 순수해지고 맑아지는 때는 없습니다.
사랑하고 있는 동안처럼 순수하게 설레고 가슴 조이는 시간은 없습니다.
생에 있어서 그렇게 설레는 때가 많이 오는 게 아닙니다.
설레임을 잊은 지 오래인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문 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전화벨 소리, 낮은 숨소리 하나까지
온몸의 솜털이 모조리 일어서곤 하던
그 기대와 기쁨과 환희와 좌절과 실망을.
사랑의 기쁨이 왜 고통이고 사랑의 아픔이 왜 행복인지를.
천지에 꽃은 가득가득 피는데 설레임도 두근거림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구나 하고 느끼는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
《68》
세월
도종환
여름 오면 겨울 잊고
가을 오면 여름 잊듯
그렇게 살라 한다
정녕 이토록 잊을 수 없는데
씨앗 들면 꽃 지던 일 생각지 아니하듯
살면서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여름 오면
기다리던 꽃
꼭 다시 핀다는 믿음을
구름은 자꾸 손 내저으며 그만두라 한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하루 한낮
개울가 돌처럼 부대끼다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망초 꽃 내 앞을 막아서며
잊었다 흔들리다 그렇게 살라 한다
흔들리다 잊었다 그렇게 살라 한다
☆★☆★☆★☆★☆★☆★☆★☆★☆★☆★☆★☆★
《69》
세한도
도종환
소한이 가까워지자 눈이 내리고 날이 추워져
그대 말대로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은 더욱 빛난다
나도 그대처럼 꺾인 나무보다 꼿꼿한
어린 나무에 더 유정한 마음을 품어
가지를 매만지며 눈을 털어낸다
이미 많은 새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난 지 오래인데
잔가지로 성글게 엮은 집에서 내려오는 텃새들은
눈 속에서 어떻게 찬 밤을 지샜을까
떠나지 못한 새들의 울음소리에 깨어
어깨를 털고 서 있는 버즘나무 백양나무
열매를 많이 달고 서 있는 까닭에
허리에 무수리 돌을 맞은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소나무 잣나무에 가려 똑같이 푸른빛을 잃지 않았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측백나무
폭설에 덮인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은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발아래 밟히며 부서지는 눈과 얼음처럼
그동안 우리가 쌓은 것들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대륙을 건너와 눈을 몰아다 뿌리는
냉혹한 비음의 바람 소리
언제쯤 그칠 것인지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기나긴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가던 길
그대 오만한 손으로 떼어냈던
편액의 글씨를 끄덕이며 다시 걸었듯
나도 이 버림받은 세월이 끝나게 되면
내 손으로 떼어냈던 것들을 다시 걸리라
한 계단 내려서서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그대 이름을 불러보리라
이 싸늘한 세월 천지를 덮은 눈 속에서
녹다가 얼어붙어 빙판이 되어버린 숲길에서
☆★☆★☆★☆★☆★☆★☆★☆★☆★☆★☆★☆★
《70》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도종환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찾아냅니다
수없이 많은 목소리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찾아냅니다
오늘도 이 거리에 물밀듯
사람들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구름처럼 다가오고
흩어지는 세월 속으로
우리도 함께 밀려왔단 흩어져갑니다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오늘도 먼 곳에 서 있는
당신의 미소를 찾아냅니다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먼 길 속에서
당신은 먼발치에 있고 ?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나 역시 작게 있지만
거리를 가득가득 메운
거센 목소리와 우렁찬 손짓 속으로
우리도 솟아올랐단 꺼지고
사그러졌다간 일어 서면서
결국은 오늘도 악수 한번 없이
따로따로 흩어지지만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수없이 많은 눈빛 속에서
당신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
《71》
스승의 기도
도종환
날려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듯
저희가 아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당신께 그러하듯
아이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거짓없이 가르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저희가 있을 수 있듯
저희가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힘차게 나는 날개 짓을 가르치고
세상을 올곧게 보는 눈을 갖게 하고
이윽고 그들이 하늘너머 날아가고 난 뒤
오래도록 비어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그 풍경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일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저희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더더욱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
《72》
슬픔의 통로
도종환
별들이 유난히 가까이 내려오는 밤이 있다
그믐이 다가올수록 어둠은 더 많은 별을 내보낸다
동굴 속에서 몇날 며칠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킨
한 사내를 생각한다 불씨를 만든 것은
얼어터진 두 손이었을까 혹독한 한파였을까
삼나무를 쪼개 배를 만들게 한 것은 거친 물결
지도를 만든 것은 오랜 방황과 잃어버린 발자국
기도를 알게 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을까
사랑을 가르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경전을 쓰게 한 것은 해결할 길 없는 고뇌
시인을 만든 것은 열망이 아니라 슬픔 아니었을까
지금 가눌 길 없는 비통함으로 쓰러져 있지만
이 통증의 끝에는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삶과 죽음이 완만한 속도로 임무를 교대하듯
슬픔 속에서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시간이 오리라
지금은 다만 천천히 깊은 슬픔의 통로를 걸어나갈 것
서둘러 눈물을 닦지 말고 흐르게 둘 것
여기까지 우리를 밀고 온 것이 좌절의 힘이었듯
약초를 알게 한 것이 상처와 고통이었듯
패배를 딛고 처절하게 한발 한발 걸어나갈 것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다스려 온기로 바꿀 것
지금은 따뜻한 위로의 물 한잔을 건넬 시간
남을 찌르지 말고 피 묻은 분노의 칼을 거둘 것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바람에 머리칼과 아픈 영혼을 맡길 것
마음의 안부를 물어볼 것
그리고 창을 열 것
그러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되리니
그쪽으로 갈 것
그러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가시리니
☆★☆★☆★☆★☆★☆★☆★☆★☆★☆★☆★☆★
《73》
쓸쓸한 풍경
도종환
쓸쓸한 지 오래되었다
들 끝의 마루나무 한 그루
내 안에 혼자 서 있은 지
오래되었다
나뭇잎 무수히 떨리는 소리로
낯선 산기슭 떠도는 지
오래되었다
언덕의 나무들을 만나도
그 중 쓸쓸한 풍경만 만나고
강줄기를 따라 가다가도
시린 저녁 물빛 옆에서만
오래오래 머물렀다
서산 너머로 달이 지듯
소리 없이 사랑도 저물면서
풍경의 안에서고 밖에서고
쓸쓸한 지 오래되었다
☆★☆★☆★☆★☆★☆★☆★☆★☆★☆★☆★☆★
《74》
아름다운 길
도종환
너는 내게 아름다운 길로 가자 했다.
너와 함께 간 그 길에 꽃이 피고 단풍 들고
길 옆으로 영롱한 음표들을 던지며 개울물이 흘렀지만
겨울이 되자 그 길도 걸음을 뗄 수 없는 빙판으로 변했다.
너는 내게 끝없이 넓은 벌판을 보여달라 했다.
네 손을 잡고 찾아간 들에는 온갖 풀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 몸 구석구석은 푸른 물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빗줄기가 물아치자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내 팔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넘어질 때 너도 따라 쓰러졌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세찬 바람 불어올 때마다
너도 그 바람에 꼼짝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밤새 눈이 내리고 날이 밝아도
눈보라 그치지 않는 아침
너와 함께 눈 쌓인 언덕을 오른다.
빙판 없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며 함께 꽃잎 같은 발자국을 눈 위에 찍으며
넘어야 할 고개 앞에 서서 다시 네 손을 잡는다.
쓰러지지 않으며 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눈보라 진눈깨비 없는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
《75》
아름다운 세상에 티끌 같은 나 하나
도종환
말 한마디하기가 두렵습니다
글 한 줄 쓰기가 두렵습니다
겨울나무 가지 끝에 팔랑팔랑 소리날 듯
별들이 걸렸는데
어찌나 겨울하늘 아름다운지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 만나 그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길이 바르게 가는 길이라 믿어
뒤돌아보지 않고 오랜 날을 왔습니다
강물도 언 살을 서로 섞은 채
어두운 곳을 저희끼리 몰려갑니다
저녁때는 물오리떼 작은 발도 씻어주고
손 흔드는 갈대풀과 소리치며 떠들기도 하더니
아무도 없는 곳을 묵묵히 감돌아 갑니다
외롭다 말 안하고 오래오래 젖어서 갑니다
우리도 작은 불 켜들고 자갈길 가다가
앞서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 보며 분노합니다
여기저기 어두운 곳에 버려진 말들을 주워들고 흥분합니다
그러다 별밭을 올려다보며 두려워집니다
나도 또한 바르게 사는지 두려워집니다
우리가 가는 발자국 위에 길을 내며 따라오는
언제나 우리보다 더 올곧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손끝이 시린 강바람 헤치며
뒤돌아보지 않고 이 길을 가지만
아름다운 세상에 티끌 같은 나 하나 두렵습니다.
☆★☆★☆★☆★☆★☆★☆★☆★☆★☆★☆★☆★
《76》
아무도 없는 별
도종환
아무도 없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달맞이꽃이 피지 않는 별에선
해바라기도 함께 피어나지 않고
폭풍우와 해일이 없는 곳에선
등 푸른 물고기도 그대의 애인도 살 수 없다
때로는 화산이 터져 불줄기가
온 땅을 휩쓸고 지나고
그대를 미워하는 마음 산을 덮어도
미움과 사랑과 용서의 긴 밤이 없는 곳에선
반딧불이 한 마리도 살 수 없다
때로는 빗줄기가 마을을 다 덮고도 남았는데
어느 날은 물 한 방울 만날 수 없어
목마름으로 쓰러져도
그 물로 인해 우리가 사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낙엽이 지고 산불에
산맥의 허리가 다 타들어가도
외로운 긴 밤과 기다림의 새벽이 있어서
우리가 이 별에서 사는 것이다
☆★☆★☆★☆★☆★☆★☆★☆★☆★☆★☆★☆★
《77》
아홉 가지 기도
도종환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깊은 허무에 빠져 기도합니다.
그러나 허무 옆에 바로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우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죄와 허물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죄와 허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내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도 늘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모든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용서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굳셈과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욱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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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어떤 날
도종환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 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소쩍새 소리를
천천히 가지고 되오는 동안
밤도 오고
별 하나 손에 닿는 대로 따다가
옷섶으로 닦고 또 닦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뭇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겁의 강물 위를 소리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무상 흘러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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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어릴 때 내 꿈은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 가는 봄 흙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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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어미 새 아기 새
도종환
또부르르 또부르르 짹
어미 새가 가르치면
떠블 떠블 찍
따라하는 아기 새
아카시꽃 필 때부터
찔레꽃 질 때까지 가르쳤는데도
아직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는
아기 새를
오늘도 또 가르치려고
곁에 와 부리를 세우는
어미 새가 예쁘다
갈참나무 잎 연녹색일 때부터
푸르른 그늘에 몸이
가릴 때까지 배웠어도
그 소리밖에 못 하지만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뭐 하면서
상수리나무 가지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
아기 새도 예쁘다
또부르르 또부르르 짹
떠블 떠블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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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여백
도종환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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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오늘 하루
도종환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은 많이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고
책 한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깊이 묻혀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도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혁명의 미래를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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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오월 편지
도종환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있는 자리마다 깊디깊은 침묵이 앉습니다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봄이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다 그러하겠지만
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멥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 없이 흔들리는 붓꽃 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가득
몰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 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 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 와 머물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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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오프라인증후군
도종환
도심에 들어서면 나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미끄러진다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서서 기다리는 짧은 동안
내 몸은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하다
지하철에서는 어떻게든 몸을 부딪치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퇴근길에 화물이 된 몸들 사이에 빼곡이 끼어 있으면서도
나는 연신 주문을 외운다
닿지 않았다고 닿은 게 아니라고
타자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서서히 경직된다 겉돈다
웃어도 안 되고 긴장을 풀어도 안 되는 내 얼굴
내 피톨들은 딱딱하게 굳어진 채로
토사물처럼 문 밖으로 토해지곤 한다
나는 기도로 잘못 들어간 음식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라인으로 밀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나를 부르면
나는 다시 활기를 찾고 치아는 생기에 넘친다
근육은 명랑해지며 여유는 제 얼굴을 되찾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만 편안해지는 목소리
무선으로만 소통이 가능해지는 짧은 시간이 끝나면
나는 다시 경계하며 거리를 걷는다
내 앞을 가로막는 유령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그림자를 끌고 간다 오프라인에서
어쩌면 나도 유령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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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도종환
견우 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 나눠 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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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시 감상 잘하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