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 때문에 내 수행이 쇼가 됐다"
종교는 신앙 아닌 윤리로 가야…석가모니는 불자가 아니었고 예수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형태일 뿐 베푸는 마음 실천해야 참종교다
한 걸음
지난달 경기도의 한 조계종 선원에 '와~' 하고 환호성이 터졌다. 푸른 눈의 외국인 승려를 향한 것이었다. 사진을 함께 찍어달라는 요청도 쏟아졌다. 무시한 채 문을 나서려던 승려가 돌아서서 버럭 소릴 지른다. "이 못생긴 미국 상놈 봐서 뭐해요? 거울에 비친 당신 자신, '참나'를 봐야지!"
이틀 뒤 승려는 서울 방배동 불교TV 법회장에 나타났다. 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지른 승려는 높은 단상 위로 몸을 날리더니 눈 깜짝할 새 가부좌를 틀었다. 승려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세상에서 이 자세가 제일 편해, 정말 좋아요."
현각(玄覺·46). 하버드대 출신의 선승(禪僧)이라 하여 세상 이목을 집중시켰고, 28세 꽃 같은 나이에 삭발하고 출가한 사연을 적은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출간, 한국 불교계에 일약 '스타'로 떠오른 승려. 동그란 금속테 안경을 쓰고 참선하는 그의 사진(김홍희 작)은 일반에도 선명히 각인되어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국내든 국외든 그가 여는 법회에는 수백 명의 대중이 몰렸고, 법회가 끝나면 그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랬던 현각이 돌연 한국을 떠났다. 2008년의 일이다. 명분은 '유럽 만행(萬行)'이었지만, 스님은 "스승이신 숭산스님이 입적(2004년)한 날부터 한국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고 했다. 가장 큰 이유는 "폭풍(perfect storm)처럼 몰아닥친 명성"이었다. "수행이 아니라, 그야말로 '쇼'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지요." 한국을 떠난 그는 유럽 만행을 거쳐 2009년 독일 뮌헨에 정착, '불이선원'이라는 선방을 개원했다.
G20 정상회의를 기념해 열린 '세계종교지도자대회' 참석차 지난달 서울에 온 스님을 만나 '만행' 이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겼지만 20대 청년처럼 여전히 혈기왕성한 스님은 특유의 직설화법과 유머, 거침없는 제스처로 시원시원한 답변을 내놨다. 난처한 질문에는 '선문답'으로 응수했다.
- ▲ "길[道]은 걸어가야만 높은지 낮은지 비로소 알 수 있다.”종교는 신앙이 아니라 윤리로, 그 보편적인 윤리의‘실천’으로 가야 참종교라고 강조하는 현각스님. 모처럼 한국에 온 스님의 하루는 바빴다. 스님을 찾는 곳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불교TV 법회가 끝난 뒤 간신히 촬영 시간을 얻었다. 스님은 웃지 않았다. 외로워지고 싶은 수행자의 생활이 서울에서는 불가능한 탓이었을까.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 ▲ "참종교? 배고픈 자에게 밥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 주시라.”현각스님의 법회는 언제나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눈빛, 제스처, 거침없는 웅변은 불자는 물론 일반 대중들을 사로잡는다. / 이진한 기자
―세계종교지도자대회에서 말씀을 너무 짧게 하시더라. 모처럼 스님 말씀 들으러 온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선승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회에서) 프랑스에서 온 패널 한 분이 대단한 말씀을 하셨다. 종교는 신앙이 아니라 윤리로 가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우리는 종교를 버려야 한다. 평화 대신 전쟁, 갈등과 환경만 파괴하는 종교는 이제 버려야 한다. 2010년이 되었는데 인간이 여전히 종교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스님 또한 불교에 몸담고 계시지 않나.
"이건 껍질일 뿐이다. 석가모니는 불자가 아니었다. 예수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종교를 만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개신교의 가르침은 많은 부분 예수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 종교가 종교다워지려면 보편적 윤리, 사랑하고 베푸는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신앙이 아니라 윤리로 가야 한다는 말은, 예수나 부처에 대한 신격화 혹은 숭배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형태일 뿐이다. 종교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생활에서 실천해 나갈 때 참종교가 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말씀은 '나의 말을 믿지 마라, 내가 말했기 때문에 믿으면 안 된다'였다. 맹목적인 믿음은 종교의 독이다."
―왜 한국을 떠나셨나.
"아까 보지 않았나. 법당에서 기도하시던 분들이 연예인이 온 줄 알고 달려나오더라. 내 죄다. 애초에 내가 무슨 계획을 세워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지만, 수행자로서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매스컴을 통해 갑자기 유명해지니 법회, 특강, 주례, 인터뷰 요청이 줄을 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회의가 들었다."
―하버드 출신이라는 것,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이 폭풍인기에 한몫했다.
"그래서 창피했다. 수행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야 하는데, 나의 겉모습은 사람들에게 유혹만 주었다. 일본에 아름다운 비구니 스님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면 사랑에 빠지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이 칼로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했다. 내가 그 비구니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말라. 비슷한 심정이었다는 얘기다."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처음 하셨나.
"2004년 숭산 스님 열반하시던 날. 바로 떠났어야 했는데 한국 불교의 세계화라는 은사 스님의 일이 안정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한국 불교계와 갈등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
―일부에서는 현각을 마뜩잖게 여기는 한국 스님들이 적지 않았다고 하더라.
"모르겠다. 만일 그랬다면 나의 스님답지 않은 언행,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법회할 때 하도 요란스럽게 하니까 주위에서 '스님이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말했다. 나는 한국 스님 되려고 온 거 아니다. 참나를 찾으러 왔다." ―스님은 늘 한국 불교를 예찬만 하시더라. 떠나 계시니 이제 쓴소리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가르침만 받았다.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러지 마시고 한 말씀 해달라.
"당신이 미국 우리 집에 와서 2~3주 살다 나가면서 저 집은 이렇더라 저렇더라 흉보면 우리 가족은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선(禪)불교는 재즈다
폴 뮌젠이 본명인 현각은 미국 뉴저지의 보수적인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일곱째였던 현각은 예일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칸트,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등 독일 철학에 심취했고 쇼펜하우어를 통해 불교를 처음 접했다. 하버드 재학시절 화계사 조실 숭산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스님 물음에 할 말을 잃자, '하버드 학생이 당신 자신을 모른단 말인가?' 하며 껄껄 웃으시더라. 완전히 다른 세계, 다른 코드였다."
―'만행' 책에 보니 유달리 총명했던 아들에게 부모님 기대가 엄청났더라.
"삭발하고 처음 집에 들어간 날 부모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보단 불교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지만 아쉬움은 여전하시다. 어머니가 그러더라. 오바마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는데 그 뒤로 너의 동창 몇이 서 있더구나, 하고."
―어릴 때 어떤 아이였나.
"말썽꾸러기! 오늘날까지도. 난 반듯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공부는 잘하지 않았나.
"음…. 누가 그림을 잘 그리듯이 난 공부를 잘했을 뿐이다. 어렵지 않았다. 내겐 '재미'와 '도전'이 중요했다. 착한 아이들은 어른들 말씀대로 살지만, 난 넘어지고 다치면서 배우는 걸 좋아했다. 남들 기대에 따라 사는 것, 예측 가능한 결과는 얼마나 재미없고 무료한가."
―정치를 하셨어도 잘했을 것 같다. 선동가 타입?
"그런 말 많이 들었다. 글쎄. 정치를 했다면 나의 내면은 죽지 않았을까? 겉으로 멋져 보일지 모르지만 내 안에서 과연 행복했을까?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나?"
―즐거워 보이신다. 에너지 넘치고.
"보이는 대로다. 선불교는 재즈다. 선승의 생활은 재즈와 같다. 많은 종교들이 형식과 틀, 어떤 룰을 강조하는데 선불교는 다르다. 재즈처럼 자유롭고 즉흥적인 연주를 할 수 있다. 나는 선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불교가 재즈라니?
"히피로서도, 예술가로도 자유롭게 살 수는 있다. 불교의 자유는 다르다. '작은 나'를 벗어나 남을 위해 자유하는 것이 불교다. 미국에서 자유, 자유를 외치지만 기분 나쁘면 총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탕' 쏠 수 있는 자유들이 난무한다. 여기 포크가 있다. 이 포크는 나의 생각 방향에 따라 음식을 집어먹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찌를 수 있는 무기도 된다. 불교가 말하는 자유는 에고(ego)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남을 위한 자유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결혼한다고 해서 '참선'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나.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오로지 '나'를 생각하게 된다."
―지난해 유럽 가톨릭 교회들이 사제들의 '섹스 스캔들'로 비난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신부나 수행자들의 결혼을 금하는 것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나왔다.
"나는 수도승이다. 그것이 나의 답이다."
- ▲ 30대의 현각스님 모습. 베스트셀러‘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표지 사진으로도 쓰인 이 사진은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상징하는 아이 콘이 되었다. / 사진작가 김홍희 제공
나는 외로워지고 싶었다
외국인 승려 현각은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일익을 담당한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법정 스님이 '깨달음의 거울'이라는 책으로 우리말로 풀이한 것을, 2006년 영문으로 번역, '미러 오브 젠(The Mirror of Zen)'이라는 책으로 미국과 유럽에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서산대사가 후학을 올바른 수행의 길로 이끌기 위해 50여 종의 경론과 조사의 어록에서 요긴한 대목을 간추려 설명한 책으로 공부 방법과 화두, 수행의 경로 등을 밝힌 선의 명저다.
―법정 스님과는 어떻게 알게 됐나.
"2004년 봄, 스님이 나를 길상사로 부르셨다. '깨달음의 거울'이란 책을 주시며 영문으로 번역해달라 부탁하셨다. 고사했다. 난 학자도 아니고, 한자도 모르는 수행승이지 않나. 그런데 스님이 '네가 공부 열심히 한다는 소리 들었다, 번역할 자격이 있다' 하시더라. 서산대사가 조선시대에 쓴 책을 서양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수적인 직역보단 의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가 필요 없는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다."
―법정 스님은 어떤 분으로 기억하나.
"모범 수자.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반듯한 수행자."
―'오두막에 살면서 수행정진 하고 싶다'고 하자 법정 스님이 '자네는 살 수 없다'고 하셨다던데.
"나처럼 키 크고, 코 크고, 얼굴 허연 승려가 와 있으면 이 마을 저 마을로 소문이 나니 조용히 살기 힘들 거란 뜻이었다."
―오두막에 살고 싶으셨나.
"물론이다. 잠시 산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그런데 등산객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보더라.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숭산 스님은 영웅이자 원수
―하버드의 엘리트를 한국의 절간으로 불러들인 숭산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
"가끔은 아버지였고, 가끔은 어머니였다. 코치이자 트레이너였고, 영웅이자 원수였다."
―원수라고 했나?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런 식의 감동이 없는 사람, 드라마가 없는 사람은 스승이 아니다."
―많이 혼나셨다 보다.
"책(만행) 냈을 때. 나이도 어리고 수행 경험도 짧은 제자가 자기를 빨리 과시하려는 욕심으로 보이셨을 테니. 표지에 얼굴도 나오지 않았겠나. 하지만 내겐 스승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무엇인가.
"그때만 해도 숭산의 사상은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자들로서는 이를 집대성할 사명이 있어서 이런저런 출판사로 타진하고 있었는데, IMF 외환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모두 거절당했다. 그때 한 출판사가 내 출가기를 써주면 스승의 책도 함께 출판해주겠다고 했다. 솔깃했다. 고민 끝에 계약했고 6주일 만에 원고를 썼다. 탈고한 뒤 100일간 안거에 들어갔는데 마치고 나와 보니 난리가 났더라. 그 책 때문에 숭산 스님도 세상에 더 크게 알려졌다."
―오로지 스승의 책 때문에 '만행'을 출간했나?
"나는 한국인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전통과 철학이 있는지 일깨워주고 싶었다. 1990년대 초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자기의 좋은 전통을 버리고 미국 사람들 사는 대로, 입고 먹는 대로 쫓아가는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양 세계는 동양의 정신과 철학을 배우려고 안달인데.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불교 서적을 읽는 것은 피어싱과 함께 젊은 세대들의 최신 트렌드였다. 당신이 구식이라고 버린 이 스카프를 다른 사람들이 주워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고 열광하면, 버린 스카프를 다시 갖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나? 내 책이 그런 역할 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요즘 '만행' 책을 구할 수가 없더라.
"절판시켰다. 책 때문에 겪은 고통이 컸다. 일반인, 심지어 도반들로부터도 돈 많이 벌었겠다는 질문이 나오더라. 책을 내니 '아침마당'에도 나가야 하고, 라디오도 나가야 하고 특강도 해야 하고. 연예인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수행자로 살고 싶었다."
―'만행'이 수십만부 팔렸다. 인세는 어디에 쓰셨나.
"책의 마지막 장에 쓴 대로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숭산 스님의 큰 뜻을 이루는 데 기부했다."
―숭산 스님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산은 항상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왔다 가는 길이 아니요, 있었다 사라지는 길이 아니다. 자연 그대로일 뿐."
제일 좋아하는 불경은 '순간경'
―독일선방 얘기를 들려달라. 왜 뮌헨에 정착하셨나.
"유럽을 만행하면서 수행 정진할 자리를 찾던 차에 독일 불자들을 만났다. 수행 정진을 도와달라고 하여 뮌헨에 머무르게 됐다."
―한국 사찰의 모습은 아닐 텐데.
"작은 주택을 빌려 선방을 꾸몄다. 일반 수행자가 40명 정도. 절반은 한국 교포들이다."
―선방 이름이 '불이선원'이다.
"불이(不二)는 불교의 기본 사상이다. 당신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본성은 하나라는 얘기다. 침, 오줌, 비, 눈, 눈물…. 모양과 색깔, 냄새는 다르지만 모두 H₂O다. 둘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둘을 만들어서 너는 틀리고 내가 옳다고 싸우는 거다. 한국의 젊은 개신교 신도들이 주도한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은 거기서 비롯됐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자살·폭탄테러도 마찬가지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독일과 여전히 둘로 나뉜 한국은 그래서 내게 각별하다. 분단이 지속될수록 배타성, 이질감만 커진다. 불교가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이 심심하진 않나. 한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에서 살다 가셨으니.
"거제도에서 기암절벽을 구경하는데 배 안에 '뽕짝'이 쿵작쿵작 울려 퍼지더라. 선장에게 소리 좀 줄여달라 부탁했더니 뽕짝을 안 틀면 승객들이 심심해한다고 했다. 한국이 내게 준 가르침 중 하나가 센세이션과 자극이다.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고요와 평화, 여백을 즐길 줄 모른다. 카페에 가보라. 연인이 나란히 앉아 스마트폰만 열심히 문질러대고 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며 108배를 하는데 주머니에선 휴대폰이 쩌렁쩌렁 울려댄다. 걱정스럽다."
―한국에서 수행하던 때보다 힘든 일 많으실 것 같다.
"도반들, 한국 스님들이 많이 도와주시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다. 식당 접시닦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많은 신도들이 수발해주시던 한국 생활이 그립지는 않나.
"그립지 않다."
―불교TV 법회 때 보니, 법문이 끝난 뒤 많은 신도들이 스님과 친견하려고 줄을 섰더라. 한국에 오면 그 인기를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유명해지는 것은 나의 계획도, 야망도 아니었다. 그것은 폭풍처럼 찾아왔다. 나는 그 유명세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최선의 방식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명성은 또 다른 짐이자 고통이란 걸 알았다. 외로워지기 위해 유럽으로 갔다. 내가 거기에서 또다시 유명해진다면 나는 또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선불교의 위대한 스승인 경허 스님도 자신이 유명해지자 자취를 감추었다. 몇년 뒤 그는 작은 시골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평상복에 긴 머리, 긴 수염을 하고서. 나도 언젠가 그런 모습으로 살게 되지 않을까 상상한다."
―가끔 수행하기 싫을 때 있지 않나? 세상에 재미난 일이 많은데.
"진짜 그런가? 세속의 재미는 나타났다 사라진다. 권태에 빠져들기 쉽다. 수행자가 되기 전 내 삶은 항상 무언가를 좇는 삶이었다. 돈, 명예, 권력, 사랑…. 사람들은 달콤한 속세의 것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었느냐 묻지만 그건 꿀이 아니라 독이었다. 승려의 길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운이 좋았다."
―출가하신 지 20년이 되어간다. '참나'를 찾았는가.
"지금 마시는 이 커피의 향이 참 좋지 않은가."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기억하는 불자들이 많더라. 제일 좋아하시는 경은 무엇인가.
"순간경! 이 커피향을 맡는 순간, 재즈를 듣는 순간, 걷고 이야기하고 시장에 가는 모든 순간,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친구와 악수를 하면서 감촉을 나누는 순간, 순간, 순간….
현각은
1964년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하버드대학원 재학 중 화계사 조실 숭산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1992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한국 선불교 본부 격인 참선 전문사찰 홍법원의 주지를 지냈고, 숭산의 설법집 ‘선의 나침반(The Compass of Zen)’과 ‘세계일화(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을 영어로 번역했다. 97년엔 출가 사연을 적은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출간해 대중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고, 2006년에는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영어로 번역했다. 2009년부터 독일 뮌헨에 거주하며 ‘불이선원’을 열고 있다.
[제작노트] 까칠했던 스님의 '쩌렁쩌렁 인터뷰'
박은주 기획취재부장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10.12.11 03:03 / 수정 : 2010.12.11 15:06
▨Why?는 자발적으로 "만나자"는 사람보다는 "안 만나겠다"는 사람을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현각 스님도 그랬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김윤덕 기자가 무작정 찾아가 인사했습니다. 첫날은 "시차적응이 안 돼 인터뷰 못하겠다". 다음 날 안양으로 만나러 갔더니 "배고프니 밥 먹고 하자", 식사가 끝나자 "토론에 나가야 한다"….
결국 이태원 스님의 숙소로 가면서 인터뷰를 겨우 시작했답니다. 이태원에 도착해, 일단 커피숍에 앉자 스님의 말씀은 일사천리.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커다란 액션까지 동원하며 얘기를 시작하자 커피숍 손님들은 스님 얘기에 귀를 쫑긋하고 있었답니다. 유람선 뽕짝 얘기할 때는 트로트의 박자를 코미디언 남보원처럼 뿡짝뿡짝 하면서 입으로 음향효과까지 내셨다네요. 시작은 까칠했으나, 갈수록 시원했던 인터뷰. 사족 하나. 문체가 기존 종교인 인터뷰와 다른 점에 거부감을 덜 느끼셨으면 합니다.
파란 눈의 선승, 현각 스님 독일 현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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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 스님의 본명은 폴 뮌젠(Paul Muenzen)으로 조부모는 독일 마인츠 출신이다. 그가 제3의 고향으로 독일을 택한 인연이 여기에서 보이기도 한다. 1964년생인 현각 스님은 미국 뉴저지 출신으로 독실한 천주교 집안 6남 3녀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컴퓨터회사의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생물화학박사로서 자녀들의 성장과 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천주교 신부서품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원 신학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그는 불교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한국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불교 연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1990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열렸던 숭산 스님의 설법에 감명을 받고부터였다. 남다른 불교입문 배경은 한국 불교인은 물론 미국인과 많은 한국인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의 부모는 처음에는 아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지만 지금은 아들의 뜻을 이해하고 있으며 전보다 오히려 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해마다 한두 번씩 일주일에서 2주일간 미국의 부모를 방문하고 있다. 그의 종교관은 확실하다. '종교'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종교 자체의 형태가 잘못되어 있다고 말했다. 석가모니는 불자가 아니었고 예수도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종교를 만들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우리들은 재인식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한국에서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하버드 출신, 미국인, 호감 가는 파란 눈의 얼굴, 숭산 스님의 제자라는 배경은 그를 일약 불교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수행자로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행에 방해가 될 정도로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그는 수행자로서 불심의 초심읽기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떠났다. 그가 운수납자(雲水衲子)로서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가다 지금 머물고 있는 뮌헨의 선방 '불이선원(不二禪院)'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스님의 행선지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독일 뮌헨으로 바뀌고 있는데, 스님의 삶의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요?
“미국에서는 나를 위해서만 살았어요. 나의 학벌, 경력, 나의 명예, 나의 가족을 위해서, 나의 경제력을 위해서 나, 나, 나, 나를 위한 삶이었지요. 한국에서 수행생활을 하면서 교육과 정진을 통해 나 자신을 떠나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배웠다고 할 수 있어요. 나 개인과 가족의 테두리를 떠나서,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고, 고통 받는 자에게는 시간을 내서 상담을 해주고 대화를 나누었어요. 어떤 때는 하루 24시간 동안, 그리고 주말도 없이 지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수행자로서 큰 실수를 했는데, 그것은 제가 한국에서 너무 유명해진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고 너무 바쁜 생활이 계속되었어요. 불교의 행사가 있을 때는 물론 대학교에서의 특강, 문화강연회, 결혼식 주례, 예술가들의 전시회 참석 등 수행자의 길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했어요. 물론 저에게 잘 해주신 한국에 계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독일에서는 저 자신의 수행을 위해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어요.”
뮌헨선방을 불이선원으로 작명한 의미는?
“불이(不二), 둘이 아닌 선원이란 뜻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불이사상’이 기본입니다. 인간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머릿속에서 습관적으로 항상 둘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나와 너, 아군과 적군, 천한 것과 귀한 것, 동쪽과 서쪽, 좋은 것과 나쁜 것 등으로 구별합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만들어 현실생활에 드러낼 때 항상 갈등이 일어납니다. 모든 종교가 갈등하는 이유는 이렇게 둘을 만드는 습관 때문입니다. 불이사상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아주 중요한 재산입니다. 이곳 독일도 한국처럼 2개로 분단되었던 나라입니다. 독일이 통일해서 불이(不二)의 나라가 된 것처럼 한국도 통일해서 두 개가 아닌 하나의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2008년 미국이 아닌 노르웨이, 독일,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지를 돌아보며 유럽에서 만행의 길을 걸으셨는데….
“그 당시 미국은 부시 정권 아래 있었고, 기독교가 주축을 이루는 미국 사회의 종교관은 닫혀 있는 것이었어요. 다른 세력은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막힌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그러나 유럽은 종교문화와 정신문화가 열려 있는 사회입니다. 독일인의 경우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은 전체 기독교인의 10%도 안 되지만 남녀평등, 비폭력주의, 사형금지, 친환경주의, 반전운동 등을 중시하여 예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타 종교에 대해서도 매우 관대합니다.”
“2009년 9월입니다. 수행자들은 40명 정도 됩니다. 한국인이 20여 명 그리고 독일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20여 명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법회가 있는데, 늘어가는 수행자들을 위해 좀 더 넓은 곳으로 선원을 옮기려고 합니다. 훗날에는 농가의 외양간이라도 깨끗하게 개조해서 절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티베트의 스님들이 스위스와 프랑스의 농촌에 많은 절을 세운 것처럼 저도 이곳에 절을 세우고 싶어요.”
현각 스님의 한국 사랑이 대단하신 걸로 알려져 있어요. 지금 이곳에서 포교활동을 하심으로써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린다는 의미도 있겠는데, 지금도 한국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물론 저는 미국과 한국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한국이 그리울 때나 한국에 계신 분들이 보고 싶을 때는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기도 하고, 일과 관련해 매스컴을 통해서 한국 소식을 수시로 접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국이 잘되도록 빌고 있어요. 특히 이산가족 문제와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는 한국을 방문합니다.”
11월에 G20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하신다고 들었는데.
“예, 이번에 4개월 만에 갑니다. NGO 여성평화단체의 초청으로 가는데, 세계 종교지도자들이 세계 정상들에게 금융 위기에 대해서만 회담할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는 행사에 참가하게 됩니다.”
한국의 깊은 산골에서 수행에 정진하실 수는 없었는지….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서 15년간 사셨는데, 저에게 ‘나는 이곳에서 그냥 할아버지로 불리면서 살 수 있었지만 너는 문제야, 너는 오두막에서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정진을 해도 사람들은 오두막까지 저를 찾아와서 행사나 강연회 등에 참석해주기를 원했습니다. 한국에서 살면 경제적으로는 잘살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정이 바쁘다 보니 제 스스로 부끄러워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수행자로서의 생활에는 충실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2004년에 돌아가신 숭산 스님의 3주기를 마치고 불자로서의 자식 된 도리를 한 뒤에 2008년에 유럽 만행길을 떠났습니다.”
“이효리, 비, 원빈 씨 같은 연예인들의 경우에는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없게 거주지를 공개하지 않고 경호원들이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지만, 저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열려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는 분들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에 관한 인터넷사이트도 생기고, 또 ‘현각 스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현각 스님께 물어보기’ 라는 코너가 생겨서 저 자신도 모르는 저의 답변이 나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의 답변을 받았다고 ‘바쁘신데 답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뻐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물론 그 답변은 제가 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제 이름을 남용하거나 도용하는 분들을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없지요. 그럴 때는 그저 ‘관세음보살’을 되뇌며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다른 예를 더 들자면 독일에서는 볼 일이 있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만 한국에서는 자전거 타는 것도 어렵지요. 신도님들이 너무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말리시니까.”
뮌헨에서의 포교와 수행생활은 한국 불교를 독일에 알린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
가 깊은데, 어려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독일어를 잘하지 못해서 불편합니다. 법회는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합니다만 평소에는 독일어를 해야 합니다. 1988년 학생시절에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에서 3개월간 독일어를 공부했는데 한국에서 18년을 살다 보니 독일어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뮌헨의 물가가 너무 비싸서 당황하고 있어요. 제가 살았던 파리, 뉴욕, 보스턴, 서울 중에서 뮌헨이 물가가 제일 비쌉니다. 이곳에서는 보시도 많지 않고 제사 같은 것도 지내지 않기 때문에 춥고 배고픈 생활이기도 하지요.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식당이나 호텔에서 접시닦이로 일하려고 합니다.”
생활고가 심해진다면 뮌헨을 떠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현각 스님이 머물고 있는 뮌헨에는 현재 약 132만 명이 살고 있다. 주민들이 시내를 거닐다 보면 가끔 뮌헨 시장이나 독일 정부의 장관이나 유명 연예인과 마주치기도 한다. 그들이 어떤 특정 행사장에 참여해서 활동하지 않는 이상, 다른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로 볼일을 보러 가던 중이건, 산책을 하건, 누구와 데이트를 하건 시민들은 그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일 수도 있지만, 사생활을 존중하는 배려가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감 가는 유명인사에게는 눈인사 정도는 교환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 사회에도 자연스럽게 기여하게 된다는 단순한 논리가 밑바탕에 깔린 환경이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물론 뜨겁고 끈끈하고 열정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썰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개인이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고 연구 전념하기에는 최상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 여성조선
취재 오명선 재독저널리스트 | 사진 오명선·현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