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 오봉산
2016. 6. 10 (금) 산길 : 사촌리~오봉산 원점회귀 거리 : 15.8km / 08:30
사촌마을회관~맹미바위~×662.4(H)~미산봉(낙남정맥)~오곡재~오봉산~얼음굴~사촌리
07:00 서촌마을 07:06 사촌마을회관 07:10 산길 들머리(사랑목가든) 08:10 345봉(골새미산) 08:23 ×357.6m 08:43 조망바위 (35분) 09:47 맹미바위 (560m) 10:07 ×661.8(상대미산 / 미봉산 갈림) 10:48 미산봉(630m / 낙남정맥 미산령 갈림) 11:06 ×555.1m (점심 30분) 11:52 오곡재 (370m) 12:22 △524.4m (함안414) 12:39 ×528.9m (낙남정맥 발산재 갈림봉) 13:38 오봉산 (524.7m △함안303) 14:04 ×444.5m 14:30 임도 (158m) 14:55 군북 얼음굴 15:30 서촌 서촌 사촌리 서촌마을 보호수 그늘아래 주차했다. 산행 들머리는 700m 가량 더 올라가야 되는데 여기다 차를 세운 이유는 날머리로 예상한 백이산에서 여기로 내려올거라는 계산에서다. 산행중 발생한 급한 민원이 있어 백이산까지 오지 못하고 얼음굴로 내려와 더 많이 걷기는 했지만 주차하기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610년 보호수 (시무나무) 사촌교 사촌교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저 능선으로 오를것이다 사촌삼거리 (좌 원효암, 우 오곡리) 사촌리를 한자로 집 사(舍) 마을 촌(村)으로 표기했지만 , 내 생각에는 절이 있었다고 절골 또는 절마을, 절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절 사(寺) 대신 舍로 쓴게 아닌가. 그 이유로는 이 골짜기에 천년고찰 원효암과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대가 있고 현재 지도에도 '절골' 표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왼쪽 입구에 사촌마을회관이 있고, 폐교로 남은 학교 건물을 지나 사랑목으로 올라간다. '사랑목'을 처음 보고 연리지 나무를 연상했었는데, 알고보니 마을이름이더라.
군북면 사촌리 (舍村) 사촌(舍村)은 군북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이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사촌초등학교 앞 삼거리가 이 마을의 중심으로 동북간의 산을 넘으면 가야읍 춘곡리와 혈곡리가 나오고, 동남간은 함안면 파수리 고심이(高深)가 된다. 옛날 원님이 진주목(晋州牧)에 행차하실때는 이 지름길을 통해 진양군 성전암을 거쳐 진주로 행하였는데 동남간 골짜기 우편에 전사동(錢(前)寺谷) 또는 광산촌(鑛産村), 심원사지(深原寺址), 원효암(元曉庵)이 있다.
삼거리 우측길을 따라 500m 정도 가면 신촌동(新村洞)이 있고 신촌동의 자연부락인 유동(柳洞) 옆에 늪이 하나 있어 늪이 배의 머리모양 같아 이곳에 많은 오리떼가 날아들어 압실(鴨谷:狎谷)이라 불렀으나 후에 신촌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의 사촌도 군북면이 6개 리(大谷, 平廣, 山足, 竹山, 安道, 南山)로 분리되어 있을 당시인 1914년 이전만해도 사랑목(斜郞木) 또는 사랑산(斜郞山)으로 불리어졌으며 아직 까지도 사랑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사랑목 위 의상대(義湘臺)로 가는 길목에 전사동(錢寺洞)이란 자연부락이 있었다. 옛날 절골에 있었다는 심원사(深源寺)와 원효암(元曉庵)에 소용되는 돈을 주조하는 마을이란 뜻에서 전사동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며, 이곳 우측 산 중턱에 일제시대에 사촌광산이 있어 광산촌으로 꽤 규모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길옆에 2~3채의 농막겸 농가가 있을 뿐이다.
(함안지명유래 http://tour.haman.go.kr/sub/01/01_01_04_10.jsp)
사랑목가든 현재 지도에도 '사랑목' 지명이 남아있는 사촌리에 속한 부락 이름이다. 함안군 지명유래에는 한자로 斜郞木이라 표기했지만 이는 우리말을 억지로 한자화 한거 같고, 우리말 '사랑목'에서 근거를 찾아야겠다. '목'은 길목 할 때의 목일 것이나 사랑은 또 무슨 말인지. 등산 이정표에도 '사랑목' 명칭을 볼 수 있다. 도로 위에 메달린 플랭카드는 [군북광산 토양개량 복원공사]라 써놨다. 광산이 폐광되면서 오염된 토양을 복원을 하는 모양이다. 오곡재로 가는 도로 옆 논에도 흙을 갖다 붓고 땅을 고르는 작업이 한창이더라. 사랑목가든 간판 건너편에 산으로 풀에 덮히긴 했지만 길이 보이고 이정표가 있다. [미산봉 5.02km (여항산6.79km)] 국제신문 리본이 길안내를 하고, 김해김공 묘를 몇 개 지나면서 오름길이 시작된다.
열매도 탐스럽고, 단풍 색깔도 고운데...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란.
얼마나 비비고 문땠으면, 저리 뺀질뺀질하노? 혹시 근처에서 보고 있는거 아녀?
산돼지사우나 무성한 수풀이 이슬을 달고있어 바짓가랭이가 젖어든다 땅나리
골새미산 (345m) 지형도에는 고도표시도 없는 봉우리. 스텐이정표가 있는데, 날개는 다 날아가고 기둥만 남아있다. 함안군 지명유래에서 말하는 골새미산이 이 봉우리로 보인다. 올라서고는 왼쪽으로 90도 꺾어 내려간다. 그대로 넘어가는 직진길은 신촌마을로 떨어지겠다.
삼신산(三神山) 삼신산(三神山)은 사촌(舍村)을 둘러싸고 있는 세 곳 산을 말하며, 상데미산, 골새미산, 북데미산이 그것이다. 북데미산은 사초동 동북간에 위치한 뒷산으로 사촌, 동촌을 비롯하여 가야읍의 춘곡, 혈곡과 연계되어 있는 관계로 봄부터 가을까지 4개동 청년과 목동들이 이곳에 모여 힘 겨루기등 놀이를 즐겨 해왔고, 특히 백중날(음 7월 15일)이면 산정 평평한 곳에 150여명의 장정들이 모여 씨름 대회를 하면서 북과 꽹가리를 치며 흥겹게 놀며 우의를 다지기도 했으나 그 풍습도 차츰 사라져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북데미산과 남쪽으로 이어진 산을 금오산(金鰲山) 또는 사촌동산(舍村洞山)이라 부른다. 이 산등성이는 자라등처럼 생겼고 산 앞에 연못이 있어 그 연못에 금빛 자라가 살고 있었으므로 금오산이라 했다. 자라가 살았다는 연못은 해방 후에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대밭과 잡목이 무성하다.
삼신산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하며 최고봉인 상데미산은 의상대 뒷산이며, 골새미산은 신촌동 뒷산이다. 예로부터 삼신산에 세 산신이 마을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믿어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의 재앙을 막아 달라는 뜻에서 정성껏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나침반을 스맛폰에 갖다댔더니 오작동한다. 까치수영 ×357.6m은 우측으로 비켜 지나간다 담쟁이덩쿨 삼규한테 물어봤더니 담쟁이덩쿨이란다. 그런데 담쟁이덩쿨은 나무를 고사시키지 않는다 한다. 왜냐하면 나무가 죽으면 저도 죽기 때문이라 그렇다는데, 내가 본 저렇게 덩쿨이 감고 올라간 나무는 대부분 고사한 걸로 봤는데, 은방울꽃
꽃이 지고 열매가 달렸다. 맹미바위
조망바위 (우측)
오곡리 맹미바위 바위에도 붙어있고, 나무에도 붙어 있다
넉줄고사리 (네줄고사리)
뿌리(넝쿨)를 끓여 먹는다. 그릇에 담아 분재로 키우기도 한다.
굴의 형태가 남았는데, 광산 같지는 않고, 저 틈으로 빠져 나가면 앞에 암봉이 맹미바위
맹미바위 오르는 길
맹미바위 정상 함안군 유래에는 '피바위'라 하는데, 맹미바위는 누가 갖다붙인 이름인지 모르겠다. 아래 오곡저수지 쪽에서 오르는 암벽장이 있어 암벽꾼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곳이다. 깝까무리~~ 오곡저수지만 겨우 보인다
맑은날은 이렇게 보일텐데 (펀사진) 낙남정맥 발산재 분기봉(528.9)~오봉산 오곡리의 오곡저수지
오곡(烏谷) 군북면 오곡리 군북면 소재지에서 약 6km 정도 동남쪽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오곡동(烏谷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재(嶺)를 넘어 비실 골짜기를 지나 의창군 진전면 국도(國道)와 통하는 옛길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당초에는 오실(奧室)이라 불리어져 오다가 신라말엽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이 어린시절 어머님을 모시고 이곳을 지나던중 피로가 겹치고 배도 고파 오곡 뒷산에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까마귀가 날아와 하늘위로 빙빙 돌더니 선생앞에 사뿐이 내려 앉아서 닭다리를 물어주고 날아 갔다고 전한다. 최치원 모자(母子)는 그 닭고기를 먹고 허기를 면하여 목적지인 통영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하여 그 후부터 오곡(烏谷)이라 불렀다고 하며, 또한 오곡 뒷산의 생김새가 까마귀 두 마리가 깃을 펴고 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이름지었다고도 한다.
오곡은 많은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가장 먼저 형성된 부락을 “골마을”이라하고 맨 나중에 형성된 부락을 새마을(薪村)이라 하는데 골마을은 원래 고마을(古村)이었다고 전한다.
쇠단산 군북에서 오곡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서편에 쇠단산이 위치하고 있고 쇠단산 밑에는 시리미산이, 또 그 아래에 솥골산이 있다. 산이름의 유래는 쇠가 많이 나서 쇠로 솥을 만들어 그 솥에 시리미떡(시루떡)을 쪘다고해서 솥골산, 시리미산이라 부른다. 이 산은 예부터 금, 은, 철이 많이 나왔고 일제시에 일인(日人)들이 엄청난 물량을 캐어 갔었다. 쇠단산 폐광을 오곡 광산굴이라 불러 왔으나 지금은 얼음굴이라 부른다. 여름이면 굴문앞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이근 주민은 물론, 먼곳 피서객 까지 이 얼음굴을 찾아온다.
쇠단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후루골산이 있다. 이 산은 오곡콩밭골 동네 뒤편에 위치하여 있으며 조선시대 진주로 가는 길이 있었다. 한다. 후루골산에서 남쪽으로 붙어있는 산을 오룡산(五龍山)이라 하는데 산이 용 다섯 마리가 승천하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에서 다시 남쪽으로 붙어있는 산을 달뜨미산이라 하며 이 산에서 장정 7~8명이 앉을 수 있는 마당 바위가 있다.
쇠단산(솥골산, 시리미산), 후루골산, 오룡산, 달뜨미산... 지도를 짚어봐도 어느 봉우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네
상데미산 ×661.8m (헬기장) 넓은 헬기장인 오늘구간 최고봉이다. 사방 막힘이 없는 봉우리이나 보이는건 사방천지 구름바다다. 동쪽으로 가는 함안읍계 능선에 미봉산(519.9m)이 있다만 보이지는 않는다. 바로 남쪽에 낙남정맥을 만나는 봉우리를 미산령 윗쪽에 있다고 이정표에도 미산봉이라 표기를 했는데, 저쪽의 미봉산과 이름이 헷갈린다. 올라서서 정면 그대로 가면 미봉산이겠고,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의상대, 원효암으로 가겠다. 함안군 지명유래에 나오는 '상데미산'이 이 봉을 말함이다. 이정표는 미산봉(낙남정맥)이 직진이나 사실은 우측이다 상데미산 상데미는 오곡동의 일명당(日明堂)과 콩밭골부락 앞산으로 이 산 정상에 서면 함안군 전체가 내려다보이는데 동편으로는 함안면 파수리 미산이 되고, 미산재(眉山嶺)를 넘어면 창원군 진전면 산서리 둔덕(屯德)이 된다. 서편 역시 이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둔덕으로 통하는 산복도로가 있어 창원군 진전면 - 진양군 - 진주 등 서부 경남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된다.
상데미와 동남으로 마주보는 철산(鐵山)은 여항산(艅航山) - 필봉(筆峯) - 서북산(西北山) - 야반산(夜半山) - 진동(鎭東) - 마산(馬山)으로 이어져 이 산은 6·25 당시 작전상 요충지로서 산정(山頂)에는 그 때에 파놓은 방호진지가 지금도 뚜렷한다.
661고지로 알려진 이 곳을 탈환하기 위하여 피아간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19번이나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관계로 이 산은 후에 중머리산, 전투산(戰鬪山), 갓뎀산(God Clamn mountain)이란 불명예스런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중머리산이란 격렬한 포격으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황토산으로 변했기 때문, 갓뎀산(갓데미산)이란 생지옥을 방불케한 당시의 현실을 저주하면서 미군(美軍)들이 지어부른 이름이다. 범꼬리 지나 온 맹미바위 기린초 노루발풀
미산봉 낙남정맥이다. [여항산2.3km 오봉산 5.03km] 여항산과 사이에 미산재(미산령)이 있어 미산봉이라 하는 모양인데, 북쪽의 미봉산과 이름이 헷갈린다. 여항산쪽으로 몇걸음 나가면 조망바위가 있다. 조망바위
여항산 (우측 평평한 봉우리) 오봉산 미산봉이 함안 군북면과 함안면, 창원시 진전면이 갈라지는 삼면봉이 된다. 2003년 2월에 창원시계를 하면서 여기를 지나갔는데, 그 때는 오늘과 반대방향이었다. 서쪽으로 낙남정맥을 따라 내려가면 왼쪽은 창원시 진전면, 우측은 함안 군북면이다. ×555.1m 2003년도에 찍은 사진과 비교를 해보니 돌덩이 하나 안바뀌고 그대로네. 새벽에 아침을 먹은지라 시간이 이르지만 점심을 먹고가자. 서면 영광도서 앞에서 사 온 충무김밥
낙남정맥 = 창원시계 오곡재 (370) 지도에는 [1029] 번호까지 표시된 함안 군북에서 창원 진전을 잇는 지방도로. 고개 정상 전후로 2~300m는 비포장이다. 우리처럼 산 타는 사람 아니면 넘어다닐 일도 없는 도로다. 군북에도 오곡리가 있고 진전면 여양리에도 오곡마을이 있다. 오곡재의 현재시각은 06:33
524.4m (함안414) 낙남정맥(발산재) 분기봉 ×528.9m 낙남정맥 분기봉이면서, 진주시, 창원시, 함안군이 갈라지는 세시봉(三市峰)이 된다. 진주시계를 하면서 지나간게 4년전이라 그림이 기억에 남아있다. 여기서 발산재 지나 깃대봉 갈림까지 진주시계와 창원시계가 겹치게 된다. 낙남에 진주-, 창원시계에 오늘까지 네 번째가 되서 그런지 남의 동네 같지않네. 추억을 되세김질 하며 반쪽 남은 사과 마저먹고 간다. 정맥길과 다르다 초롱꽃 분위기 음산하네 약초재배 경고문 오봉산은 우측으로 휘돌아 오르는 느낌이 드는데, 얼마나 가파르고 길게 느껴지는지 오늘 힘 여기서 다 뺀다 오봉산 헬기장 (여름) 오봉산 헬기장 (겨울) 오봉산 △524.7m (함안303) 삼봉이나 오봉, 팔봉, 모두 봉우리가 이어지는 숫자를 표시한 것인데, 이 오봉산은 어디서 어디까지 다섯 봉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군북쪽에서 보면 봉우리 다섯개가 이어진다고 하나 확연하게 드러나는 가까이 붙어있는 봉우리가 아니다. 남쪽으로 트진 테라스로 나가면 진주 이반성면 일대가 확 펼쳐지면서 지리산까지 보일 장면이나 오늘은 영 아니다. 바로 아래 성전암 지붕이 보이고, 남강으로 흘러드는 반성천이 산자락을 휘감으며 흘러간다. 진주 이반성면 왼쪽 10시방향이 제산령으로 가는 길
오봉산 정상부를 내려서자 말자, 풀에 덮힌 묘가 있는데서 길이 갈라진다. 제산령은 정면으로 알고 있으나 우측 2시방향에 국제신문 리본이 팔랑 거리길래 긴가 민가 따라 들어갔더니 조금씩 벌어지더니 결국은 북쪽 444.5봉으로 가더라. 되돌아 올라가기도 그렇고, 임도에 내려서고 보자 하면서 계속 내려갔다. 진주시계는 왼쪽길로 내려가 제산령, 어석재를 지나 괘방산, 방어산으로 이어지고, 국제신문에서 소개한 백이산 코스는 왼쪽 제산령에서 올라와, 오봉산 찍고 되돌아 나와 우측 2시방향으로 내려가는 코스다. 어느쪽에나 [국제신문]은 붙어있다
숲이 더 갑갑해진거 까지는 게안는네, 자빠진 나무(풍도목)가 길을 막아 타넘고 돌아 넘는다고 욕봤다
숙제봉
끝도없이 내려 앉다가 터진 공간으로 앞봉이 보이는데, 저 봉은 자꾸 위로 솟는다. 숙제봉이다. 오봉산에서 제산령으로 내려갔더라면 저 왼쪽 능선을 타고 갈건데 말이쥐...
임도에 떨어졌다. 이 임도는 오곡재에서 왼쪽(서)으로 갈라져 오봉산 북쪽을 한바퀴 돌아 제산령으로 이어지는 임도다. 시간상으로야 숙제봉 백이산 넘어 서촌마을로 내려가기에 충분한데, 급작스레 접수된 민원 두 건. 하나, 이삼규 장유에서 만나 오룩스맵 지도 편달 요청 둘, 삼돌이 집에 컴퓨터 포토샵 작동불능으로 출장 지도 요청
'삼'자 돌림 둘이서 짰나.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동시민원을 넣다니. 그런데 둘 다 무시할 만한 인사들이 아닌것이 문제다. 그만한 신세를 지고 있으니 또 그만한 애로사항은 해결을 해줘야 안되것나.
숙제봉은 숙제로 남겨놓고, 하산하자. 장유에서 삼규 만나고 광안리까지 가려면 서둘러야겠다. 제산령과 반대방향인 우측 광산마을쪽으로 내려간다.
맹미바위
피바구(血岩) 피바위 피바구(血岩)는 상데미 남쪽(원효암 뒷산) 1km 떨어진 써리봉에 위치하는 깎아지른 암벽으로 암벽 군데군데에 피가 흘러내린 흔적과 같은 붉은 반점과 슬픈 사연이 서려 있다.
옛날 오곡 마을에 아름다운 처녀가 살았다. 이 처녀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워 인근 총각들의 사모의 대상이 되었으나 처녀의 마음에 두는 총각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혼기(婚期)가 지나려하자 마음이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둥근 달이 상데미 산 위에 얼굴을 내밀던 초여름날 밤 처녀는 집 앞에서 달을 바라보며 저달 만큼 잘생기고 씩씩한 백마의 기사가 자신 앞에 나타나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고 있을 때 홀연히 미남청년이 처녀 앞에 나타났다.
청년은 오래전부터 처녀를 사모해왔노라고 고백하며 유혹하니 처녀는 그만 총각에게 혼이 빠져 버렸다. 그리하여 산책길에 오른 두 청춘 남녀는 달밝은 밤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다보니 어느새 피바위까지 오게 되었고 달은 벌써 서쪽 쇠단산 너머로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총각의 품에 안겨 미래의 단 꿈에 빠져있던 처녀는 답답하고 싸늘함에 정신을 차려보니 커다란 구렁이가 자신을 감고 있지 아니한가, 깜짝 놀란 처녀는 두려움에 떨며 필사의 몸부림으로 빠져 나오려하자 구렁이는 다시 총각으로 변신하여 수년동안 그대를 사모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하여 사랑을 고백하게 된것이니 자신의 애틋한 사랑을 저버리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랑이니 단꿈이니 하는 것은 이미 저만치 가버린 지금 두려움과 비탄에 북받힌 처녀가 냉정히 거절하자 화가 난 총각은 처녀를 강간하려 하였다. 이에 강간하려는 총각과 당하지 않으려는 처녀의 치열한 사투가 피바위 위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날이 밝자 처녀가 행방불명이 된 것을 안 부모와 동네사람들이 온 산을 찾아 헤메다가 이 바위에 이르니 처녀와 구렁이가 유혈이 낭자한채 이미 죽어 있었다 한다. 피가 암벽을 타고 흘러 굳어진 후 비바람이나 풍화작용에도 그 흔적이 없어지지 않아 이후부터 이 바위를 피바위(血岩)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얼음굴
[얼음굴]은 개인의 영업장이다. 옻오리, 닭백숙 등을 판매하는 가든 형태의 식당인데, 이 집 뒷편 산쪽으로 일제시대 때 운영했던 광산이 폐광이 된 채로 남아 있다. 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막아놨지만, 굴 속에서 나오는 냉기를 받는것 만으로도 온 몸이 서늘하게 피서가 된다. 그 굴 입구에 영업장을 차린 것이다. 어쨌거나 그 냉기 한번 쐬려면 3만원 짜리 닭백숙은 하나라도 시켜야 한다는 사실.
오곡재 넘어 진전으로 연결이 되는 도로 고개 정상부는 비포장이지만 택시가 올라간다.
군북으로 들어가는 버스 시간 19:50을 확인하고는 긴말없이 포기하고 돌아서 걸었는데, 절반쯤 갇다보니 버스가 올라가더라. 그리고 10여분 후 되돌아 내려오더만. 그 버스시간 미리 알았더라면, 10분만 기다렸더라면 타고 내려오는긴데... Ningiri~~ 땡볕에 다 꼬씰렀네.. 숙제봉
백이산(佰夷山)과 숙제봉(叔齊峯) 백이산(佰夷山)은 명관리(明?里) 평광동(平廣洞)의 뒷산이며, 사촌리(舍村里) 사촌동(舍村洞)의 앞산이기도 하다. 백이산 동쪽 기슭에 구서산서원(舊西山書院)이 있다. 서산서원은 생륙신(生六臣)의 한 분이신 조려(趙旅)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이 세운 것으로, 선생은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시키자 그 불의(不義)에 항거, 이 곳으로 낙향(落鄕)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 독서와 낚시로 소일하면서 끝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키면서 출사(出士)하지 않았다.
백이산 숙제봉은 유가(儒家)에서 청절지사(淸節之士)로 숭앙 받은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 황자였던 백이(百夷)·숙제(叔齊) 형제의 인의(仁義)를 본받은 조려가 은둔(隱遁)하여 여생을 보냈던 산을 백이산(伯夷山), 그 옆에 있는 봉우리를 숙제봉(叔齊峯)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35분간 아스팔트길을 걸어, 걸어. 서촌마을 원위치 가운데 정면 봉우리가 오봉산 북봉인 444.5봉, 그 뒤가 오봉산 얼음굴 근처에 가면 알탕할 만한 장소가 있겠던데, 개인의 영업장이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군북에는 목욕탕이 있으나 영업을 하지 않고, 함안군 가야면에 목욕탕 검색을 하니 '함주사우나 12.4km' 란다. 오늘은 오레곤 대신 오룩스만 갖고 갔다. 동작 꿈뜨는것만 제외하면 전용기보다 나은데, 간혹 발 보다 훨씬 늦게 표시된다는게 치명적인 결점이라. 기계가 시원찮아 그렇나...? 오봉산에서 내려가는 코스만 국제신문을 따랐다 숙제봉은 숙제로 남겨놓고, |
출처: 조은산 원문보기 글쓴이: 조은산
첫댓글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요청 들어온 김에 숙제봉은 숙제로 ... 저는 하루에 봉우리 두번은 못탑니다 ㅎㅎㅎ
저에겐 <오봉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양산의 그것인데... 오잉~!! 쌩뚱맞게 <군북>의 산이라...
호기심으로 열어봅니다. 그런데... 산행기속에 나오는 작은 산봉우리들과 관련된조은산님의
해박한 지식에 깜짝 올라면서 눈길 머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쩜 이렇게라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어쩜 잊혀지기 쉬운 이야기들.... 후답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의심치
않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